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화재 2023년 가을,겨울호에 실린 조선시대의 학교 교육의 근본을 인재의 기름( 養士)라고 기술하였다. 학교 교육에 대한 조상의 지혜를 관심있는 네티즌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아래와 같이 전문을 실어 소개하고자 한다.
[2023 가을, 겨울호-학교 조선시대]
조선 시대의 학교, 양사(養士)와 함께 성학(聖學)을 추구하다
- 『증보문헌비고』 권202, 「학교고(學校考)」 1
「학교고」의 앞에 있는 「선거고」 서문에서는 ‘먼저 가르치고 뒤에 뽑아서 쓴다.’고 하였다. 일찍이 김부식(金富軾, 1075-1151) 또한 “학교는 현재(賢才, 뛰어난 인재)를 기르는 곳이니, 때를 기다린 뒤에 쓸 수 있는 것이다.”[『동문선』 권31, 하행국학표(賀幸國學表)]라고 하였다. 둘 다 학교를 통해 먼저 가르치거나 기른 다음, 적절한 때에 과거를 통해 뽑아서 쓴다는 취지의 말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인재 양성은 학교의 보편적 기능 가운데 하나였다고 할 수 있는데, 특히 학교 제도가 과거(科擧)라는 취사(取士) 제도와 긴밀히 연계되어 운영되는 시대에는 학교의 인재 양성 기능이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학교고」의 서문에서 ‘학교는 양사를 근본으로 한다.’고 단언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 제도는 크게 문과(생원·진사시 포함)와 무과, 잡과로 구성되어 있었다. ‘뽑아서 쓰는’ 취사 제도가 이렇게 되어 있었다면 ‘먼저 가르치는’ 양사 제도 또한 그에 상응하여 구성되어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예컨대 문과에서 뽑아 쓰려는 문관을 기르는 학교, 즉 유학(儒學)이 있어야 할 것이고, 무과와 잡과에서 뽑아 쓰려는 인재를 기르기 위해서는 무학(武學)과 잡학(雜學)을 두는 게 순리라는 말이다. 「학교고」의 서문에서는 “우리나라에 학교가 있은 지는 오래되었다. 신라·고려 때는 대개 자세히 기술할 수 없으나, 우리 조선조에는 더할 수 없이 성하였다.”고 하였다. 과연 그러한지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유가가 꿈꾸는 학교 교육의 이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예기』의 「학기편(學記篇)」에서는 “옛날의 가르침은 가(家)에는 숙(塾)이 있었고, 당(黨)에는 상(庠)이 있었으며, 주(州)에는 서(序)가 있었고, 국(國)에는 학(學)이 있었다.”고 하였다. 한 집안이나 가까운 이웃의 아이들이 함께 공부하는 글방인 가숙(家塾)에서 출발하여 점차 그 범위를 넓히고 수준을 높여 당상(黨庠)과 주서(州序)가 있고, 나라의 수도에는 최고학부인 국학(國學)을 두는 것, 이것이 유가가 이상으로 삼았던 학교 체제이다. 적어도 유학(儒學)에 관한 한, 조선 시대에는 바로 이 유가의 이상에 가까운 학교 체제가 갖추어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유학 교육체제의 정점에는 최고학부인 성균관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서울의 사부학당(四部學堂)과 전국 각 고을의 향교(鄕校)가 있었다. 이들이 이른바 관학(官學)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된 유학(儒學) 생도 정원을 보면, 서울의 성균관과 사부학당에는 200명과 400명(학당마다 100명)의 생도가 배정되었다. 전국 329개 고을의 향교에는 부·대도호부·목에 90명, 도호부에 70명, 군에 50명, 현에 30명씩의 생도가 배정되었다. 전국 향교의 생도 정원은 모두 15,070명이었다. 이에 따라 『경국대전』 상의 유학 생도 정원을 모두 더하면 15,670명에 이른다. 적어도 『경국대전』이 완성되는 성종 7년(1476년) 무렵까지 서울과 지방에는 이와 같은 유학 교육체제가 구축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관학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서원(書院)이라는 사학(私學)이 등장하여 기존의 관학 위주 학교 체제를 보완해 나갔다.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은 조선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賜額, 임금이 서원의 이름을 적은 현판과 함께 서적, 토지, 노비 등을 하사하는 것)을 청하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 국학(國學)이나 향교(鄕校)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성곽 안에 있어서 한편으로 학령(學令)에 구애되고 한편으로 과거(科擧) 등의 일에 유혹되어 생각이 바뀌고 정신을 빼앗기는 것과 비교할 때 그 공효를 어찌 동일 선상에 놓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관점에서 말하자면 틀림없이 서원이 국학이나 향교보다 나을 것입니다.
- 『퇴계집』 권9, 상심방백(上沈方伯)
퇴계가 장담한 대로 이후 조선 시대 전 시기에 걸쳐 417개 소의 서원, 492개 소의 사우(祠宇)가 세워졌고, 이 가운데 서원이 200개 소, 사우가 70개 소 사액을 받았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원’ 항목 참조).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광여도(廣輿圖)를 보면 당시 안동부(安東府)에는 삼계서원(三溪書院), 도연서원(道淵書院), 물계서원(勿溪書院), 주계서원(周溪書院), 경광서원(鏡光書院), 구계서원(龜溪書院), 호계서원(虎溪書院), 병산서원(屛山書院), 노림서원(魯林書院), 청성서원(淸城書院), 묵계서원(.溪書院) 등 10곳이 넘는 서원이 포진해 있었다. 읍치(邑治) 지역에 향교 한 곳만 있던 때를 떠올려 보면 서원이 기존의 관학 위주 학교 체제를 얼마나 크게 보완하였는지 실감하게 된다. 조선 후기에 보편화하는 향촌 서당 또한 학교 체제의 밑바탕을 튼튼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리 동네 글방’이라 부를 만한 가숙 형태의 기초 교육기관인 향촌 서당은 양반 사족이나 부유한 평민층이 집안에 숙사(塾師)를 초빙해 자제들을 가르치는 형태도 있었고, 동네에서 공동으로 숙사(塾舍)를 마련하고 훈장을 초빙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훈장 개인이 생계를 도모하기 위해 직업적으로 생도를 모아 가르치는 경우나, 한 명의 훈장이 여러 서당을 순회하며 가르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후기 서울에는 중인, 심지어 노비 신분의 훈장이 운영한 서당이 크게 인기를 끌기도 하였다.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 중인계층들이 송석원에서 결성한 문학단체)를 이끌었던 여항시인 천수경(千壽慶, ?-1818)이 노모 봉양을 위해 동리의 아이들을 모아 가르쳤던 서당은 나중에 배우는 아이가 300명까지 늘어나기도 하였다. 성균관 동북쪽 송동(松洞)[현재의 서울과학고등학교 자리]에 성균관 수복(守僕) 정학수(鄭學洙)[윤기(尹., 1741-1826)의 『반중잡영』에서는 정조윤(鄭祚胤)이라 함]가 운영한 서당은 학도가 100여 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현재 조선 후기 서당의 숫자는 정확히 산출하기 어려운데, 참고로 1911년 「조선총독부 통계연보」를 보면 전국에는 모두 16,540개의 서당에 141,604명(남 141,034명, 여 570명)의 학생이 공부하고 있었다고 한다[국가통계포털(https://kosis.kr)의 광복이전통계 참조]. 조선 후기에는 이보다 더 많은 서당에서 더 많은 학생들이 공부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 후기에는 면훈장(面訓長) 제도가 확산되고, 도 단위의 학교인 영학(營學)의 발전도 이루어진다. 학장(學長) 등을 면 단위 교육의 책임자로 두는 제도는 임란 이전에도 시행된 적이 있지만 「권학절목」의 반포(1732년, 영조 8년)와 함께 면훈장 제도가 전국에 확산되어 나갔다. 아울러 경상감영이 운영한 낙육재(樂育齋)를 비롯하여 전라도의 희현당(希賢堂), 평안도의 장도회(長都會), 함경도의 양현당(養賢堂), 황해도의 사황재(思皇齋) 등 도 단위 학교인 영학(營學)이 전국 여러 곳에 세워졌다.1 이렇게 하여 조선 시대에는, 적어도 유학의 경우 오래전부터 유가가 꿈꾸어 왔던 이상에 근접하는 학교 체제가 구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학 이외에 무학·잡학도 있었다 조선은 개국 초부터 ‘문과 무는 어느 한쪽만 폐할 수 없다(文武不可偏廢)’는 문무병중(文武竝重)의 원칙을 표방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정례화되지 못했던 무과를 문과와 함께 식년마다 거행하는 것으로 법전에 명시하였고, 실제 그렇게 운영하였다. 무과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려면 이에 대비하여 무학(武學), 즉 무관을 양성하는 학교도 있어야 했다. 조선 전기에는 ‘군사의 시재(試才), 무예 훈련, 무경(武經) 습독(習讀)의 일을 맡는’ 서울의 훈련원(訓鍊院)이 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다 임진왜란 중에 “각도의 대도호부에 훈련원과 같은 무학을 설립하여 병사(兵士)를 양성하고 무업(武業)을 연마하라.”(『선조실록』 선조 28년 월 12일)는 무학 설치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실제로 경상도의 안동, 대구, 경주, 일선(一善, 선산), 전라도의 나주와 장성, 충청도의 청주와 충원(忠原, 충주), 강원도의 횡성, 평안도의 성천 등 전국 곳곳에 무학당(武學堂)이 설립되었다. 이들 무학당에는 무학제독(안동)과 무학교수(대구, 경주), 무제독(상주), 무학장(성천) 등의 이름으로 무학교수가 배치되었다. 그리고 성천의 무학사(武學祠)와 같이 무인의 표상이 될 만한 충의(忠義)의 인물들을 제사하는 무묘(武廟) 성격의 사당도 세워졌다. 이성심(2017), 조선 후기 도 단위 학교, 영학(營學) 연구, 「한국교육사학」 39-2. 법전에 무학의 정원에 관한 규정이 따로 존재하지 않아 무학 생도의 규모를 산출하기는 어렵다. 다만 조선 시대에 800회(또는 801회)의 무과 시험을 거쳐 배출된 28,246명의 무관 가운데는 전국의 무학당에서 무재(武才)를 기른 이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른바 잡학(雜學)은 전문기술 교육을 실시하던 학교들로서, 『경국대전』 상에 생도가 배정되어 있는 역학(譯學), 의학(醫學), 음양학(陰陽學), 산학(算學), 율학(律學), 화학(.學)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잡학은 사역원(司譯院), 전의감(典醫監)·혜민서(惠民署), 관상감(觀象監), 호조(戶曹), 형조(刑曹), 도화서(圖.署) 등 해당 분야의 실무를 담당하는 행정관서에서 직접 운영하였다. 당시에는 ‘군자불기(君子不器)’의 관념 때문에 잡학은 유자(儒者)의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세조 때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지금 문신들로 하여금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율려(律呂)·의약(醫藥)·복서(卜筮)·시사(詩史)의 7학(學)을 나누어 닦게 하는데, 시사야 본래 유자(儒者)의 일이지만, 그 나머지 잡학이야 어찌 유자들이 마땅히 힘써 배울 학(學)이겠습니까?”[『세조실록』 권34, 세조 10년(1464년) 8월 6일]라고 항변했다가 파직당하기도 하였다. 상층 지배계급의 홀대 속에서도 잡학은 조선 사회가 필요로 하는 여러 분야의 전문 인재를 길러내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참고로 『경국대전』의 생도 정원 규정을 보면, 서울의 잡학에는 모두 285명의 생도가 배정되었고, 지방에도 접경 지역의 역학(한학, 여진학, 왜학)에 생도 156명이 배정되었으며, 전국 각 고을에는 의학·율학 생도가 3,140명씩 배정되었다. 서울의 잡학 생도 285명과 지방의 잡학 생도 6,436명을 더하면 그 숫자는 6,721명이다.
조선의 설계자로 불리는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조선경국전』에서 “학교는 교화의 근본이다. 여기에서 인륜을 밝히고, 여기에서 인재를 양성한다.”(『조선경국전』 상, 예전, ‘학교’)고 하였다. 인재 양성과 함께 인륜을 밝히는 것을 학교의 중요한 사명으로 들고 있는 것이다. 정도전의 이러한 인식은 흔히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學校(학교)’의 어원으로 이용하곤 하는 맹자(孟子, BC 372-289 추정)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상(庠)·서(序)·학(學)·교(校)를 설치하여 그들을 가르칠 것입니다. 상(庠)은 기른다는 뜻이고, 교(校)는 가르친다는 뜻이며, 서(序)는 활을 쏜다는 뜻입니다. 하나라에서는 교(校)라 하였고, 은나라에서는 서(序)라고 하였으며, 주나라에서는 상(庠)이라고 하였고, 학(學)은 삼대(三代)가 공유하였으니, 그것은 다 인륜(人倫)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맹자』, 「등문공장구-상」
맹자가 학교의 본질로 강조하는 ‘인륜을 밝히는 것’, 명인륜(明人倫)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인륜(人倫)’에 대해 설명하는 곳을 찾아보면,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후직(后稷)이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고 오곡을 심어 가꾸게 하자, 오곡이 익었고 백성들은 그것을 먹고 자신을 기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도리(道理)가 있으니,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고 편안히 머물면서 가르침이 없으면 금수와 가까워진다. 성인이 이를 근심하여 설(契)을 사도로 삼아 인륜(人倫)을 가르치게 했으니,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친애함이 있고,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리가 있고, 부부 사이에는 분별이 있고,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가 있고, 친구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 『맹자』, 「등문공장구-상」
맹자에 따르면, 의식주의 문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사람에게는 도리, 즉 인도(人道)가 있고, 그 핵심이 바로 인륜이다. 이 인륜을 통해 사람은 참으로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된다. 일찍이 성인이 다스리던 세상에서 스승을 두어 백성들에게 가르친 그 사람다움의 길이 바로 다섯 가지의 인륜, 오륜(五倫)이다. 조선은 맹자의 이러한 뜻을 받들어 성균관·향교의 학당에 ‘명륜당(明倫堂)’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학교는 인륜을 밝히는 ‘명인륜’의 장소임을 천명한 것이다.
(우) 서당, 『단원 풍속도첩』, 김홍도, 국립중앙박물관.
「학교고」의 서문에서는 ‘양사’가 학교의 근본이라고 하였지만, ‘묘학(廟學)’의 구조를 띤 성균관·향교에서 차지하는 문묘(文廟)의 특별한 위상을 통해 우리는 조선 시대의 학교가 추구한 또 다른 이상을 마주하게 된다. 조선 전기의 문신 성간(成侃, 1427-1456)은 「성균관기(成均館記)」에서 조선의 국학(國學)인 성균관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우리 태조께서 즉위하신 아무 해에 국학(國學)을 동북쪽 모퉁이에 설립하였는데, 그 경영·설계와 규모·제도가 모두 마땅하게 되어 하나도 완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대략을 들면 남으로 묘(廟)를 만들고 묘의 좌우에 무(.)를 두어 묘에는 선성(先聖)을 제사하고, 무에는 선사(先師)를 제사하는 것이 나라의 옛 전통이다. 동에 정록소(正錄所)를 만들고, 그 남으로 주방을 만들고, 또 그 남으로 식당을 만들었다. 묘(廟)의 북쪽 양옆으로 장랑(長廊)을 만들고, 낭(廊)의 북쪽에 그 터를 돋우어 좌우로 협실을 두고, 중간은 청을 만들어 선생과 제자가 강학하는 장소를 만들었으니, 이를 명륜당(明倫堂)이라 이른다. 성균관의 옥(屋)이 대소를 합하여 무릇 96칸인데, 유독 이 명륜당이 성묘(聖廟)와 더불어 가장 높아 치목(治木)도 정하고 구조도 견고하며, 우뚝하고 높으며 찬란하고 새롭다.
- 『동문선』 권82, 기(記), 성균관기(成均館記) 중
기문에 잘 나타나 있듯이, 성균관의 남쪽에는 선성(先聖) 공자를 모시는 대성전(大成殿)과 여러 선사(先師)들을 모시는 동·서 양무(兩.)가 있다. 이곳이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공자를 비롯하여 유교의 여러 성현을 모신 사당인 문묘이다. 그 문묘의 북쪽에 선생과 제자가 강학하는 공간으로 명륜당(明倫堂)과 동·서 양재(兩齋)가 있다. 성균관에는 모두 96칸에 이르는 많은 건물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우뚝하고 높은 두 건물이 바로 성묘(聖廟)와 명륜당이다. 이렇게 문묘와 학당을 양대 구조로 하는 유교식 학교가 ‘묘학(廟學)’이다. 조선 시대에 성균관과 전국의 모든 향교는 이러한 묘학의 구조로 지어졌다. 서원도 기본구조는 이와 비슷하였다. 묘학의 구조를 띤 유교식 학교에서는 문묘가 위계상 윗자리에 배치되는 것이 원칙이다. ‘반궁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성균관은 앞쪽(남쪽)에 문묘가 있고, 뒤쪽(북쪽)에 학당이 있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구조를 띠고 있다. 그것은 평지의 경우 앞쪽(남쪽)이 윗자리이기 때문이다. 향교의 경우 야트막한 야산의 산기슭 경사지에 위치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에는 학당이 앞쪽(아래쪽)에 있고, 문묘가 뒤쪽(위쪽)에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구조를 띠게 된다. 경사면에서는 높은 곳인 뒤쪽이 윗자리이기 때문이다. 일부 향교는 좌묘우학(左廟右學)이나 우묘좌학(右廟左學)과 같은 배치구조를 보이기도 하는데, 어떤 경우에도 묘학의 구조에서 문묘는 위계상 윗자리에 배치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묘학의 구조에서 문묘가 윗자리에 배치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교식 학교에서 문묘는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성리학의 집대성자인 주희(朱熹, 1130-1200)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가에서 옛 도를 상고하여 제사하도록 하되 선성(先聖)과 선사(先師)를 학교에서 제사하게 하는 것은 대개 장차 이로써 도통(道統)이 있음을 밝히고 세상의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향해 가 도달하고자 해야 하는 바가 있음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 『주희집』 권80, 신주주학대성전기(信州州學大成殿記)
주희가 얘기한 것처럼, 문묘는 도통의 상징이다. 그리고 문묘가 학교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한 집안에서 가묘(家廟)가, 한 나라에서 종묘(宗廟)가 갖고 있는 의미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신줏단지 모시듯 한다.’고 하는 것처럼, 가통(家統)의 상징인 가묘는 한 집안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이다. 그곳에 모셔진 선조(先祖)들은 지금의 우리에게 생명을 부여한 분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묘·사직이 흔들린다.’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왕통(王統)의 상징인 종묘(宗廟)는 국가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그곳에 모셔진 선왕(先王)들이 이 나라와 이 백성이 있게 한 분들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도통의 상징인 문묘는 학교의 근원이자 중심이다. 그곳에 모셔진 선성선사가 아니었다면 유학이라는 학문도 없고 그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학교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주희는 또한 문묘에 모셔진 선성선사가 세상의 배우는 자들이 ‘향해 가 도달하고자 해야 하는 바’라고 했다. 참된 공부는 선성선사를 사표(師表)로 삼아 그분들과 같은 성현(聖賢)이 되고자 하는 학위성인(學爲聖人, learning to be a sage)의 공부, 즉 성학(聖學)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선성선사의 학문과 사상이고, 배우는 자들은 그것을 통해 선성선사와 같은 이상적 인격을 추구한다. 이 때문에 ‘누구를 문묘에 모시느냐’의 문제는 곧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배울 것인가’의 문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조선 시대에 남송의 진덕수(陳德秀, 1178-1235)와 원의 허형(許衡, 1209-1281) 이후 어떤 중국 학자도 문묘에 더 종사하지 않고 오직 우리나라 학자들로 유학의 도통을 이어간 사실은 자못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국조오례의』, 『춘관통고』 등의 전례서에 잘 나타나 있는 것처럼, 조선 시대의 문묘에서는 다양한 향사 의례가 거행되었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삭망분향(朔望焚香)이 이루어졌다. 성균관의 「학령」 제1조는 “매월 초하루에 모든 유생은 관대를 갖추고 문묘(文廟)로 가 참배하며 사배례를 행한다.”고 되어 있지만, 문묘의 망제(望祭)가 태종 9년(1409년)에 회복되었기 때문에 실제 유생들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 새벽에 문묘를 참배하였다. 또한 임금의 시학(視學)이나 왕세자의 입학(入學) 등 특별한 때에는 선성선사의 신위 앞에 술잔을 올리고 절하는 작헌례(酌獻禮)를 행했다. 그리고 매년 봄(2월)·가을(8월) 첫 번째 정일(丁日)에는 석전(釋奠)이라는 큰 제사를 올렸다. 석전 때에는 3일 전부터 ‘경건한 재계에 들어가며(入淸齋)’ 전날에는 예행 연습을 실시하였고, 유생들은 다양한 역할을 맡아 제례에 참여하였다. 문묘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향사 의례는 유생들에게 명륜당에서 독서하는 것 못지않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들에게 ‘제향(祭享)’과 ‘강학(講學)’은 별개가 아니었다. 문묘 향사 의례에 참여하면서 유생들은 자신들이 제사드리고 있는 대상인 선성선사들처럼 되고자 하는 희성희현(希聖希賢)의 꿈을 꾸게 된다. 그리고 자신들이 하고 있는 공부의 궁극적 목적이 선성선사와 같은 성현이 되는 데 있음을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그런 마음으로 제사를 마치고 명륜당으로 돌아가 학문에 정진하게 되면 유생 자신도 언젠가 타의 모범이 되는 학행을 이루어 도통의 반열에 오르는 영광을 얻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신라의 설총(薛聰, 655- ?)에서 조선의 박세채(朴世采, 1631-1695)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열여덟 학자들처럼…. 퇴계 이황의 다음 글에도 이러한 뜻이 담겨 있다.
사우(祠宇)를 보면서 스승을 생각하며 벗들과 더불어 학문에 정진한다. 천 길 높은 산은 무너지지 않으니, 높이 이룬 자는 입실(入室)하고 승당(升堂)하여 성현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며, 낮게 오른 자라 할지라도 길인수사(吉人修士)는 될 수 있을 것이다.
- 『퇴계집』 권42, 「영봉서원기(迎鳳書院記)」
출처: 월간문화재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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