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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이야기

옛 부산부+동래군 지도

옛 부산부+동래군 지도

 

 

 

 

1876년 강화도조약, 동래부 부산포 개항

1906년 양산군 좌이면(현 구포)을 동래부에 편입

1910년 경술국치, 동래부를 부산부로 개칭

1914년 부산부의 영역을 개항장 일대로 축소, 부산부의 잔여지역과 기장군을 병합하여 동래군 설치

-1914년의 행정구역 상황-

부산부
현재의 동구, 중구, 영도구, 서구(암남동 X)

동래군
동래면(동래군청 소재지) : 현재의 동래구, 연제구 및 금정구 오륜동, 회동, 금사동, 서동, 해운대구 석대동, 반여동,
                                  반송동

 북면 : 현재의 금정구(오륜동, 회동, 금사동, 서동, 금성동 X)
 남면 : 현재의 해운대구(석대동, 반여동, 반송동, 송정동 X), 수영구
 서면 : 현재의 부산진구, 남구
 좌이면(1918년 구포면으로 개칭) : 현재의 북구, 금정구 금성동
 사상면 : 현재의 사상구
 사하면 : 현재의 사하구, 서구 암남동
 기장면 : 현재의 기장읍, 해운대구 송정동
 철마면 : 현재와 同
 정관면 : 현재와 同
 장안면 : 현재와 同
 일광면 : 현재와 同

1931년 동래면을 동래읍으로 승격

1936년 서면, 사하면 암남리를 부산부에 편입

1942년 동래읍, 사하면, 남면, 북면 부곡리·장전리를 부산부에 편입

1943년 구포면을 구포읍으로 승격

1945년 광복, 1948년 정부수립

1949년 지방자치제 실시, 부산부를 부산시로 개칭

1963년 부산시를 부산직할시로 승격, 동래군 구포읍, 사상면, 북면, 기장면 송정리를 부산직할시에 편입
(이때부터 동래군의 영역은 현 기장군의 영역과 동일해짐)

1973년 결국 동래군을 폐지하고 양산군에 병합, 1995년 이 지역을 다시 양산에서 뺏어와 기장군으로 부활

철도이야기 : 부산지하철 1호선(신평~노포)


2009/05/16 10:36

1929년(소화4년) 발행 동래군 지도 





부산부, 서면 동래면 남면 기장면 북면 철마면 일광면 정관면 장안면 구포면 사상면 사하면




오늘날 우리가 ‘부산(釜山)’이라고 부르는 지명은 조선시대에 생겨났다.

원래 부산은 15세기까지 동래현에 부속되었던 동평현의 한 지역인 좌천동(佐川洞)에 위치해 있던 ‘부산(富山)’에서 유래하였다. 지금은 증산(甑山)이라 부른다. 그 산 아래에는 고려시대에 ‘부산부곡(富山部曲)’이라는 포구가 있었는데 이 지역을 부산포(富山浦: 뒤에 釜山浦)라 하였다.

 

경상도(慶尙道)의 도청 소재지는 당초 상주(尙州)에 있었으나 1466년(세조12)에 대구(大邱)로 옮겨졌다. 1519년(중종14)에는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경상도를 경상좌도(慶尙左道, 낙동강 동편), 경상우도(慶尙右道, 낙동강 서편)로 분리하고 좌도의 치소(治所)를 대구, 우도의 치소(治所)을 진주에 두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무렵 좌·우 도(道)를 통합하고 대구에 감영(監營)을 두었다.

1897년(광무1)에 전국을 13(道)로 개편하게 됨에 따라, 경상 남·북도로 분리하여 북도의 도청을 대구에, 남도의 도청을 진주에 두었다. 그 후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진주에 있던 도청 소재지를 부산으로 이전하였고, 1963년1월1일 부산이 정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부산이 경상남도로부터 완전 분리되었다.

 

 

공식적인 행정구역으로‘부산(釜山)’이란 이름이 등장한 것은 1868년 편찬된『동래부사례(東萊府事例)』에서 나타난 대로 동평면에서 부산면이 분리되어 나온 그때부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부산이라는 행정 명칭이 널리 쓰인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0년10월에 동래부(東萊府) 전역이 부산부(釜山府)로 개칭되고, 1914년에 부산부제(釜山府制)가 공식적으로 실시되면서부터다.

 

 

                                      1895 부산진성 지성과 영가대

 

 

 

초량고개

 

 

                                                                           1907 영가대 원경

 

     중앙동 해안

 

1910 초량동 해안가

 

 

1678년 초량왜관 설치

1916년 용두산공원 조성


부산 중구 광복동과 남포동, 중앙동 등 이른바 원도심 일원은 부산을 근대도시로 탈바꿈시킨 장소였다.

1678년 용두산 주변인 현재의 남포동, 광복동, 동광동, 신창동, 대청동 등 35만㎡에 초량왜관이 설치되면서 이 일대는 다양한 문물교류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1607년 동구 수정동 일원에 세워진 두모진왜관을 확장 이전한 것이다.

 

초량왜관 시대가 열리면서 왜관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예전 200여명 수준에서 500여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왜관은 일본상인들이 중국 상품을 구입해 가는 중계무역 기지인 동시에 조선과 일본간의 국제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외교특구였다. 이곳을 통해 양 국가는 외교, 경제, 문화, 풍속 등에 걸친 다양한 교류를 시작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면서 부산은 본격적인 개항장으로 탈바꿈했다.

이후 ‘부산항일본인거류지계조약’이 체결되면서 기존의 초량왜관은 일본인 외교관들이 머무르는 일본인 전관 거류지로 개방됐다. 비록 압제와 침탈을 위한 공간으로 변질되기는 했으나 광복동 일원이 본격적인 근대문물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는 계기도 됐다.

 

개항이후 유입되는 일본인들이 급증하면서 지금은 복개된 광복로의 실개천 주변으로 주택도 크게 늘어났다. 이후 각종 공공기관과 업무, 상업시설은 물론 항만과 철도 등 각종 산업시설들이 모두 이곳을 중심으로 들어섰다.


일본이 우리의 국권을 침탈한 1910년 8월29일 이후 이 일대에 대한 일본의 개발야욕은 더욱 본격화됐다. 1915년 11월부터 1916년 6월 사이에 용두산공원을 조성, 현재 부산타워가 있는 곳에 신사를 세워 부산시민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기도 했다. 그렇게 일제 강점기 시절 광복동은 일본인들의 상업중심지로 자리매김 했다. 식당, 극장, 백화점, 은행 등 근대식 업종들이 속속 문을 열었다. 당시 장수통 또는 변천정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사람들은 남부민동과 아미동 등 고지대에 살고, 일본사람들은 자갈치 시장 인근 평지에서 생활하는 등 주거 차별도 심했다.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일본이 패망, 광복을 맞으면서 다시 주권을 회복했다는 의미에서 이 일대는 비로소 ‘광복동’으로 이름 지어지고 광복로도 현재의 명칭을 갖게 되었다. 5년 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광복동 일원은 대한민국 임시수도가 설치되는 등 자연스럽게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급부상하기도 했다.

 

 

일제시대 때 경남도청으로 사용된 건물, 한국 전쟁시(1950년 8월~10월, 1951년) 임시정부청사로 사용, 1983년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이사가고 2001년까지 부산지방 검찰청사로 사용.
도청이 거제리로 이사가면서 동아 대학교에서 인수했다는데...

 

 

 

 

 

1876년 부산항 개항1883.11.3 부산세관 개청

 

(부산세관)

산 자와 죽은 자의 공존.

피난민촌 중에서도 소위 공동묘지 마을로 불리는 곳은 피난민들의 애환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는 지역이다. 당시 피난민들은 생존을 위해 죽은 자의 공간까지 비집고 들어가야만 했다.


남구 문현동 ‘돌산마을’은 농막마을(현재 문현동 안동네) 뒷산 공동묘지에 형성됐다. 문현초등학교 뒤편 골짜기에 있던 농막마을은 옛날 막노동꾼이나 가난한 농부들이 움막을 짓고 살았던 곳. 일제강점기 말기 30채 가량의 이 마을은 전쟁직후 피난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공동묘지 주변으로도 판잣집이 들어섰다.


처음엔 무덤 옆 공터에 조심스럽게 집을 지었다. 하지만 이후에는 무덤을 절개하여 반만 남겨둔 채 집을 짓는가 하면 담 안에 무덤을 그대로 두고 집을 지어 살기도 했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 80여기의 무덤이 흩어져 있어,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다.


서구 아미동 묘지마을의 사연은 더 기구하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부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무덤이 있던 자리다. 뒤늦게 부산으로 피난을 와 미처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이 주로 이곳 공동묘지로 흘러들었다.


다른 피난민 정착지역과 달리 아미동 무덤 일대는 땅이 평평해 외려 집을 짓기에 안성마춤이었다. 일본인 가족묘 주위를 직사각형으로 두른 경계석과 외곽벽은 그대로 집벽으로 활용했다. 집을 지을 마땅한 재료가 없던 시절, 비석과 상석은 축대를 쌓고 계단을 만드는데 유용한 건축자재였다.


“당시에는 눈 앞의 생존을 위해선 무덤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피난민들이 납골함 위에 놓여 있던 비석과 상석, 받침돌 등 커다란 돌덩이들을 옮길 수도 없어 그대로 둔 채 그 위에 집을 짓고 살 수밖에 없었다.”

산 자는 물론, 죽은 자에게도 상흔을 남긴 한국전쟁이었다.

 

당감동 화장장 앞 정화 작업 장면. 빨강색 원이 화장장 굴뚝이다

 

 

1957.12.10. 개장 (화장로 7기에 하루 최대 56구 처리)

1987.11.30. 당감동 화장장 폐쇄.

화장장 자리에는 지금의 롯데백화점 부산점 자리에 있던 부산상고(현 개성고)가 1989.4월 이전했다.

 

당감동에 화장장이 들어서기 전에는 서구 아미동에 화장장이 있었다. 1929년 아미동 2가에 신설됐다.

일제강점기인 그때도 지역 주민의 반대 운동이 거셌다. 부산 전역에 흩어져 있던 화장장을 아미동으로 이전한 뒤 아미동에는 장례행렬이 줄을 잇고, 유족들의 곡성과 시체 타는 악취가 온 마을을 진동했더랬다. 화장장의 연기가 아미골을 뒤덮었고, 제물로 차려진 음식은 까치를 불러 모았다. 화장장 부근의 까치고개란 이름도 이때 생겼다고 한다.

 

 

 

 

 

 

 

 

▲ 1934 중앙동

 

 

 

 

 

▲ 1952 중앙동

 

 

 

 

 

▲1950 대청동

 

 

 

 

 

 

 

 

 

▲ 1953. 1. 국제시장 화재

 

 

 

 

 

 

▲ 1960 구덕운동장 (제1대 참의원 선거)

 

 

 

꽃동네.

부산 서구 서대신동 ‘꽃동네’는 60년전 한국전쟁 피난민들의 기구한 애환을 간직한 곳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포화를 피해 전국에서 200만명이 부산으로 몰려들었지만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터는 턱없이 부족했다. 피난민들은 등을 뉠 수 있는 한뼘의 땅이라도 있다면 도로변과 산비탈, 공동묘지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구덕령(九德嶺) 정상에 위치한 꽃마을까지 피난민 발길이 닿은것도 이러한 연유였다. 당시 꽃마을에서 부산 전차종점이 있던 구덕운동장까지는 차편이 없어 30분 이상 가파른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해방 직후까지 꽃마을은 초가집 60여채가 옹기종기 모인 작은 마을이었다. 전쟁을 거치면서 100여세대의 피난민들이 정착해 원주민 수를 넘어섰고, 마을의 규모도 커갔다.

 

들꽃이 흐드러지게 핀 구덕령. 꽃마을 사람들은 피난민들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방 2칸중 1칸을, 3칸인 집은 2칸을 내줘가며 이들은 보듬었다. 집집마다 원주민과 피난민의 애틋한 동거생활이 펼쳐졌다.

 

“당시 꽃마을 일대는 국유지가 대부분인데다 감시가 심해 다른 지역처럼 움막을 함부로 지을 수도 없었다. 고향을 잃은 피난민들을 내칠 수 없어 주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방을 내줬다”

 

고난의 피난생활이었지만 꽃마을 피난민들은 그나마 여유로운 편이었다. 시내 다방과 상가 등지에 꽃을 내다 팔며 밥벌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을 겪으면서 피난민이 유입돼 부산인구가 늘어났고, 이는 꽃수요 증가로 이어졌다. 다방과 상점 등 꽃을 찾는 가게가 늘어났고, 서울 등지에서 온 부유층도 주요 고객이었다.

 

당시 부산지역에서 꽃을 내다 파는 사람들은 꽃마을의 젊은 아낙들이 유일했다. 일제 강점기부터 인근 엄광산과 구덕산에 흐드러지게 핀 야생화를 꺾어다 일본인들에게 판매했던 경험이 밑바탕이었다. 특히 다방, 상점, 가정집 등 꽃을 찾는 단골 위주의 방문판매라 큰 품을 안팔아도 됐다.

 

이들은 마을에서 꽃을 재배해서 팔거나, 판매할 꽃을 김해와 마산 등지에서 대량으로 떼어오기도 했다. 새벽이면 대야 한가득 머리에 꽃을 이고 줄을 지어 고갯길을 내려가는 아낙네들의 모습은 당시 언론에 소개될 정도로 장관이었다. 비닐하우스가 없던 시절이라 계절에 따라 여름에는 카네이션과 다알리아, 가을에는 국화가 인기였다.

 

꽃마을은 60년대 중반 또 한번의 전쟁을 겪으며 재차 꽃을 피웠다. 베트남전에한국군을 파병하면서 꽃 수요가 큰 폭으로 늘어난 것이다. 베트남으로 떠나거나 돌아오는 국군장병들 목에는 어김없이 ‘꽃마을표 꽃다발’이 하나씩 걸렸다. 아이러니하게도 평화의 상징인 꽃, 꽃을 상징하는 꽃마을의 번성과 참혹한 전쟁의 역사가 궤를 같이하고 있는 셈이다.

 

현재 꽃마을에는 1981년 구청에서 건설한 2천여평 규모의 양묘장이남아있다. 여기서 생산된 꽃들은 지역 내 길거리나 화단 등 조경용으로만 사용된다. 몇몇은 동구 범일동 자유시장과 펑화시장에서 꽃도매상을 하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90년대 들어 등산객이 늘면서 꽃마을 아낙네들 중 일부는 음식점을 열어 이들을 맞고 있다.

 

 

 

 

 

 

▲ 공동수도

 

 

 

 

 

▲ 급수차

 

 

 

▲광복동

 

 

 

 

 

▲광복동

 

 

 

 

 

▲ 국제시장

 

 

 

 

 

 

▲구덕운동장 앞길

 

 

 

 

 

 

▲舊 부산역 (現 중앙동 외환은행)

 

 

 

 

 

▲부민동

 

 

 

 

 

 

▲1953. 11. 부산역 대화재

 

 

 

 

 

▲보수천

 

 

 

 

 

▲ 1961 부산터널

 

 

 

 

 

 

 

 

 

 

 

▲ 1963 서면로터리

 

 

 

 

 

 

▲ 1966 대연동

 

 

 

 

 

▲ 1968 보수천

 

 

 

 

 

▲1969 장림동

 

 

 

 

 

 

▲1969 동천(전포동)

 

 

 

 

 

 

▲1970 구포

 

 

 

 

▲ 1960 중앙동 (산 위에 남성여고)

 

 

 

 

▲1970 중앙동 (상공회의소)

 

 

 

 

 

▲1973 해운대 (극동호텔)

 

 

 

 

 

 

▼. 영도다리

 

 

1934. 11.준공

 

전체길이 214m (시내쪽 도계교 跳開橋 31m)처음에는 하루 여섯번 들다가, 이후 2회(10:00, 16:00) 들었고, 배가 지나 다녔다.

 

당시 부산인구 16만명

 

 

 

 

 

하루에 두 번 들었고. (10:00, 16:00)1966년 9월 이후 들지 않았다. 영도에 수돗물이 공급되면서, 상수도관이 다리에 묶이게 된 때문.

 

 

 

 

 

 

 

 

 

 

 

영도 (봉래산)

 

 

 

 

 

 

 

 

 

▲ 1965 영도

 

 

 

 

▲ 초량동 1975

 

 

 

 

 

 

 

 

남포동

 

 

 

 

 

▲ 송도 출렁다리

 

 

 

 

 

 

▲ 송도 해수욕장 (다이빙대와 케이블카)

 

 

 

 

 

 

 

▲ 영선고개

영주동 부산터널 입구에서 코모도호텔∼메리놀병원∼카톨릭센터∼국제시장 입구 사거리로 이어지는 고갯길로 '유엔고개'라고도 한다. 이 고갯길은 6.25전쟁 때 부산에 상륙한 유엔군이 부산에서 처음으로 아스팔트를 포장함으로써 '유엔도로' 또는 '유엔고개'라고 불리게 되었다.

 

본래의 영선고개는 유엔도로 동쪽 아래 있는 언덕 바로 윗길(영주동 시장 남쪽입구∼부원아파트 뒤∼논치시장∼대청로로 이어지는 길)이 통하고 있는 고개로 영선산(瀛仙山)의 착평공사(鑿平工事, 1909∼1912년) 때 헐려 없어진 영선산(營繕山) 등성이로 가로지르고 있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당시 영선산은 대낮에도 혼자서는 좀처럼 나다닐 수 없는 소름끼치고 으스스한 오솔길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무렵 초량왜관 담장을 넘어 함부로 다녔다가 우리나라 번병(番兵)에게 들킨 사람이 참수형을 당했던 곳이 바로 영선산 숲속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이 '영선고개' 오솔길을 넘나들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은 초량객사와 임소(任所, 초량왜관 사무를 맡아 오던 우리측 관원들이 지켜있던 관청)가 있던 영주동에서 초량왜관(현 용두산 부근) 사이를 오가는 길목이 바로 이 고갯길 뿐이었기 때문이다.

 

   ▲ 장전동

 

 

 

    ▲ 임시승합차 -

 

▲ 자갈치

 

 

▲ 3부두 (맹호부대 월남파병 1966)

 

 

 

서면로터리

 

 

 

 

 

 

서면로터리와 부산탑

 

부산 서면의 중심에 원형의 ‘서면로터리’가 조성된 시기는 1957년, ‘부산탑’은 1963년에 세워졌다. 부산시가 1963년 1월 1일 직할시로 승격됨에 따라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62년 12월 1일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열렸다.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거행된 이날 기념식에는 박정희(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비롯한 정부 요인, 재부 기관장 그리고 부산 상공인과 시민 2만여 명이 참여했다.

 

또한 부산상공회의소는 직할시 승격을 기념하는 부산탑 건립 공사를 추진하였는데 예산 250만원(부산시 100만원, 부산상공회의소 150만원)으로 1962년 12월 25일에 기공식을 가진 뒤 1년간의 공정을 거쳐 1963년 12월 14일 제막식을 거행함으로써 부산의 명물, 부산탑이 탄생을 보았다.

 

탑의 전체 높이는 23m, 상부에는 오륙도(五六島)를, 중앙에는 자유의 횃불을 든 4.2m 높이 남녀 동상을 안치하여 부산의 영원한 번영을 염원하였고 가로 61㎝, 세로 91㎝, 두께 14.2㎝ 크기의 기념비도 세웠다.

 

기념비에는“이 탑은 넓은 바다와 맑은 하늘의 복과 덕을 입어 자유와 평화에의 굳은 신념으로 새로이 출발한 직할시 부산의 영원한 번영과 자손만대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온 시민의 정성으로 모아진 것이다.”라는 취지문과 탑 건립에 참여한 당시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인 姜錫鎭과 具仁會, 金智泰, 朴敬奎, 朴正寬, 申景浩, 申德均, 申世均, 愼重達, 梁泰振, 王相殷, 李秉喆, 李英震, 張洪植, 鄭翼鈺, 鄭泰星

外 釜山商議議員一同이라는 명단을 새겼다.

 

서면로터리는 중앙로, 가야로, 새싹길, 동성로를 연결하는 부산 교통의 중심은 물론 상업·금융·유통·문화·정보 등이 교차하는 소통의 로터리였다. 찻길은 늘 차량의 홍수를 이루었는데, 솜씨가 서툰 신출내기 운전자는 로터리를 빠져 나갈 기회를 잡지 못해 몇 바퀴나 뺑뺑이를 돌기도 했다.

 

1970년대 이후 급격한 산업화로 도시가 발전하고 교통량이 폭증하자 부산에도 지하철 공사가 시작되면서 부산탑은 1981년 7월 부산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고 로터리는 신호등이 달린 교차로로 바뀌었다. 자유의 횃불을 든 남녀상은 부산박물관 뜰에 보관되어 있으며 기념비는 종적이 묘연하다. 2009년 3월, 부산박물관 지하 수장고에서 발견되었다.

 

 

 

 

서면 로터리 기념탑 한가운데로 전차가 지나 다녔다

 

 

 

 

 

부산시청

   상공회의소

 

 

 

 중앙동 전찻길

 

 

 

 

 

 



 

 

부산역사 메모 (해방 후 - 1962년)

 

1945.

08.15 해방 - 부산인구 281,160명(일본인 60,000명)

08.18 건국준비위원회 부산지부 발족

08.19 부산치안 사령부 발족 일본소유의 각 기관 접수개시

08.20 부산상공경제위원회 발족

09.01 국문 "부산일보" 창간, "민주중보" 창간.

맥아더 사령관 북위38도선을 미소양군 분담 점령책 발표

09.07 미 제8군 제24군단 선발대 인천 상륙

09.11 하지중장 미군정 시정 발표

09.16 미군 부산진주(미 제24군단 6사단 300명)

-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구 미문화원), 부산부청사 접수

09.17 미군정 경남도지사 찰스·헨리 소장 취임 부산부윤 죤 P·H 케리 소령 취임

09.19 치안사령부, 부산시내 경찰서 및 파출소 접수 시작

09.24 "부산정보" 창간

09.25 부산에 처음으로 야간통행금지 시행(밤 8시∼익일 04시)

09.26 미군정청, 일본정부 및 일본인 재산을 미군정 소유로 할 것을 발표

09 치안유지·경찰사무 일체 미군정 인도 - 부산치안사령부 해산

10.01 경남도내 초·중등학교 개학(우리말 우리글을 가르침)

10.08 "인민해방보" 창간

10.14 귀환동포를 위하여 부산부 각 은행이 제1부두에서 일본 은행권을 조선 은행권으로 바꾸어 줌.

10.20 국립경찰창립. 초대 경상남도 경찰국장 김국태

10.25 부산부에 근무하는 일본인 관리를 전부 추방하고 한국인 관리로 전원 교체

11.01 부산상공회의소 발족 미군정청 교통국 부산부두국 발족

11.03 부산·경남 육상선수권대회 개최

11.12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신한공사로 개칭(1946.7.9 해체령)

12.01 부산항 입출입 신고업무 부산수산경찰서에서 부산부두국으로 이관

12.12 야간 통행금지 시간 하오 8시 → 10시로 변경

12.18 부산체육회 발족(회장 양성봉)

12.27 모스크바 3상회의, 한국을 5개년간 신탁통치하기로 결의함에 대한 시민 반탁궐기대회 개최

 

1946.

01.01 신탁통치반대 부산시민 총궐기대회 개최(현 국제시장 부근)

01.11 귀환동포 100만 돌파

01.19 국군 제5연대 4중대 감천동에서 창설

01.23 미군정 초대 경남도지사 김병규 취임

01.24 미군정 부산부윤 한국인 양성봉 취임

03.07 부산∼서울간 경부특급열차 운행

03.29 부산부두국을 부산항무청으로 개청(법령 제76호)

04.17 귀환동포에게 열차표 우선 제공

05.03 "부산신문" 창간

05.15 부산대학교 개교. 부산에 콜레라 만연, 5천명 정도 감염, 1,500여명 사망자 발생

09.01 신교육제도 6·6·4 制로 개편하고 학년초를 9월 1일로 조정

09.10 "부산일보" 국문판 창간

09.23 부산철도국 관내 종업원 700여명 0시를 기해 파업

10.01 일본식 행정구역의 町 → 洞으로, 丁目 → 街로, 通 → 路로 개정

11.01 동아대학교 개교

 

1947.

01.14 미군정 경남도 한국인 장관 金喆壽 취임

02.05 군정청 민정장관 安在鴻 임명 “부산정보”, “조선일일신문” 군정청이 폐간

03.01 3·1절 기념식 소요로 경관의 발포 - 부산에서 6명 사망

03.09 미국제 기관차 30대 부산항 도착 하역

08.15 부산부 주최 광복2주년 기념식을 구덕공설운동장서 거행 - 좌우익 충돌로 중단

09.01 “산업신문” 창간 → 1950년 8월 9일 국제신보로 → 1975년 6월 1일 국제신문

 

1948.

01.21 공창제도 폐지법 통과(2월 24일부터 발효)

02.06 일제징용으로 끌려간 동포 유골 5천여구 부산항 도착

05.10 유엔 한국위원회 감시 아래 대한민국 총선거 실시

05.31 제헌국회 개원

07.01 우리나라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함

07.17 대한민국 헌법 제정(국회 통과)

08.15 대한민국 정부 수립

09.08 국회에서 연호를 檀紀로 결정

10.18 제3대 경남도지사 文時煥 임명

11.06 부산부윤 梁聖奉 이임 11. 07 부산부윤 鄭鍾哲 취임

12.12 UN총회, 한국정부 승인

 

1949.

01.01 서울 - 부산간 민간항공 취항 (주)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 발족

02.05 부산지구에 5,500㎾ 상시 송전 개량 실시

04.01 야간 통행금지 하오 11시~다음날 상오 5시로 단축

06.14 부산특별시 승격기성회준비위원회 발족

07.29 부산특별시 승격안 국회에서 부결. 미국 해외공보처 미문화원(USIS) 개원

08.15 부산부를 부산시로 개칭 - 법률 제32호(1949. 7. 4 공포)

 

1950.

01.16 부산전파 감시국 개국

01.28 최초의 한일 무역선 근사환 부산항 입항

04.10 사단법인 조선방송협회 산하 부산연주소 → 부산방송국 승격

04.20 부산시장 鄭鍾哲 이임

04.21 부산시장 金柱鶴 취임

06.25 한국전쟁 일어남

06.27 정부 대전으로 이전

07.01 연합군 지상부대 부산상륙, 부산에 해군작전본부 설치

07.03 부산에 기지사령부가 미극동사령부하에 설치

07.06 부산에 한·미연합 해군 방위사령부 설치

07.07 우암선(부산진 - 적기간) 개통

07.08 전국에 계엄령 선포, 부산항만방위사령부 부산에 설치

07.10 해군본부 대전에서 부산으로 이전

07.16 정부 대전에서 대구로 이전

07.24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 설치(미 8군운영, 현 부산경찰청 부근)

08.01 부산영도 해동중학교에 포로수용본소 설치(한국군 운영)

08.12 부산영도 포로수용본소 폐지하고 거제리 포로수용소로 통합

08.16 체신부 부산이전

08.18 정부 부산으로 이전(제1차 임시수도 - 1950.10.27 환도)

09.01 국회 부산 문화극장에서 개원

09.08 부산 피난민 가덕도 이송

09.16 낙동강 전선서 유엔군 총반격 개시 맥아더 장군 지휘하에 미군 인천상륙작전

09.17 미 10군단 인천 상륙작전 개시

09.23 서면 부산상고에 스웨덴 야전병원 개원

09.28 국군 서울 수복

10.08 서울~부산사이 철도 완전 개통

10.19 유엔군 평양 점령

10.25 중공군 한국전 개입

10.27 정부 서울로 1차 환도

12.04 국군 평양 철수

12.12 비상계엄 선포 국회에서 승인

12.13 부산상공회의소 화재로 소실

12.29 부산시 피난민 수용을 각동별로 배정(사찰, 교회당, 창고 등에 우선 수용)

 

1951.

01.01 중공군 6개 군단 남침. 38도선 돌파

01.03 정부 부산을 임시수도로 결정

01.04 정부 부산으로 이전(제2차 임시수도 - 1953.8.15 환도) 국회 부산국장에서 재개원

01.05 중공군 서울 재침입 부산시청에 문교부 임시사무소 설치

01.17 부산극장에서 구국결전문화인 대회개최

01.18 유엔묘지 조성(남구 대연동)

01.26 “부산일보” 휴간 - 미군시설로 접수

01.27 남포동 임시사옥서 “부산일보” 속간

02.18 부산 전시연합대학 개강(1952. 5 해체)

02.28 거제리 포로수용소 포로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동

03.14 서울 재탈환

03.20 부산특별시 승격안 국회내무위 상정

04.07 부산·대구지역 계엄령 해제

05.01 전시 비상조치로 부산에서 전시 연합대학 개교

06.27 국회 경남도청 무덕관으로 이청

07.03 부산특별시 승격안 국회 유보 가결

07.11 송도앞 바다 제5편리호 침몰(사망 55명)

10.01 서울~부산간 급행열차 운행

10.31 부산시 인구조사실시(총 626,180명)

11.17 부산시민 戰災民에 방 비워주기 지원 신청자 쇄도

12.01 부산·대구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 선포

 

1952.

01.10 전국에 반공비상사태 선포

02.01 미 제7항만사령부로부터 한국 제302항만대대에 부산 제1부두 이양

02.18 부산에서 반민의 국회의원 소환요구 데모

04.25 전국 시·읍·면 의원 선거 실시

04.28 각 지방 계엄령 해제. 국립해양대학 군산에서 부산 거제리로 이전

05.07 부산시장 金柱鶴 이임

05.08 민선 부산시장 孫永壽 취임. 첫 시의회 개원(의장 김락제, 부의장 박교준)

05.10 전국 도의원 선거

05.20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 폭동 발생

05.24 부산시교육위원 10명 선출

05.25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남·전남북에 계엄령 선포

06.20 부산국제구락부서 야당인사들 반독재호언 구국선언, 회의장에 괴한 난입

06.25 부산 충무로에서 6.25 2주년 기념식장에서 대통령 저격 사건 발생

07.17 부산 부두 노동자 임금인상을 요구 총파업

11.27 부산 국제시장 대화재 발생

11.29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폭동 발생

 

1953.

01.09 부산 다대포에서 여객선 昌慶號 침몰(229명 사망)

01.21 해군 부산항만사령부 발족

01.30 부산 국제시장 대화재 발생(1984호 소실, 소실세대 2,366세대, 이재민 13,235명)

02.15 화폐개혁 단행 - 화폐단위를 100대 1로 절하하여 圓을 환으로 표시

04.01 부산대학교 국립대 인가

07.03 부산해양원양성소 설립인가

07.27 판문점에서 휴전협정 조인

08.15 정부 임시수도 부산에서 2차 서울로 환도

09.16 국회 부산에서 서울환도

09.17 부산시, 대연출장소와 해운대출장소 설치

09.시·도민증 소지자에게 한강 도하 허가

11.27 부산역전 대화재 발생 - 2천여 가옥소실, 이재민 3,100명

12.17 민선 부산시장 손영수 취임

 

1954.

02.08 부산시 약 51,000동 판자집 중 현재까지 3,412동 철거

04.03 좌천동지구 미군 송유관에서 대화재 발생(사상자 27명, 650세대 전소)

04.04 부산진에 대화재 발생 - 사상자 134명

05.07 부산여고에서 서독병원 개설 민간인 무료치료

05.20 전국 민의원 선거(당선자 부산갑 김지태 외 4명)

07.09 부산시장 孫永壽 이임

07.23 민선 부산시장 崔丙奎 취임

11.27 부산 미55보급창 화재로 전소

12.08 군대에서 사용중인 토성초등학교 화재로 18개 교실 소실

12.10 용두산공원 판자촌 대화재 발생(가옥 1,093동 소실, 이재민 8,000여명)

 

1955.

02.13 부산시장 崔丙奎 이임

02.18 국무회의는 부산·광주 사범학교를 사범대학으로 승격

02.24 민선 부산시장 裵上甲 취임

03.02 부산역 구내 객차내 인화물 폭발로 42명 사상자 발생

03.09 용두산공원 → 우남공원으로 개칭(1960년 4·19혁명 뒤 용두산공원 환원)

06.09 부산교육대학 개교

06.25 미 극동군 사령관 겸 UN군사령관이 부산항의 관리권 한국군에 이양

09.09 사단법인 부산해양협회 설립

11.25 국립해양대학 영도 새교사로 이전

12.01 부산해사국→ 부산해무청으로 개칭

12.22 용두산공원에 이순신 장군 동상 제막

 

1956.

01.29 제1회 간이 총인구조사 실시 - 부산 인구는 1,019,363명(남자 529,112명)

03.13 부산해양고등학교 설립

08.02 부산국제시장에서 대화재 발생 (점포 135개 소실)

08.08 경남도 시·읍·면 의원 및 시·읍·면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 실시

08.13 제2회 전국 도의원 선거 실시

08.20 부산시의회 개원(의장 서재원, 부의장 김길한 선출)

09.16 부산시 동장선거 규칙에 의거 동장선거 실시

 

1957.

01.01 부산시 區制실시 -법률 제407호(1956.12.17 공포)

- 중구,서구,동구,영도구,부산진구,동래구. /괴정동 외국인 수용소에서 일본어부 17명 도주

02.07 제2대 부산시 교육감 선출(5. 11 교육감 吳秉仁 취임)

06.02 부산진 미군 송유관 파열로 화재 발생(사망 20, 화상 30명, 이재민 2천명)

07.11 부산에서 디젤기관차 인수식 거행

08.21 태풍7호 부산항 강타 - 선박 11척 침몰

10.18 제38회 전국체육대회 부산개최(구덕운동장)

12.23 부산시, 제1회 문화상 수상자 확정

 

1958.

01.12 ICA자금에 의해 도입되는『디젤』기관차 9대, 객차 18대 부산항 도착

01.30 일본인 억류어부 30명 부산서 제1차 송환

02.21 제1차 재일억류동포 249명 부산항 도착

03.27 부산일보사, 부일영화상 제정

04.23 일본 大村수용소 억류 동포 251명 부산항 도착

04.27 우리나라 최초로 부산부두노동자회관 준공

05.28 서독적십자사, 부산서독병원 폐쇄

07.26 부산시 정부 직할시 승격 기성회서 국회에 청원서 제출

08.23 주식회사 부산문화방송국 창립총회 개최

09.25 부산지방해무청 청사 준공(중앙부두 뒤편)

09.26 “부산일보” 지방지로서 조석간 6면 발행 개시

12.13 부산 조병창 준공

 

1959.

02.13 서울·부산 등지에서 제일교포 북송반대 규탄대회 개최

02.23 부산시장 裵上甲 이임

03.19 부산시장 裵上甲 취임(임명직)

04.15 부산문화방송국 개국(호출 HLKU, 출력 IKW) → 한국 최초 민간상업방송

07.07 부산 구덕공설운동장 시민 위안의 밤 67명 사망 참사 발생

09.01 부산 수영공항 개항

09.17 삼남지방에 태풍 "사라호" 엄습(부산지방 사망 28명 부상 5천명)

10.23 부산택시노조 일제히 파업쟁의

12.06 제1회 눌원문화상 시상식 거행

12.23 부산기독교 방송국 개국(호출부호 HLKP 주파수 1475KHz 출력 250W)

 

1960.

01.16 부산항 제7물양장 축조공사 완공

03.02 부산국제고무공장에 대화재 발생

03.15 마산에서 부정선거 규탄데모 발생(부산MBC 부정선거규탄 마산의거시위현장 중계)

03.20 범일동 국제고무공장 대화재

03.24 3·15 부정선거 규탄 부산 학생 1천여명 데모 참가

03.29 경남지사 愼道晟 사표 제출

03.30 일본 오오무라(大村)수용소 억류 재일동포 344명 부산항 귀환

04.19 정부, 5대도시(서울·부산·대전·대구·광주) 비상계엄령 선포

04.24 부산·대구 3·15 부정선거 데모 격렬

04.25 부산시장 裵上甲 사표 제출

04.26 이승만 대통령 下野 성명

05.03 부산 수용소 억류 일본인어부 28명 석방

05.06 신임 李基周 경남지사 취임

05.10 부산시장 裵上甲 이임

05.14 부산 택시 총파업

05.16 부산시장 李瑾鎔 취임

05.29 이승만 대통령 하와이 망명

06.18 부산라이온스클럽 창립

10.30 부산밀수 깡패 100명 경관 납치구타 사건 발생

12.01 한일 정기 해상항로 해방 이후 첫 취항

12.12 도의원 선거 실시

12.19 전국 시·읍·면의원 선거 실시

12.24 해양대학 실습선 반도호 명명식

12.25 국제시장에 대화재 발생(234개 전포 소실)

12.26 전국 시·읍·면장 선거 실시. 부산시장 李瑾鎔 이임-金種圭 취임

12.29 특별시 및 도지사 선거 - 경남지사 李基周 선출

 

1961.

01.27 부산항 하역노동자 파업으로 부산항 마비

02.16 제3대 부산시 교육위원회 교육감 姜三滎 취임

03.20 부산시 동장선거 일제히 실시

05.05 용두산공원 어린이 헌장비 제막

05.16 군사쿠데타 발생

05.17 행정사무를 軍에 이양

05.18 장면 내각 총사퇴

05.23 상공회의소 해산

05.24 부산시장 金鍾圭 이임

05.25 신임 군정 부산시장 卞在甲 취임

07 용두산공원내 4.19혁명탑 건립

06.16 부산 수산센터 착공

08.14 부산 영주터널(640m) 준공 - 현 부산터널(9. 15 개통)

10.02 부산지방해무청→ 부산지방해운국으로 개칭

12.04 부산사범 → 부산교육대학 승격

 

1962.

01.01 연호를 단기를 서기로 바꿈(1961.12.2 공포)

02.19 경남공무원교육원 개원(양정동)

03.01 부산교육대학 개교

04.20 부산시장 卞在甲 이임 金玄玉 취임

05.01 부산 해안경찰대 발족. 괴정동 판자촌 화재발생(건물 48채 전소)

05.18 경남도 문화재 보존위원회 발족

05.20 제1회 도민체육대회 개최(구덕운동장)

05.25 부산일보, 부산문화방송, 한국문화방송(서울), 부일장학회 운영권을 5.16 장학재단에서 인수

05.31 부산시기 제정

07.20 부산시사편찬위원회 발족

08.15 부산시민헌장 제정

08.24 서면 어린이회관 개관

09.20 부산시 부두지구 정리사업 본격적으로 착수

11.12 부산시립교향악단 창립

11.13 제80차 최고회의 상임위원회에서 부산직할시 설치(안) 통과

12.01 정부 직할시 승격 경축기념식 거행

12.18 브라질 이민단 17세대 91명 처음으로 부산항 출항

12.25 서면로터리 부산탑 기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