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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이야기

동래부순절도 이야기

 

             

 

동래부순절도[ 東萊府殉節圖 ] 이야기

 

 

 

비단바탕에 수묵 담채. 세로 145㎝, 가로 96㎝. 보물 제392호. 육군박물관 소장. 1592년(선조 25년) 4월 15일 동래성에서 왜군의 침략을 받아 싸우다 순절한 부사 송상현(宋象賢) 이하 군민(軍民)들의 항전 내용을 그린 그림이다.

 

1709년(숙종 35년)에 처음 그려졌으나, 지금 남아 있는 작품은 1760년(영조 36) 동래 출신의 화원 변박에 의하여 개모(改模)된 것이다. 원래는 송상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안락서원(安樂書院)에 봉안되어 있었다.

 

치열하였던 교전(交戰)의 전말(顚末)을 한 화폭에 효율적으로 담기 위하여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식의 조감법(鳥瞰法)을 사용하였다. 그림의 중앙에는 동래부의 성곽이 둥글게 자리 잡고 있다. 아랫부분에는 남쪽 성루를 중심으로 수비하고 있는 동래부 병사들과 이를 공략하기 위하여 반달형으로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왜병들을 그려 넣었다.

 

화면의 근경이 되는 이 부분에는 길을 빌리자는 목패(木牌)를 든 왜군을 향하여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는 팻말을 성밖으로 던지고 죽음의 결전을 벌이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는 성을 공략하는 왜병들의 모습이 보다 크게 그려져 있어 당시 전력의 심한 격차를 말하여 주는 듯하다.

 

화면의 상단부에는 능선의 윤곽선을 따라 미점(米點)이 가하여진 경직된 모습의 산악과 선염(渲染)으로만 처리된 윤곽뿐인 산악이 중첩된 산군(山群)을 배경으로 하여 그려졌다. 그리고 왜군들이 무너진 성을 넘어 난입하는 장면 및 이를 피하여 성밖으로 도주하는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이각(李珏)의 무리들이 그려져 있다.

 

화면의 아랫부분에는 붉은 조복(朝服)을 입고 북쪽을 향하여 단좌(端坐)하고 있는 송상현을 중심으로 한 순절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제작한 이 그림의 목적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그림의 주제에 비하여 화격(畫格)은 그리 높지 못하여 필치(筆致)·형태 등에서 다소 경직된 면이 엿보이고 있다.

 

 

관련기사1  

 

동래성전투의 송상현 장군

 

 

동래성 전투에서 보여준 송상현(宋象賢) 장군의 절개에 대한 이야기.

1592년(선조 25) 4월 어느 날 부산 앞바다에 한 무리의 배가 도착하였다. 갑자기 쏟아져 나온 군사들은 바로 현해탄 건너의 왜국의 군사들로, 이들은 곧장 부산진을 공격하였다. 부산첨사 정발(鄭撥)은 갑자기 당한 공격이었지만, 부장 이일운(李一雲)과 성을 막기 위해 힘껏 노력하였다. 그러나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데다가 녹슨 무기를 든 군사들은 제대로 왜군을 대적하지 못하였다. 특히 왜군들은 조총이라는 신무기로 조선군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제대로 전투도 하지 못한 채 부산진성으로 쫓겨 들어온 정발 장군과 군사들은 성을 막아내기 위해서 끝까지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왜군의 무자비한 살육 아래 군사들과 백성들 모두 합하여 8천여 명이 죽었으며, 부산첨사 정발장군도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부산진의 상황을 전해 들으며 깊은 상념에 빠졌다. ‘이곳 또한 부산진성의 처지와 다를 것이 없구나. 어쨌든 막아내야 할 텐데······.’마침내 송상현은 군사와 백성들 모두를 모아놓고 끝까지 성을 지킬 것을 약속하며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러나 첫 싸움에서 가볍게 승리한 왜군은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져서 동래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성을 지키기 위하여 송상현과 그의 휘하 부장들과 군사, 백성들은 한마음으로 왜군의 공격을 막아냈으나 결국 성은 허물어지고 말았다. 송상현은 성문 위에 서서 왜군들이 벌떼같이 성을 넘어오는 것을 다만 바라볼 뿐이었다. 마침 왜군들 사이에 있던 평조신과 현소가 그를 발견하였다. 평조신과 현소는 전에 사신으로 조선을 방문한 자들로, 송상현이 융숭하게 대접해 준 일이 있었다.

그들은 그 일을 보답하기 위해서 송상현을 살리고자 성의 서문을 가리키며 피신하라고 소리쳤다. “피하시오. 어서 서문으로 오시오.” 그러나 송상현은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다만 허둥대는 그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뿐이었다. 성문 위까지 다다른 왜군들은 송상현을 보자 무서운 기세로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송상현은 왜군들의 창검 아래 굳은 절개로 반짝이던 두 눈동자를 감고 말았다.

평조신과 현소는 송상현의 충절에 감복하여 그의 시체를 거두어 성 밖에 묻고 나무를 깎아 표를 세워주었다고 한다.

참고자료
문화콘텐츠닷컴 원문보기

 

 

 관련기사2

    임진왜란 때 동래성 사람들 처참한 죽음”

 


동래읍성 해자에서 인골이 출토되는 모습. 320㎡에 불과한 공간에 81~114개체의 인골이 유기되어 있었다. 경남문화재연구원 제공

 


ㆍ부산 동래읍성 해자서 출토된 유골 분석 ‘충격’
ㆍ5세 미만 유아 조총 공격에 즉사…20대여성 칼로 무참히 살해된듯 

 


“320㎡(97평)에 불과한 해자 조사구역에서 발견된 인골만 해도 최소 81개체, 최대 114개체입니다. 10~40대 남녀는 물론 5세 미만의 유아까지 살해되거나 처형된 비참했던 현장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고인골 전문가인 김재현 동아대 교수는 2005년 5월~2008년 1월까지 경남문화재연구원이 조사한 부산 동래읍성 해자에서 출토된 인골을 분석한 결과 1592년 4월15일 임진왜란 개전 당시의 비참했던 동래성 전투상황을 알려주는 사실들을 속속 밝혀냈다고 19일 말했다.

임진왜란 관련 유적에서 유골이 출토된 것은 동래읍성이 처음이다. 또한 인골의 개체수와 인골에 난 상흔의 성격, 그리고 인골의 형질까지 분석한 것 역시 이번이 처음이다.
 

유탄에 맞아 희생된 것으로 보이는 5살 미만의 유아의 인골. 왜병은 어린이와 여성 등 힘 없는 백성들까지 죽여 해자에 무더기로 내던졌다.

 


 

석 결과 동래읍성 해자 밑바닥에 집중된 인골의 수는 확인된 것만 81개체(남자 59개체, 여자 21개체, 유아 1개체)였다. 이번에 분석 대상이 된 두개골 상흔은 절창(切創·칼에 베인 상흔)이 4개체, 사창(射創) 또는 자창(刺創·총이나 활을 맞은 상흔)이 2개체, 둔기에 의한 두개골 함몰(2개체) 등이다. 구체적인 인골분석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적병의 조총공격에 맞아 살해된 5살 미만의 유아 인골이 확인된 것이다. 김 교수는 “두개골에서 확인되는 부정형의 상흔과 상흔의 경사도, 그리고 깨진 정도를 종합하면 이 유아는 일본군의 조총공격에 빗맞았거나 유탄을 맞아 즉사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20대 여성의 사인(死因)은 심상치 않은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김 교수는 “왜병은 이 여인의 전두부와 두정부를 두 번이나 칼로 내려쳤으며, 특히 전두부의 경우는 예리한 칼로 단번에 완전히 잘렸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전투 중에 칼을 휘두르면 얼굴 양쪽에 상흔이 남을 가능성이 크지만, 이 여인의 경우 전두부와 두정부를 잘렸는데, 이는 왜병이 여인을 꿇어 앉혀놓거나 고개를 숙이게 한 뒤 옆에서 칼로 내려쳤을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처형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밖에도 상흔이 반듯하지 않은 인골과 두개골이 함몰된 인골 등도 확인된다”면서 “이는 칼 이외의 다른 도구로 무참하게 살해되었음을 뜻한다”고 전했다. 왜병들은 이렇게 살해한 조선인들을 해자에 한꺼번에 내던진 것이다.

또한 분석된 인골들은 모두 조선인이었다. 분석이 가능한 19개체의 남성인골의 평균신장(163.6㎝)이 동시대 일본 에도인(江戶人·155.09~156.49㎝)보다 무려 7~8㎝ 정도 크다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또한 두개장폭지수(頭蓋長幅指數·이마와 뒤통수의 길이와 귀와 귀의 길이 비율)도 동래인과 에도인은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3 해자에서 확인된 20대 여성의 인골. 왜병이 꿇어 앉아있거나 고개를 숙인 이 여인의 머리를 위에서 두 번이나 칼로 벤 것으로 보인다. 김재현 동아대 교수 제공

 


동래성 전투는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끈 일본군이 1592년 4월15일 동래부사 송상현이 지킨 동래성을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송상현은 “죽더라도 절대 길을 내줄 수 없다”면서 버텼지만 그만 순절했고, 동래성은 함락되고 만다.

1760년 변박(卞璞)이 그린 ‘동래부사순절도(東萊府使 殉節圖·보물 392호)’에는 동래성을 겹겹이 에워싼 왜병들의 모습과 의연하게 싸우다 죽음을 맞이하는 송상현 부사, 그리고 도망 가는 경상 좌병사 이각의 모습 등이 시간대 별로 잘 묘사되어 있다. 또한 효종 때 동래부사로 재직하던 민정중(閔鼎重)이 쓴 ‘임신동래유사(壬辰東萊遺事·1668년 간행)’ 등의 기록을 보면 동래성 전투의 비극을 잘 표현하고 있다.

“성은 협소하고 사람은 많은데 적병 수만이 일시에 다투어 들어오니 성중은 메워져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대혼란에서 조선군 병사들은 물론 백성들도 막대기와 괭이, 낫, 도끼, 칼 등을 들고 백병전을 벌였다고 한다.

이재 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장은 “동래읍성 발굴 결과는 각종 사서기록이나 ‘동래부사순절도’의 그림과 부합된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라면서 “이것이 바로 전쟁고고학 분야가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