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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 이야기

문과 급제에 이르는 길

[2023 가을, 겨울호-학교 조선시대]문과 급제에 이르는 길

작성자 : 관리자작성일 : 2024-01-02조회수 : 110
 
문과 급제에 이르는 길
조선 시대 문과는 문한(文翰), 학술, 교육 등을 담당할 문관(文官)을 선발하는 시험이었다. 유교국가의 특성상 문(文)을 숭상하고, 관료제도도 문관(文官)을 중심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무과나 잡과에 비해 특히 중시되었다. 국가는 경학(經學, 중국 유가 경전을 연구하는 학문)에 대한 이해와 문장의 제술 능력을 겸비한 인재를 배양하고 과거를 통해 선발하여 관료로 등용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이런 구도하에 문과의 시험 과목이 구성되었다. 양반 남성들은 문과에 급제하여 입신출세하고 가족과 가문의 영예를 드높이기를 요구받았다. 이에 따라 일상적인 교육 과정에 문과의 시험 내용이 반영되었다. 양반 가정에서는 과거가 일상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글 박현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부교수
김홍도의 안릉신영도(安陵新迎圖), 평안도 안주목사의 부임 행렬 중 기치(旗幟)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문과의 이상과 시험 과목의 구성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즉위 교서에서 문과를 시행하여 경명행수(經明行修)한 인재를 선발할 것을 천명하였다. 유교 경전에 밝고 그 도(道)를 실천하는 인물을 선발하여 문관(文官)으로 등 용하겠다는 의미이다. 이런 취지에서 경학(經學)을 기본으로 제술 능력을 겸비한 인재를 선발한다는 구상이 제시되었다. 흔히 조선 시대 문과는 고려의 제술업에 비해 경학(經學)을 중시하였다는 점이 강조된다. 하지만 경학에 능한 것만으로는 문과에 급제할 수 없었다. 문과는 문한(文翰)과 학술, 교육, 간쟁 등을 담당할 문관을 선발하는 시험으로 문장과 여타 학술도 함께 시험하였다. 문과에 급제하기 위해서는 경학은 물론 역사, 제도와 문물, 문학 등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토대로 정해진 형식에 맞추어 글을 지을 수 있는 문장력도 갖추어야만 했다. 조선 시대 관직 가운데에는 문관만 담당할 수 있는 관직들이 있었다. 국왕문서와 외교문서의 작성을 담당하는 예문관과 승문원, 학술 자문과 서적의 편찬·출판을 담당하는 홍문관·교서관·규장각, 세자와 유생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과 성균관, 실록을 편찬하는 춘추관의 관원은 모두 문관으로만 충원되었다. 승정원의 경우도 사초(史草)를 작성하는 주서(注書)는 문관만이 담당할 수 있었다. 이런 관직은 학술과 교육, 국가의 중요 문서 작성과 역사 기록에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는 자리로 폭넓은 학술적 경륜과 문장력을 기본자질로 요구하였다. 문과는 바로 이런 업무를 수행할 전문가를 선발하는 시험이었다. 문과의 시험 과목은 문관의 역할에 맞추어 학술과 문장을 폭넓게 평가할 수 있는 과목으로 채워져 있었다. 문과의 시험은 여러 차례 조정을 거치는데, 크게 경학과 제술 시험으로 대별된다. 경학 시험은 사서삼경의 구두시험인 강경(講經), 경서의 의미를 해석하는 제술 시험인 사서의(四書疑)와 오경의(五經義)로 구성되었다. 제술시험은 응시자의 문사철에 대한 식견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글쓰기로 논(論), 부(賦), 표(表), 대책문(對策文) 등이 시험 과목으로 채택되었다. 이 과목들의 배치에는 강경과 제술을 겸비한 인재를 배양하고 선발하겠다는 이상이 담겨 있었다.

문관의 상징인 학흉배를 단 관복을 입은 오재순의 초상.(출처 : 문화재청 문화유산포털)
 
늘어나는 별시와 시행 경향

성종 대에 편찬된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문과의 종류로 식년시(式年試)만이 실려 있다. 3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초시-회시-전시 3단계의 시험을 시행하고, 33명을 선발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영조 대에 편찬된 법전인 『속대전(續大典)』에는 식년시 외에 증광시, 별시, 정시, 알성시, 춘당대시 등 다양한 종류의 문과가 실려 있다. 이런저런 명분으로 새로운 종류의 시험이 하나씩 생겨난 결과다. 식년시 외에 부정기적으로 시행된 시험들은 당초에는 모두 별시로 통칭되었다. 하지만 점차 시행 빈도가 늘어나면서 시행 사유와 시험 방식에 따라 별시, 증광시, 정시, 알성시, 춘당대시 등을 구분하였고, 그 내용이 『속대전』에 수록되었다. 별시류 과거는 다양한 경우에 시행되었으나 조선 후기를 기준으로 보면 크게 두 가지 경우로 대별된다. 하나는 특별한 국가의례를 기념하여 과거를 시행하는 경우다. 국왕이 성균관을 방문할 때 시행하는 알성시나 군사들의 무예를 점검하는 관무재(觀武才) 때 시행하는 춘당대시가 이에 해당된다. 두 시험은 모두 백일장 형식으로 하루 동안 시험을 시행하고 합격자도 시험 당일에 발표하였다. 또 하나는 특별히 국가의 경사(慶事)로 선포한 일을 기념하여 과거를 시행하는 경우다. 이런 시험은 ‘경과(慶科)’라고 일컬었다. 당초에는 새 국왕의 즉위를 기념하여 경과를 시행하였을 뿐이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국가의 경사로 칭하는 사안들이 계속 증가하였다. 성종에서 중종 대를 거치며 세자의 책봉과 같은 중요한 의례 때 과거를 시행하는 관행이 만들어졌는데, 조선 후기에는 그 범주가 점점 확대되어 병에 걸렸던 국왕이나 왕대비, 세자의 건강 회복과 같은 사안도 경과를 시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경과를 시행할 때는 증광시, 별시, 정시 중에서 하나의 형식을 선택하였다. 증광시는 초시-회시-전시 3단계, 별시는 초시-전시 2단계, 정시는 백일장 형태의 시험으로 시험 형식이 각각 달랐고, 시험 단계가 줄어듦에 따라서 시험 과목도 줄어들었다. 이러한 차이에 기초하여 과거를 전국적인 대규모 행사로 시행하고자 할 때는 증광시를 시행하고, 소규모 행사로 시행하고자 할 때는 정시를 주로 시행하였다. 시기에 따라 증광시, 별시, 정시에 대한 선호도도 달랐는데, 대개 조선 전기에는 두 단계로 시행하는 별시를 선호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백일장 형식의 정시를 선호하였다. 정시가 자주 시행되면서 정시에 다시 초시가 있는 정시를 추가로 도입하기도 하였다. 문과는 갈수록 그 종류가 늘어나 제도가 더욱 복잡해졌다. 하지만 조선 후기 사람들은 시험 내용을 기준으로 문과를 명경과(明經科)와 제술과(製述科) 두 가지로 대별하여 파악하였다. 식년시는 회시 초장의 사서삼경 강경(講經)에 의해 사실상 당락이 결정되는 강경 중심의 시험이었다. 이와 달리 증광시 등의 별시들은 강경(講經)이 없는 제술 위주의 시험이었다. 이에 따라 식년시는 명경과(明經科), 증광시 등의 별시류는 제술과(製述科)로 일컫게 된 것이다.

『속대전』의 별시류 시험에 관한 규정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문과의 시험 내용과 과문(科文) 짓는 법

문과의 시험 과목은 각각이 고유한 자질을 평가하는 잣대였다. 크게 강경과 제술로 나뉘는 시험 과목은 각각 경학(經學)에 대한 이해와 문장 구사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이었다. 사서삼경의 강경은 구두시험으로 식년시 회시의 특징적인 시험 과목이었다. 응시자가 제비뽑기로 사서삼경에서 한 장(章)씩을 뽑아 본문을 암송, 해석하고 시험관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이었다. 경서의 암송과 해석을 기본으로 경전의 뜻을 심도있게 이해할 것을 요구하였다. 강경은 상당히 난이도가 높은 시험으로 통과 비율이 상당히 낮았다. 전국에서 식년시 초시를 통과하고 회시에 응시하는 인원은 240명 정도였는데, 16세기에는 선발정원 33명에 못 미친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제술에서는 대책문(對策文), 표전(表箋), 부(賦)의 출제빈도가 높았다. 대책문은 경학과 역사, 시무(時務) 등에 대한 질문을 통해 학술과 국가 운영에 대한 식견을 물었다. 장문의 문장으로 출제되는데, 그 안에서 다시 여러 조목의 질문이 제시되었다. 응시자들은 각 조목의 질문에 하나씩 답하고 이를 종합하는 결론을 제시하였다. 명종 13년(1558년) 별시 초시에는 ‘천도(天道)’에 대한 책문이 출제되었다. ‘천도는 알기도 어렵고 말하기도 어렵다[天道難知亦難言也]’는 구절로 시작하는 476자의 장문이었다. 그 가운데 ‘해와 달이 하늘에 걸려서 한 번은 낮이 되고 한 번은 밤이 되는데, 더디고 빠른 것은 누가 그렇게 한 것인가?[日月麗乎天 一晝一夜 有遲有速者 孰使之然歟]’를 시작으로 천문·기상·재이와 관련된 20여 개의 질문을 던져 유생들이 조목조목 대답하도록 유도하였다. 천도(天道)와 재이(災異), 인사(人事)의 관계를 묻는 것이었다. 이 시험의 장원은 율곡 이이(李珥)였다. 그의 답안은 ‘하늘이 하는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上天之載 無聲無臭]’로 시작하는 2,484자의 장문이었다. 그는 ‘만화(萬化)의 근본은 오직 음양뿐이다’라는 말로 첫 번째 물음에 답한 뒤 조목조목 제기한 문제들을 논변하고, 만물의 조화는 국왕의 신독(愼獨)에 달려 있다는 말로 글을 마무리하였다. 이 글은 ‘천도책(天道策)’이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책문은 장문에 걸친 질문과 이에 대한 응답을 통하여 응시자의 식견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시험이었다. 이 때문에 조선 전기에는 여러 과목 중에서도 대책문이 제일 중시되었다. 그러나 답안을 장문으로 작성해야 한다는 특성 때문에 시험 시간이 짧은 알성시나 정시에서는 출제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알성시와 정시가 자주 시행된 조선 후기에는 대책문의 비중이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표전(表箋)과 부(賦)는 주어진 글제[書題]와 형식에 맞추어 글을 짓는 시험이었다. 표전은 주로 특정한 상황에서 신하가 황제나 국왕에게 올리는 글의 형식을 취한다. 예를 들어 ‘진나라의 여러 신하들이 육국(六國)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는 표[擬秦朝群臣賀平六國表]’, ‘우리나라의 여러 신하들이 『속명의록』을 지어 바치는 전[本朝群臣進續明義錄箋]’과 같은 글의 제목이 출제되었다. 응시자는 글제에 주어진 상황에 부합하는 내용으로 주로 변려문이라는 형식에 맞추어 글을 지었다. 표전은 관련 전고(典故)를 풍부하게 활용하는 현학적인 내용 구성이나 댓구를 중시하는 변려문이라는 형식 때문에 상당히 난이도가 높은 과목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숙종 대에 정시·알성시에서 표전이 자주 출제되었는데, 정조도 인재를 선별하는 변별력이 높은 과목으로 표전을 선호하였다. 부(賦)는 운문 형식에 대한 숙련도와 문학적인 표현력을 평가하였다. 흔히 문과의 시험과목하면 대책문을 떠올리지만 조선 후기 문과에서는 부가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영조 대 이후 정시·알성시에서는 주로 부가 출제되었다. 글제의 출제 범위는 상당히 광범위하였다. 『서경(書經)』에서 출제된 ‘바람을 돌려 벼를 일으키다[反風起禾]’처럼 역사나 문학서의 고사에 근거하여 출제한 경우도 있고, 창덕궁 후원에 있는 ‘장원봉(壯元峯)’이나 기로소의 누각인 ‘영수각(靈壽閣)’ 등과 같이 당대의 상황을 반영한 글제도 있었다. 부(賦)의 글제는 한 단어나 어떤 글의 한 구절을 뽑아서 제시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출제된 글제를 통해 글의 주제를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글의 주제를 파악하는 것이 시험의 첫 번째 관문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주제를 파악한 후에 정해진 형식 속에서 적절하게 관련 고사나 글귀를 인용하며 논리는 명료하고 문장은 우아한 글을 짓는 것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과장에서 글을 완성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19세기 전반까지도 정시나 알성시 때 시간 안에 글을 완성하여 제출한 경우는 응시자의 30~40% 수준이었다. 순조 7년(1807년) 알성시 때는 응시자가 53,789명이었으나 제출된 답안지는 9,292장에 불과하였다. 응시자의 17.3%만이 글을 완성하여 제출한 것이다.

순조 대 신국휴(申國休)의 강경시험 채점지인 강지(講紙),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과거 공부법과 수험서

조선 시대 양반들은 어려서부터 유교 경전과 역사서, 문학서를 통해 문사철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을 쌓고 글을 짓는 법을 익혔다. 그리고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과거 준비를 시작하여 과거 때 짓는 문장의 형식인 과문(科文)을 익혔다. 실제 청소년기까지의 교육 과정은 일반적인 소양 교육과 과거 준비 과정이 딱히 분리되지 않는다. 숙종 대에 활동한 임상덕(林象德, 1683-1719)은 당대의 수재 중 한사람으로 열일곱 살 때 진사가 되고, 스물세 살 때 증광시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과거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눈에 띄는 성취를 보였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경험을 살려 독서법과 문장의 작법(作法)을 정리한 글을 여러 편 집필하였다. 그 중에는 과거 준비를 하는 유생들을 위한 글도 있다. 이 글에서 임상덕은 사서와 『시경(詩經)』, 『서경(書經)』과 같은 경서와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 등의 성리서, 『강목』, 『송조명신록』 등의 역사서, 『선문정수(選文精粹)』, 『고문진보』 등의 문장서와 한유, 유종원의 산문, 이백과 두보의 시선(詩選) 등 문학서를 차례로 익히도록 하였다. 이 책들을 익히면 높게는 성현(聖賢)이 되기를 희망할 수 있고, 중간으로는 문장을 배울 수 있으며, 아래로는 과유(科儒)가 될 수 있다고 평하였다. 임상덕은 학문과 문장 공부, 과거 공부를 하나로 파악하였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임상덕이 제시한 책을 공부한 것은 아니다. 어떤 교재를 선택하느냐는 개인의 선호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하는 공부의 내용은 동일하였다. 과거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과문(科文)을 보다 집중적으로 익혀야 한다는 차이도 있었다. 과문은 일반적인 문장과 달리 과문 특유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고, 글제가 요구하는 서술의 방향도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7세기 문장가 이식(李植)은 자손들에게 과문 공부를 할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과거 때 지은 글을 뽑아 초집(抄集)을 만들어 익히도록 당부하였다. 실제 오늘날 과거 수험서로 특화할 수 있는 책들은 대부분 과문(科文)의 선집(選集)이다. 조선 전기에는 과거 시험 때 지은 과문을 모은 과작집(科作集)이 여러 종류 간행되었다. 15세기에는 원나라의 과거 시험 답안을 모은 『삼장문선(三場文選)』의 일부가 간행되었고, 16세기에는 조선 과거에서 우수한 성적을 얻은 대책문을 모은 『동국장원책(東國壯元策)』, 『동국장원집(東國壯元集)』, 『동인책선(東人策選)』, 『전책정수(殿策精粹)』, 『동책정수(東策精粹)』 등이 간행되었다. 이 흐름은 임진왜란 직후 『진영수어(震英粹語)』의 간행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는 과작집이 간행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여러 사람의 과작(科作)이나 습작을 모아 필사한 책들이 수없이 많이 전해진다. 이런 책들은 『동표(東表)』, 『동책(東策)』, 『동부(東賦)』와 같이 보다 일반적인 이름으로 전하기도 하지만 개인의 뜻에 따라 그 제목도 천차만별이다. 그 중에는 과문의 작법을 따로 정리해둔 경우도 있는데, 아예 과문짓는 법만을 따로 정리한 『과문규식(科文規式)』, 『과려규식(科儷規式)』과 같은 책들도 있다. 이런 책들을 통하여 당시 유행하던 과문의 형식과 출제 경향, 유생들의 공부법 등도 살펴볼 수 있다. 과거 공부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습작이다. 출제가 가능한 주제를 뽑아 글을 지어 보는 것은 좋은 글을 짓는 법을 익히는 공부인 동시에 실제 시험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모범 답안을 미리 작성해 보는 시험 준비 과정이기도 하였다. 재위 19년(1795년) 정조는 유생 88여 명에게 평소 습작한 작품 수를 물어 본 적이 있다. 당시 유생들의 답변에 따르면 수백 수를 짓는 것은 기본이었고, 심지어 2,000수 넘게 지었다고 한 유생도 있었다. 현재 저명한 문인들의 문집에는 대부분 과거를 준비할 때 지은 습작들이 실려 있다. 아예 과문만을 따로 모아 책으로 묶은 경우도 있다. ‘윤려(尹儷)’라는 제목으로 묶은 책에는 영조 대에 활동한 윤지태(尹志泰, 1700-1751)가 지은 과표 157수가 실려 있다. 정약용은 노년에 자신이 지은 표전 등 460수를 모아 3권의 책으로 묶고 『열수문황(冽水文簧)』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영조 50년(1774년) 정시 문과에 합격한 심유진(沈有鎭)의 부(賦) 시권,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과거 응시의 기록

응시자들은 누구나 합격의 영광을 기대하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조선 시대 과거 합격자의 평균연령은 문과가 35.4세, 생원·진사시가 33.5세 정도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생원·진사시든 문과든 30대 중반 정도에 합격하면 중간은 한 셈이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합격 평균 연령도 점차 높아져 18세기 후반 문과 급제자의 평균 연령은 38세가 되었다. 고령 응시자들의 이야기도 흔히 볼 수 있다. 숙종 대 권상일(權相一)의 부친은 아들이 문과에 급제한 뒤에야 과거 응시를 그만두었는데, 당시 나이는 50대 중반이었다. 영조 대 이광정(李光庭)은 부친에게 쉰이 넘어서는 과거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사례들은 50대까지도 과거 응시가 계속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8세기 중반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은 스물세 살 때부터 마흔다섯 살 때까지 23년 동안 적어도 스물일곱 차례 이상 과거에 응시하였다. 그는 서른에 진사가 되었으나 이후 15년간에 걸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가 실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을 뿐 아니라 영조 45년(1769년)에는 성균관 칠일제에서 2등을 하여 국왕을 알현하기도 하였다. 그에게 문과는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신기루같은 것이었다. 그는 마흔 다섯 살이 넘어 결국 과거 응시를 포기하였다. 영조 대 이후 정시·알성시 과장에서 수만명이 몰렸고, 19세기에는 10만 명이 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도 선발하는 인원은 많아야 20~30명 수준이었다. 적게는 채 10명이 되지 않는 때도 많았다. 정조 24년(1800년) 세자 책봉을 기념한 정시는 응시자가 10만 명을 넘었지만 선발 인원은 9명에 불과 하였다. 조선 시대 문과급제자는 14,600여 명, 생원·진사시 합격자는 47,000여 명이다. 연평균을 따지면 문과는 29명, 생원·진사시는 92명 정도가 된다. 시험 때마다 수천, 수만 명씩 몰려드는 응시자들을 만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치였다. 사람들은 과거에 급제하는 것은 천명(天命)에 달렸다고 이야기하곤 하였다. 부모가 아무리 현달한 사람이라도 자식의 급제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 아들은 자신의 부친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한 걸음씩 과거 합격에 이르는 계단을 밟아 올라가야만 했다. 이 일은 세대와 세대를 이어가며 조선왕조 500년 동안 되풀이되었다. 조선 시대 양반에게 과거는 부단히 계속되는 일상의 영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문과 장원의 합격 대책문을 모아 수록한 『동국장원집(東國壯元集)』 중 성종 13년(1482년)에 출제된 ‘정통(正統)’에 대한 책문과 김기손(金驥孫)의 대책문 부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윤지태의 표문을 모아 엮은 『윤려(尹儷)』,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담와 홍계희의 평생도 중 문과 급제 후의 유가(游街)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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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월간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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