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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 이야기

전통 옷감을 평생 짜는 여인들-나주의 샛골나이 노진남

 

전통 옷감을 평생 짜는 여인들-나주의 샛골나이 노진남

발행일 : 2021-01-21

1936. 5. 1 ~ 2017. 9. 10 | 보유자 인정: 1990년 10월 10일

위대한 문화유산

한국문화재재단의 무형문화재이야기
나주의 샛골나이 노진남

국가무형문화재 나주의 샛골나이
나주의 샛골나이 노진남

꽃은 / 단 한 번 핀다는데 / 꽃시절이 험해서 / 채 피지 못한 꽃들은 /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꽃잎 떨군 자리에 / 아프게 익어 다시 피는 / 목화는 / 한 생애 두 번 꽃이 핀다네

날 피는 꽃만이 꽃이랴 / 눈부신 꽃만이 꽃이랴

꽃시절 다 바치고 다시 한 번 / 앙상히 말라가는 온몸으로 / 남은 생을 다 바쳐 피워가는 꽃 / 패배를 패배시킨 투혼의 꽃 / 슬프도록 환한 목화꽃이여

이 목숨의 꽃 바쳐 / 세상이 따뜻하다면 / 그대 마음도 하얀 솜꽃처럼 / 깨끗하고 포근하다면 / 나 기꺼이 밭둑에 쓰러지겠네 / 앙상한 뼈마디로 메말라가며 / 순결한 솜꽃 피워 바치겠네

춥고 가난한 날의 / 그대 따스하라

- 박노해 시인의 <목화는 두 번 꽃이 핀다>

나주의 샛골나이

나주 샛골나이는 전남 나주시 다시면 소재지인 동당리 일원에서 직조되고 있는 전래의 고운 무명베를 일컫는 말이다. 샛골은 이곳 동당리 마을을 가리키는 것이고 나이는 길쌈을 뜻하는 말이다. 샛골나이라는 명칭은 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한 조사 당시 고 석주선 박사가 붙인 이름으로 일반적으로는 셋골 세목이라고 알려져 있다.

고려 말 문익점에 의해 한반도에 전래된 목화씨는 조선 시대에 전국적으로 재배되었으며, 무명은 한국인 의생활의 주재료가 되었다. 무명의 제작 과정은 목화솜을 수확하는 데서 시작한다. 목화솜에서 씨를 빼내고 솜을 부풀려 고치를 말고 물레에 돌려 무명실을 만들어낸다. 자아낸 무명실을 날틀에 걸어 실의 굵기에 따라 날고 그 위에 풀을 먹인 후 베틀에 걸어 짜면 무명 한 필이 완성된다.

무명을 짠다는 것은 매우 고된 작업이다. 목화씨를 빼서 활로 타서 고치를 말아서 물레로 자아서 짤 때가지 적어도 달포가 걸려야 하는데 그 수고에 비해 대가가 너무나 적은 작업이다. 그래서 개화기 이후 무명길쌈은 수입직물과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제품들에 밀려 점차 쇠퇴하게 된다. 특히 해방 이후 질기고 다루기가 좋은 나일론이 나오면서부터 재래식 방법에 의한 길쌈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으며 1960년대 중반쯤에는 거의 다 사라지게 되었다.

면직물의 발달

면직물은 그 본질이 순우하고 검박하며, 위생적이어서 인류가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의복의 재료뿐만 아니라 각종 생활용품의 소재로 가장 널리 애용해 온 천연 식물성 섬유직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의 문헌에 백첩포(白疊布, 白?布)로 명명된 면직물을 고구려와 신라에서 제직하고 중국에 예물로 보낸 기록이 있어 한반도에서의 면의 재배와 제작의 역사도 거의 2,000여 년을 상회함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고려시대에는 채첩(綵?)으로 만든 의복과 건(巾)을 사용하였으며, 첩(疊)을 녹봉으로 하사하기도 하였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백첩포는 일반적으로 사용된 직물은 아니며 외국과의 교류에서 예물로 사용되는 등 극히 귀하게 사용된 직물이었다. 이후 우리나라에서 면의 재배가 본격화된 것은 고려 말 1363년(공민왕 12)에 문익점이 원에서 새로운 면종자를 반입하면서부터이다. 문익점이 원에서 들여온 면의 종자는 개량된 일년생 관목형 목면인 중국면이었다. 중국의 절강을 위시한 강남지방의 기후조건은 우리나라 남부지방과 비슷하여 중국면이 재배되기에 적합하였으며 이로써 면의 재배가 확대되어 면직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문익점의 면종자 반입 후 반세기도 못되어 면의 재배는 전국으로 확산되는데, 태종1년(1401)에는 백성 상하가 모두 면직물을 입게 되었다는 기록이 [태종실록]에도 있어 조선 초기에 이미 면의 재배가 확산되고 의료(衣料)로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재래종 면작물의 생장특성상 재배지역에 한계가 있었으며 주로 차령 이남의 삼남지방(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일부)에서 재배되었다.

조선시대 면직업은 국내적인 수요의 충당뿐만 아니라 외국으로 수출할 정도로 발달되었는데 세종 즉위년(1418년)에는 일본을 1,539필의 면포를 수출하였고 차차 그 수량이 늘어 세종5년(1423년)에는 2.640필의 면포가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중국에 예물로 보낸 면포의 종류에는 백목면, 생목면, 세목면, 각색세목면, 각색세면포, 생상목 등이 있다. 조선 시대 육의전 중에는 면포전(綿布廛)이 있어 면포를 전담 판매하였으며 후에는 백목전, 은목전이라고도 하였다. 면직은 조선의 3대 기간산업의 하나로 대단히 중시되어 발달하였으나, 19세기에 이르러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기계직 면포가 우리나라에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농가의 재래식 무명제직이 쇠퇴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이 명치유신 이후 서구의 기계문명을 받아들여 기계직 면포를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고 그 면포가 우리나라로 수입되게 되면서 국내의 면포생산은 더욱 어려워지게 되어 우리나라 면의 제직도 기계화를 서두르게 되었다.

국내에서도 이후 기계직 면포의 생산이 늘어남에 따라 우리나라 재래의 수공면직물의 생산은 점차 줄어들게 되어 근래에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그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국가에서는 무명짜기의 전승을 위하여 1969년 전라남도 나주지역의 샛골나이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기능보유자로 김만애 선생을 인정하여 그 기능을 전승시켜 왔으며 이후 며느리인 노진남 선생이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모든 것을 바쳐 ‘춥고 가난한 날’을 감싸는 목화는 이 땅의 어머니들을 닮아 있다.

1960년대 중반 무렵, 마을마다 부녀자들이 가족들과 집안사람들을 위하여 밤을 지새워가며 해야만 했던 무명짜기의 전통은 그 고된 작업의 상징으로 부녀자들의 애환을 가득 담고 있는 베틀과 함께 모두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문화재청(당시 문화재관리국)에서는 사태의 시급함을 파악하고 무명짜기의 재래식 방법에 대하여 1968년에 지정을 위한 조사를 실시하였고 1969년에는 제28호 나주의 샛골나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지정하여 나주시 다시면 동당리에 있는 고 김만애 할머니를 기능 보유자로 인정하게 되었다.

당시 역사적으로 유명한 면직물로 샛골 세목 외에도 고양나이, 진주목 등이 있었으나 조사 당시 그 기능을 보유하고 있는 곳은 샛골나이뿐이었다고 한다. 지방에 따라 삼베와 모시를 재래 방법으로 짜기도 하지만 무명을 짜는 곳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샛골에서도 베틀이 남아 있는 곳은 김만애 할머니 집뿐이었다고 한다. 1982년 김만애 할머니가 고령으로 작고한 뒤 나주의 샛골나이는 8년간 해지된 상태에서 보유자가 지정되지 않은 채 유보되어 있었다. 1990년에야 보유자 인정을 위한 조사가 다시 실시하게 되었고, 당시 김만애 할머니의 며느리이자 보유자 후보였던 노진남 선생을 새로이 인정하게 되었다. 1990년 조사 당시 이미 재래방법에 의한 무명짜기는 샛골에서도 노진남 선생만이 전승하고 있을 뿐 샛골나이는 나이든 할머니들의 기억에만 남아있었다.

재래식 무명짜기의 유일한 기능보유자 노진남 선생

노진남 선생은 1932년 5월 1일(호적에는 1936년 5월 1일로 되어 있다.) 친정인 함평군 학교면 복천리에서 태어나 남편인 최석보 선생 댁으로 시집오기 전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머슴을 두고 살 정도로 넉넉한 집에 태어나 시집오기 전까지 들일은 하지 않았으나 7남매 중에서 장녀로 태어나 동생들을 키우느라 고된 유년생활을 보냈다고 한다. 혼기가 꽉 찬 20세되던 해 2월에 중매로 신랑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시집을 오게 되었으며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길쌈하는 이른 친정에서 어머니 어깨 너머로 배웠으나 본격적으로 무명을 짜기 시작한 것은 시집와서부터이다. 그다지 윤택하지 못했던 시집에 와서 처음으로 들일을 하면서 틈틈이 베와 가마니를 짜야만 했다.

1974년 시어머니인 김만애 선생의 보유자 지정과 함께 전수교육생으로 선발되어 1980년에 전수과정을 이수하였으며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1982년에는 보유자 후보로 선정되었다. 현재 샛골나이의 전승을 위한 가장 큰 문제가 무명베가 고된 품에 비해 삯이 저렴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명을 짜서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보유자인 노진남 선생도 특별히 주문이 없는 한 1년에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 작품전에 출품하기 위한 2필 정도의 무명 제작이 고작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전승 상의 문제로 전통직기의 노후와 수량의 제한, 재래품종의 개발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2017년 숙환으로 별세했다.

작품

무명

우리나라의 전통방식에 의해 직접 재배하고 수확하여 햇볕에 말린 목화로 제작한 작품이다. 목화를 씨를 앗고 실을 잣아 베날고 베메기 과정을 거쳐 베틀에 올린 후 베를 짠다.

제작과정

1_면의 재배·수확, 그리고 방적

무명짜기의 작업의 시작은 면의 재배와 수확으로부터 시작한다. 수확한 목화는 씨가 들어 있는 상태이므로 방적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목화에서 씨를 빼내야 한다. 이 과정을 전통 무명재직에서는 ‘씨앗기’라 하며, 현대의 면방적에서는 조면(繰綿)의 단계에 속한다.

씨앗기를 거친 면을 가락 사이를 빠져 나오면서 눌려져서 섬유가 서로 얽혀 납작하게 뭉쳐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원료 목화로부터 실을 만들려면 먼저 엉켜있는 섬유덩어리를 풀어헤쳐 섬유 하나하나를 피어나게 하는데, 이 과정을 전통 면방적에서는 ‘솜타기’라 한다. 솜타기를 한 솜은 실잣기를 하기 위해 우선 목화에서 섬유가 잘 뽑아지도록 솜을 가늘고 길게 말아야 하는데 이를 ‘고치말기’라 하며 말아놓은 솜을 ‘고치[綿筒]’라 한다. 고치말기를 하고 나면 실잣기를 하게 되는데 이때 사용되는 도구가 물레이다.

2_날실과 씨실 준비

실잣기의 과정이 끝나 실이 만들어지면 이제는 무명짜기를 위해서 날실과 씨실을 준비한다. 날실과 씨실은 날줄, 씨줄이라고도 하며 보통 문헌에 기록되기로는 경사(經絲), 위사(緯絲)로 되어 있다. 날실은 직물을 짤 때 직물의 길이 방향, 즉 세로로 놓인 실이며, 씨실은 가로방향으로 날실과 교차하면서 짜여지는 실이다. 이 과정은 베뽑기, 베날기, 날실익히기, 바다에 날실 기우며 사침 옮기기, 베매기, 씨실 꾸리감기로 나뉜다.

3_무명제직

베틀이 차려지고 무명을 짜기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나면 직녀는 베틀에 앉아 부테를 허리에 감고 날실과 거기에 걸려 있는 부품들을 일으켜 세우고, 밀침대를 비거미 앞에 끼워 넣어 양손으로 밀침대를 잡고 비거미와 잉아를 뒤로 밀었다 당겼다 하며 바디, 잉아, 비거미 등이 직물을 짜기에 적당한 위치에 놓이도록 하며 날실이 고르게 정렬되도록 정리한다. 바디에는 손으로 참기름을 직어다 바딧살에 고루 발라주고 바디를 양손으로 잡고 앞뒤로 여러 번 밀었다 당겼다 하며 바디가 부드럽게 잘 움직이는지 확인한다. 베틀로 직물을 짜는 과정은 무명이나, 명주, 베, 모시가 모두 한가지이며 날실개구, 씨실투입, 바디치기, 날실풀기, 직물감기 등 5가지 동작의 단순 반복운동에 의해 직물이 짜여진다.

<씨앗기 과정>

<물레를 사용해 실잣기 하는 과정>

<무명제직>

4_무명의 정련과 손질

베틀에서 짜낸 베는 날실에 풀이 먹여져 있고 짜는 과정에서 더러움이 타서 반드시 세척을 하여 풀기를 빼고 보관해야 한다. 말코에 말려있는 베를 풀어서 물에 하룻밤 담가서 불렸다가 방망이로 두드려 빨아 여러 번 헹구어 풀물을 빼낸다. 처음 짜서 베틀에서 내린 무명은 약간 누런색을 띠며 부서진 껍질이 중간에 섞여 있어 거뭇거뭇한 티가 남아 있다. 이 무명베를 생목(生木) 또는 생면포라고 한다. 생목은 잿물에 삶아 내거나, 잿물에 담갔다가 쪄서 햇볕에 바래는 정련과정을 거쳐야 하얗게 표백되어 백목(白木)이 된다. 나주지역에서는 쪄서 정련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 과정을 ‘마전하기’ 또는 콩대로 잿물을 만들므로 ‘콩대 찜 마전하기’라고도 한다. 정련한 무명으로 옷을 짓기 위해서는 풀을 먹여 다듬질하거나 다림질하여 사용한다. 풀 먹여 다듬는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아침 일찍 풀을 먹여 만져서 다듬고 다림질하여 한나절 안에 마쳐야 베에서 쉰내가 나지 않고 풀내음이 상긋하다.

<베틀로 직물을 짜는 모습>

약력

  • 1936년출생
  • 1974년시어머니 고 김만애 선생이 보유자로 지정됨과 동시에 전수장학생으로 선발
  • 1980년나주의 샛골나이 전수과정 이수
  • 1980년~1981년전승공예대전 입선
  • 1982년국가무형문화재 나주의 샛골나이 보유자후보 인정
  • 1982년~1988년전승공예대전 장려상
  • 1990년국가무형문화재 나주의 샛골나이 기능보유자 인정
  • 1995년국립중앙박물관 전시 및 시연
  • 2006년청주문화엑스포 전시 및 시연
  • 2009년광주시립민속박물관 전시 및 시연
  • 1990년~2017년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 작품전 출품
  • 2017년별세
  • 글 이치헌 / 한국문화재재단
  •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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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노진남, 폭 35cm

무명(목화) 30x1100cm

무명, 노진남, 34x120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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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노진남, 폭 3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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