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경제 야사] <42> 인물편 양정모
⑥ 그룹복원 집념과 후일담
20040628T110959 | 수정시간: 2009-01-13 [21:46:36] | 31면
국제그룹이 해체되자 신발업종인 국제상사는 한일그룹(김중원)으로 넘어갔다. 한일그룹은 이로써 기업규모가 커져 재계 5위의 거대기업으로 급부상했다.
세월이 흘러 5공정권 말기인 1987년 6·10 민주항쟁과 6·29선언 등으로 정권교체 가능성이 거의 확실시되자 그동안 와신상담하던 양정모는 국제그룹 복원본부(대표 김상준)를 설립하여 회사 되찾기 운동을 펼쳤다. 드디어 전두환의 5공정권이 끝나고 노태우의 6공정권이 들어서자 국제그룹 복원운동은 제법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1989년 1월 당시의 6공정권은 전임 5공정권에 대한 비리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국제그룹 해체와 관련하여 정치적 개입 흔적을 찾지 못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국제그룹 복원본부는 이에 굴하지 않고 헌법소원을 제기했는데 1993년 7월 헌법재판소는 국제그룹 해체는 위헌이란 판결을 내렸다.
이에 사기가 오른 복원본부 측은 한일그룹을 상대로 국제상사 소유권반환 청구소송을 제기했지만 1996년 대법원 최종판결에선 패소하고 말았다. 판결요지는 국제그룹 해체는 비록 위헌이라 할지라도 사인(私人) 간의 계약에는 흠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양정모는 그룹 복원 문제와 관련하여 1987년 말부터 1988년 말까지 1년간에 걸쳐 모 그룹 회장으로 있던 그의 사위 김모씨에게 로비자금 명목으로 200억원을 제공했다는 말이 나돌았는데 이 돈의 용처를 두고 말들이 많았다.
이뿐만 아니라 1985년 국제그룹 해체 당시 양정모는 그의 사돈인 신한종금 김모 회장에게 신한종금 주식 124만주를 건네줬는데 명의신탁이냐 증여냐 그 성격을 두고 법정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양정모가 승소하고 김모 회장은 형사소추되어 실형까지 선고받았지만 IMF 사태로 신한종금 주식이 휴지조각처럼 되어버리자 승소의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한편 1985년 한일그룹으로 넘어간 이후의 국제상사는 생산시설을 대폭 교체하고 경영혁신을 꾀했으나 누적된 적자로 재무구조가 악화되어 정상가동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한일그룹에서는 궁여지책으로 시가 2천억원 상당의 사상공장 부지 6만9천평을 팔아 1천300억원의 빚을 갚고 나머지 돈은 회사이전 비용에 충당키로 했다.
드디어 1992년 부산경제계의 대들보와도 같은 향토기업 국제상사는 오랜 부산시대를 마감하고 경남 김해시 안동으로 이전했다.
끝으로 부산상의 회장으로서의 양정모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오랫동안 부산상의 회장직을 맡고 있던 강석진이 그 자리를 떠나자 후임 상의회장은 당연한 수순처럼 양정모가 그 뒤를 이었다. 그는 1976년 6월 제9대 부산상의 회장으로 취임한 이래 1985년까지 9년 동안 3대에 걸쳐 연임했다.
그는 부산상의 회장에 취임하자 영도 동삼동에 새마을연수원을 건립하고 도시가스㈜와 항도투자금융㈜을 설립하는 등 많은 사업을 펼쳤다.
그는 1980년 5월 동명목재 구제책을 관계요로에 건의했는데 3년 뒤 그 또한 그 지경에 이를 줄이야 짐작도 못한 일이다.
세상사 참으로 허망하다. 수만명 근로자의 일터였던 괘법동 회사터엔 잡다한 업무시설들이 들어서서 그 옛날 국제타운의 옛 모습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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