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부산의 이야기

정부수립 60년 - 부산항의 어제와 오늘

정부수립 60년 - 부산항의 어제와 오늘

군수물자·월남파병·수출품 들고난 영욕의 관문

6·25전쟁때 피란민 구호물품 하역기지

60년대 경제성장 제1의 수출항 발전

선원 송출·이민선 떠난 '눈물의 항구'

70년대 자성대 등 컨테이너 부두 개장

현재 크레인 78기 운영 신항 개발 박차

  • 국제신문
  • 오광수 기자 inmin@kookje.co.kr
  • 2008-08-13 20:55:53
  • / 본지 7면

   
1950년 무렵 부산항 북항 일반부두 모습. 자성대부두와 국제여객부두를 제외하면 지금의 제1, 2, 3, 4부두 및 중앙부두의 모습 그대로다. 부산경남본부세관 제공


부산항의 올해 나이는 132살이다. 지금의 부두 접안시설 골격이 갖춰진 것은 60년 전, 컨테이너 전용부두 시대를 연 것은 30년 전쯤 된다. 이러한 세월의 더께가 앉아 있는 탓에 부산항을 둘러싼 사연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일제강점기 막바지, 전쟁의 광기가 극에 달하던 시절 대륙으로 향하는 일제 군수품이 부산항에 부려졌고 8·15 해방으로 쫓기듯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던 일본인들도 부산항에서 관부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6·25전쟁 발발. 부산항에는 전선으로 향하는 군수물자를 비롯해 구호물품 하역 작업으로 눈 코 뜰 새 없었다. '수출 입국'의 기치 아래 세계로 향하는 수출품도 부산항으로 통했다. 선원 송출과 월남 파병, 브라질로 향하는 이민선도 부산항에서 떠났다. 부산항은 현재도 우리나라 제1의 관문이다.

   
부산경남본부세관 내 계류장 앞에 골동품처럼 서 있는 3t급 수동식 크레인. 부산항 하역의 역사나 다름 없다.
'잘 있거라 부산항'과 '돌아와요 부산항에'

'오륙도, 갈매기, 연안부두, 제2부두, 자갈치, 남포동'. 부산항을 상징하는 대중가요 주제어들이다. 이와 관련해 관세 사료를 담당하는 이용득 부산세관박물관장은 독특한 해석을 내리고 있다. 가요가 당대의 정서를 노래하듯 부산항을 노래한 가요에서도 시사점을 많이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먼저 원로 가수 백야성이 부른 '잘 있거라 부산항'. 정든 이를 두고 떠나는 마도로스의 이별가이지만 내일을 기약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대한민국은 1964년 1억 달러의 수출 금자탑을 세웠다. 정부는 수출 주도로 경제성장을 하려 했고 대부분의 수출 물량이 부산항으로 집중되다 보니 부산항 1, 2부두는 '대한민국의 1, 2부두'일 정도로 정신없이 바빴다. 대리석은 물론 여염집 아낙들의 머리카락마저 가발로 수출하던 당시였다. 이 무렵 선적 화물 대부분은 지금처럼 컨테이너 화물이 아닌 벌크화물이었다. 인력 수출도 대단했다. 때문에 부산항은 사람도 떠나 보내던 항구였다. 생이별의 항구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나온 노래가 '잘 있거라 부산항'이라는 게 이 관장의 설명이다.

'잘 있거라 부산항'을 노래하면서 부산항 일반부두(1, 2부두)에서 수출의 닻을 올린 우리나라는 1970년대부터 조용필의 노래로 유명한 '돌아와요 부산항에' 가사 속 오륙도 인근에도 자성대·신선대부두를 만들면서 경제초석을 다지게 된다. 이들 컨테이너 전용부두들은 정부가 공격적인 항만 투자를 하면서 문을 열게 된 것이다. 마침내 우리나라는 1977년 수출액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부산항에 컨테이너 화물이 처음 들어온 것은 1970년. 컨테이너 물류 개척자인 미국 선사 씨랜드가 미군수물자를 실은 컨테이너 102개를 들여왔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도 컨테이너 화물을 처리할 수 있는 부두 건설에 박차를 가했고, 자성대·신선대부두를 비롯해 감만·신감만부두가 잇따라 개장하게 된다. 결국 1980년대 이후 부산항도 컨테이너 화물이 주류를 차지했고 오륙도 앞 신선대까지 컨테이너 전용부두가 생겨났다.

3~10t짜리에서 22열짜리 크레인으로

부산 중구 중앙동 부산경남본부세관 내 감시정 계류장 앞 부두 잔교에는 골동품과 같은 크레인 한 대가 묵묵히 서 있다. 낡을 대로 낡아 보이지만 보존 상태가 좋아 아직도 작동이 가능하다. 3t급 수동식의 이 크레인은 1906년 10t급 크레인과 함께 들여온 것으로, 지금의 부산세관 청사 동쪽 뒤편에 설치돼 운영됐다. 그동안 부산항으로 드나드는 숱한 수출입 화물이 이들 크레인을 통해 배에 올려지거나 내려졌다.

요즘은 크레인을 비롯한 하역업무를 전문업체에서 도맡아 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크레인의 관리·운영권자가 세관이었다. 민간인은 세관으로부터 허가를 받아야만 크레인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크레인의 사용료는 기종과 톤수에 따라 달랐는데, 3t급 크레인은 세관 측이 시간당 40원에 임대해 줬다고 한다. 당시 80㎏ 쌀 한 가마니가 26원 안팎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꽤 비싼 셈이다. 이 크레인은 1980년대 후반까지도 사용됐다. 세관 감시정의 수리 작업을 위해 엔진을 들어내는 작업도 이 크레인이 해냈다고 한다. 함께 들여온 10t급은 오랜 세월을 거친 뒤 태풍 등으로 유실돼 사려졌고 3t급 크레인도 신형 하역장비가 속속 등장한 탓에 현존하는 '역사'로 남아 있다. 개항장 부산항에서 당시 가장 신식 하역장비로 위용을 떨쳤던 최초의 크레인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그렇다면 2008년 8월 부산항의 하역장비는 어떨까. 부산항 컨테이너 전용부두에서 운용 중인 안벽크레인(갠트리크레인)은 현재 모두 78기. 이 가운데 31기는 22열짜리 최신형이다. 이들 크레인의 인양 능력은 50~65t. 3t급에 비해 무려 20배나 힘이 세진 것이다. 더욱이 내년 1월 개장 예정인 신항 북컨테이너부두 2-1단계에는 최첨단 무인 자동화 야드 크레인 42대가 도입된다. 세계 최초의 수평식 야드 자동화 시스템으로, 좌, 우 양방향 양·적하도 가능하기에 60년의 세월은 이처럼 하염없다.


◆ ■ 개항부터 신항 건설까지

- '원조' 부산항은 재개발 앞둔 북항 일반부두

지난해 1326만 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개)를 처리, 컨테이너 화물 기준 세계 5위 항만으로 자리잡은 부산항. 이 같은 부산항의 '원조'격인 북항의 골격이 갖춰진 시기는 대한민국 건국 직전이다.

1876년 부산포라는 이름으로 개항한 이후 1906년 처음으로 부두 축조공사가 시작됐고 마침내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1~1945년 부산항 제1, 2, 3, 4부두 및 중앙부두가 들어섰다. 지금은 북항이라 하면 자성대·감만·신선대부두 등 컨테이너 전용부두를 떠올리지만 사실은 이들 일반부두(1~4부두, 중앙부두)가 한동안 부산항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정부 수립(1948년 8월 15일) 이후 30년 동안 항만에 대한 투자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뒤 1970년대부터 부산항 개발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974년부터 부산항 1, 2단계 개발사업(1974~1982)을 추진, 자성대부두를 비롯한 4개 컨테이너 전용부두와 국제여객부두 등이 들어섰다. 이어 부산항 3단계 개발사업(1985~1991년)으로 신선대부두를, 4단계 개발사업(1992~1998년)으로 감만부두를 잇따라 축조, 급증하는 컨테이너 수출입 화물 수요에 대처하게 됐다. 2002년 2월에는 신감만부두가 개장했고 2006년 부산 강서구 가덕도 일원에 신항 1-1단계(북컨테이너부두·6선석)가 문을 연 것을 시작으로 총 30선석에 달하는 신항 건설이 진행 중이다.

이러한 가운데 부산항 북항 일반부두는 올해부터 친수공간 등으로 재개발돼 부두 기능을 잃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처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60년과 함께 한 뒤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 한때 쾌속선 이용한 '특공대 밀수' 설쳐

- 50~60년대 일본서 우산·재봉틀 등 들여와

- 90년대 이후 중국산 농산물 밀수로 변화

   
1950년대 중반 일본 쓰시마 이즈하라항에 정박 중이던 '특공대밀수' 쾌속선. 부산경남본부세관 제공
#1960년 2월 일본 쓰시마 인근에서 원양 감시 중이던 부산세관 직원 2명이 탄 감시정을 쓰시마 해상안보청 경비정이 나포, 세관 직원들을 해상강도 및 밀입국 혐의로 누명을 씌워 1개월 동안 억류한 사건이 발생했다.

#1962년 2월 25일 부산세관은 밀수품 재고 7억5000만 환 상당 물품 중 1억4000만 환 상당의 사치품을 부산 영도 청학동에서 공개 소각하고 화장품은 부산 앞바다에 버렸다.

1950~60년대를 장식했던 이른바 '특공대밀수'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기록들이다. 1950년대 말 소형 쾌속선을 이용, 쓰시마 이즈하라항과 부산항 및 우리나라 남해안 일대를 오가며 대규모 밀수를 자행한 '특공대밀수'가 나타났다. 이들은 우리 남해안 주민의 지원과 일본 정부의 비호로 점차 대형화, 조직화, 폭력화됐다. 이 때문에 우리 정부는 밀수 단속 관련 특별법 제정과 각 세관 단위 밀수단속 책임제를 실시했는가 하면 남해안지구 밀수 단속 책임자로 군인까지 파견하는 등 강력 대응했다. 그 결과 특공대밀수는 소강 상태를 보였지만 미군PX 물품의 불법 유통이나 활선어수출선을 이용한 밀수 형식으로 오히려 '진화'했다.

이 같은 특공대밀수가 기승을 부리던 1950, 60년대 주요 밀수 품목은 우산, 재봉틀, 화장품류와 비로도치마, 주름치마, 만년필 등이었다. 1970, 8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는 밀수 품목 중 기계에 많이 들어가는 베어링, 선박 엔진 등도 포함됐다. 여기까지 주된 밀수 대상국은 일본이었다.

1990년대 이후부터는 중국과의 교역이 크게 늘면서 주대상국도 중국으로 바뀐다. 우리의 기술 수준이 일본과 대등한 수준으로 올라선 점도 있지만 이 시기에는 기술보다는 가격 경쟁력을 좇는 양상. 주요 밀수 품목이 참깨, 고추 등 농산물을 비롯해 중국산 가짜 비아그라 등으로 재편된 점도 이를 그대로 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