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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이야기

그들이 사는 세상, 완월동

부산 공존 프로젝트 <2> 그들이 사는 세상, 완월동

쇠락한 동네 고립된 여성 … 자활의 등 켜줘야 홍등 꺼진다

  • 국제신문

  • 최민정 기자 mj@kookje.co.kr

  • | 입력 : 2018-01-07 19:54:56

  • | 본지 3면

- 일제때 조성된 성매매 집결지
- 지금도 여성착취 여전하지만
- 관계망 단절된 채 철저히 소외

- 부산시·서구 내놨던 재생정책
- 국비확보만 바라보다 흐지부지
- 생계 고려한 폐쇄가 공존의 길
- 시 차원 예산·정책 마련 절실

‘당신은 얼마입니까’.

 

부산 서구 완월동에 아직 성매매업소가 버젓이 자리 잡고 있다. 서정빈 기자

 

성매매 피해자 여성 A 씨는 이 질문과 함께 끝없이 흥정되는 거래 대상으로 20여 년을 살았다. 매일 오후 8시면 성매매업소 입구에는 나까이(알선자)가 나서 성매수남을 상대로 영업을 시작했다. A 씨는 업소 1층 유리방에 마네킹처럼 진열됐고, 구매자는 원하는 이를 선택해 방으로 들어갔다. 하루에 많게는 20~30명을 상대했다.

A 씨를 성매매업소로 밀어 넣은 건 가출한 뒤 다방에서 일하며 쌓인 수천만 원 의 빚이었다. 업주들은 여성이 손님에게 ‘티켓비’를 못 받거나 쉬면 수십만 원씩 ‘벌금’을 물렸다. 빚은 갚을수록 쌓였다. 아프면 업주가 부른 ‘주사 아줌마’한테 치료를 받았고 생리하는 날엔 솜을 이용해 일했지만, 애초에 빚은 갚을 수 없는 대상이었다.

성매매 여성 대다수는 A 씨처럼 사회망 바깥에 놓여 철저히 소외됐다. 영업을 마치고 완월동 밖을 나서는 이는 거의 없을 정도다. 과거에는 입구를 막아 감금 상태에서 일하는 경우도 있지만 감시가 없더라도 인근 시내조차 외출하는 여성은 극히 드물다. 성매매 피해자 B 씨는 30여 년간 완월동 밖을 나간 적이 없다고 했다. 사람 관계망이 폐쇄적인 곳에서 의식이 매몰된 채 무기력함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B 씨는 “항상 빚을 갚지 못해 불안에 떠는 여성이 많았다. 정신과 치료를 받거나 수면장애, 알코올 의존증, 우울증을 겪는 이가 대다수”라고 말했다.

■고립된 완월동

입구에 청소년통행금지구역임을 알리는 팻말이 붙어 있다

 

부산에서 성매매가 주로 이뤄지는 곳은 14곳으로 파악된다. 여성인권지원센터 ‘살림’은 지난해 ‘성산업 지도’를 만들었다. 주로 ▷괘법동 유흥업소 밀집구역 ▷사상 ‘뽀뿌라마치’ ▷하단 유흥업소 밀집구역 ▷구포 만세길 ▷덕천로타리 ▷초량텍사스 ▷감만동 부둣길 ▷조방 앞 산업형 성매매 ▷온천장 유흥업소 밀집구역 ▷연산동 산업형 성매매 ▷해운대 609 ▷서동 유흥업소 밀집구역 ▷미남 ‘과부촌’에서 성매매 산업이 이뤄지고 있다.

이 가운데 완월동(13만9000㎡, 초장·충무동 일원)은 서울 청량리, 대구 자갈마당과 함께 전국 3대 성매매 성업지로 꼽힌다. 최근 찾은 완월동에서는 100년 넘게 이어온 흔적을 볼 수 있었다. 1902년 일제는 부산 최초의 근대식 도로(현재의 천마로)를 만들고 그 입구에 한반도 최초의 유곽(공창)을 세웠다. 해방 이후 소유권을 넘겨받은 조선인은 공창제가 폐지된 후에도 사창으로 운영했고, 1970년대 정부의 묵인 아래 완월동은 엘리베이터, 에어컨, 수세식 화장실을 갖출 정도로 왕성했다.

3000명에 육박하는 여성을 먹이사슬의 아래에 두고 업주 알선자 청소부 세탁업자 등이 돈을 벌었고 1980년대에는 동양 최대의 사창가로 명성을 떨쳤다. 2004년 성매매방지법이 시행됐지만 간판 없는 불법 영업은 여전히 시행 중이다. 현장에 동행한 살림 변정희 소장은 “성매매를 통해 이득을 얻은 집단이 있는 상황이라 성매매특벌법을 만들어 단속한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 기대하는 건 순진하다”고 말했다.

■배제된 여성

완월동 성매매업소는 시대 변화와 맞물려 점차 줄어드는 추세지만 그 속도는 더디다. 1980년대 150개(2500명)에서 성매매방지법 시행 전 78개(800명), 시행 직후 42개 296명으로 대폭 줄었다. 그러나 법 집행이 느슨해지면서 2008~2012년 45개(150명)에서 2014~2015년 60~67개(240~260명) 늘어난 뒤 2017년 12월 기준 43~47개(238명)가 됐다.

가장 큰 문제는 완월동과 여성이 고립되고 있다는 점이다. 2015년 부산발전연구원의 완월동 창조적 재생 연구용역에 따른 보고서를 보면 각종 벌금과 선불금 채무 등 착취 방식은 여전하다. 여성은 사회와 완전 격리되면서 버스와 도시철도 타는 방법을 모를 만큼 자존감이 위축됐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전업할 형편이 되지 않는다.

업소에서 나와도 거주공간 등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생계비와 직업훈련, 의료비 등이 정부 지원으로 이뤄지고 있지만 기간은 3년에 불과하다. 탈성매매 여성이 성매매업소나 인근에 월세방을 구해 사는 경우도 잦다. C 씨는 “완월동은 잊고 싶은 곳이다. 하지만 아는 사람이 여기밖에 없어 청소나 심부름 일이라도 소개받을 수 있을까 싶어 이곳에 머물고 있다”고 말했다.

그간 부산시와 서구는 완월동을 재생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시도했지만 제자리걸음이다. 2013년 부산시의회 공한수 의원이 완월동을 문화예술마을로 바꾸자고 제안해 다음 해 시가 연구 용역을 부발연에 맡겼으나 국비 확보에 실패하면서 흐지부지됐다. 구는 2014년 여성가족부 권고에 따라 성매매 방지대책 실무협의체(TF)를 2년 뒤에야 구성했지만 연 1회 형식적 모임에 그치고 있다. 구는 완월동 입구에 국·시비 120억 원을 들여 서구가족센터를 짓고, 인근 지역에 100억 원을 들여 ‘아미·초장동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완월동 집결지 폐쇄나 재정비에는 소극적이다.

전문가들은 성매매 집결지를 폐쇄하려면 시 차원에서의 접근과 예산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완월동 여성을 정책 수혜 대상으로 고려해 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춘천 난초촌과 전주 선미촌 폐쇄, 충남 아산의 성매매 피해 여성 자활 지원 조례 마련, 대구 자갈마당 폐쇄와 여성 자활 지원 조례 제정 등도 시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이뤄냈다.


최민정 기자 mj@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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