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부산의 이야기

동천의 기억- 직할시 승격과 동천 운하

동천 재생 4.0 부산의 미래를 흐르게 하자 <4-13>

 동천의 기억- 직할시 승격과 동천 운하

동천은 원래 운하, 온전히 보전됐다면 '도심 속 뱃길' 환상적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2013-08-06 19:20:48
  • / 본지 6면
  •  
   
1960년대 초반 부산 서면 일대 시가지 전경. 오른쪽 나무가 들어선 곳이 현 롯데백화점(옛 부산상고)이고, 가운데 대로처럼 보이는 곳이 부전천이다. 상당부분 복개돼 있으나 폭이 꽤 넓은 모습이다. 부산진구 제공
 
- 1930년대만 해도 선박 드나들어
- 갈수록 자갈·흙 쌓여 출입 못해
- 1949년 商議 등 주축 시민조직
- 정부에 특별시 승격 청원하며
- 하천 준설 운하기능 복원 요구
- 6·25 전쟁 발발하면서 흐지부지
- 구상대로 운하건설 이뤄졌다면
- 벌써 생태도시 자리매김 했을 것

올해는 부산이 직할시로 승격된 지 만 50년이다. 1961년 5·16 후 국가재건 최고회의 조시형 내무위원장이 제안한 '부산직할시 승격안'을 근거로 1963년 직할시가 출범했고 이제 반세기를 지나는 중이다. 그러나 부산이 경남도에서 독립해야 한다는 시민 여론은 이보다 훨씬 이전인 광복 이듬해 1946년부터 꾸준히 일었다. 애초 부산이 바랐던 건 직할시가 아니라 특별시였다. 특별시가 되면 무엇을 하겠다는 구상 가운데 하나가 동천을 이용한 운하 건설이었다.

부산 특별시 말이 나온 계기는 서울의 특별시 승격이었다. 경기도에 예속됐던 서울이 1946년 8월 16일 정치수도를 명분으로 내세워 특별시가 되자 부산에선 해양수도를 내세워 특별시 여론이 조성되었다. 여론 조성의 중심에는 1946년 7월 10일 출범한 부산상공회의소가 있었고 부산상의 초대와 2, 3대 회장을 지낸 김지태(1908∼1982)가 있었다.

■'大부산' 건설 10대 구상

김지태는 한 시대 부산을 대표하는 명사였다. 부산상고(14회)를 졸업하고 삼화고무와 조선견직, 부산일보와 MBC 사장, 2, 3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김지태는 한 시대를 풍미한 기업인이자 언론인이자 정치인이었다. 1946년 10월 부산상의 초대 회두(회장)로 임명된 그는 총회를 열어 '부산특별시 승격안'을 제안해 만장일치 가결한다. 부산직할시 승격의 발판은 사실상 이때 놓아졌다고 봐야 한다.

승격 여론 조성의 다른 축은 '부산특별시 승격 기성회'다. 1949년 6월 14일 부산상의와 동회연합회가 주축이 되어 설립한 기성회는 관과 유지가 총망라된 범시민적 조직이었다. 회장 김지태, 부회장 김용준, 이사 김낙제 김달범 신덕균 권인수 등이 선임돼 거시적 승격운동 조직을 갖추었다. 기성회는 그 해 6월 25일 대통령과 국회의장에게 부산을 정부 직할의 특별시로 승격시켜 줄 것을 청원한다.

기성회 청원서에는 부산 미래 청사진인 '大부산' 건설 10대 구상이 담겼다. 부산역을 서면으로 이전하고 그 자리를 해안상가로 개발하자는 등 지금 곱씹어도 혁신적이고 진취적인 내용들이다. 동천 운하 건설도 구상 중의 하나로 말 그대로 부산의 미래를 제시한다. 직할시 승격 50주년을 맞는 이즈음에도 몇몇 구상은 유효하다.

10대 구상의 주요 내용은 이렇다. ▷부산역을 서면으로 이전하고 동시에 조차장을 가야 방면으로 옮긴다. ▷부산항을 근대적 항만시설로 갖추고 특히 적기 방면을 개발하여 또 하나의 외항을 만든다. ▷부산 중앙역(서면)과 연결하는 임항(臨港)철도(서면∼적기, 산 밑을 통과)를 부설하여 별도계획의 운하와 더불어 육해수송 능력을 강화한다. ▷범일동에 있는 동천 부지를 이용, 운하(서면∼대선양조장 간)를 개설하고 낙동강 물을 끌어들여 공업용수를 해결한다.(당시 대선양조장은 문현동에 있었음) ▷현재의 부산역(초량으로 이전하기 전의 본역) 및 조차장을 철거하는 데서 생기는 넓은 땅을 국내 유일의 해안상가로 개발한다. ▷서면을 중심한 거제 연산 해운대 송도를 고급주택지역으로 설정한다. ▷지하철도(서면∼시청 앞)를 기간 교통수단으로 설정하고 동래 해운대 등의 풍치지구는 관광지대로 개발하여 전철을 운행한다 등이다.

동천 재생과 관련 주목을 끄는 건 네 번째 구상이다. 당시 동천 주변엔 큰 공장이 많았다. 1911년 들어선 조선방직과 대선주조가 있었고 고무신 공장들이 동천 유역에 있었다. 원재료와 완제품 수송을 주로 해상에 의존하던 시절이라 바다와 연결된 동천 운하는 돋보이는 구상이었다. 구상대로 되었다면 부산은 자연친화적 생태도시, 상상력 풍부한 다층적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낙동강 끌어들이는 구상

실제 1930년대만 해도 동천은 운하였다. 1936년 5월 1일 조선방직과 대선주조 등 5개 기업 명의로 부윤(지금의 부산시장)에게 청원하는 진정서가 문건으로 남아 있다. 동천은 준설이 계속되지 않아 물동량을 실어 나르는데 장애가 있으므로 속히 준설해 달라는 진정이다. 진정서 내용으로 미루어 동천은 서면 일대 공업지역으로 물동량을 실어 나르던 운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낙동강 물을 끌어들인다는 구상도 값지다. 동천 지류인 당감천 가야천으로 수로를 내어 낙동강 물을 잇댄다는 구상은 충분히 공감이 가는 대목이다.

'국제도시 부산은 부산의 부산이 아니라 세계의 부산이 되었으니 정부 직할로 승격함은 지극히 필요한 일이며 그렇게 해야만 대한민국의 비약을 기할 수 있다.'

'大부산' 건설은 제2대 국회의원에 입후보한 김지태 공약으로 이어진다.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총선에서 서면과 동래, 해운대를 아우른 부산 갑구에서 출마한 김지태의 공약은 그러나 당선되고서도 3년이 지나서야 틀이 잡힌다. 총선 후 한 달도 안 돼 터진 한국전쟁 탓이었다. 서울로 환도한 국회에서 김지태는 특별시에서 직할시로 고쳐 부산의 승격 법안을 제출하고 제안 설명을 통해 세계도시 부산의 당위성을 밝힌다. 그럼에도 경남도와 서울시의 조직적 적극적 반대로 무산된다.

부산시민의 열패감은 컸다. 대안으로 도입된 게 구제(區制)였다. 1956년 12월 17일 '부산시 구제에 관한 법률안'이 통과되면서 이듬해부터 시행되었다. 이후 연판장을 돌리고 승격 촉구 시민대회가 열렸지만 3, 4, 5대 국회에선 열매를 맺지 못했다. 그러다 앞서 언급했듯 최고회의 의결 과정을 거쳐 특별시 대신 직할시로 승격되었고 광역시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100의 순우리말은 '온.' 온은 온전을 뜻하고 완전을 뜻한다. 100을 가리키는 영어 센텀의 속뜻이 완전무결인 것과 같다. 부산은 지금 지나간 50년과 다가올 50년의 중간 지점에 서 있다. 지나간 50년이 직할시 50년이라면 다가올 50년은 직할시 50년을 뛰어넘는 50년이어야 한다. 그래야 온전한 100년이 된다. 동천은 지나간 50년과 다가올 50년 한 중간을 가로지르는 도심 하천. 부산이 온전한 100년으로 가느냐, 그 시금석 하나가 바로 동천이다.


# 동천 변천사

- 임진왜란 땐 왜선까지 정박
- 일제시대 도시계획 실시로 구불구불 하천이 일직선화
- 현재 서면 복개도로 원형돼

   
1936년 동천 준설을 요구한 진정서.
동천(東川)은 성(부산진성, 자성대) 동쪽의 하천을 이른다. 성이 생기기 이전에는 단풍 풍을 써 풍만(楓滿)강 또는 보만(寶滿)강으로 불렀다. 단풍 잎이 보석처럼 떠다니는 아름다운 하천이었으리라. 임진왜란 전황을 기술한 난중일기에는 여기에 왜선이 정박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임진년(1592) 9월 1일(양력 10월 5일) 부산포해전 일기에 언급된 '부산성 동쪽 한 산에서 5리쯤 되는 언덕 밑 세 곳에 둔박한 왜선이 모두 470여 척 있었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동천은 차츰 토사가 쌓이면서 운하 기능이 위축된다. 홍수가 들면 백양산 황령산 등지에서 자갈과 흙 따위가 떠 내려와 동천 곳곳을 가로막은 것이다. 1936년 준설 청원 진정서에는 그러한 상황이 묘사돼 있다. 진정서 내용 일부다. '동천 운하는 부산항만에 통하는 유일한 수로로서 부선(艀船)은 물론 200∼300톤 정도의 범선(帆船) 및 발동선도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어 경제에 있어 극히 유리한 운하임. 그럼에도 매년 여름철에 여러 번의 큰 비로 동천에서 유출되어 하류 운하 및 항내에 퇴적하는 토사는 약 1만 톤 또는 그 이상으로 추측되어 동 운하의 교통두절뿐만 아니라 하구 멀리의 항내마저 매몰케 하는 상태임.'

   
1937년 부산 최초 도시계획이 실시됨에 따라 동천으로 유입되던 부전천과 전포천이 크게 변모한다. 구불구불하던 자연하천은 일직선으로 바뀐다. 일직선 하천은 서면 복개도로의 원형이 된다. 부산진구청에서 발간한 동천 사진집을 보면 일제강점기 전포동과 문현동 야산을 깎아 바다를 메웠다는 기록이 있다. 황령산터널 우측 문현동 방면 절벽이 그때 산을 깎은 증거란다.

동길산 시인

후원: (주)협성종합건업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