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신비 간직한 동래온천 이야기
동래온천을 언제부터 사람이 이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1500여 년 전 다리를 저는 학이 땅속에서 솟은 따뜻한 샘터에서 멀쩡해지는 것을 본 한 노파가 아픈 다리를 고쳤다는 백학 전설과, 눈 내리던 겨울 사슴이 밤마다 잠자고 가는 것이 신기하여 가보니 사방은 눈으로 덮였는데 그 곳엔 새싹이 자라고 웅덩이에 뜨거운 물이 솟았다는 백록의 전설은 동래온천이 발견된 이야기로 전해 오고 있다.
역사 속에 담긴 동래온천
신라시대
온천 역사에서 지명이 최초로 밝혀진 곳이 동래온천이다.
682년 신라 신문왕 때 재상 충원공이 동래온천에서 목욕하였다고 일연스님의 삼국유사에서 전한다.
1481년 조선 성종 12년 강희맹이 지은 동국여지승람에는 동래온천에서 병자가 목욕하면 병이 나아 신라 때부터 왕들이 자주 찾았으며 온정 주위 네 귀퉁이에 구리기둥을 세워 표시를 남겼고 계란을 익힐 수 있을 정도로 뜨겁다고 했다.
고려시대
1740년 조선 영조 16년에 펴낸 동래부지에는 고려시대 관리들이 노래한 고시에서 당시 동래온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동방 깊은 곳에 돌 우물이 펼쳐있어/ 물살 짓는 맑은 물이 넘칠 듯 가득 찼네/ 촛불 등불이 그림처럼 물 밑을 비추고/ 향긋한 반소매 미인이 욕탕으로 부축하네/
고려 충숙왕 때 문신 박효수가 동래온천에서 목욕한 후 남긴 시 일부이다.
온천물에 유황이 스며들었으니 신비롭기만 하구나/ 동래의 아침 해 돋는 곳에서 목욕함도 꿈만 같거니와/ 외진 땅이라 양귀비도 더럽히지 못하였거니
고려 고종 때 이규보는 동래온천 물이 맑고 깨끗하다고 칠언절구를 남겼다.
조선시대
동래온천은 조선조에 와서 신라, 고려시대의 귀족적인 온천문화에서 벗어나 서민온천으로 활용되면서 의료구제기관 역할도 했다.
역마(驛馬)를 배치하여 각지에서 모여드는 욕객들에게 교통편의를 제공하고 온정 부근에 관립 여관인 온정원을 세워 욕객들이 쉬어갈수 있도록 했으며, 욕객 수가 늘어 번잡해지자 온정원을 만덕고개 주변으로 옮기기도 했다.
선조와 광해군 때 대석학인 정구선생이 1617년 7월 제자들과 함께 동래온천에서 한 달간 요양하며 기록한 기행문 봉산욕행록에는 동래온천 모습과 온천요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온정의 안팎은 신라왕이 지었다는 석감이 있는데 한 감시에 5~6인이 들어갈 수 있다. 온정의 윗부분에는 많은 구멍이 있어 물이 나오고, 수온은 손발을 담그기가 어려울 정도로 뜨겁다. 욕조밖에는 외석정이 있고 온수를 별도로 떠다가 식혀서 목욕할 수 있는 목탕 시설도 있다고 온정을 설명하고 있다.
1691년 동래부사 김홍복은 새로운 온정을 확장하여 온정가라는 관공서를 세우고 온정직이라는 관리를 배치했다.
온천수가 끊임없이 솟기를 기원하는 온천용왕대제 봉행행사는 이 때 부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욕객들이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나자 1765년 동래부사 강필리는 온천의 대대적인 정비와 수량이 풍부한 새 천원을 굴착하여 온정을 조성했다.
이를 기념하고자 세운 온정개건비에 탕에 들어가 목욕하면 온갖 질병이 낫는다. 강필리공이 온정을 다스려 9칸의 욕사를 건립하고 남탕과 여탕을 구분하였는데 상쾌하고 화려하기가 마치 꿩이 나는 듯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공중목욕탕의 시초일 것이다.
근대(일제강점기)
1900년대까지만 해도 온천장은 금정리라는 행정구역으로 금산마을에 30~40여호가 촌락을 이룬 호젓한 마을이었다.
온천장이 오늘날과 같이 관광위락지로 개발된 것은 식염온천에 목욕하기 좋아하는 일본사람들이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부산포 개항과 함께 꾸준하게 동래온천 출입을 요구하던 일본은 국력이 약해진 조선후기부터 온천장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1910년 한일병탄과 함께 본격 온천관광휴양지로 개발되었다,
금정산과 동래천(온천천)이 유유히 흐르는 자연풍광에 반한 일본인 부호들은 다투어 별장을 짓고 여관, 요정 등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또한 일본인은 동래온천 출입의 편리를 위해 1910년부터 부산진에서 온천장 입구까지 경편철도를 운행했다(1915년부터 전차로 교체)
밀려드는 일본인들의 침탈로 동래온천이 그들의 전유물로 변하는 가운데 조선 사람들이 경영하는 여관도 생겨나고 옛 동래부 교방출신 권번예기와 일본기생까지 가세하면서 외교 사절단이나, 일본 주요인사 등 고관대작이 조선을 방문하면 의례히 동래온천에서 쉬어가는, 작은 고을 온천장은 20여 년만에 조선 최고 유흥지로 탈바꿈했다. 바늘 가는데 실이 간다는 속담처럼 동래하면 온천장, 그리고 기생은 동래의 3박자였고 그렇게 전국으로 알려졌다.
특히 우기 때와 겨울철에도 온천장 출입 편리를 위해 온천장 입구에 있던 전차종점을 온천장 안(지금의 부산은행 온천장점 자리)으로 옮겼다. 더불어 온천천에 제방을 쌓여지고 교량도 확장되면서 차량통행도 원활해졌다.
금정산 자락에 조성된 개인정원 금강원도 관광객에게 개방됐다.
1930년대 초부터 시행된 시구개정사업으로 온천시가지가 정비되고 상수도도 보급되었다. 근대적인 온천휴양도시로 탈바꿈한 온천장에는 1년 내내 전국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무전성시를 이루고, 주말과 공휴일에는 전차를 타고 오는 욕객들로 거리는 종일 북적거렸다.
글·사진 : 이상길(전 동래구청 근무·향토자료수집가)
출처: 동래구청>동래고을
<관련 내용>
동래온천 변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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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과 |
2020-1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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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여 년 전 아픈 다리를 고쳤다는 백학의 전설이 ○ 682. 신라 신문왕 때 재상 충원공이 동래온천에서 목욕. |
출처: 동래구청홈>동래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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