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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이야기

금단곶보성지(金丹串堡城地)

제목(한글)

금단곶보성지

제목(한자)

金丹串堡城地

간행연도
2001
간행기관
부산광역시립박물관
발굴조사자
1차조사:박유성,송계현,김홍원,나동욱,최정혜,성현주/추가조사:박유성,김홍원,하인수,나동욱,최정혜,박미욱
집필자
나동욱
쪽수
204
목차
(소목차 포함)
1. 머리말/ 2. 유적의 위치와 현상/ 3. 조사의 내용 (1) 유구 (2) 출토유물 4. 고찰 (1) 유구 (2) 유물 (3) 금단곶보성지에 관한 기록 (4) 축조시기와 폐성/ 5. 맺음말

발굴기관
부산광역시립박물관
보고서 주소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산 129-4 일원
현재 주소
(광역, 시군구)
부산광역시 강서구
현재 주소
(나머지 주소)
녹산동 산 129-4
경도
° ′ ″
위도
° ′ ″
발굴면적
발굴목적
부산지방국토관리청이 시행하는 진해-부산간 국도 2호선의 6차선 확장공사 구간 내에 금단곶보성지가 포함되었다. 이에 따라 발굴조사 학술용역 위탁을 받은 강서구청이 부산광역시립박물관에 발굴조사를 의뢰하였다. 조사결과 보존상태가 양호한 옹성이 조사되어 문화재관리국의 심의결과 1997년 10월 30일 원형 보존 결정이 통보되었으나 부산지방국토관리청이 이의를 제기, 1998년 추가발굴조사를 또 다시 실시하였다. 기존 도로하부에 매몰된 성벽과 옹성 일부의 발굴을 위해 옹성북측에 임시 우회도로를 개설하기도 하였다.
발굴전후
유적상황
발굴조사 전에는 지표에서 성벽의 흔적과 전체적인 범위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고, 금단곶보성지를 알리는 표석의 남쪽 경사면에 돌무더기가 흘러내린 듯이 석재가 일부 확인되었다. 아리쪽은 계단상을 이루는 지형으로 높은 곳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었고 그 아래로 평지가 계속되다가 낮은곳은 대부분 건축폐기물 등으로 복토되어 있었다. 도로 맞은편 북쪽 성벽도 산불진압도로를 만들면서 파괴되어 교란된 석재들이 잡초 아래로 널려 있었다. 조사 종료 후 유적공개에 어려움이 있으나 현장보존과 토사유출로 인한 성벽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비닐 등을 깔고 전면복토를 시행하였고, 향후 성곽복원을 위한 문화재지정 및 성내 시설물에 대한 조사 및 복원, 정비계획 등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발굴시기
1997.06.20~1997.09.12(1차)/1998.07.27~1998.10.02,1999.10.11~1999.11.24(추가조사)
발굴유형 및 종류
/ 유구시기
중분류
소분류
유구시기
관방 성곽 조선
유구 개요
성벽 축조는 북쪽성벽의 경우 성 안쪽에서 외벽쪽으로 생토면을 ㄴ자상으로 굴착하여, 바닥면에 10cm크기 내외의 잡석을 전면적으로 깔았다. 외벽쪽에서 내벽쪽으로 1.5m정도까지는 잡석 상부에 판석을 깔아 지대석을 만들고 그 위에 기단석을 올려놓았는데, 그 위로 약 10~20cm정도 뒤로 물리어 대형 성벽석을 놓은 형태이다. 내벽은 외벽쪽으로 ㄴ자상으로 절토된 생토 바닥면의 잡석층 위로 정방형에 가까운 석재로 축조했는데, 내벽의 채움석은 성벽 안쪽에서부터 여러 겹을 석렬상으로 덧붙여 평면상으로 겹벽을 이루고 있다. 성벽 부속시설물로서 치는 북쪽 정상부 성벽과 동북 절개지 단면에서 확인되었다. 동쪽 경사지 석축이 남쪽 평지로 연결되는 부분에서는 문지가 조사되었는데, 정면1칸, 측면2칸의 규모이다. 문지 바닥에서 다수의 기와편과 함께 숯편이 출토되어, 문루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옹성은 동문지의 밖에 성밖에서 볼 때 시계반대방향으로 둘러진 것으로, 북쪽으로 성벽과 나란히 개구부(開口部)가 난 반원형의 편문식(片門式) 옹성이다. 옹성벽의 축조상 특징은 조선시대 읍성의 석축과 같은 방법으로, 비교적 큰 판석을 세워쌓고 상부로 갈수록 작은 돌로써 축조하되 그 틈새를 작은 돌로 메우는 방식이다. 그 밖에 성 내부의 중심부에서 건물지의 축대가 확인되었는데, 조잡한 상태로 조사되었다. 경사지의 성벽축조의 경우 성벽의 적심을 생토층 아래에 두면서 성벽의 기단부를 일정한 간격으로 수평화한 기단수평화구간 축조수법으로 밝혀졌다.
유구 도판
(3)
              



 >> 금단곶보성지 북측 성벽 단면



>> 금단곶보성지 옹성문지


>> 그림16.금단곶보 옹성문지 주변 성벽 평면도


유물 개요
성내에서 출토된 유물은 소량의 분청사기 접시편과 대형의 귀얄분청사기호편 및 백자접시편, 기와편 등이다. 기와는 일부 수키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암키와이며, 주로 문지 주변에서 출토되었다. 자기류는 분청사기와 백자류가 주종을 이루며, 청자와 흑유자 파편도 일부 보인다. 자기류는 주로 옹성 주변에서 출토되었다.
유물
중분류
소분류
유물명
점수
도기 도기 병, 호, 시유도기, 조가비흔
자기 청자 청자편(1), 대접 저부편(1)
자기 분청사기 접시, 대접, 병, 호, 인화분청편, 귀얄분청편
자기 기타(불분명 자기) 흑유자기편
기와 암키와 변형수지문, 변형어골문, 창패파문, 변형창해파문, 선조복합문, 단사선문, 집선문,
기와 수키와 단사선문, 변형수지문, 사선복합문기와, 유단수키와

종합고찰
금단곶보성지는 그동안 목장성(牧場城)으로 알려져왔으나 옹성과 치의 존재, 금단곶보성지 축조 이전의 금단곶목장에 관한 기사, 김해부와의 거리 등을 통해 볼 때 군사적 성격의 보를 목장성으로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문헌자료와 출토유물로 볼 때 16~17세기가 중심년대로 보이며 18세기말 이전에는 성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된 것으로 보인다. 이번 발굴조사는 비록 부분적인 구제발굴조사이긴 하지만 1차조사 때 확인된 성벽과 경사지 성벽, 치, 옹성 등을 정밀 조사하여 성벽이 2차에 걸쳐 축조되었다는 점과 당시 성곽축조의 수법을 면밀히 밝혀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금단곶보의 발굴조사의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금단곶보성지는 산 능선 아래에 위치하여 지형적으로 불리한 입지조건을 극복하여 축조한 성으로 조선시대 진보(鎭堡)의 성곽 입지 선정에 일면을 보여준다. 둘째, 북쪽 정상부의 성벽 정밀조사에서 바닥에 잡석을 깔고 지대석과 기단석 위에 뒷물림하여 대형석을 세워 쌓은 성벽은 조선전기 읍성의 축조기법과 유사하며, 성벽 외면의 기단부를 보호하는 것으로 보이는 보조석축과 더불어 조선전기 성곽 축조수법의 연구에 일례를 제공한다. 셋째, 경사지의 성벽축조에 있어서 성벽의 적심을 생토층 아래에 두면서 성벽의 기단부를 일정한 간격으로 수평화한 기단수평화구간 축조수법이 조사되어 성벽의 붕괴를 방지하기 위한 당시의 축조기법을 살펴볼 수 있다. 네째, 옹성문지의 경우 기단 내외에 지대석이 전면적으로 깔리고 가공석 등 성벽과 문지가 거의 완벽하게 남아있어 당시 성문복원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다섯째,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금단곶보성지 특유의 파수부 시유도기 호편 등은 조사 예까 드문 경우로서, 백자편, 흑유자기편 등과 더불어 유적의 성격과 도자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었으며, 변형수지문의 기와편은 유적 초축에서 보이는 표식유물로서 조선시대 기와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번 발굴이 유적보호를 위해 우회도로가 개설되는 등 유적보호의 중요성과 그 노력의 일면을 보여준 것으로, 차후 잔존부분의 성벽과 성내 건물지 등의 조사가 진행되어 조선시대 진보의 성격이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관련기사>


금단곶보성지

세운 지가 얼마되지 않는 비석. 자세한 역사에 대한 기록도 그렇지만 그저 성고개라는 지명만으로 이 고개에 성이 있었나보다 하였다.

금단곶보성지는 조선시대 전기 군사적 성격의 연해 진보성곽의 축조수법과 그 규모를 알 수 있는 유적이라고 한다.

                                                                    부산시립박물관의 자료사진                                                                   

금단곶보성지추가발굴조사

금단곶보성지는 부산시 강서구 녹산동 산 129-4번지 일대에 위치하며, 진해-부산간 국도중 녹산동과 송정동을 경계로 한 성고개 정상부근에 평면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성종실록」 16년(1485) 3월조에 의하면 4도 순찰사 홍응의 청에 의하여 축조된 조선시대의 석축성으로 둘레가 2,568척으로 나타나 있다.


1차 발굴조사에서는 성벽과 치, 옹성, 그리고 배수로 등이 조사되었는데, 경사지의 성벽축조는 성벽의 붕괴를 방지하기 위하여 계단식으로 성벽과 직교되게 쌓았으며 옹성의 경우는 현 도로에 매몰되어 있는 북벽 일부를 제외하고는 주초석을 비롯한 기단석이 거의 완벽하게 남아 이었다. 이러한 중요성으로 인하여 발굴조사 후 실시된 금단곶보성지유적 보존에 대한 문화재관리국의 심의결과 기조사한 성벽에 대한 정밀 실측조사와 도로 선형 변경에 따른 옹성 북측성벽의 추가 발굴이 결정되었다.
추가발굴조사는 3개월 예정으로 1998년 8월 4일 발굴조사에 들어가 1998년 10월 2일자로 옹성북측 성벽의 정밀조사를 완료하였고, 현 국도 2호선 도로 하부에 있는 성벽발굴을 위한 우회도로 개설공사로 인하여 일시 중단되었다.
이번조사에서 1차조사시 확인된 북쪽성벽의 바깥 채움석은 배수를 위한 것이 아니고 인위적인 파괴로 인하여 매몰된 것으로 밝혀졌으며, 채움석을 제거하여 외벽을 전면 노출시키고 정밀조사갱을 넣어 성벽과 치, 경사지에 있어서 성벽의 축조수법을 확인하였다.


성벽의 정밀조사를 통해서 본 성벽의 축조방법은 다음과 같다.
북쪽의 성벽은 산정상에서 내려오는 능선을 상부폭 약10m, 깊이 5m 이상 「V」자 상으로 절토하여 능선의 연결을 차단시킨 뒤 성벽폭 만큼 생토면을 정지하여 성벽을 축조하였다. 성벽의 기초는 먼저 내벽쪽의 생토면을 'ㄴ'자상으로 절토한 후 성벽석을 다듬는 과정에서 생긴것으로 추정되는 직경 10cm 내외의 박편석을 바닥에 전면적으로 깔고, 외벽에서 안쪽으로 2m 지점까지는 그 위에 판석을 깔아 지대석으로 삼았다. 이 지대석 끝의 20cm 안쪽으로 기단석을 1단 배치하고 기단석 끝에서 다시 안쪽으로 20cm 정도 들여서 성벽석을 축조하였는데, 기단석 위에 올려진 성벽석은 가로 1~1.4cm, 세로 1m, 두께 0.5~0.7m 크기로 잔돌을 끼워 세워쌓기 하였다. 세워쌓기한 성벽석의 상부석은 잔존된 부분의 석축상태로 미루어 볼 때 하부의 성벽석 보다 작은 돌로서 눕혀쌓기를 하였고 이렇게 쌓은 성벽의 안쪽으로 3~4m는 잡석다짐을 하였다. 그리고 내벽쪽으로 가면서 성벽의 진행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석축렬을 맞추어 뒷채움하였는데, 평면상에서 폭 50cm 내외로 내벽으로부터 3~5개의 열이 확인 되었다. 잔존된 상태로 볼때는 내벽에서 성위로 올라가기 쉽게 설치된 계단과 유사하였는데 이러한 뒷채움방법은 성벽의 견고함을 더하려는 의도로 추정된다. 전체적인 성벽의 축조수법은 조선후기의 읍성과 같다. 한편, 외벽바깥에서 성벽의 기단부를 보호하려는 굽도리 시설이 확인되었다.<부산시립박물관>

 

사람가고,세월가면 뉘라서 그 이름 일러 주리오.

마당지도 귀에 익은 지명이고...

협찬 방명엔 우리 숙부님의 성함도 들어 있다.

----전   략----

 

뱃보가 좀 큰 놈은 전답 팔아 짐 싸들고 서울로 기어올라 청량리, 왕십리 떠돌아다니다
다 꼬라박기도 하고, 더러는 몇 푼 벌어 사장으로 거들먹거리기도 하고

겁도 없는 녀석들은 불알 두 쪽만 차고 브라질로 엘에이로 혹은 벤쿠버로
어떻게 비비고들 건너가서 노랑머리 서양년 꿰차고 위스키 홀짝이며 살아가고 있지 않던가

보라, 지금 누가 고향에 남아 그 땅을 지키고 있는가?
있다면 그도 저도 못한 놈들이 홧김에 술만 퍼마시다 일찍 땅속에 들어 고향을 짊어지고 누워 있을 뿐이다.

<임보님의 '누가 고향을 사랑한다던가'에서>


출처;  http://m.blog.daum.net/bok-hyun/670?categoryId=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