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마지막 건축물 ‘가덕도 등대’의 운명은…
등록 :2019-07-02 17:33수정 :2019-07-02 20:04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한·일 해상 교통요충지이자
동서양의 양식 결합한 수작
신공항 터 지목된 위치 탓에
등대에 닥쳐올 격변의 미래 ‘착잡’
정면부에 돌출된 출입문 지붕을 좀더 가까이서 촬영한 모습. 지붕 가장 위쪽에 세개의 꽃잎마다 각 두개씩 꽃술이 뻗어나간 오얏꽃 무늬 장식물이 보인다. 지붕 안쪽 천장 부근에도 오얏꽃잎을 확대한 듯한 무늬를 볼 수 있다.
“저기 지붕 위에 오얏꽃 보입니까? 그땐 대한제국이 살아있었습니다! ”
올해로 건립 110돌을 맞은 부산 가덕도 등대(부산시 문화재)의 출입문 앞에서 연구자 석영국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 1일 낮 답사단과 함께 여기에 닿자마자 그가 손을 들어 가리킨 건 등대정면 출입문을 덮은 맞배지붕 위 장식물이었다. 세개의 꽃잎에 각각 두개의 꽃술이 뻗어간 단아한 꽃 장식. 대한제국의 상징 오얏꽃이 맞다. 지붕 안쪽 천장 부근에도 오얏꽃의 꽃잎, 꽃술을 확대한 무늬가 보였다.
믿기지 않았다. 한반도 동남쪽 부산의 서쪽 변두리섬 가덕도의 가장 깊숙한 곳에 대한제국 건축의 마지막 흔적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었다. 가덕도 등대는 1909년 12월25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날 첫 점등을 했다. 한·일 월드컵이 열린 2002년까지 대한해협을 비추는 임무를 93년간 묵묵이 맡아왔다. 해양수산부 항로표지 공무원으로 일하다 퇴직한 석씨의 안내로 돌아본 등대 내외부의 얼개는 옛 등대건축의 현장 박물관과 다를 바 없었다.
대한제국 건축의 마지막 흔적으로 꼽히는 가덕도 등대의 전경. 사각형 평면에 벽돌로 벽을 쌓고 그위에 팔각형 등탑을 올렸다. 외벽과 등탑, 등롱, 굴뚝, 난간 등이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가덕도 등대는 등탑 외에 관리직원의 숙소와 부엌, 목욕탕, 화장실을 한 건물 안에 일체로 갖춘 혁신적인 얼개가 가장 주목되는 특징이다. 이는 국내 근대 등대들 가운데 유일한 사례다. 인천 팔미도 등대나 포항 호미곶 등대 등 국내의 유명한 근대 등대들은 등탑만 외따로 있고 주거 시설동은 후대 분리된 채 지어진 것 밖에 없다. 내부를 살펴보니, 부엌의 큰 가마솥과 목욕탕의 탕물을 데우는 목욕솥, 일본식 화장실과 다다미 깔린 방 등이 그대로 남아있어 과거 외로이 등대를 지켰던 등대지기들의 고단한 삶을 엿보는 듯했다. 건물 안의 좁은 계단과 사다리를 올라가 위쪽 등탑의 등명등 시설과 이를 감싼 돔 유리창 덮개인 등롱을 둘러 보았다. 내외부가 판자와 철제로 만들어진, 등명등 시설을 감싼 등롱 또한 1909년 건립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가덕도 등대는 등탑 외에 관리직원의 숙소와 부엌, 목욕탕, 화장실을 한 건물 안에 일체로 갖춘 혁신적인 얼개가 특징이다. 근대 등대건축물 가운데 유일한 사례다.
유리창 너머로는 기암괴석의 절경인 섬의 동쪽 해벽이 가까이 눈에 잡히고, 멀리 바다안개 사이로는 동쪽 부산 다대포의 산야가 흐릿하게 내다보였다. 남쪽으로는 맑은 날 일본 쓰시마의 풍경이 뚜렷하게 보이고, 서쪽으로는 진해로 빠지는 수로의 배들도 눈에 띄었다. 이 가덕도 남단의 등대 자리가 한국과 일본, 남해안 연근해를 지나는 핵심 해로를 한눈에 굽어보는 최고의 요지이며, 가덕도가 역사적으로 해양 교류의 요충지로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조망 자체로도 실감할 수 있었다. 등대건축사를 연구해온 김종헌 배재대 교수는 말했다. “가덕도 등대는 대한제국이 주체적으로 예산을 들여 해양 기반시설을 건립했음을 보여주는 실체적인 근거로서 의미가 큽니다. 한·일 양식과 근대의 서구 고전양식이 어우러진 한국 등대건축의 숨은 수작으로 국가 사적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덕도 등대 정문과 옛 본체 건물. 정문에 ‘가덕도항로표지관리소’라는 간판이 내걸렸다. 오른쪽 높은 건물은 2002년 훨씬 큰 규모로 지어진 신등대 등탑이다.
이날 답사는 ‘2019 세계 항로표지의 날’(1일)을 맞아 해양수산부와 한국항로표지기술원이 꾸린 행사 중 하나였다. 지난해 인천에서 열린 국제항로협회(IALA)총회에서 매년 7월1일을 등대를 비롯한 항로표지를 전세계에 알리는 날로 만들자는 공동선언이 나오면서 올해 첫번째 기념일에 ‘올해의 등대’를 가덕도 등대로 선정하고 그 역사적 가치를 알리는 답사행사를 열게된 것이다. 2일에는 부산 벡스코에서 국내외 등대연구 성과를 발표 토론하는 학술포럼도 열렸다. 현재 국내에 있는 유·무인 등대 1800여곳 가운데 근대문화유산으로 분류할 수 있는 등대는 23개밖에 되지 않는다. 70~80년대 등대를 정비하고 무인등대를 들이는 과정에서 구한말, 일제강점기 세운 근대 등대 상당수를 헐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내력을 지닌 국내 근대등대의 역사에서 최근들어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뒤늦게나마 재조명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가덕도는 고대부터 중요한 해상 교통의 요지여서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정주역사만 6000년이 넘는다. 2000년대초 이곳에서 신석기유적을 발굴한 결과 보기 드문 신석기 시대 섬사람의 인골들이 무더기로 나와 고고학계의 눈길을 모았다. 구한말 러일전쟁 당시엔 일제가 포병시설 등을 건립해 해방 직전까지 군사시설로 운용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어 최근엔 역사관광지로도 부각되기 시작했다. 등대 유산 못지않게 고대 해상 교류와 일제 강점기의 군사유적지로서도 가덕도의 가치는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등대가 있는 가덕도 남단과 주변 해역은 최근 다시 논란을 빚고있는 동남권 신공항 터로 지목되는 곳이다. 해금강을 방불케하는 등대 앞 해벽의 절경과 오얏꽃 새긴 대한제국 최후의 등대는 앞으로 어떤 운명을 맞게될까. 역사의 굽이마다 격랑의 공간이 되었던 섬의 아름다운 풍광도 신공항의 건립 여부에 따라 격변이 불가피할 것이다. 가덕도등대의 알 수 없는 장래를 생각하니 머리 속이 착잡해졌다.
가덕도/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출처: http://www.hani.co.kr/arti/PRINT/9002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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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도등대
대진은 고려시대에 여산현(驪山縣), 그후에는 열산현(烈山縣)에 속해 황금리(皇琴里 황구리)라고 불러왔고,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는 한나루(大津里)라 개칭하였다. 그후 1920년에는 고성군 현내면 소재리로 승격하였으며, 한나루(포구)에 항을 쌓아 조그마한 어항으로 축조되었다. 1954년 10월 21일 대한민국 행정권이 수복되어 전국 각지에서 이곳에 피난민이 일시에 많이 몰려, 대진리 일원만 9,000여명으로 늘어 대진 1,2,3리로 분할 관할하였고, 1973년에는 행정 구역 조정상 2개리를 늘려 대진 4,5리로 분할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대진등대는 등탑이 팔각형 콘크리트로 이루어져 있고, 불빛은 12초 간격으로 깜빡이며, 약 37km 떨어진 해상에서 식별이 가능하다. 또한 등탑 위 전망대에 올라서면 동해바다의 아름다운 모습을 조망할 수 있으며 환상적인 일출과 석양을 감상하기에 제격이다. 특히, 시야가 좋은 날에는 멀리 해금강은 물론이고 북한지역까지 바라볼 수 있다. 대진등대는 설치당시 1개의 유인등대와 또 다른 보조등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대진등대가 설치된 목적이 어로한계선을 표시하는 도등(2개의 등대를 연결하는 선이 어로한계선)의 역할을 하기위해 1973년 1월 불빛을 밝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1991년 어로한계선을 북쪽으로 5.5㎞으로 상향 조정하면서 도등의 역할을 마치고 1993년 4월 1일 일반등대로 전환되었다. 대진등대의 또 하나의 특징은 동해안 최북단의 무인등대인 저진도등을 원격으로 관리하는 곳이라는 점이다. 저진도등은 2개의 등대를 연결한 선이 어로한계선임을 표시하면서 어선들이 월북 조업하지 않도록 안전한 위치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 저진도등의 전도등은 35m, 후도등은 20m의 높이로서 홍백 사각의 콘크리트 등대이다.
속초라는 명칭에 대하여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조선 영조36년(1760년)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로 조선시대 양양도호부 소천면(所川面) 속초리(束草里) 라는 한 동리였으며, "묶을 속(束)"자, "풀 초(草)"자 라고 쓴다. 이는 영금정(靈琴亭)과 연관되어 지어진 이름으로, 영금정(靈琴亭)옆에 솔산이 있는데 바다에서 이 포구를 들어다 보면 그 솔산이 소나무와 풀을 묶어서 세워 놓은 것 같은 형태라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풍수지리적으로 속초(束草) 지형이 와우(臥牛)형으로 소가 누워서 풀을 먹고 있는 형국으로서, 소가 누워서는 맘대로 풀을 뜯지 못하므로, 풀을 묶어서 소가 먹도록 해야 한다는 뜻으로 지었다고도 하며, 또 "한국지명총람"에는 속새울, 속새골 이라고도 불렀으며 속새가 많아 그리 불렀다는 기록도 있는데 속새를 한자로 표기하니 속초라는 것이다.
속초에 등대가 세워진 것은 6.25 전란 후 휴전선을 바로 앞에 둔 속초에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항구 개발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선박들이 빈번하게 드나들면서부터이다. 속초등대는 1956년 12월에 착공하여 1957년 6월 8일부터 등대불을 밝히기 시작하였으며, 등탑은 높이가 10m로서 등대가 위치한 절벽높이 38m까지 합쳐 해발높이는 48m에 달했다. 등대불빛은 45초에 4번 반짝이며 그 빛은 36km 거리에서도 식별이 가능하다. 속초등대의 등명기는 1953년 일본에서 제작, 1957년 등대설립 당시에 설치되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으며, 이 렌즈의 직경은 무려 1m에 달한다. 특히 이 등명기는 추의 무게로 회전하는 방식으로 추 무게가 최대 230㎏까지 활용되며 시계추 같은 역할을 하는 이 추가 한번 내려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7시간이다. 속초등대 전망대에서는 속초항방파제등대를 비롯하여 조도북방등부표, 조도등대, 속초항등표 및 조도남서방등표 등 여러 종류의 항로표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속초등대는 2005년 종합정비공사를 착공하여 2006년까지 시행되며, 신축되는 등대는 높이 28m의 구조물로서 등고가 66m에 달한다. 또한, 해양수산홍보관, 등대테마공원 및 바다전망대 등을 설치하여 관광명소로 가꾸어나갈 계획이다.
묵호는 옛날에 오이진이라 했는데 한일 합방 이후 이곳을 통해 연탄이 취급되자 맑았던 오이진이 먹물처럼 검어져 그 당시 누구인지 기록이 없으나 먹물 같은 나룻가라 해서 묵호진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묵호항은 1941년 8월 11일 개항(開港)되어 무연탄 중심의 무역항의 역할과 함께 어항으로 발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묵호등대는 1963년6월8일 건립 되어 항해하는 선박들의 안전운항에 기여하게 되었다. 해발고도 67m에 자리 잡은 묵호등대는 백원형 철근콘크리트조이고, 높이는 12m의 내부 2층형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봄이면 개나리가 화사하게 피고,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소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작은 해양수산홍보관은 해양수산 변천사를 알려주고 있으며, 소공원은 이곳을 찾는 관광객과 지역주민들에게 볼거리와 편안한 휴식처를 제송한다. 특히, 묵호등대 소공원에는 1968년 정소영 감독 作 영화 「미원도 다시 한번」의 주요촬영지임을 기념하기 위해 2003년 5월「영화의 고향」기념비가 세워졌다. 묵호등대는 묵호지역 해변가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바다에서 등대 식별이 용이토록 되어 있으며, 2003년 10월 설치한 국내기술로 개발한 프리즘렌즈 회전식 대형등명기의 불빛은 42km에서도 식별이 가능하다.
독도 입도는 1회 470명 , 여객선 1일 운항 무제한 ▶독도 관람 구역은 동도 선착장 으로 제한 ▶ 여객선 매일운항 (3월 ~ 11월) 독도관광시 해상 및 계절에 따라 운항 시간이 자주 변경 됨으로 여객선사에 문의하는 것이 좋다.
바다 한복판에 두 기둥이 우뚝 서서 위풍 당당하게 바다를 바라보는 웅장한 모습의 독도! 거기에 우리의 바다를 비추는 독도등대가 서있다. 독도는 망망대해 위에 깍아지른 바위 봉우리로 규모는 작지만 거제의 해금강이나 여수 백도 못지않게 독도의 풍광은 웅장하여 관광지로도 손색이없으며, 코끼리를 닮은 독립문바위와 주변에 크고 작은 암봉, 가제바위와 탕건봉 등은 바다 한가운데 펼쳐진 기암 전시장처럼 보인다. 동도와 서도 두섬 사이 수면 아래로는 자갈과 모래가 환하게 들어올 정도로 너무 맑다. 바다와 하늘과 조화를 이룬 독도의 자연 경관은 그야말로 한폭의 그림을 방불케 한다. 이 섬은 해저 약 2000m에서 솟은 용암이 굳어져 형성된 화산섬으로, 약 460만년 전부터 250만년 전 사이에 형성되었다. 울릉도가 약 250만년 전부터 생성된 것에 비해 약 200만년 앞선다. 독도등대는 독도 주변해역 조업어선의 안전을 위하여 1954년 8월에 무인등대로 최초 설치되었으며, 1998년 12월 광력을 증강하고 사람이 상주하는 유인등대화하였다. 현재의 독도등대는 백색원형콘크리트 구조로(높이15m) 백색 불빛이 10초에 한번 깜박이며, 46km의 먼곳까지 불빛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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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점등일 1954년 8월10일
- 위치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행남길 291-71
- 특징 : 우리나라 최 동단의 화산바위섬에 세워진 등대이며 등대원이 상주근무하여 국토지킴이 역할과 선박안전에 기여하고 있다.
- 연락처 : 독도 항로표지 관리소 054-791-1161
교통안내
포항여객선터미널 → 썬플라워호(1일1회 왕복, 3시간10분소요),
우리누리1호(1일1회 왕복, 3시간 20분 소요)
강릉여객터미널 → 씨스타3호, 씨스타5호
(1일1회 왕복, 3시간 소요)
묵호여객선터미널 → 씨스타1호, 씨스타7호
(1일1회 왕복, 3시간 소요)
울릉도(도동,저동) → 해안산책로(도보 30분 소요)
도동등대에서는 북쪽으로는 저동항의 아름다운 모습과 촛대바위가 한눈에 조망되며, 울릉도의 상징인 성인봉 의 정상을 볼 수가 있다. 울릉8경 중 도동모범(道洞慕帆 : 도동항 석양 무렵 오징어배 출어 모습), 저동어화(苧洞漁火 : 저동 야간 오징어잡이 불빛)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울릉도를 찾는 많은 관광객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다.
도동과 저동 사이의 해안을 끼고 있는 촌락으로 울릉도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겨울에도 살구꽃을 볼 수 있는 따뜻한 마을 어귀에 큰 살구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하여 행남(杏南)으로 전래되고 있으며, 지형이 뱀의 입처럼 되었다고 하여 살구남(口南) 이라고도 한다. 청명한 날에는 등탑에서 정동쪽으로 독도를 볼 수 있으며, 북쪽으로는 저동항의 아름다운 모습과 촛대바위를 눈 아래로 볼 수가 있고, 울릉도의 상징인 성인봉의 정상을 볼 수 있다. 도동등대는 울릉도의 동쪽 끝 행남말(杏南末) 끝단 (등고 116m)에 위치하며, 1954년 12월 무인등대를 설치하여 운영하여 오다가 독도 근해 조업 선박이 증가하여 연안표지시설의 필요성이 있어 현재의 위치에 광력을 증강하여 1979년 6월 유인등대화 하였으며, 신비의 섬 울릉도 뱃길의 길잡이로서 도동등대 새단장이 2006년말 마무리되면 소규모 공원과 전시실을 갖춘 자연친화적인 해양문화공간으로 거듭나게 된다. 인근에는 도동약수터가 있는데 이곳의 물은 독특한 청량 음료의 맛으로 소화를 도우고 신경통과 피부병에 효과가 크다고 한다.등대에서 한눈에 바라보이는 저동항은 국가어항으로 울릉도의 유일한 어업전진기지로서 새벽에는 울릉도 근해에서 밤새 낚은 오징어의 참맛을 볼 수 있으며 수평선 너머 떠오르는 일출광경을 볼 수 있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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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점등일 1958년 4월 11일
- 위치 : 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태하등대길 188
- 특징 : 우리나라 동쪽 끝 울릉도 서단의 향나무 군락지인 대풍감에 위치하여 대화퇴어장과 육지에서 울릉도로 운항하는 선박의 육지초인표지 역할을 하고 있다.
- 연락처 : 울릉도 항로표지 관리소 054-791-5334
교통안내
강릉여객선터미널 → 씨스타3호,5호(1일1회 왕복, 3시간 소요)
묵호여객선터미널 → 우리누리호(1일1회 왕복, 3시간 30분 소요)
씨스타1호,7호(1일1회 왕복, 1호 2:40분 , 7호 3:40분 소요)
포항여객선터미널 → 썬플라워호(1일1회 왕복, 3시간 20분 소요)
울릉도(도동) → 태하(시내버스 1시간 소요)→ 도보(40분소요)
옛날 삼척의 한 사또일행이 바다로 선유놀이를 갔다가 갑작스런 돌풍을 만나 울릉도에 표류하여 배고픔에 지쳐 있었는데 황토 흙을 발견하고 이 흙을 먹고 연명하였는데 흙을 먹어본 사람마다 흙 맛이 다르다고 하여 대풍감 끝자락의 흙 이름을 황토구미(黃土口味)라 불리었다고 한다. 울릉도등대는 이 곳에 위치한다.
울릉도는 512년(신라 지증왕 13년) 신라의 이사부가 독립국인 우산국을 점령한 뒤 우릉도(羽陵島)▶무릉도(武陵島) 등으로 불리다가 1915년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고 섬 전체가 화산작용에 의해 형성된 종상화산(鐘狀火山)이다. 섬의 중앙부에는 최고봉인 성인봉(984m)이 있고, 그 북쪽 비탈면에는 칼데라 화구가 무너져 내려 생긴 나리분지가 있으며, 평지는 거의 없고 해안은 대부분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각형 모양으로 면적은 72.56㎢이다. 울릉도 동쪽 끝 대풍감 끝자락에 태하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태하는 김(해태)이 많아서 불리었다는 설과 안개가 자욱하다고 불리었다는 설이 있다. 1958년 최초로 점등 되어 울릉도 인근을 항해하는 선박들의 파수꾼 역할을 해오고 있다. 등탑은 백색 원형콘크리트 구조로 높이는 20m이며, 2003년 10월 국내기술로 개발한 프리즘렌즈 회전식 대형등명기로 교체하여 50km까지 불빛이 나아간다. 울릉도등대로 오르는 등산로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오솔길과 푸른 숲으로 되어 있으며, 경사가 완만하고 기암절벽과 풍광이 아름다워서 관광객들의 등산코스로 많이 사랑받고 있다.
죽변등대가 위치한 곳은 용의 꼬리라 하여 용추곶이라 부르기도 하며 지역주민들은 용태미라 부르며, 죽변등대가 있는 육지에서 바다까지는 암초가 깔려 있고 암초의 중간부분에 용소라고 부르는 곳이 있는데 용이 하늘로 승천 하였던 곳이라 전해 내려오고 있다. 조선시대부터 이곳에서 기우재를 지내면 비가 내린다고 한다.
호미곶을 제외하고 동해안에서 바다로 가장 많이 뻗어 있는곳이 죽변곶이다. 파도소리와 울창한 대나무 숲으로 둘러쌓인 이 곳에 죽변 등대가 우뚝 솟아있다. 죽변은 대나무가 많이 자생한다고 붙여진 지명이다. 특히 이 곳에 자생하는 小竹은 화살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되어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보호하였다고 전한다. 이 등대는 1910년 11월 24일 건립되었으며, 구내에는 1911년 일본국 수로부에서 설치한 수로측량 원표가 남아있다. 죽변은 우리나라 동해안 항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울릉도와는 직선거리상 가장 가까운 곳이다. 등탑의 높이는 16m로 백색의 8각형 콘크리트구조로 되어 있으며, 불빛은 20초에 한번 반짝이며 약 37㎞까지 불빛이 전달된다. 등탑은 2005년 9월 경상북도 지방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되어있다. 현재 등탑내부 천정에는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원래는 대한제국황실의 상징인 오얏꽃문양이 새겨져 있었다고 전한다. 등대 주변풍광 또한 무척이나 아름다워 2004년에는 이곳을 배경으로 SBS에서 ‘폭풍 속으로라는 드라마를 촬영하기도 하였다.
후포항에는 11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어선들이 경북 동해안의 대표적인 수산물인 대게잡이를 나선다. 어획량만 비교하면 울진군이 영덕군보다 많다. 이는 후포항에서 25㎞ 떨어진 왕돌초에서 대게잡이가 활발하기 때문이다.
동해의 푸른바다와 산야를 끼고 아름다운 해변의 풍광을 자랑하는 후포항은 울진군의 가장 남쪽에 자리한 항구로서 동해안 항로중간에 위치하여 동해중부해역에서 조업하는 선박의 어업전진기지이다. 후포항 끝자락에서 북동쪽 해안선을 따라가면 해발 64m의 풍광이 아름다운 등기산 꼭대기에 올라 등대로 들어서는 입구가 바로 후포등대이다. 등대가 위치한 등기산은 옛날부터 부근을 지나는 선박의 지표역할을 하기 위하여 주간에는 흰 깃발을 꽂아 위치를 알리고 야간에는 봉화 불을 피웠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후포등대는 1968년 1월 최초점등을 하였으며, 불빛은 48Km에 이르러 후포앞바다를 운항하는 선박들의 길잡이 역할을 할 뿐 아니라 후포항과 동해바다를 관망하는 전망대 역할도 한다. 후포항 방파제는 동해에서 이름난 낚시터로써 사철 낚시꾼들이 몰려 들어 감생어, 흑도미, 학꽁치 등을 잡을 수 있으며, 후포등대 정상에는 어린이 놀이시설과 점 전망대가 있어서 관광객들이 쉬어가기에 좋은 곳이다.
고산자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만들면서 호미곶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동쪽으로 확인하고 호랑이 꼬리부분이라고 기록하였다. 육당 최남선은 백두산호랑이가 연해주를 할퀴고 있는 형상으로 한반도를 묘사하면서 이곳을 "호랑이꼬리"라고 이름하였고 영일만의 일출을 조선십경(朝鮮十景)중의 하나로 꼽은바 있다. 매년 해맞이 축전행사가 열린다.
한반도 최동단에 위치해 일출로 전국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는 곳이 "호미곶 (虎尾串)"이다. 16세기 조선 명종때 풍수지리학자인 "남사고"는 한반도의 모양새가 호랑이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형상이라며 백두산은 호랑이 코, 호미곶은 호랑이 꼬리에 해당한다면서 이곳을 천하 명당으로 꼽았다. 융희원년(1907년)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륙진출의 기반을 다질 즈음인 1907년 9월 9일 일본수산실업전문대학 실습선(快應丸)이 대보 앞바다를 항해하다가 암초에 좌초되어 승선자 4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등대시설 공사를 하게 됐으며 1908년 12월 호미곶 등대가 건립됐다. 이 등대는 8각 연와조로 철근없이 벽돌로만 지어졌으며 내부는 6층이며 등탑 높이는 26.4m이다. 등탑 내 각층 천정에는 대한제국 황실 문양인 "오얏꽃(李花文)"이 새겨져 있고 출입문과 창문은 고대 그리스 신전 건축의 박공양식으로 장식돼 있다. 또 상부는 돔형 지붕 형태에 8각형 평면이 받치고 있으며 하부로 갈수록 점차 넓어진다. 등대의 불빛은 35km까지 전달된다. 1982년 경상북도 지방기념물(제39호)로 지정되었다.
연인들의 은밀한 공간으로 제격인 송대말등대는 감포항이 한눈에 들어오며 달빛서린 밤바다는 온몸이 저리도록 강한 성정을 내뿜는다. 신라문무대왕의 혼이 깃든 신비로운 대왕암 일출을 감상할 수 있는 봉길해수욕장이 송대말등대에서 10km 거리에 있다.
삼국통일을 이룩하고 죽어서도 龍이 되어 동해를 지키겠다는 유언을 남긴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에서 멀지 않은 곳에 경관이 수려한 감포항이 있다. 항구 북단에는 끝없이 펼쳐지는 동해 망망대해를 지키는 송대말(松臺末)등대가 자리잡고 있다. 송대말에는 수령 300년∼400년 정도의 소나무숲이 무성하다. 감포항 인근 해역에는 암초들이 길게 뻗어 있어 작은 선박들의 해난사고가 빈번하자 암초들의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1933년 2월 감포어업협동조합에서 등간(燈竿)을 설치하였다. 그러다 감포항 이용선박이 점차 늘어나게 되면서 감포항 북쪽 송대말(松臺末)에 1955년 6월30일 무인등대를 설치했다. 그후 육지표시 기능의 필요성이 제기돼 1964년 12월20일 기존 등탑에 대형 등명기를 설치해 광력을 증강하고 유인등대로 전환했다. 원래 등탑은 백색의 원형이었으나 지난 2001년 12월 등대를 종합정비하면서 신라시대를 대표하면서 문무왕의 은혜를 기리는 의미를 지닌 ‘감은사지 3층 석탑’을 형상화한 모습으로 건립하였다. 또한 전시실을 마련하고 등대 및 바다와 관련된 자료들을 전시해 두어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나는 죽은 뒤 큰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리라“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던 신라 30대 문무대왕, 서기 681년 그는 숨을 거두면서 이 같은 유언을 남겼다. 그의 유언에 따라 화장한 유골을 동해 앞바다에 안장하여 그곳이 경주 감포 앞바다의 대왕암. 아내 문무대왕비도 남편과 같이 호국대룡이 되기를 바랬고, 죽어 용이 된 뒤 울산 앞바다로 내려왔다. 용이 떨어졌던 바위를 댕바위(대왕바위)라 불렀고, 바위 뒷산을 댕바위산이라 불렀다. 이후에 등대가 생기자 등대산이라 불렀으며, 현재는 공원을 조성하고 바위의 이름을 따서 대왕암공원이라 부르고 있다. 또한 등대 동쪽에 깊숙이 뚫린 자연동굴이 바위벼랑 아래 입을 벌리고 있는데, 물결이 동굴 깊숙이 들어갔다 빠져나올 때는 그르륵! 하고 용의 울음소리가 들린다하여 용굴이라 불렀고, 파도가 사나울 때는 굴속이 쿵쿵 울릴 만큼 소리가 심하여 여름철에도 오싹함을 느낀다.
태백산맥이 마지막 뻗어내려 그 끝머리가 깊숙이 방어진 반도에 꼬리를 감춘 곳,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해안의 절경을 이루고 있어 “제2의 해금강”이라 불리는 울산의 끝 “울기(蔚埼)”에 등대가 건립된 것은 1906년 3월 높이 6m의 백8각형 등탑이 세워지면서 부터이다. 조선시대 말을 기르던 목장이었던 이곳에 러▶일전쟁 이후 해군부대가 주둔하면서 인공적으로 1만 5천 그루의 해송림이 조성되었다. 그 후 등대 주변의 해송들이 자라 하늘을 감싸 안아 등대불이 보이지 않게 되자, 1987년 12월 기존 위치에서 50m를 옮겨 촛대모양의 아름다운 등대를 새로 건립하여, 동해안을 따라 항해하는 선박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대왕암공원 내에 등대가 위치하여, 등대로 가는 600m의 길섶에는 타래붓꽃, 수선화, 해당화, 해국 등 각종 야생화가 찾는 이를 반기며, 매년 4월이면 왕벚나무 터널이 만개하여 장관을 이룬다. 등대를 지나 계단을 내려서면 문무대왕의 호국영령이 서려 불그스름한 기운을 띤 대왕암이 청자빛 하늘과 코발트빛 바다를 그은 수평선 위로 살짝 돋아나면서 절경을 자아낸다.
방어진 서쪽 해안마을의 바다에 돌출된 검회색 바위 위에는 이상하리 만큼 하얗게 꽃문양을 연상시키는 무늬가 박혀 있다고 하여 “꽃바위(花岩)”라 불렀고, 주변 마을을 “꽃방마을”이라 불렀다.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 바닷물이 만조를 이루었을 때, 출렁이는 물결에 드리워진 꽃무늬는 더할 나위 없이 절경을 이루었고, 저녁 무렵 바닷물이 썰물로 빠져 나가면서 바다 속에 잠겨 있던 천태만상의 바위형상들이 만물상을 이루는 모습을 보고는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시인묵객들은 “화암만조”(花岩晩潮)라 부르며 방어진 12경중 제1경으로 꼽기도 하였.으나, 1989년 항만축조 및 매립사업으로 모두 사라져 버렸다.
1961년 이후 울산에 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부터 산업의 대동맥인 석유화학제품들이 쏟아졌고, 울산항에는 이를 실어 나르는 배들의 왕래가 잦아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해양오염사고 방지 및 선박의 안전항해를 위한 항로표지 설치가 절실히 요구되어졌고, 울산항 관문에 위치한 꽃방마을 끝단에는 천년동안 안전하게 항해하기를 기원하는 거북이 모양의 등대가 세워졌다. 이후 조선산업의 발달로 항만 축조 및 매립이 이루어져 바다쪽으로 등대를 옮겨야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낮아진 등고를 보완하고 울산항을 출입하는 선박들의 길잡이 역할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높은 등대 설치가 요구되었다. 마침내 1994년 12월 동양최대 규모의 등대가 건립되어, 머나먼 여정을 헤쳐온 선박들을 안전하게 울산항으로 인도하게 되었다. 특히, 해상교통의 요충지인 이곳 화암추등대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여 전망대에 오르면 생동감 넘치는 울산항과 24시간 불빛을 내뿜는 산업단지의 역동성을 한 몸에 느낄 수 있으며, 등대 앞 방파제의 강태공들이 계절에 따라 색다른 손맛을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간절곶이라는 명칭을 동해 먼 바다를 항해하는 어부들이 동북이나 서남에서 이 곳을 바라보면 긴 간짓대(긴 대로 만든 장대)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졌다. 한자로는 "艮絶"이라 표기한다. "곶(串)"이란 육지가 바다쪽으로 뾰족하게 돌출된 부분을 가리키는 말로 신라 때부터 "고차(古次)" 또는 "곶"이라 써왔고, 조선시대 용비어천가에 "등산곶", "잦곶" 등이 기록돼 있다. 간절곶을 조선 초기 "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지리지" 에는 이길곶(爾吉串)이라 하였는데, 이(爾)가 가지고 있는 뜻은 「넓다」이며, 길(吉)은 「길다」라는 말의 차음(借音)이니, 간짓대처럼 길게 나온 곳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특히 낭끝바위는 간절곶에서도 가장 돌출 지역으로 이곳에서 해를 가장 빨리 볼 수 있다하여 새해 첫날 해돋이 광경을 보러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동북아 대륙에서 새천년을 가장 먼저 맞이한 곳. 해안을 따라 느린 경사의 언덕이 있고, 그 언덕에 그림 같은 등대가 서 있다. 그 앞에 남태평양으로 향하는 뱃길이 환하게 열려 있고, 무거운 짐을 실은 거대한 화물선들은 울산항에 정박해 있다. 1920년 3월 처음 불을 밝힌 이래 80년을 하루같이 울산항을 드나드는 배들의 항로를 비추었던 간절곶등대는 국립 천문대와 새천년준비위원회가 “2000년 1월 11일 오전 7시 31분 17초” 새천년의 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소로 공포함에 따라 유명해진 등대이다. 조용한 어촌마을이 해맞이 명소로 각광받으면서 등대를 찾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게 되자, 이들을 위하여 탁 트인 동해바다를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와 등대에 사용하였던 장비, 아름다운 등대사진, 등대의 역할을 설명하는 전시물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등대 홍보관을 마련해 놓고 있다. 주변에는 장승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등대와 키재기를 하고 있으며, ‘모녀상’, ‘어부상’, ‘거북이상’ 등 석재 조각품과 ‘도충’, ‘기둥’, ‘둘과 하나의 논리’ 등 철재 조각품들이 곳곳에 세워져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오륙도의 명명을 살펴보면 육지에서 가장 가까운 방패섬은 세찬 비바람을 방패처럼 막아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솔섬은 소나무가 자생하고 있는데서 비롯된 이름이며, 송곳섬은 송곳처럼 뾰족하게 생겨서 그같은 이름이 붙여졌고 수리섬은 예전에 독수리가 갈매기를 포획하기 위해 모여들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굴섬은 가장 큰 섬으로 큰 굴이 있어 천장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이 한 사람 몫의 음료수가 될만하다고 한다. 육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등대섬은 위가 평평해 밭섬이라 불리다가 등대가 세워진 뒤부터 등대섬으로 불려졌다고 한다.
부산항 앞 바다에 가지런히 배열된 다섯 개의 바위섬 ! 부산항을 지키는 수호신인 오륙도이다. 오륙도는 부산만 북안 승두말로부터 남동방향으로 뻗어있는 기암절벽의 바위섬들을 말한다. 1972년 6월 26일 부산시 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된 이곳은 부산의 대표적인 명물이기도 하다. 오륙도는 밀물과 썰물에 따라 5개 또는 6개 섬으로 보여 오륙도라는 이름이 유래됐다. 오륙도 밭섬에 등대가 개설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37년 11월이다. 1876년 부산항이 개항되고 나서 부산의 관문인 오륙도 앞으로 배들이 드나들기 시작하자 항구를 오가는 선박들의 길잡이가 필요해 등대가 세워졌다. 이 등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국제 항구인 부산항을 드나드는 각종 선박이 반드시 지나야 하기 때문에 오륙도와 더불어 부산항의 상징으로 통한다. 오륙도 등대는 당초 6.2m 높이로 건립됐다. 그러나 등대가 너무 낡아 보수가 필요해 현상설계 공모를 통해 1998년 12월 웅장한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났으며, 등탑 높이를 27.5m로 높이고 등대 내부에는 우리나라 주요 등대를 살펴볼 수 있는 사진 전시실을 갖췄으며 부산항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전망대가 설치돼있다. 여기에 올라서면 활기찬 부산항의 모습과 아름다운 야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1906년12월 시작된 영도등대의 처음 명칭은 목장이라는 뜻의 목도(牧島)등대라 하였으며 1948년 1월 4일 절영도(絶影島) 등대로 개칭하였다. 절영도라는 지명은 영도에서 군사훈련용 말을 많이 길렀는데 영도에서 기른 말들은 비호같이 빨라 순식간에 말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하여 절영도라 불리었으며 1881년에는 절영도진(絶影島鎭)이 설치된바 있고 1951년 9월 1일 영도출장소(影島出張所)가 설치되었는데 행정편의상 절(絶)자를 빼고 영도(影島)라고 하였다.
부산시 영도구 태종대에 위치한 영도등대는 1906년 12월에 설치되어 지난 100여년 동안 부산항의 길목에서 영롱한 불빛을 밝혀왔으나 시설 노후로 2004년에 새로운 등대 시설물로 교체되어 부산지역의 해양관광 명소로 거듭났다. 새로 건립된 영도등대는 등대시설, 예술작품 전시실 그리고 자연사 박물관 등 3개동(연면적 720㎡)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등대시설은 기존 등대와 같이 백색의 원형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높이가 35m이며 불빛은 40km까지 나아간다. 전시실(see & sea)은 시민들과 방문객을 위해 미술작품을 소개하는 장소로 활용하고 있으며 자연사 박물관은 등대 바로 옆 신선바위 등에서 발견된 공룡발자국과 백악기 공룡서식지로 추측되는 이곳을 기념하는 공룡화석 등을 전시하고 있다. 영도등대에 오시면 등대와 바다, 천혜의 절경 그리고 덤으로 해양갤러리에서 미술작품도 감상할 수 있어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체험할 수 있는 친숙한 해양문화공간으로써 역할을 할 것이며 영도등대는 새천년의 빛을 밝히며 해양부국실현을 향한 힘찬 도약의 선봉장이 될 것이다.
옛 등대 시설은 사무실과 숙소, 등탑이 연결된 복합건물 형태로써 중앙에 높이 9.2m의 등탑이 세워져 있으며, 붉은 벽돌과 미송을 사용했고 출입구 천정에는 그 당시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 모양의 문장이 새겨져 있으며, 함석으로 된 지붕은 부식방지를 위해 함석 위에 피치타르가 덮혀져 있다.
가덕도는 한반도의 동남단에 자리잡아 동으로는 사하구 다대포, 서남북은 거제도 동북바다, 북으로는 유라시아와 환태평양의 관문이면서 동북아 허브항만으로 건설한 부산항신항(2006.1.19)과 접하며 진해시 용원동과 접하며 진해시 용원과의 거리는 4㎞, 인근의 거제도와의 거리는 10㎞ 정도이다. 가덕도가 해상교류 및 군사적으로 중요시 된 것은 조선 중종 39년(1544년) 가덕진과 천성진을 설치하여 임진왜란 때는 치열한 격전장이기도 했던 곳 이었으며, 현재 진해만으로 들어가는 중요 요충지로서 가덕도등대는 대한제국의 말기인 1909년 12월에 건립되었으며 옛 가덕도 등대건물은 서구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의 하나로 2003년 9월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으며 해양수산부에서도 영구보존 시설로 지정해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2002년 새로 지어진 지금의 등대는 팔각으로 된 돌출형이며 등탑높이는 40.5m로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높은 등대이다.
한국 등대의 기원
한국 등대역사는 우리에게 불행한 시기에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의 술책과 강압에 의한 시대적 산물로 등대가 건설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대부터 산, 곶, 등에서 횃불을 밝혀 선박을 인도 하였으며 암초, 수심이 얕은 곳에는 나무를 꽂아 항로표지로 이용하였다.
최초의 근대식 등대는 1903년6월1일 인천항 입구 팔미도등대, 소월미도등대, 북장서등표, 백암등표를 원형 석조로 건립 하였으며, 석유로 반사경에 의해 불을 밝혔다. 현존하는 등대는 북장서등표, 백암등표이다.
출처: 등대와 바다
https://www.lighthouselove.com:444/usr/lhl04/lhl0401_V0.lhl?area=a04&location=l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