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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이야기

1952년 수영강변의 널구지,보리전마을 풍경

Dr. Burstone's films, 1952, Korean War


https://youtu.be/DDrlFyJZXmY


부산 수영강변의 널구지, 보리진 마을 풍경과...


Watch the documentary Korea 1952, created by the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in Seoul, South Korea.
This documentary features film footage and color photographs that were taken by Dr. Charles Burstone,
a WFO fellow and professor emeritus at the University of Connecticut School of Dental Medicine,
while he was serving in the United States Air Force and stationed at the K-9 Air Base in the Suyeong district of Busan,
South Korea, toward the end of the Korean War.



(찰스 버스톤(Charles Burstone씨 육성)

한국에 와서(한국전쟁 당시) 처음으로 영상을 촬영한 것 같습니다,

상대적으로 물건이 저럼한PX에서 모든 물건을 구입했고, 필름도 그곳에서 구입했습니다.

처음에는 흑백필름을 사용햇으며 나중에 칼러필름이 유명세로 칼러 필름도 사용했습니다.

당시 필름이 많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상 촬영은 쉽지 않았고, 대부분 사진촬영을 했습니다.

촬영할 때 중요한 점은 삼각대를 사용해 흔들림을 방지하고 촛점을 잘 맞추는 것입니다.

(수영비행장 East K-9)



1951년 1월 미공군 소속 중위 한사람이 부산 수영비행장에 왔다.

그는 수영비향장 주한미군병원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했다.

이름은 찰스 버스톤(Charles Burstone)으로 미국에서 치의학을 전공햇다.

근무도중 버스톤은 틈틈이 부대안의 일상을 8mm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부산의 일상역시 그것(8mm카메라)로 담았다.

수영비향장 가까이 늘구지와 보리전 마을이 있었다.

두 마을은 현재 피서지로 유명한 광안리 해수욕장 일대에 자리했다.

물동이를 이고 가는 아낙네,  그리고 한 아이, 초가와 돌담,

버스톤이 남긴 필름은 늘구지와 보리전 마을 생활상이 주를 이룬다.




특히 한국의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벌거벗은 아이, 씻기싫어서 우는 아이,

그리고 가사노동을 하는 아이들은 그것이 당연하다.

한편 한국전쟁으로 몰려던 피난민으로 아이들은 학교가 부족해 야외수업을 자주 했다고 한다.

아러한 모습은 버스톤의 필름에 고스란히 담겼다.


널구지와 보리전마을은 동남해와 만나는 수영강 하구에 자리했다.

이 때문에 다양한 형태의 배들, 멸치와 해산물을 채취하는 모습들이 그의 필름에 담겼다.

그리고 수영해수욕장 (수영강)에서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널구지와 보리전 마을에서는 농촌의 다양한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이 역시 버스톤은 놓치지 않앗다. (모내기, 거름주가, 김매기, 타작 등 )

이처럼 그가 남긴 필름에는 다양한 농촌 모습이 담겼다.




카메리를 든 이방인에게 농촌과 어촌이 공존하는 모습들은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왔는지 모른다.

널구지와 보리전마을 사람들은 마을 근처 동래시장을 자주 찾앗다.

버스토은 그 역시 필름에 담았다.(싸전, 풀빵,뻥튀기,국수가게 등 )

한편 강변에 따라 임시로 들어 선 노점들 역시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그 모습 역시 버스톤은 8mm카메라로 담았다.

강변노점에는 풀빵, 술빵, 묵 둥 다양한 먹거리도 한데 모였다.

강변이란 지리적 특징 때문에 한편에서는 낚시와 빨래하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수영에는 송정과 부산 중심가를 잇는 동해남부선 철도가 지났다.

널구지와 보리전 마을 사람들은 숭영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중심가로 가곤했다.

기차가 가고나면 역 근처는 사람들로 붐볐다.

머리에 짐을 인 여인들이나 지게꾼들은 빠른 발걸음을 옮기며 부산중심가로 향했다.(광복로)

한편 부산 중심가 근처에는 피난민들이 모여사는 보수천도 있었다.

이처럼 버스톤의 필름에는 간간이 한국전쟁이 모습들도 묻어있다.(부산항)

영도다리 위에서 천진남만한 얼굴로 버스톤을 맞이한 소년은 고등어를 들고 있었다.

이아이는 이제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을 것이다.






(찰스 버스톤씨)

나는 예전부터 사진촬영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아직도 취미로 즐기고 있습니다.

공군기지에 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상촬영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사진촬영을 즐겠지만 저는 영상촬영을 더 즐겼습니다.

미국과 다른 한국은 매우 흥미로운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 많은 나라들을 다니며 촬영하엿습니다.

그래서 지인들은 저의 영상을 매우 흥미롭게 생각합니다




촬영을 할 때 아이들은 제게 포즈를 취해주엇고 매우 좋아햇습니다. 어른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의 영상에는 많은 아이들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네, 저는 작은 마을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삶과 생활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저는 전쟁에 대한 촬영은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근무한 공군기지에도 전쟁에 관한 많은 일들,...

폭발, 비행기굉음 등이 있었지만 저는 촬영하지 않앗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상의 사진 출처는  하기 유튜브 영상에서  캡쳐한 것임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DDrlFyJZXmY

Dr. Burstone's films, 1952, Korean War/ 김재훈


'널구지 마을'과 '보리전' 마을 이란?

약 300년 전부터 백산 북쪽 보리전 마을(덕민동)과 백산 남쪽 널구지 마을(평민동)인 2개의 큰 자연부락이 있었는데 보리전(덕민동)과 널구지(평민동) 두 마을 백성들이 모여 즐겁게 사는 동네라 하여 1914년 행정지명통일 때  ‘민락(民樂)’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이런 지명 내력이 있지만 주민들은 옛부터 불러온 널구지마을, 보리전마을 이라고 불렀는 것으로 보인다



<<찰스 버스톤의 사망에 관한  중앙일보 기사>>

한국전 참전용사 애제자 정년퇴임 기념 강연 왔다 별세

6.25 참전 용사 출신인 미국의 치과교정학 권위자인 찰스 버스톤 코네티컷대 치의학대학원 명예교수가 한국 방문 중에 별세했다. 향년 87세. 버스톤 교수는 아끼던 제자인 박영철(65) 연세대 치과대학 교수의 정년퇴임 기념 학술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지난 8일 한국을 찾았다. 11일 오전 학술대회에서 특강을 마친 뒤 숙소인 연세대 내 영빈관에서 머물다 갑작스런 심근경색으로 숨졌다. 고령인데다 건강이 좋지 않지만 애제자의 정년퇴임을 축하하려고 힘들게 방한길에 오른 것이었다.

연세대 치과대학은 24일 신촌 세브란스병원 내 장례식장에서 버스톤 교수의 영결식을 진행했다. 영결식엔 그의 지도를 받은 제자들과 연세대치과대학 교정학교실 교수진, 대한교정학회 회원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유해는 화장 뒤 고향인 미국 세인트루이스로 보내질 예정이다.

버스톤 교수는 1951년부터 2년간 미 공군 군의관으로 6.25에 참전해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특히 52년 부산 수영 K-9비행장에 근무하면서 주변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전쟁이 한창이던 때지만 그는 전쟁의 참상보다는 피란 온 사람들의 일상에 초점을 맞춰 사진과 영상을 남겼다. 그는 2009년과 2010년 2회에 걸쳐 컬러슬라이드 95장과 흑백사진 1장, 그리고 3분51초 분량의 컬러 동영상을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했다. 2011년엔 그의 기증품을 모은 전시회 ‘KOREA 1952’가 열리기도 했다.

그런 남다른 인연 때문인지 버스톤 교수는 한국에서 온 제자들을 유독 아꼈다. 평생 20명이 넘는 한국 교정 전문의를 가르쳤다. 84년 코네티컷대에 온 박영철 교수가 그의 첫 한국인 제자가 됐다. 그는 2년 동안 박 교수를 지도하며 제자가 미국 교정학계에서도 날개를 펼치도록 도왔다. 덕분에 박교수는 85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교정학회지에 연구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86년부터는 직접 한국을 찾아 강의를 펼쳐 2004년 대한치과교정학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강연자에게 수여하는 상인 ‘Ryu‘s lecture award’ 1회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영결식에서 박교수는 “제 정년퇴임을 축하해주러 오셨던 스승님이 너무나 갑작스레 떠나 마음이 많이 아프다”며 “한국을 사랑했던 스승님이 마음이 잊히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에스더 기자 etoile@joongang.co.kr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출처: 중앙일보 https://news.joins.com/article/17215584


Dr. Charles J. Burstone

Charles J. Burstone, 1928-201

Charles J. Burstone은 1928 년 4 월 4 일 미주리 주 캔자스 시티에서 레스터 박사와 로즈 버스 톤 박사에게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제 Marvin은 모두 치과 의사였습니다. Charles는 아버지와 형제처럼 1950 년에 St Louis의 Washington University에서 치과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1951 년 미국 공군에 합류하여 한국 전쟁 중에 한국의 치과 병원 대위를 역임했습니다. 1953 년,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1955 년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치열 교정학 석사 학위를 받고 치열 교정에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전문 훈련을 마친 후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교수직을 수락 한 후 회장과 교수가되었습니다. 1961 년 치과 교정학과에서 연구를 육성하고 프로그램의 전문 교육을 진흥시키는 데 핵심이되었습니다.


Burstone 박사는 치열 교정술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많은 관심사와 취미가있었습니다. 그는 예술, 음악 (특히 Wagnerian Operas) 및 사진을 즐겼습니다. 전쟁 중 한국에서의 그의 시간은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사진과 영화는 갈등의 시대에 일상을 묘사했습니다. 서울 국립 민속 박물관은“한국 1952”라는 제목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전시회를 열었으며, 한국의 전국 TV에 실린 다큐멘터리에 통합되었습니다. Charles J. Burstone 박사는 86 세의 나이에 서울에서 강의를하던 중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한국에 전념했으며 마지막 강의가 서울에서 진행된 것은 참으로 적합한 일이다.

2015 년 2 월 27 일 코네티컷 대학교 (University of Connecticut)에서 열린 추모식에는 전 세계의 많은 과거 학생들과 가까운 친구들이 참석했습니다. Burstone 박사는 평생 교정 치과의 발전에 헌신했습니다. 치열 교정 커뮤니티는 진정으로 그에게 빚을지고 있으며 교사, 지도자 및 친구의 상실을 계속 슬퍼 할 것입니다. 그의 전문 분야에 대한 그의 공헌은 교정 연구 및 임상 실습을 형성했으며, 그의 영향은 앞으로도 계속 느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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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ajodo.org/article/S0889-5406(15)00468-0/fullt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