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담뱃대
1929년 동래군에서 발행한 "동래군군세요람"을 보면, 당시 동래면에는 담뱃대를 생산하여 전국에 공급하였으며, 담뱃대를 생산 수량은 년간 61,700개이며 생산액은 18,810엔으로 기록되어있다. 대표적인 공장으로는 한윤규연관제조소에는 자본금 1,000엔, 종원업 9인, 생산액은 3,700엔이다.
1929년 동래군군세요람
동래의 고로(古老)들은 이 지방의 명산물로서 서슴지 않고 담뱃대를 든다. 그만큼 동래지방에는 일찍부터 담뱃대를 만드는 수공업(手工業)이 성행하여 부산지방 수공업의 대종을 이루었다.
옛날에는 연관(煙管)이란 이름으로 불린 담뱃대가 언제부터 생산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조선시대에 울산(蔚山)의 병영(兵營)에 무기 제작창(武器製作廠)이 있었고, 이를 중심으로 연관이 많이 생산되었는데 이곳에서 동래지방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추정한다면 대략 150년은 됐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울산을 비롯, 경주(慶州), 김천(金泉) 등 전국 각지에서 담뱃대가 다량 생산되었지만 가장 성했던 곳은 동래라고 한다. 풀무불에 쇠까치를 달구어 두드리는 쇠망치 소리가 여기 저기 쉴 새 없이 들려왔고, 연관공(煙管工)들이 부르는 흥겨운 담바귀타령이 밤늦게까지 흘러나오곤 했던 것이다.
"시작일세 시작일세 담바귀타령이 시작일세
귀야 귀야 담바귀야 동래 울산 담바귀야
너의 국(國)이 어데길레 대한의 국을 왜 왔나
우리 국도 좋건마는 대한의 국을 유람왔네…"
(담바귀타령의 일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물건은 장날이 되면 연관조합(煙管組合)에 가져다주고 그 대금(代金)을 받아와서 직공들에게 임금을 지불했으며, 물건을 인수한 조합은 이것을 직매(直賣)하지 않고 서울에 있는 조합(총판)으로 보내어 전국의 판로(販路)를 통해 거래가 되었다 한다.
그러나 해방 후 서민의 담뱃대가 궐련으로 바뀌고, 언제부터인지 담배가 고급화됨에 따라 담뱃대는 하나 둘 자취를 감추어 민예품으로 장식품화되어 가는 실정이다.
(출처: 동래구>문화관광>전통풍물)www.dongnae.go.kr/index.dongnae?menuCd=DOM_000000401004005000
담뱃대에 관한 우리나라의 옛 문헌에서는 연죽(煙竹)·연관(煙管)·연배(烟盃) 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 연죽이 일반적이다.
담뱃대는 담배를 담아 불태우는 담배통과 입에 물고 빠는 물부리, 그리고 담배통과 물부리 사이를 연결하는 설대로 구성되어 있다. 담배통은 대꼬바리·꼬불통, 물부리는 물추리·빨부리 등으로 일컫기도 한다.
또, 설대가 긴 것은 장죽(長竹), 설대가 없거나 짧은 것은 곰방대[短竹]라 부른다. 담배가 우리나라에 전하여진 것은 임진왜란 후 광해군 때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그 흡연구는 필연적으로 담배 보급 이후에 수반되었을 것이다. 담배는 일본을 통하여 들어온 까닭에 초기의 담뱃대는 역시 일본의 양식이 이식되는 형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담뱃대는 대일무역의 창구구실을 하였던 동래(東萊)에서 일찍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명성을 굳혔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의 ≪오주연문장전산고≫나 ≪규합총서≫에서 동래연죽을 유명물산의 하나로 지목하였고, <춘향전>에서도 “왜간죽 부산대에 담배를 너훌지게 담는다.”는 구절이 보인다.
오래 된 양식의 담뱃대는 담배 담는 통이 작고 설대도 짧았다. 그러나 18세기 풍속도에 나오는 한국인의 담뱃대는 이미 장죽이 유행되었음을 볼 수 있다.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 京都雜志≫에 의하면 조관들이 담배합과 담뱃대를 말 뒤에 달고 다닌다고 하면서, 비천한 사람들은 존귀한 분 앞에서 감히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고 하였다.
또, 서유구(徐有榘)는 ≪금화경독기 金華耕讀記≫에서 “전국에 걸쳐 다투어 사치하는 자들이 백통이나 오동(烏銅 : 검은빛이 나는 구리)으로 담뱃대를 만들뿐더러 금은으로 치장함으로써 쓸데없는 데 막대한 비용을 허비한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조선 말기의 담뱃대에 대한 사치풍조는 대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현재 전통공예로서의 담뱃대가 백통을 기본으로 하여 오동과 금은으로 시문(施文)하고 있는 것과도 일치한다. 종래 담뱃대의 재료는 담배통의 경우 구리·놋쇠·백통을 쓰고 도자기로 된 것도 더러 썼으며, 물부리에 있어서는 쇠뿔·수정·호박·옥 등이 다양하게 이용되었다.
또, 설대는 자죽(紫竹)·반죽(斑竹)을 즐겨 썼으며, 특히 장죽에 있어서는 각죽(刻竹) 및 낙죽(烙竹)으로 치장하는 기법이 성행하였다. 서구식의 파이프는 19세기 무렵 함경도지방에 보급되었는데, 이를 목연통(木煙筒)이라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담뱃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산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형기 (0) | 2020.12.21 |
---|---|
천년의 신비 간직한 동래온천 이야기 (0) | 2020.12.01 |
부산의 세 아지매 아시나요…자갈치,깡깡이아지매, 그 (0) | 2020.09.03 |
비치코밍(beachcombimg) (0) | 2020.08.28 |
잠들지 않는 바다 해운대, 백사장과 동백꽃의 향연 (0) | 2020.08.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