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가을, 겨울호-학교 조선시대]조선 시대의 무과와 무학 교육
작성자 : 관리자작성일 : 2024-01-02
조선 시대의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로 고려와 가장 구별되는 것은 무과 제도다. 문관을 선발하는 문과는 고려 광종 때부터 실시되었지만, 무관을 선발하는 무과는 몇 번의 시도는 있었으나 번번히 문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던 것이 조선 건국 초기인 태종 2년(1402년)부터 무과가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무과는 그 후 약 1세기 간 정비과정을 거쳐 성종 연간에 『경국대전』이 반포될 즈음에는 상당한 제도적 안정을 이루게 되었다.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시험 과목의 추가나 선발 인원의 증가 등 다소간의 변화는 있었지만, 이 무과는 고종 31년(1894년) 군사제도의 개혁과 아울러 폐지될 때까지 약 493년간 꾸준히 존속된 조선의 대표적인 무관 선발 제도라고 말할 수 있다. 무과는 원칙적으로 문과와 함께 실시되는 것이 관례였다. 3년마다 정기적으로 치루어지는 식년(式年) 무과에는 초시, 복시, 전시의 3단계 절차가 있었다. 일차 시험인 초시는 무예만을 시험하는 것이었는데 한양과 경기지역을 대상으로 서울에서 보는 훈련원시(70명)와 각 지방에서 보는 향시(경상 30명, 충청·전라 각 25명, 강원·황해·함경·평안 각 10명 : 도합 120명)에서 총 190명을 선발하였다. 2차 시험인 복시는 초시 합격자를 서울에 모아 무예와 강서(講書, 병서 및 유교 경전)를 시험보아 28명을 선발하였다. 복시에 합격한 28명은 국왕이 친림한 전시에서 무예만을 시험하여 3등급(갑과 3인, 을과 5인, 병과 20인)으로 나누어 선발하였다. 이와 같은 정기 시험인 식년 무과 이외에 국가적인 대소 경사나 무예 권장, 또는 국방상의 요구 등을 위해 비정기적인 다양한 별시 무과가 시행되었다. 별시의 경우에는 정기시험에 비하여 그 시험 단계가 축소되기도 하고(초시와 전시 혹은 전시 단독), 선발 인원도 상황에 따라 변하였다. 선발 인원이 적게는 수십 수 백 명에서 많게는 수 천 명, 만여 명에 이르기도 하여, 이러한 무과를 만과(萬科)라고 불렀다. 만과는 과거제도가 폐지되는 고종 31년(1894년)까지 계속되었다. 만과는 처음에는 변방 방어 병력의 충원이라는 국방상의 이유로, 뒤에는 무과 출신들에게 변방 근무를 면제해 주는 조건으로 면포를 받아 국가 재정의 궁핍을 타개하려는 재정상의 이유로 자주 설행되었다. 그 결과 많은 무과 출신자를 양산하여 무과의 권위를 떨어뜨리기는 하였으나, 하층민들의 신분 상승을 돕는 계기로도 이용되었다. 무과의 시험 과목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확대되고 변화하였다. 100여 년 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경국대전』(성종 16년, 1485년) 속에 정비된 조선 전기의 무과 제도는 시험 내용이 크게 실기 테스트인 무예 시험과 경전과 법전을 해석하는 강서(講書) 시험으로 나누어진다. 무예 시험 과목은 목전(木箭), 철전(鐵箭), 편전(片箭)과 기사(騎射), 기창(騎槍), 격구(擊毬) 등 6가지로서 궁술과 기마술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강서는 사서오경(四書五經) 중 1, 무경칠서(武經七書) 중 1, 기타 병서(兵書) 중 1, 경국대전(經國大典) 등을 시험 보았다. 임진왜란 이후의 무과의 시험 과목은 조선 후기에 편찬된 『속대전』(영조 22년, 1746년)에 이르러 재정비된다. 이 법전에 의하면 시험 과목은 종래의 실기 6과목과 강서(경전 시험)에다가 새로이 유엽전(柳葉箭, 120보), 관혁(貫革, 150보), 조총(鳥銃), 편추(鞭芻) 등 실기 4과목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종래의 실기 중 원형 표적을 맞추던 기사가 허수아비 인형을 맞추는 기추(騎芻)로 변화되었다. 그래서 조선 시대 후기의 무과 시취 과목은 실기 10과목(목전, 철전, 편전, 기추, 기창, 격구, 유엽전, 관혁, 조총, 편추)과 강서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실제 시험에서는 왕이 지정하는 1~2기만을 택하여 시험을 보았다. 조선 전후기 식년 무과 시험 과목을 비교하면 도표와 같다.
조선시대 식년 무과 시험과목
조선시대 식년 무과 시험과목법전/시험명『경국대전』『속대전 』무예강서무예강서초시 | 목전(240보)·철전(80보)·편전(130보)·기사·기창·격구 | 없음 | 목전·철전·편전·기추·기창·조총(100보)·편추 중 1~2기 선택 | 없음 |
복시 | (초시와 동일) | 사서오경 중 1서,무경칠서 중 1서,통감·병요· 장감박의·무경·소학 중 1서, 경국대전 | (초시와 동일) | (『경국대전』 종목과 동일) |
전시 | 기·보격구 | 없음 | 목전·철전·편전·기추·관혁·기창·유엽전·조총·편추 중 1~2기 선택 | 없음 |
무과 응시자들이 필수적으로 준비해야 하는 것은 활쏘기와 말타기 같은 무예 실기 외에 병서와 경전 등 이론적인 지식이 요구되었다. 그 중 병서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필요한 전략·전술이나 진법 등에 관한 지식을 담은 서책이었다. 이들 중 반드시 출제되던 대표적인 병서는 『무경칠서(武經七書)』였다. 『무경칠서』는 중국의 대표적인 고대 군사 이론서로서 춘추시대 오나라의 손무가 쓴 『손자(孫子)』, 전국시대 위나라 오기의 『오자(吳子)』, 제나라 사마양저의 『사마법(司馬法)』, 위나라 위료의 『위료자(尉.子)』, 당나라 이정의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 진나라 황석공의 『삼략(三略)』, 주나라 여망의 『육도(六韜)』를 일컫는 말이다. 11세기 말 북송 때 이들 병서를 무학의 교재로 지정하여 칠서라고 호칭한 데서 비롯되었다. 『손자』는 제일 오래된 병서로서 1권으로 계(計)에서 용간(用間)까지 13편(篇)으로 되어 있다. 중국 고대의 각종 군사 전략과 전술을 총망라한 체계적인 전쟁 이론서로서, 흔히 서양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 1780-1831)의 『전쟁론』과 더불어 동서양 최고의 병서로 손꼽힌다. 『오자』는 1권으로, 도국(圖國)에서 여사(勵士)까지 6편으로 된 병서이다. 『손자』가 대전략을 다룬 전쟁 이론서라면 『오자』는 보다 더 실용적인 전술에 비중을 두고 있다. 『사마법』 역시 1권이고, 인본(仁本)에서 용중(用衆)까지 5편으로 되어 있다. 고대 병법 사상들을 모아서 간단명료하고 알기 쉽게 논술하고 있다. 『위료자』는 『손자』에 필적할 만한 병법서로서, 전 5권이며 천관(天官)에서 병령(兵令)까지 24편으로 되어 있다. 여러 병법가들의 이론을 취사선택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병학 체계를 구성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위공문대(李.公問對)』는 당나라 태종과 저자인 이정(李靖, 571-649)이 병법에 관하여 문답한 것을 수록한 것으로 상·중·하의 3권으로 되어 있다. 상권에서 고구려 토벌문제를 두고 태종과 이위공(이정)이 토론하고 있는 장면이 이채롭다. 『삼략』은 상략·중략·하략으로 되어 삼략이라 부르며, 모두 3권으로 되어 있다. 적을 소멸하기 위한 정치전략, 지휘통솔법, 부국강병책 등을 다루고 있다. 『육도(六韜)』는 문무도(文武韜) 등 6도로 나누어져 있고 전 6권으로 되어 있다. 무성왕 또는 강태공이라고 호칭되는 강자아(姜子牙, 1156-1073)와 주나라 문왕(文王) 사이의 토론 형식으로 논술되고 있다. 여기서 도(韜)는 감춘다는 의미로, 비밀스러운 책략이란 뜻이다. 군사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제왕의 도리를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렇듯 『무경칠서』는 군사적인 전략·전술 등 용병하는 방법을 총망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쟁 승리를 위한 국가적인 대전략까지 두루 다룬 전통 시대의 대표적인 전쟁 이론서였다. 무과의 필수 과목이었을 뿐만 아니라, 무과 시험 합격 후에도 모든 무관들에게 그 내용을 체득하도록 수시로 강조되었다.
무관을 선발하는 무과는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었으나, 무관 후보생들을 체계적으로 교육할 수 있는 전문 교육 기관은 존재하지 않아 무과 준비는 개인의 역량에 의존하였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설이다. 훈련원과 무학당에 관한 최근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조선 시대의 무학 교육을 알아본다. 조선 시대에는 무관 양성을 목적으로 무예와 병서를 강습하는 교육기관을 무학(武學)이라고 불렀다. 무학이라는 용어는 원래 강습의 내용 즉 학문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무학당’처럼 교육기관으로서의 의미로도 사용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강습을 받는 학생이라는 신분(‘직역’)을 지칭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이준구. (1983). 조선 후기의 「무학 (武學)」 고(攷). 대구사학, 23(0). 조선 시대의 중앙 무학 교육 기관으로는 조선초부터 설치되었던 훈련원이 있었다. 훈련원(초기에는 ‘훈련관’으로 호칭됨)은 문(文)과 무 (武)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 수 없고 동시에 중시되어야 한다는 문무병중(文武幷重)의 원칙에 따라 유학의 성균관과 아울러 무학의 대표적인 중앙 교육기관으로 출발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훈련원의 역할은 세 가지다. 첫째, 무과 및 각종 시재(試才)를 주관하였다. 둘째, 각종 군사 훈련을 담당하였다. 셋째, 무경 습독관들에게 무경을 가르치는 일을 담당하였다. 습독관 제도는 세종 4년(1422년)에 기존 무관과 신참 무과출신자들의 무학 강습을 독려하기 위하여 20명의 관원을 선발하여 훈련관에서 『무경칠서』를 비롯한 병서 강습과 무예 훈련에 전념케 한 후에 평가를 통해 발탁하는 제도였다. 이 습독관 제도는 무예가 출중하고 병서에 능통한 무관을 양성하기 위한 무학교육 제도였다. 다만 이 제도는 이미 무과에 합격한 무관들을 대상으로 한 관리 보수 교육이었지, 무과 준비생들을 위한 후보자 양성 교육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지방의 무학 교육기관 설치는 임진왜란 발발 후 선조 28년(1595년)에 “각 도의 대도호부에 훈련원과 같은 무학을 설립하여 군사를 양성하고 무학을 연마하라”는 무학 설치령이 내려진 이후의 일이다. 무학 설치령은 인조5년(1627년) 「영장절목(營將節目)」에서 재차 강조되었다. 그 후 전국 곳곳에 무학이 설립된 것으로 보이나, 오랫동안 그 실상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 전국의 각종 읍지와 문집을 분석한 연구에 의하여 비로소 지방의 무학 교육기관인 ‘무학당’의 존재가 부분적으로 밝혀졌다. 박종배. (2016). 읍지(邑誌)에 나타난 조선 후기의 무학(武學). 교육사학연구, 26(2). 조선 후기의 읍지 중 경상도 선산의 읍지인 『일선지(一善誌)』에 가장 소상하게 무학당의 건립 내역이 기술되고 있다.
무학당 : (중략) 을사년(1605년)에 조정에서 드디어 여러 고을에 향교의 제도와 같이 무학당(武學堂)을 건립하도록 명하였다. [모든 백성이 15세 이상이면 입속하여 말달리고 활쏘는 것을 익히며 병서를 읽되 노비와 학전(學田)은 대략 향교와 같이 하라고 하였는데, 초창기라 다 갖추지 못하였다.]
이렇듯 임진왜란 이후 조선 정부는 지방에 유학의 향교 제도에 준하는 무학 교육기관으로 무학당을 건립하려고 시도하였다. 연구에 따르면, 선조와 인조 연간의 무학 설치령 이후 전국 각지에 설립된 33곳으로 충청도 14곳, 강원도 2곳, 평안도 1곳, 경상도 13곳, 전라도 3곳에 무학당(武學堂)이 있었다. 무학당이 설립된 것으로 확인되는 33개 고을은 조선 후기 전체 행정구역의 10% 정도에 해당한다. 따라서 숫자는 그리 많지 않지만, 무학 설치령 이후에 전국에 실제로 별설 교육 기관으로서의 무학, 즉 무학당이 상당수 설립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확인된다. 그러나 무학당의 성격은 무예 연마를 주목적으로 하는 연병(鍊兵) 장소로서의 ‘연무청(鍊武廳)’에 가까운 성격을 갖고 있었다. 활쏘기 등 무예 교육에 그치고 강서 교육 기능이 없었기 때문에 무과 준비를 위한 지방 무학 교육기관으로서의 충분한 기능은 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무학당이 실제로 무과 준비생들의 교육기관으로서 얼마나 기능을 하였는지 하는 문제는 아직도 좀 더 많은 해명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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