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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 이야기

전통 옷감을 평생 짜는 여성들 - 명주짜기 조옥이

위대한 문화유산 <한국문화재재단의 무형문화재이야기>편에서 각 분야별로 등록된 장인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중 옷감 분야의 길을 한평생 걸어 온 여성장인들을 소개합니다.

전통 옷감을 평생 짜는 여성들 - 명주짜기 조옥이

 

 

 

1920. 5. 27 ~ 2007. 10. 30 | 보유자 인정: 1988년 5월 27일

 

 

위대한 문화유산

한국문화재재단의 무형문화재이야기

명주짜기 조옥이

 

국가무형문화재 명주짜기

Master Artisan of Silk of Weaving

큰 냇물 건너가서 쑥대밭을 쫓아내어

한쪽에는 뽕을 심고 한쪽에는 목화심어

뽕잎일랑 누에치고 목화송이 솜을 타서

고치고치 새고치를 오리오리 잦아내어

모슴모슴 뽑아내어 무명 명주 짜내보세

명주 한 필 매어노니 베틀 연장 전이 없네

- 두리실 명주짜는 베틀노래 (경북 성주군 용암면 본리)

 

 

누에고치에서 태어나는 실, 명주

명주는 누에고치에서 실을 자아 베틀 위에서 짠 무늬가 없는 비단의 일종이다. 일반적으로 비단은 실의 종류, 올의 굵기, 무늬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데, 명주는 그중에서도 누에고치에서 풀어낸 견사(絹紗)로 짠 무늬가 없는 평직 직물이다. 우리나라의 양잠은 그와 관련된 기록이 고조선 때부터 나타날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신라시대에는 정교한 직물을 당나라에 보내기도 하였을 정도로 섬세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보다 질이 좋은 견직물이 생산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종류가 다양해서 색과 품질로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 중 명주가 가장 많이 생산되어 일상적인 옷감재료로 사용되었다. 제작방법과 제작상태, 산지와 원료 등에 따라 각기 달리 불리다가 근래에 명주라는 이름으로 통칭하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태종 연간부터 누에씨를 국가에서 공급하는 등 누에고치를 개량하여 얇고 가는 명주를 짜 중국에 조공품으로 연간 만필 정도를 보낼 정도로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옷감을 짜는 장인 중 무늬를 넣어 짜는 장인인 능라장은 상의원에, 무늬가 없는 직물을 짜는 방직장은 제용감에 소속되어 있었다. 근대기에 나일론이 발명되고 방직공장이 세워지면서 전통 직물을 짜는 기술은 쇠퇴했다. 특히 누에를 키우고 명주를 짜는 기술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여 1988년 국가에서는 국가무형문화재 종목으로 명주짜기를 지정하였다. 당시 전국에서 경상북도 성주군 두리실의 안동 권씨 마을에서만 뽕나무를 재배하고 명주를 짜는 전통 기술이 남아 있었다. 이때 권씨댁 맏며느리인 강석경 선생은 나이가 많아 대신 둘째 며느리인 조옥이 선생을 보유자로 인정하였다.

 

 

생이별한 남편을 기다리며 밤낮으로 베를 짜다

명주 짜기의 고향은 경상북도 성주이다. 조옥이 선생은 열아홉 살에 안동 권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안동 권씨 집안은 대대로 아낙들에게 밭일을 시키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여인네들은 집안에 틀어박혀 길쌈에 매달렸다. 안동 권씨 집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이름난 길쌈꾼들이 많이 나왔다. 조옥이 선생의 시어머니 홍남이 선생이 그렇고, 큰동서 강석경 선생도 전승공예대전에서 솜씨를 자랑하던 베짜기 장인이었다. 그뿐 아니라 조옥이 선생의 넷째 동서 백문기 선생도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무명짜기 기능보유자이며, 다섯째 동서인 이규종 선생(명주짜기 명예보유자)도 조옥이 선생의 뒤를 이어 베틀 인생을 살아왔다.

 

조옥이 선생은 열아홉에 시집을 가서 그 이듬해 젖먹이 딸 하나를 둔 상태에서 남편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남편이 일본으로 돈을 벌러 떠난 후 소식이 끊겼다. 여러 해 지난 후 선생의 남편은 만주 등지를 떠돌다가 전염병으로 객사하였다고 한다. 조옥이 선생의 명주짜기는 길쌈으로 낙을 삼고 이제나 저제나 남편이 오기를 기다리며 한숨짓던 평생의 업이었다. 남편도 없는 시집에서 선생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집안 살림을 돌보고, 밤낮으로 베를 짜는 일 뿐이었다. 길쌈으로 생계를 꾸리기 위해서는 정성들여 만든 명주를 내다 파는 일도 베짜기 못지않게 중요했다.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새벽같이 봇짐을 이고 장터로 향했다. 장꾼들에게 애써 지은 명주를 내놓으면 조옥이 선생의 명주는 가장 먼저 동이 났으며, 값도 가장 잘 쳐주었다. 그만큼 솜씨가 좋았던 것이다.

1988년 국가무형문화재 명주짜기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으며, 2006년 명예보유자로 인정되었다가 2007년 노환으로 별세했다. 조옥이 선생의 뒤를 이어 막내 동서인 이규종 선생이 전승교육사로 활동하다 2020년 명예보유자로 인정됐다.

 

작품

명주, 조옥이, 35cm

조옥이 선생의 베를 짜는 솜씨는 성주 시내에 소문이 나서 선생이짠 명주를 서로 탐을 내고 사 가려고 주문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밤낮으로 베를 짜서 오일장이 설 때마다 시장에 나가면 “베가 곱다”면서 서로 웃돈을 주고 사가서 밤낮으로 베틀에서 베를 짜기에 바빴다고 한다. 특히 명주의 경우 열넉새나 보름새로 짜서 매우 곱고 치밀하게 짜는 솜씨가 필요하기 때문에 선생처럼 섬세하고 차분한 성격에 어울리는 작업이었다.

 

 

작업도구 및 제작과정

명주를 짜는 순서는 1)실 써기(製絲)와 2)실내리기(解絲), 3)날실 걸기(整經), 4)풀 먹이기(加糊), 5)베 짜기(織造)의 순서로 진행된다. 명주를 짜기 위해서는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을 뽑아내야 한다. 이렇게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고[실 써기], 그것을 가락에 내려 감는 [실 내리기] 과정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제작과정이다. 다 자란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기 위해 ‘자새’와 ‘왕쳉이’(물레의 경상도 사투리)를 준비한다. 마당과 마루 사이에 화로를 마련하여 솥을 건 다음 물을 팔팔 끓여 뜨거워진 물에 고치를 가득 넣고 삶으면서 놋젓가락으로 휘젓는다. 왼손의 젓가락에 몇 가닥의 고치실이 걸려 올라오면 일정한 두께의 실을 건져 자새에 걸어 꼬면서[合絲], 오른손으로 왕쳉이를 돌리면 명주실이 만들어진다. 이것이 ‘실 써기’ 과정이다. 이렇게 고치에서 뽑아낸 명주실을 광주리에 사려 담고, 실끝을 ‘물레’에 건 다음 오른손으로 물레를 돌려 실을 잣는다. 물레질이 끝나면 ‘돌것’에 타래실을 걸어 일정한 속도로 돌리면서 ‘가락’에 내려 감으면 ‘실 내리기’가 끝나게 된다. 그 밖의 나머지 과정은 삼베나 모시베나 무명베를 짜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ASMR] 국가무형문화재 제87호 명주짜기

 

 

 

 

약력

  • 19205월 출생
  • 1986~1992전승공예대전 출품
  • 19885월 국가무형문화재 명주짜기 기능보유자 인정
  • 1988~2007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 작품전 출품
  • 20064월 명예보유자 인정
  • 200710월 노환으로 별세
  • 글 이치헌 / 한국문화재재단
  •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갤러리

Previous

 

 

조옥이 선생이 짠 무명

 

명주(1)

 

명주(2)

 

명주(3)

 

선생의 낙관

 

조옥이 선생의 모습

 

조옥이 선생이 짠 무명

 

명주(1)

 

출처: 한국문화재단

문화유산이야기 - 자료/연구 - 한국문화재재단 (chf.or.kr)

한국문화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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