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사진상설관 시대 이전의 극장들 (1903년? -1913?)
- In 2008 Autumn (통권 27호), 뉴스, 부산과 영화, 영화 그리고 부산
- 2008년 9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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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부산지역 극장사 연구에서 관심사가 되고 있는 1895년부터 1903년까지 기간 소개가 우선되어야 하지만 실체적 검증 필요성으로 인하여 본고는 1903년 12월 제도된 부산항 시가 및 부근 지도’ 에 나타나는 두 개의 극장 행좌와 송정좌가 상존하고 있는 시기로부터 활동사진(영화상설관 개막 이 전 시기인 1913년까지 기간에 개관된 총 7개 극장을 소개한다.
근대 부산극장사
활동사진상설관 시대 이전의 극장들 (1903년? -1913?)
초기 부산지역 극장 총 7개소
7개 극장은 남빈정의 행좌(1903?-1915)를 비롯하여 행정의 송정좌<1908?-1911?),부평정의 부산좌(1907-1923),본정의 변천좌 (1912-1916), 부평정의 동양좌<1912?- 1918?), 영도의 질자죄(1912?_1918?),행정 의 욱판(1912-1916?) 이다.
이들 극장들은 일본 거류민들의 생활 주거지와 경제활동의 중심지에 위치 하였던 오늘의 중구 지역 에 총6 개 극장이 밀집 되어있었다. 그것은 부산구조계조약에 의거 전관거류지역 범위 내를 벗어날 수 없는 한계 때문이었으며 유일하게 질자좌가 영도에 위치하고 있었다. 7개 극장은 모두 무대공연을 목적으로 건축된 연극 전용 극장이었으며 영환관은 육관이 활동사진 상영관시대가 열렸다
부산에 극장들이 하나 둘 생겨나던 시기 당시 조선의 중심지였던 경성(서울)에는 1902년 12월 2일 현대식 상설극장인 협률사가 처음 개관된 이후 1907년 들어 4개긔 극장이 선을 보였다. 4월 프랑스인 마전이 서소문 밖 새다리 동편 벽돌집에 활동사진소 영업을 시작하였고, 5월28일 광무대가 동대문 전기 회사에 부속된 활동사진 소 내 연극장을 신설하고 활동사진을 상영하였다. 이어서 6월 4일 준공을 본 단성사는 7월17일 개관되고 7월 26일에는 원각사가 협률사를 이어 받아 새롭게 개관되었다.
흥행물은 일본 대중문화가 주류
1903년 – 1913년까지 기간 부산지역 극장 무대에 올려진 공연물은 대다수 일본의 공연단들이 건너와 흥행되던 대중문화가 그 주류를 이루었다.
1904년 한 해 동안 극장 행좌와 송정좌 무대에 올려진 총 12종익 공연물에서 이와 같은 대중문화현상을 보여 주었다 207일간 흥행으로 최고의 인기몰아_ 하였던 연극장사 명치시대 자유민권운동의 청년활동가 이야기가 중심)에서부터 연극부연절 이 70일간, 죠루리 제문(爭留樓 祭文)이 49일간,즉흥민요가 37일간 연극옛날배우가 30일간, 줄 타기. 등곡예흥행이 24일간,흥행 씨름(轉〒相?)이 20일간,영화 및 막간화극 이 19일간,환등 죠루리 노래와 사설로 엮어진 연회물가 15일간 미술, 간단한 춤 이12일간 연극젠지부시 (原氏節: 11세기 초엽 완성된 문학작품을 토대로 했던 겐지모노 가타리)가 5일간 비파흥행이 3일가으로 총 491일간 공연되었다. 여기에서 눈 여겨 볼 것은 흥행물 12종중 10종은 일 본인들의 전통 관습에 젖어있던 대중 공연 물들로 왜색문화 일색이었다 이로써 부산은 일본인 전관 거류지를 중심으로 외형적으로는 일본건축물들이,내적으로는 그들의 정신과도 같은 대중공연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나머지 2종은 1895년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일반에 상영된 후 전 세계에 빠르게 보급되어간 영화와 환등•상영으로 부산에서는 처음 영화가 상영되었다 이들 공연2개의 극장 외에도 수요의 필요성에 따라서는 특정장소에 임시 가설극장이 허가되어 운영되었다. 당시 부산의 인구가 급증하게 된 사유는 1902년 7월 부산매 축(주;):부산지점이 시작한 항만 매립공사에 몰려든 근로자가 가장 많았을 때는 1일 한국인 약900명,일본인 약 2,000명이 동원되어 거류지 중심의 주변부에 몰려든 유동인구의 증가세가 이들 극장흥행의 활성화에 한 몫을 해주었다.
「부산항세일반」(1905)은 이들 공연물들이 하층사회의 오락으로서,일반시민들이 관람 하기에는 미흡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당시 상류층이나 지식층 계급사회에서는 극장 공연 문화를 폄하 평가한 시기였음을 엿보게 한다. 영화는 상설관시대가 아니어서 상영 때마다 막간화극(니와키)을, 환등상영 시에도 죠루리가 동시공연 되었다.
그것은 오늘날의 영화 상영행태와는 달리 초기의 1~2분찌리 짧은실사(다큐멘터라) 영화가 대부분이어서 관객의 흥미와 만족감을 줄 수 없어 막간화극과 죠루리가 동시공연 되었다. 영화상영의 빈도수가 적었던 것은 프랑스_미국 등지에서 제작된 작품 수급이 원활치 못했던 때여서 그러했다.
(1) 행좌(1903년?~1915년)
◦극장명: 행좌(幸基사이외이자)
〇주소지: 남빈정/ 중구 광복동
〇개관일자: 마싱(현재는 1903년 12월 부산항시가 및 부근지도 자료 기준)
〇폐관일자: 1915년
〇좌주: 하사마 후사따로
1904년 영화가 처음 상영된 극장 행좌는 부산영화의 모태가 된 곳이다 행좌 관련내용은「부산최초의 극장 행좌의 역사성 검증보고」(BFC리포트 Vol. 25)에서 이미 발표된 바 있어 독자께서는 이를 참고 바란다 본 내용은 극장 행좌를 건축 경영한 좌주 하사마 (1860-19 43는 누구였으며 어떤 인물이었는지 기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일본 池田村에서 출생,오사카 오백정 상점에 취직하여 1880년 5월부산지점 지배인으로부임하였다 부산에서 무역을 시작한 이후 개인으로 계속 이 업에 종사하는 한편 우리나라 여러 곳에 적지 않은 토지와 가옥을 소유하고 부동산 경영을 본업으로 하였다 또한 그는 오오이께 (부산좌좌주) 등과 갈이 부산의 초창기에 부두를 축조하는데 힘이 되었고 그의 최전성 시대엔 부산항 수출입 총무역고의 2할 분을 그가 차지하였다 1907년 이래 거류민단의원 부산상업회의소의원,부협의원,경상남도 도의원 등의 공직을 거쳐 부산 상업은행의 은행장이 되고 부산 공동창고회사장 부산수산회사,경남은행 등의 각 취제역을 역임,1906년 4월 러일전쟁 때 그의 공적을 치하하는 제국 일본의 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다음은 1930년 당시 이들 3대 재벌의 부산시 공과금부담액을 살펴보면 1위에 하사마 2위에 가시 이 겐타로,3위에 오오이께의 순으로서 이들은 재력뿐만 아니라 관선 경상남도 평의원 부산부협의회원 등 공직을 위시하여 부산시내 대표적 회사의 7할에 상당하는 중역을 겸하고 있었던 독점적 사업가 들이었다 그러나 아들이 이와 같이 치부하여 부산의 실권을 쥐게 된 경위에 대하여 당 시 일본인 이노우에 기요마로는 그의 자술에서 다음과 갈이 비판하였다 부산개항 당시에 이 3대 재벌의 주인공들은 단신 빈손으로 건너와서 어리석은 한국인들에게 비싼 이자로 돈을 빌려주고 기한이 되어 돈을 갚지 못하면 곧 저당된 땅을 빼앗아 버렸다 또 한국 군수를 농락하여 이권을 획득하고 한국정부납세 보관금을 한 군에서 6-7만에서 12만원까지 여러 군의 것을 지정받아 수 십 만원의 공금을 무이자로 내어 고리대 자금 미곡 자금에 유용하였다 이렇게 이익을 취하면서 막대한 수송 요금까지 편취하였다 그 밖에 특산물의 판매권 해운과 어장의 이권을 얻어서 거부가 되었고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기회를 악용해서 오늘의 부산 산업계를 그들 3대 재벌이 독점하게 된 것이다(개항 90년,1966, 박원표) 하사마는 1915 년 노후한 행좌를 철거 후 동 위치에 활동사 진 상설관인 행관을 신축 개관하였다
(2) 송정죄(1903년?~1911년?)
◦ 극장명 : 송정죄(松井座: 미츠이자)
〇 주소지 : 행정 2정목 / 중구 광복동
◦개관일자: 미상(1903년?)
◦ 폐관일자: 미상(1911년?)
〇 좌주: 마츠이 고지로®供幸次郞)
사안교(思案橋) 다리 앞에 위치했던 극장송 정좌는 남빈정과 행정 거리에 이웃해 있던 행좌와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송정좌는 1903년 12월 “부산항시가 및 부근지도에 처음 나타났으며 1907년 8월 1일 “한국부산항 시가명세도”에 행좌와, 동년 7월 15일 개관된 부산좌와 자리하여 송정좌의 실체를 재확인해 주었다. “한국대지도부산향’ (1906)에도 행좌와 함께 수록됐으나 명치 44(1911 년)년도 후기「여관요록」(동경 인사여 신소 조시) 조선 부산편 소개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1911년 7월 발행 “부산시가 전도초량부속,,지도는 송정본점이 변천정으로 이전됐으나 주업종인 여관업만 표기되고 극장 표기가 제외돼 있어 폐관 시기는 불명확하다 좌주 마츠이는 개항 이듬해 4월 나셰사키에서 건너와 선원을 상대로 여관업과 도매업을 시작하여 거류지 여관업계 제 1인자로 자리잡은 자(伯鮮通交史附해史 1916)로 송정 본점을 중심으로 한 여관업과 상설극장인 송정좌를 경영했다. 송정좌는 초기 부산지역 극장 중 폐관 제 1호 극장으로 기록되고 있다
(3) 부산죄(1907년~1923년)
◦ 극장명: 부산죄(釜山座: 후산지)
◦ 주소지: 부평정 2정목 / 중구 부평동
◦ 개관일자: 1907년 7월 15일
〇 폐관일자: 1923년 3월 22일 화재로 소실
◦ 좌주: 오오이께 다다스께(치世忠태)
거류민 1세대 실업가였던 오오이께 다다스께가 아마모토 준이치(山本D, 나까무라 토시마츠(中村f受松, 고지마 진기찌와 공동으로 합자하여 1907년 4월 자본: 총액 30,000원, 불입 자본액 20,000원의 부산연극합명회사를 칭립후 행좌, 송정좌에 이은 새로운 극장 부산좌를 신축 동년 7월 15일 개관하였다 부산좌의 건축형식은 르네상스, 사라센풍 일본 절충양식으로 극장 전면은 회랑이 있는 르네상스 외관과 원형, 아치 등은 사라센풍을 가미한 일본 건축의 전환기에 속하는 건물로 이런 유형을 절충 식이라고 할 수 있다. 구조는 목조2층으로 바닥에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기 전에 일본 화양식 목조 구조의 전형으로 바닥을 구성한 극장이다(이형재 건축사 고증) 당시 부산을 대표하여 세워진 연극전용 극장 부산 좌는 일본 거류민의 새로운 주거 중심지 부평정에 위치했으며 주관객은 일본 인위주로 경영되었다. 1923년화 재로 폐관되기까지 17년동안 경영되어온 부산좌는 행좌 송정좌는 물론 변천좌, 동양좌 질자좌 욱관 보래관, 초랑좌,행관; 상생관, 국제관,유락관 태평관 등 총13개 극장과 상존하였으나 행좌 송정좌,변천좌, 동앙좌, 질자좌, 육관, 초량좌등의 7개극장은 부산좌 보다 먼저 폐관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부산좌는 1915년 10월 15일 부산 소방조 대장 지도세 사다기치와 니시오가 공동으로 임차경영 되는 등 경영에 애로사항도 있었으나 폐관된 후 설립자 오오이께는 재건을 목표로 수차례에 걸쳐 재건축을 시도하려고 쟁점화 시켰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활동사진 상설관 시대를 맞으며 부산좌도 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경영되었다. 1915년 10월 15일 개봉되어 4일간 상영된 작품을 소개하면 미쯔노 강게츠
(水野觀月) 일행의 활동사진 연쇄극(蓮貞劇 : 연극공연 중 필요한 무대배경을 촬영, 실사 하는 공연양식. 시발지는 일본이 었으나 1917년 일본의 흥행법 개정에 따라 이 형식은 금지됐다)_:〈쿠스노기마사시게공 일대기 >, 실사〈수이쯔루의 풍경〉,신파화극〈마법용〉,태서활극〈형사의 고삼>, 전 4권짜리 신 파비극〈짝사랑〉등으로 오늘날의 1회 1편 상영방식이 아닌 단편물 수편이 상영되었다 그 외에도 부산좌에서는 특별영화 상영회가 수차례 공개되었다 2만 5 천척(전 9권) 찌리 대작영화〈아무정)(원제 : 레미제라뵐 이 1915년 4월 23일,24일 양일간 3회 상영되었다 입장료는 특등 1원,1등 70전,2등 50전,3등30전의 꽤나 비싼 요금이었으나 학생단체를 포함하여 2,372명이 관람하여 순이익 402원 28전의 흥행성적도: :올렸다 그 외 음악회,무용발표회를 비롯 투견대회 권투시합끼지 열렸던 특별한 극장이었다 좌주 오오이께는 1875년 부산으로 건너와 약삭빠른 실업가로 변신하여 치부한 자였다 해산물무역업을 시작으로 미곡 및 잡화 직 수입도 하고 정미공장을 설립,1881년 이 후에는 부산거류민회 의원 및 민단의장 등 의 공직을 역임했으며 부산번영화장 이외에 각 은행의 중역을 겸했다 러일전쟁 때의 공적을 치하 받아 제국 일본의 훈장을 받았으며 그의 동상까지도 세워졌다. 내(박원회가 아는 부산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은 일이 있 다 어느 한국인 한 사람은 왜놈 오오이께 에게 돈을 빌려 썼는데 그 돈을 갚지 못한 채 죽어 버렸다 그러자 돈을 못 받게 된 오오이께는 채무자의 미망인을 불러들여 자기 창 고속에 가두었다 그 과부는 돈을 갚을 도리가 없었거니와 언제 풀려날지 알 수 없었으므로 그들이 주는 밥을 일체 먹지 않고 단식으로 반항하였다 이때 과부는 월경이 있을 때라 그녀는 피를 온 얼굴에 칠하였다. 피를 보고 놀란 그들은 그 과부를 풀어^었다고 한다. 한일합병 직전 이런 일들로 채무변제 가 안 되면 행패를 당하지 않으려고 한국인은 집과 토지를 내주고 떠나기까지 했다(향토부산; 1967) 오오이께가 1930년 중앙극장을 건축 중 갑작스레 망하자 아들 오오이께 겐지가사업을 인계 받았다
(4) 변천죄(1912년?~1916년)
〇적명 : 변천좌決座 : 벤텐자)
〇주소지: 본정 1정목 / 중구 동광동
◦개관일자 : 1912년?
◦폐관일자 : 1916년
◦좌주: 교야마 하나마루(京山7技1)
극장 변천좌는 일본 거류지 내 은행가의 중 심지였던 본정에 위치했으며 극장명은 이웃
변천정의 거리 이미지와 연계하여 변천좌로 명명되었다 연극 전용의 기석篇席)식 극장 변천좌는「부산요람] (1913,「경싱남도 안 내J(1914) 에서 행좌,초량좌 욱학 부산좌 동양좌 질자좌등과 동 시기에 경영된 극장으로 기록되고 있다. 히로자와 나쯔기꾸 일행을 비롯하여 도리마루 일행,가쯔라 일행, 교야마 도모이 일행,나나와 후꾸스케 일행 등의 일본 구극과 산극단 등이 공연되어 오다 1916년 활동사진 상설관인 상생관으로 개관하기 위해 개축공사에 들어가면서 5년 만에 폐관됐다.
〇동양조 K1912년~1918년?)
〇극장명: 동양죄凍洋座: 도오요지)
〇주소지: 부평정 1정목 / 중구 부평동
〇개관일자 : 1912년?
〇폐관일자: 1918년?
〇좌주: 다까시다 모리도리(反F親虎)
보스천 하류 쪽에 위치하였던 연극 전용극장 동양좌는 변천좌, 질자좌, 욱관, 등과 비슷한 시기에 개관된 곳이다. 동야좌에 대한 기록은 부산요람(1912) 경상남도 안내(1914)에 소개되고 있으며 1916년 1월부터는 극장명 ,대흑좌次黑座: 다이고꾸지)로개명 활동 사진 상설관의 시범하여 기존 상설관인 욱관과 보래관의 경쟁대열에 가세하였다 그러나 “부산부전主’(1917)의 대흑좌소개에 이어 “부산시가전도”(1918)는다시 동양좌로 표기 되고 있어 본래의 극장명으로 환원 되었는지 여부는 미확인되고 있다. 나리꼬마게 후꾸자꾸 일행,다이아몬드 유끼꼬 일행, 가다오까 쯔르노스께 일좌 등의 공연은 당시로써는 보기 드문 대흑좌의 회전무대 에서 공연되었다.
(6) 질자죄(1912년?~1918년?)
〇극장명: 질자죄: 히루고지)
◦주소지 : 목도 / 영도
◦개관일자 : 1912년?
◦폐관다 : 1918년?
◦좌주 : 미상
앞에 소개된 행좌를 비롯한 5개 극장은 일본 거류지 내에 세워졌으나 극장 질자좌는 영도 지역에 처음으로 세워진 연 극 전용 극장이다. 질자좌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여 실존여부조차 불투명했으나「부산요람1912과「경상남도 안내」(1914)에 행좌, 부산좌 동양좌 변천좌, 욱관과 함께 확인되었으며 동시기에 신종 극장 업이 성행되면서 앞 다투어 생겨났다 단명으로 사라져 버린 극장 중의 하나였다. 1916-1918년 미가 사고로 일행의 신파극,가다오까 쯔르노스께 일행의 나니와부시 공연 등이 질자좌무대에 올랐으나 후의 흔적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질자좌의 위치, 전경사진,좌주명은 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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