부산은 무엇을 기억하는가 <1> 대로변 동상이 간직한 부산의 義
부산 수호신 3인의 의로움, 딱딱한 시선에 죽은 듯하다
- 국제신문
- 오상준 기자 letitbe@kookje.co.kr
- 2012-01-10 20:38:10
- / 본지 7면
임진왜란 때 부산을 지키다가 순절한 송상현 동래부사, 정발 부산진첨사, 윤흥신 다대첨사의 동상(왼쪽부터)이 중앙로를 따라 서있다. 김동하 기자 kimdh@kookje.co.kr |
- 사나이 의리·아지매의 情·이태석 신부·의인 이수현…지금의 부산사람 만들어
- 이익에 밝은 소인에 의해 뽑히고 방치되니 씁쓸해
서울 광화문광장에 가면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과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 동상을 만날 수 있다. 흔히 우리 역사의 영웅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부산의 가장 큰 대로인 중앙로를 따라 송상현 동래부사 동상(1978년 건립), 윤흥신 다대첨사 석상(1981년 건립), 정발 부산진첨사 동상(1977년 건립)이 외롭게 서있다. 서울과 달리 이들 세 동상의 표정은 밝아 보이지 않는다. 30년 넘게 부산과 동고동락해왔는데도 정작 이들의 존재를 아는 시민은 많지 않아서다. 수많은 자동차와 노숙자 이외에는 반겨주는 이가 없어서일까.
특히 윤흥신 석상은 임진왜란 당시 다대포에서 활동했던 분이 왜 연고가 없는 동구에 세워졌는지 의아하다는 반응도 나온다. 실제 10여년 전 동구청과 사하구청이 윤흥신 석상의 관리를 서로 떠넘기기도 했다.
■송상현 정발 윤흥신 '부산 수호신 3인방'
송상현, 정발, 윤흥신은 임진왜란 당시 부산을 지키기 위해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한 인물이다. 이들은 왜란 중 임금(선조)은 물론이고 사회지도층 대부분이 자신의 안녕을 위해 도망쳤거나 책임을 전가한 역사에 비춰 우리에게 '의로운 죽음'을 통해 많은 가르침을 던져주고 있다.
부산의 의(義)를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로 이들 3인을 자신 있게 꼽을 수 있다. 부산시 시사편찬실 홍연진 상임위원은 "송상현 부사는 동래읍성 전투에서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며 장렬히 전사한 부산의 수호신이자 저항정신의 상징"이라고 평가했다. 부산시는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이들 세 분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시민이 많이 다니는 중앙로 변에 동상을 건립했다. 송상현 동상은 동래부의 입구인 양정동, 정발 동상은 부산진이 있었던 초량동에 세웠다. 다만 윤흥신 석상은 활동무대인 다대포가 아니라 동구 초량동 옛 KBS 건물 옆에 있다. 이런 취지와 달리 현실은 무심코 지나치는 도심 속 풍경이 되어 버렸다.
■죽은 듯 살아 있는 부산의 기억
부산 사나이의 의리와 부산 아지매의 정은 이 세 인물과 닮았다. 마땅히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도리를 다하는 것이 의리다. 그래서 부산의 정체성을 의(義)라고 할 수 있다. 송상현 윤흥신 정발과 함께 임진왜란 때 이 땅을 온 몸으로 지키고자 했던 이들은 바로 민초들이다. 근대사의 굴곡 속에서 부산 민초의 의로움은 부마항쟁, 6월 항쟁을 통해 잘 드러난다. 영화 '울지마 톤즈'를 통해 아프리카 남수단의 슈바이처로 알려진 고 이태석 신부와 일본에서 더 추앙받는 의인 고 이수현 씨 모두 부산 사람이다.
지역의 정체성은 오랜 시간을 거쳐 응축된다. 공동체를 위한 희생정신과 불의에 굴하지 않는 저항정신,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람의 도리를 다하려는 신념은 켜켜이 쌓이면서 부산사람의 뼛 속에 녹아들었다. 이 모두가 지금의 부산사람을 만들었다.
■'군의소리(君義小利)' 비석의 교훈
거제리시장 상인들이 세운 '군의소리(君義小利)' 비석. |
안타깝게도 이 비석은 도로 확장공사 과정에서 뽑힌 뒤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거제성당 옆에 나뒹굴고 있다. 비석 옆의 '당신의 양심을 버리시겠습니까'라고 적힌 쓰레기 무단투기 방지 팻말은 군의소리 비석과 부산 수호신 3인방의 동상을 눈앞에 두고도 의로움을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함을 자아낸다.
# '다대포 역사 이야기' 발간
- 권력자 아들서 노비까지 드라마 같은 윤흥신의 삶
윤 첨사의 기구한 가정사 때문이다. 윤 첨사의 부친 윤임 수군절도사는 을사사화(1545년) 때 역적이 되어 세 명의 아들과 죽임을 당했다. 윤흥신은 당시 여섯 살의 어린 나이여서 간신히 생명을 건지긴 했으나 노비로 전락했다. 1577년 사면복권되면서 32년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충청 청주 진천현감으로 부임하지만 글을 모른다는 이유로 파직당한다. 윤 첨사는 우의정 유성룡에게 도움을 청해 글을 몰라도 구설에 오르지 않을 변방 근무를 자처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591년 52세의 나이에 다대 첨사로 부임했다.
윤 첨사는 1592년 4월 13일 다대포진을 향해 벌떼같이 몰려드는 왜적에 맞서 매복작전으로 귀중한 첫 승리를 거뒀다. 다음 날 이복동생 윤흥제와 함께 군민을 이끌고 왜적에 맞섰으나 중과부적으로 다대포는 함락되고 말았다. 왜군은 동생과 함께 순직한 윤 첨사의 시신을 연못에 넣어 찾지 못하도록 했다.
윤흥신의 기구한 운명 못지않게 동래부사로 부임한 조엄을 시작으로 아들 조진관, 손자 조인영으로 이어지는 풍양 조 씨 3대가 잊혀진 윤 장군의 공을 추적하는 84년간의 노력 역시 극적이다.
향토사학자 한건(70) 다대문화연구회 회장은 지난해 10월 윤흥신 장군의 순절과 조 씨 3대의 끈질긴 재조명 노력을 다룬 '다대포 역사 이야기'를 펴냈다.
# 퀴즈로 푸는 동상 이야기
- '부산 수호신 3인방'의 바라보는 곳과 든 무기는
〈퀴즈 1〉
문:임진왜란 때 부산을 지키다가 장렬히 전사한 송상현 동래부사, 윤흥신 다대첨사, 정발 부산진첨사 동상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을까?
답:툭하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노리는 것을 분쇄하기 위해 동남 쪽의 일본을 향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싶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정발 윤흥신 동상은 남쪽, 송상현 동상은 남서쪽을 쳐다보고 있다. 공통점은 인도와 차도를 향하고 있다.
왜 그럴까. 아무리 위대한 인물의 동상이라고 해도 시민들이 보기 어렵다면 소용이 없다. 그래서 남향이나 북향을 따지지 않고 행인과 눈을 마주칠 수 있도록 보행로를 향해 서 있다.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 장군 동상의 경우 정면이 아닌 약간 아래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동상 아래를 지나는 시민과 마주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퀴즈 2〉
문:이들 세 동상은 어떤 무기를 들고 있을까?
답:윤흥신 동상은 왜적에 맞서 칼을 뽑으려 하고 있고, 정발 동상은 왼손에 활을 쥐고 오른손을 치켜들어 전투를 독려하고 있다. 송상현 동상은 의외로 칼이나 활 같은 무기가 아닌 홀(조선시대 벼슬아치가 임금을 만날 때 조복(朝服)에 갖추어 손에 쥐던 패)을 두손으로 잡고 있다. 전투에 나설 채비가 아니다. 윤흥신과 정발은 무관(장군)이지만 송상현은 문관이기 때문이다. 송상현은 문관임에도 목숨을 걸고 결사항전을 택했다.
국제신문·대안사회를 위한 일상생활연구소 공동기획
[관련사진]
1. 양정로타리에 있는 송상현 동상
2. 초량에 있는 정발장군 동상
3. 중앙동 메리츠은행 옆 윤흥신장군 부조석상
동구 수정동 부산진 전철역 1번출구 바로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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