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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 이야기

전통 옷감을 평생 짜는 여인들-한산모시짜기 방연옥

위대한 문화유산 <한국문화재재단의 무형문화재이야기>편에서 각 분야별로 등록된 장인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중 옷감 분야의 길을 한평생 걸어 온 여성장인들을 소개합니다.

 

전통 옷감을 평생 짜는 여인들-한산모시짜기 방연옥

 

발행일 : 2021-01-21조회수 : 3460

1947. 12. 16 ~ | 보유자 인정: 2000년 8월 22일

위대한 문화유산
한국문화재재단의 무형문화재이야기
한산모시짜기 방연옥

국가무형문화재 한산모시짜기
Master Artisan of Hansan Ramie Weaving Holder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 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 나가 구름 위에 나부낀다.

제비도 놀란 양 나래 쉬고 보더라.

- 김말봉 작사, 금수현 작곡의 가곡 <그네> 중

여인네들의 땀과 피와 침과 눈물로 완성되는 천년명품 한산모시

우리나라 직물의 역사상 마직물은 견직물과 함께 가장 오래전부터 의료로 사용되어 왔으며 특히 모시는 천연섬유 가운데 우리나라를 알리는 질 좋은 특산물로서 해외로부터 호평을 받아 왔다. 이는 우리나라가 우수한 모시를 생산할 수 있는 자연 풍토적 여건을 가지고 있으며 모시를 제직하는 기술면에 있어서도 인근의 중국과 일본, 그리고 동남 아시아 등의 타지역 모시 생산 국가들에 비해 차별화된 기능과 여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대 우리나라 저마 직물의 제직에 대한 문헌 기록은 『중국정사조선전(中國正史朝鮮傳)』에 나타난 기록이 가장 오래된 사료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우리나라 마직물 재배와 제직의 역사는 부족연맹국가시대에 이미 한반도 전역을 포함한 북방의 부여, 옥저, 동예에 이르기까지 널리 보급되었고 당시의 마직물은 여름용 의료로써 남녀 외출용 겉옷이나 여자들의 일상복으로 많이 보편화되었으며 제직 기술면에 있어서도 폭이 넓고 섬세한 마직물을 제직하였을 정도로 이미 그 기술이 우수하였다.

한산모시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 지역에서 생산되는 저마(苧麻) 껍질을 쪼개고 이은 실로 짠 우리나라 여름철 직물이다. 특히 한산의 모시는 ‘밥그릇 하나에 모시 한 필이 다 들어간다.’는 말이 생길 만큼 가늘고 곱기로 유명하다. 모시풀은 다년생 식물로 보통 1년에 3번 정도 수확하는데 수확 시기가 이르면 섬유가 약하고, 늦으면 올이 굵고 거칠기 때문에 8월 초순에서 하순 사이에 수확하는 모시가 제일 좋다. 타지역 모시와 구별되는 한산지역의 모시짜기 특성은 토양과 기후, 지세를 바탕으로 생산된 모시풀의 질과 제직 기술면에서 우수성을 갖는다. 세저포(細苧布 ), 광폭세포(廣幅細布), 문저포(紋苧布), 사저포(紗苧布), 저포교직(紵布交織)의 측면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다.

  • 세저포 : 머리카락보다도 곱게 짜여진 모시로 삼국시대는 30~40승까지 제직되었으며 고려시대는 20승포, 조선시대는 15승포까지 제직되었다. 모시의 승수는 천의 폭이 넓으면 승수가 높아지므로 당시 천의 폭을 알지 못하면 모시의 섬세함의 정도를 추측하기 어렵다. 오늘날 한산모시의 포폭은 대개 29~36cm이며 보통 최고로 곱게 짤 수 있는 것이 12승 모시라고 한다.
  • 광폭세포 : 폭을 넓게 해서 짜서 만든 모시로 삼국시대 문헌기록에 나타나며 당시 예측되는 천의 폭의 범위는 50cm 내외, 또는 60~78cm 내외로 추측된다. 광폭의 모시는 고려시대 모시이며 현재 한산지역에서는 62cm까지 제직하고 있다.
  • 문저포 : 고려시대 문헌기록에는 나타나나 현재까지 유물이 없으므로 그 제직법을 잘 알 수는 없으나 고려후기 직물 중에 화문(花紋)으로 된 생초 직물처럼 사직과 평직으로 교차된 형태로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 사저포 : 사직(紗織)으로 짠 고급모시로 추정되며 중국의 공물로 보낸 물품 중에 사저포 공평포 등이 있었다. 당시 사직으로 짠 견직물처럼 동일한 기법으로 제직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저포교직 : 저마교직(苧麻交織), 사저교직(絲苧交織), 면저교직(綿紵交織) 등 모든 다른 천연섬유와 교직을 행하여 왔다. 일반적으로 사저교직은 경사올을 견사로 짜고 위사올을 저사로 짰으며 면저교직은 “춘사”라 하며 주로 경사올을 면사로 하고 위사올에 저사를 넣어서 짰다.

화학섬유가 판을 치는 오늘날에도 모시의 희소가치가 여전히 높은 것은 인조섬유가 범접하기 어려운 장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스피드와 효율을 지향하던 산업화의 시대가 지나고 근래 삶의 가치에 주목하게 되면서 모시는 다시 미래형 섬유의 하나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모시와 다른 섬유를 교차 직조하여 만든 천이 기능성 섬유로 활용되는 등의 상황은 모시의 저력을 쉽게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산모시짜기 기능은 1967년 국가지정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201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500년 역사를 지닌 한산모시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방연옥 선생

국가무형문화재 한산모시짜기 기능보유자 방연옥 선생은 1947년 12월 16일 충남 서천군 기산면 가공리 36번지 옹근절 마을에서 부친 방자순 선생과 모친 박수영 여사의 2남 6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선생이 모시 짜기를 처음 접한 것은 친정 어머니를 통해서였다. 어머니는 환갑이 넘어서까지 모시 짜기를 하였는데 선생이 모시 짜기를 배우려고 할 때마다 모시짜기기 정말 힘들다며 다른 일을 하라고 하며 못 배우게 하셨다. 러나 모시 짜기를 하는 어머니 등에 업혀 자란 선생은 자연스레 접하게 되었고 6살때부터는 바디 꿰기를 할 정도로 모시 짜기에 익숙해져 있었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숙제보다 모시 일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는데, 사실 한창 모시에 재미를 붙였을 때에는 학교 가서도 공부하는 것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모시 하는 것만 생각나곤 했다. 그래서인지 훗날 문정옥 선생께 모시 짜기를 전수받을 때 이미 어머니한테 배운 바가 있어 보다 쉽게 터득할 수 있었다.

선생의 나이 29살되던 1973년 한산면 지현리에 사는 이소직 선생과 혼인하였다. 한산면으로 시집와서 살던 중 우연한 기회에 동네에 사는 문정옥 선생을 만나 본격적으로 모시 짜기를 배우게 되었다. 문정옥 선생 댁에서 짬이 날 때마다 일을 도와드리던 중 문정옥 선생의 권유로 1980년부터 본격적으로 모시 짜기를 배우게 된 것이다. 1981년 생애 최초로 짠 모시 4필은 약 12만원을 받고 팔았다. 당시 쌀 2가마니에 해당하는 꽤 큰 금액이었다. 모시를 판 돈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생활비로 가정경제의 보탬이 되기도 하였다. 실을 입술로 찢어 모시섬유를 만드는 ‘모시째기’는 숙련도에 따라 품질이 좌우된다. 한산모시의 ‘숨은 비법’은 이 모시째기에 있다. 모시풀 껍질을 벗겨서 말린 다음 그것을 앞니로 쪼개는 과정은 입술이 다 부르트고 피가 날 정도로 매우 고단한 작업이다. 또한 여러 과정을 거쳐 베틀에서 모시를 짤 때도 건조한 날에는 모시가 다 바스러져서 기후가 안 좋다 싶으면 한여름에도 문을 다 닫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을 해야 한다. 그야말로 여인네들의 땀과 피와 침과 눈물이 고스란히 배어야 하나의 명품으로 완성되는 것이 한산모시이다.

선생역시 처음 모시 째기를 할 때 입술이 부르트고 피가 나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였다. 나중에는 입술에 굳은살이 박힐 정도라고 했다. 또한 모시를 쪼개려면 앞니를 이용해야 하는데 이때 불편함이 없도록 한산지역에서 모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치과에서도 불편함이 없도록 신경을 쓴다고 한다. 모시 일을 하면서 온몸이 파스 투성이, 입술에 굳은살이 생겼고, 일하기 편하게 이도 새로 해 넣었다. 그렇게 30년을 꼬박 온몸을 혹사시켜왔다. 문정옥 선생으로부터 모시 짜기를 배우면서 모시 짜기 전 과정을 습득하게 되었다. 1980년 전수장학생이 되었고 1986년 이수자로 인정되고, 1987년 전수교육조교가 되었다가 2000년 8월 국가무형문화재 한산모시짜기 기능보유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품질로 보나 들인 공력으로 보나, 모시는 서양에서 들어온 천과는 비교가 안됩니다. 모시 한필이면 전통한복 한 벌하고 남자 저고리 하나가 나오는데, 좀 비싼 듯해도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대도시 백화점의 명품 옷들에 비하면 착한 가격이지요. 모시옷은 대물림하며 입는 옷입니다.” 적삼과 치마 한 벌에 남자 윗도리 한 벌이 나오는 모시 한 필의 가격은 고운 세저는 150만원, 중저는 100만원, 막저는 그보다 훨씬 싸다.

“처음에는 비싸다고 하시는 분들도 만드는 과정을 보시면 비싸지 않다고 해요. 아토피를 전혀 일으키지 않는 천연섬유요, 모시를 완성하기까지 손길이 4000번이나 들어가는 명품입니다.”

한산 지역에 시집와서 이곳의 삶을 배웠고 모시를 짜왔다. 여인에서 여인으로 전수되던 전문화를 지켜 마침내 한산모시짜기 기능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이르렀다. 선생은 “이제 세계인의 전통이 된 만큼 기술을 배우는 후학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옛날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모시를 벗 삼아 오순도순 모여 일하면 참 좋겠다.”며 대대로 한산모시짜기의 명맥을 이어나갔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내비쳤다.

작품

백모시 / 30×2160cm

모시풀로 만든 직물을 모시라 하며 직조 후에 표백과정을 거친 것을 백모시라 한다.

생모시와 백모시 / 각 32×2160cm

경사와 위사 모두 저마를 사용하여 짠 것을 생모시라 하는데 까실까실하여 여름철 옷감으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옥색, 치자색, 분혹생 등으로 염색하여 사용하였다. 생모시를 표백한 것을 백모시라 하였으며 다듬이질을 하여 봄, 가을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제작과정

1) 태모시 만들기 : 모시나무를 베어 모시의 겉껍질을 벗기는 과정이다. 모시나무에서 겉껍질을 벗긴 후 다시 부드러운 속살만을 골라내는데, 낫과 같이 생긴 손가락 크기의 특수한 칼로 훑어서 겉껍질과 속살을 분리시킨다. 벗겨낸 속살을 한주먹의 다발로 묶어서 4~5회 물을 반복해서 적시며 양지에 말린다.

2) 모시째기 : 잘 말린 태모시를 이와 입술을 이용해 쪼개는 과정인데, 이때 모시의 굵기가 결정된다. 모시는 굵기에 따라 올의 굵기가 가장 가는 상저(세모시), 중간정도의 중저, 가장 굵은 막저로 구분한다. 따라서 모시의 품질은 바로 장인의 입술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모시는 보통 7새에서 15새(보름새)까지 짜는데 10새 이상을 세모시라고 하며, 숫자가 높을수록 상품으로 여긴다. 1새는 30cm 포폭에 80올의 날실로 짜여진 것을 말한다.

3) 모시삼기 : 모시째기가 끝난 모시는 “쩐지”라는 틀에 걸쳐 놓고 한 올씩 입술의 침을 이용해 이어붙인다. 한 주먹 정도의 모시 한 태래를 ‘한 굿’이라고 하는데 10굿 정도가 돼야 한 필의 모시를 짤 수 있다.

4) 모시날기 : 모시째기가 끝난 모시는 ‘조슬대’라는 틀에 매어 한필의 모시를 짤 만큼의 실을 감는다. 모시날기를 할 때 실이 엉키지 않게 잘 해야 모시를 잘 맬 수 있다.

5) 모시매기 : 모시날기가 끝난 모시를 모시짜기에 앞서 날실을 부드럽고 보푸라기가 생기지 않도록 콩풀을 먹이면서 모시베틀에 얹을 ‘도투마리’라는 틀에 감는 과정이다. 이때 왕겨불로 콩풀을 말리면서 작업을 한다.

6) 꾸리감기 : 모시는 날줄과 씨줄로 엮는다. 모시매기는 날줄로 쓸 모시원사이고, 씨실이 되는 실꾸리를 만들어서 북집에 끼워 넣는 작업 과정이다. 보통 7, 8승 정도의 모시 한 필을 짜는 데는 날실로 모시굿이 10굿이 필요하며 씨실에는 꾸리용 모시굿 8굿 정도가 필요하다. 이것을 실꾸리로 계산하면 모시 한 굿은 실꾸리 약 두 개 정도에 해당되므로 씨실에 필요한 실꾸리의 수는 모시의 곱고 섬세한 정도에 따라 약 10~16개가 사용된다.

7) 모시짜기 : 모시매기 과정을 거쳐 날실이 감긴 도투마리를 베틀의 누운 다리 위에 올리고 바디를 끼운 날실을 빼어 각각의 잉아에 번갈아 끼운다. 짜기를 할 때에는 베틀신대에 달려 있는 베틀신끈을 오른발의 끌신에 걸고 오른손에는 북을 쥐며 왼손에는 바디집을 잡아서 짤 준비를 한다. 모시가 짜여지는 원리는 끌신을 당기고 놓고 함에 따라 베틀신대가 고정되어 있는 원산이 눈썹대를 움직여서 사올과 잉아올을 교차시켜 주게 되므로 매번 날실이 교차될 때마다 씨실이 담긴 북집을 통과시켜 씨실을 걸어 주게 되므로 천이 짜여지는 것이다. 이 같은 과정이 계속 반복되면서 모시를 짜는데 도중에 날올이 마르면 준비해 둔 물소래기의 물로 중간중간 물을 축여가며 짜야 도중에 실이 잘 끊어지지 않는다.

8) 실 잇기 : 모시를 짜는 도중에 제일 힘든 것은 도중에 실이 끊어지는 일이다. 실이 잘 끊어지는 이유는 모시실의 질에도 문제가 있지만 습기가 부족해서 실이 건조하면 잘 끊어지게 된다. 실이 끊어졌을 때는 베틀 옆에 준비해 둔 잇기용 모시실과 눈썹끈에 붙여 둔 풀솜을 이용해서 실을 이어준다.

9) 표백하기 : 다 짠 모시는 흐르는 물이나 더운물로 대충 헹군 뒤에 콩즙을 빼기 위해 잿물에 1~2시간 정도 담궜다가 건져내고 더운물을 끼얹어가며 방망이로 두들겨서 콩즙을 깨끗이 빼내는데, 이렇게 한 모시를 반제라고 하며 생모시는 이것을 그대로 말려서 손질한 뒤 보관한 것이다. 생모시를 반쯤 표백한 것을 ‘반저’라 하고 완전히 표백한 것을 ‘백저’라 한다. 반저는 생모시의 연한 갈색에서 미황색을 지닌 색이며, 백저는 눈이 부시게 하얀 모시 본연의 독특한 특성을 가지는 흰색이다. 그해 옷을 지어 입지 않을 경우는 콩즙은 뺀 후에 풀을 하지 않고 잘 접어서 보관하고 염색을 할 경우엔 풀을 하기 전에 해야 하며 모시염색은 쌀겨나 쪽, 그리고 치자나 홍화 염색 등 색이 차분하고 은근한 천연염색을 많이 한다.

약력

  • 1947년출생
  • 1980년문정옥 선생 사사
  • 1982년~1986년전승공예대전 7~11회 입상
  • 1990년전승공예대전 장려상
  • 1993년전승공예대전 장려상
  • 1995년~1996년전승공예대전 19~20회 입상
  • 2000년전승공예대전 19~20회 입상
  • 2003년충청남도 공예품대전 특선
  • 2003년전국공예품대전 입선
  • 2004년서천군 공예품 및 관광기념품 경진대회 대상
  • 2000년~현재국가무형문화재보유자작품전 출품 및 전수활동
  • 글 이치헌 / 한국문화재재단 www.chf.or.kr
  •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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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_31x2160cm(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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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_31x2160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