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間 (인+간)] 도편수의 한옥인생 김창호
2012-01-21 [15:38:00] | 수정시간: 2012-01-21 [08:50:25] |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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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호 도편수가 큰자귀로 서까래를 다듬고 있다. 요즘 한옥 건축 현장에는 엔진톱과 전기대패가 도입돼, 자귀나 도끼 등 전통 공구를 이용해 나무를 다듬는 치목 기법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김병집 기자 bjk@ |
그 남자에게서 나무 냄새가 난다. 경북 봉화군 춘양면 금강소나무와 하룻밤 잤나 보다. 금강송이 밤새워 풀어낸 제 고향 산골 이야기일까? 희고 고운 속살의 대팻밥이 발아래 긴 사연처럼 수북하다.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용흥리 목정(木丁) 김창호 도편수의 치목장. 나무를 깎고 자르고 다듬는 거친 사내들의 몸에선 저마다 솔향이 풍겼다.
한옥을 만드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부리고 보듬는 대목의 최고봉 도편수. 누비옷을 입고 고구려식 두건을 쓴 도편수. 그런데 얼굴이 낯설다. 주름과 연륜이 배어 늙수그레 할 줄 알았는데 20대로 보아도 좋은 홍안이다. 만 46세, 말띠란다. 그래도 젊다. 한옥 세상을 꿈꾸는 젊은 도편수를 만나고 왔다. 솔향이 아파트 안까지 따라와 코끝에서 수런거렸다.
# 손자귀

합천군 가야면 황산리. 해인사 아래 깡촌. 창호네 집은 넉넉하지 않았다. 부지런한 아버지 덕에 배는 곯지 않았지만, 형들은 일찌감치 돈을 벌러 나가야 했다. 열다섯 살 차이가 나는 첫째 형 창록은 기왓일을 하는 와공이었다. 형의 일감이 많을 때면 어린 창호도 현장으로 가 흙물이라도 날라야 했다.
창호의 아버지는 가진 재산보다 부지런함이 더 많은 분이었다. 가야산 해인사가 지척이었다. 어느 날 경운기를 한 대 사더니 운수업(?)을 시작했다. 사과가 많이 나는 고장이어서 사과상자를 해인사가 있는 치인 마을까지 실어주고 품삯을 받았다. 도자기 공장에 새끼를 꼬아서 팔기도 했다. 사업 수완이 있는 분이었다.
성지중 졸업하자마자 짜장면 배달·식당 전전
기왓일하는 형님 도우러 갔다 목수일에 매력
불국사 중창 당대 최고 목수 김창희 선생 사사
10년 만에 목수의 최고봉인 '도편수' 올라
문화재수리기능자 시험도 최연소 합격
당신의 식견을 너무 믿었던지 어느 날 온 가족을 이끌고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 창호도 해인중 1학년을 다니다가 부산 성지중으로 전학을 갔다.
아버지 친구 분이 연탄공장 함바집(현장 식당)을 받도록 해 주겠다는 말만 믿고 이사부터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대영연탄 함바 운영권은 2년을 기다려도 아버지에게 오지 않았다.
5남 1녀. 형들과 누나는 이미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중학교를 갓 마친 막내 창호도 일을 시작해야 했다. 창호의 나이 16세였다. 어린 창호의 삶은 손자귀에 몸을 맡긴 옹이 많은 나무처럼 찍힐 곳이 많았다.
# 모탕
김창호 도편수는 요리를 잘한다. 학원도 다녔다. 중학교를 갓 졸업하고 힘도 딸리고, 기술도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식당 배달원이었다. 목수 일을 배우기 전까지 다닌 중국집만도 10군데가 넘는다. 직물공장에도 취직을 했고, 서울 태릉에서는 직접 짜장면 집을 개업하기도 했다. 호텔 요리사도 있고 일식 주방장도 있는데 하필 중국집이었다. 요리학원에서 친하게 지낸 형이 중국집 주방장인 게 패착이었다. 혈기 하나만으로 시작한 식당은 쉽게 일어서지 않았다.

와공인 큰형님은 여전히 큰 공사를 많이 했다. 기와를 이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 전국에도 많지 않아 절집이나 문중 재실, 궁궐 등 국가 문화재 공사를 많이 했다. 그런데 기왓일은 아무리 길어도 보름을 넘기지 않는다. 한번은 공주 동학사 일을 맡았다. 큰형님 일을 도우러 갔다. 나무를 다루고 대패질을 하는 목수가 너무 좋아보였다. 목수가 정말 되고 싶었다.
"형님, 저 목수 할랍니다." "식당은 우짜고?" "너무 멋있네예. 여기서 일할랍니다." 그런데 형님이 반대를 하셨다.
"목수일은 아무 데서나 시작하면 안 된다. 기다리 봐라." 한 달 뒤 큰형님 창록 씨가 불렀다. "내하고 갈 데가 있다. 짐 챙기라."
형님을 따라간 곳이 통영 미래사 건축 현장이었다. 그곳에 해운 김창희 선생이 있었다. 불국사를 중창한 당대 최고의 목수.
"선생님한테 일 제대로 배워라. 못 배우면 아예 집에 올 생각도 마라. 알겠나!" 형은 훠이훠이 떠났다. 큰형과 스승은 창호 씨에게 목재를 가공할 때 쓰이는 받침목인 모탕 같은 존재였다.
# 큰자귀
스승 김창희 선생은 위대한 목수였다. 해운대 해운정사를 지을 때다. 한 번은 전자계산기를 분해하고 계셨다. 이 조그만 기계 안에서 어떻게 사람보다 더 빨리 계산이 이뤄지는지 궁금해서 그런다고 하셨다. 전자계산기는 온전하게 재조립되었다.
한옥 목수 생활이라는 것은 유목민의 생활과 같다. 짧게는 3개월, 길게는 3년을 머물다가 그 집이 완성되면 또 다른 곳으로 떠난다. 어떤 해는 한 해에 명절 두 번과 어른 제사 한 번 포함해 단 세 번밖에 집에 다녀오지 못할 때도 있었다.
창덕궁 인정전과 동서행각 정비공사를 할 때이다. 인근 경복궁에서는 또 다른 목수팀이 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곳은 서울 출신 목수가 공사를 맡았다. 시골 목수팀과 서울 목수팀이 은근한 경쟁을 했다. 경쟁이라야 각자의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이지만 편수(목수)들의 간접 실력 비교도 예민했다. 그 실체가 문화재기능자 시험. 한옥 목수에게도 국가가 인정하는 자격증이 있다. 문화재수리기능자나 문화재수리기술자이다. 문화재청이 엄격한 심사를 통해 발급한다. 김창호 편수는 스물일곱이 되던 1993년 문화재수리기능자 시험에 도전했다. 창덕궁 팀 목수 4명과 함께였다. 결과는 다섯 명 모두 탈락. 경복궁팀은 시험 결과가 좋았다고 들었다. 스승을 볼 면목이 없었다.
희고 고운 대팻밥만큼 목수 도량도 깊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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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호 도편수가 경복궁 근정전 하층 공포를 3분의 1로 축소한 모형을 설명했다. 공포는 처마를 높이기 위한 한옥 고유의 건축 양식이다. 김병집 기자 bjk@ |
대패가 아니라 자귀로 둥근 기둥을 깎는 기술은 전통 한옥 목수라면 꼭 지녀야 할 기술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아름다운 배흘림 기둥은 대패가 아니라 도끼로 다듬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손기술이 있어야 제대로 된 목수인 것이다.
# 먹통과 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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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위해 지은 한옥 선자연의 우측 식당 건물 대공은 활처럼 굽은 육송울 써서 자연미를 살렸다. 김병집 기자 |
먹줄을 잘못 놓으면 나무는 엉뚱하게 가공이 되기에 편수들은 언감생심 먹통을 쥘 생각도 못하고 멀찌감치서 쳐다볼 뿐이다. 이렇게 울퉁불퉁한 나무에 먹줄을 놓고 대패로 깎으면 이것이 팔각 기둥이 되고 또 16각 기둥, 32각 기둥으로 바뀌면서 결국은 원형 기둥으로 탄생한다. 그때마다 먹줄을 놓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