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鞋)
신목이 없고 운두(신울)가 낮은 신.
- 내용
- 특징 및 의의
- 참고문헌
내용
일반적으로 혜鞋는 신울이 낮은 형태로, 초草나 마麻, 나무[木]를 제외한 신의 총칭인데 주로 상류층의 신을 의미한다. 재료에 따라 명칭이 다양하며 신코 부분의 형태로 남녀용으로 구분된다. 주된 재료나 꾸밈새에 따라 명칭이 달라서 피혁皮革, 포백布帛, 유鍮 등으로 구분된다. 종류에는 태사혜, 삽금혜, 삽혜, 제혜, 녹피혜, 흑피혜, 흑혜, 유혜, 분투혜, 피초혜, 사피혜, 당혜, 운혜 등이 있는데, 성별과 신분에 따라 다르게 신었다. 왕실 유물로는 영친왕비의 당혜 두 점과 왕손이 신던 태사혜 한 점이 있다.
문헌의 도설에 나와 있는 혜의 형태를 보면 『고종임인진연의궤高宗壬寅進宴儀軌』에서의 초록혜草綠鞋, 『악학궤범樂學軌範』의 처용관복處容冠服과 여기女妓 복식의 혜가 있으며 발등을 많이 덮지 않는다. 이 중 처용의 관복에 신는 혜에는 끈이 달려 있고, 초록혜는 신코에 술이 달려 있는 것을 제외하면 장식이 거의 없다.
유물로 전해지는 것은 조선 후기와 말기의 출토유물이 대부분이며, 이러한 유물의 시대적 한계를 문헌 자료와 비교하면 남녀의 혼용, 명칭의 혼란 등 차이를 보인다.
조선 말기 유물에서는 운혜와 당혜는 여성용 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말기에 나타난 현상이며, 문헌 기록에서는 남녀 공용으로 확인되고 있다. 또한 남성용 신을 대표하는 태사혜는 19세기 말 「궁중발기宮中撥記」에서 한 건이 확인되고 있을 뿐이다.
조선시대 가죽신에 쓰이는 재료로는 노란색 소가죽인 흡피, 노루 가죽인 쟁피[獐皮], 사슴 가죽인 녹피가 신울로 쓰였고, 왕실에서는 흑담비, 고라니, 곰, 당나귀, 양 등의 귀한 가죽재료를 사용하기도 했다. 백마白馬의 볼기 가죽이 도리(신 입구의 둘레 부분)로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채찍에 많이 단련된 질긴 엉덩이 부분 가죽을 사용하여 여러 번 착용해도 신 입구가 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 자료 중 복식 제작에 필요한 재료가 기록된 『미암일기眉巖日記』에 보면 여러 가지 다양하고 생소한 가죽의 종류가 보인다. 서피鼠皮, 백록피, 인록피모人鹿皮毛, 녹피, 흑록피, 문피文皮, 구피狗皮, 흑서피黑黍皮, 어피魚皮, 황피黃皮, 황광피黃狂皮, 초피貂皮, 장피獐皮, 호피虎皮 등으로, 이 중에는 정확히 파악이 힘든 것도 있다. 내피용으로는 짐승 털을 누른 ‘담毯’ 등을 사용하였다. 신울로 사용되는 천으로는 숙고사, 생고사, 삼팔, 무명 등이 여름용으로 사용되었고, 공단, 양단 등이 겨울용으로 사용되어 신의 재료도 의복의 재료와 유사했음을 알 수 있다.
혜를 제작하기 위하여 필요한 재료 구성은 표(겉감), 내공(안감), 근, 회이, 창, 과피, 휘, 백비, 실, 금전지 등이다. 그 외 보수를 위해 모직물로 만든 혜전鞋氈 또는 모전毛氈이 있다. 어저귀 풀의 털을 풀에 섞어 길이와 너비가 반 발쯤 되게 만들어 걸어놓았다가 신이 닳아 밑창이 떨어지면 베어서 신발 밑바닥에 대어 신는다.
남자의 혜는 신울의 높이에 따라 왼마상(온마상), 반마상으로 분류할 수 있다. 왼마상은 울이 높고 신코가 길며 우뚝하며 왕, 내시, 노인들이 많이 착용하였다. 반마상은 울이 낮고 보통 솜버선에 맞게 된 일반용 신이다. 여자의 혜는 왼궁혜(온궁혜), 반궁혜, 계혜, 기혜로 분류한다. 왼궁혜는 노인용으로 울이 높고 발이 편하여 버선에 솜을 두어 신는다. 반궁혜는 신울이 얕고 맵시가 있으며 발볼이 좁고 버선에 솜을 두어 신는다. 계혜는 볼 넓은 여자나 여염집 부인용으로 맵시가 별로 없는 신이며, 기혜는 기생들의 신으로 신울이 아주 얕고 불편하나 맵시가 있다고 하였다. 이는 혜의 신울이 높고 낮음에 따라 맵시와 발의 편안함이 달라짐을 알 수 있다. 문헌에 있는 혜의 기록은 삽혜, 온혜, 운혜, 피혜, 흑혜 등이 있다.
삽혜는 남혜男鞋로 왕의 어리御履를 말한다. 삽혜는 유생과 천인들의 금제에 포함되어 있으며, 왕실을 비롯하여 사대부 상류 계급에서 착용하였다. 『상방정례尙方定例』에 나와 있는 흑웅피삽혜를 보면 겉은 흑색의 곰 가죽, 안은 백색 사슴 가죽으로 하며 뒤꿈치 안쪽으로 자색의 사피 근을 대었다. 백색 개 가죽으로 도리를 두르고 대홍색과 초록색 비단으로 휘(솔기에 넣는 장식 선)를 돌려 화려하게 꾸민 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진상품으로 화와 함께 갖춰 올리는 것으로 보아 삽혜는 임금 이하 왕실 남자들의 신으로, 평상시에 신는 일반 피혜의 형태로 생각된다.
온혜溫鞋는 온혜鞰鞋라고도 하며, 안창에 융이나 담을 대어 따뜻하게 만든 것이다. 『상방정례』에 있는 왕실의 흑웅피온혜는 흑웅피삽혜와 동일한 검은색 곰 가죽으로 만든 것이며 휘의 재료를 초록 남필단을 사용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온혜는 삽혜와 구조가 같고 재료도 비슷하며, 진상품으로 왕비 이하 여관들이 신는 왕실 여자용 신이다. 또 다른 왕실 여자용 신으로 흑웅피결화온혜黑熊皮結花溫鞋, 흑당피결화온혜黑唐皮結花溫鞋는 온혜에 꽃을 단 것인데, 곰 가죽, 당나귀 가죽 이외에 색색의 천과 실, 금종이를 사용하여 만든 것으로 보아 화려했음이 짐작된다. 의궤에도 중궁의 생신에 검은 당나귀 가죽으로 만든 온혜에 꽃을 단 흑당피화온혜를 선물하였다고 하였으므로 결화온혜는 화온혜를 말한다.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에도 상궁, 유모, 시녀, 기행나인, 보행나인, 본궁나인의 흑웅피온혜와 「궁중발기」에는 임오년(1882년) 가례 시 순정효황후의 자적향직온혜, 다홍백로봉채금단온혜, 빈궁의 유청온혜가 있으며 계사년(1893년) 의친왕 부인(군부인)의 자적향직온혜와 명성황후의 흑당피온혜의 기록(1890년)이 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는 1864년(고종 1) 각 전과 궁에 진상하는 온혜의 봉진에 흑당피온혜 대신 백피로 만든 신발을 대신하기도 하였다.
피초혜皮草鞋는 대왕대비전의 백당피초혜와 중궁전, 빈궁의 백당피초혜가 있다. 모두 신울의 겉과 안감으로 흰당나귀 가죽을 사용하고 도리는 흑사피를 사용하지만, 그 외 부분에 색색비단을 사용한 재료가 달라 중궁전과 빈궁의 피초혜가 대왕대비의 것보다 더 화려했음을 알 수 있다. 삽혜와 온혜에는 피초혜와 달리 뒤꿈치 안쪽에 근을 덧대는 공정이 더 있어서, 한 가지 가죽이 더 사용되어 공들여 제작된다.
이외에 외코신은 아무 장식이 없는 신으로 첩과 기녀들이 신었으며 비혜鼻鞋라고도 한다. 외코신의 재료를 보면 흰색, 옥색, 검정색, 회색 등의 비단을 사용하거나 검정색의 노루 가죽, 회색의 가죽을 사용하였다. 흰말의 볼기짝 가죽으로 도리를 둘렀으며 여기에 눈을 놓지 않고 앞코와 뒤축에만 흰 실을 걸었다. 신코가 낮은 것이 특징이다. 장식이 없기 때문에 조선시대 말의 온혜도 외코신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녹피혜도 사슴 가죽으로 만들고 장식이 없다. 궁궐의 잔치에서 기녀들이 신는 붉은색 비단으로 만든 신은 혜아鞋兒, 혜자鞋子라고도 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악학궤범』에는 양반 부녀자와 여기女妓는 사라능단으로 만든 비단 혜를 사용하게 하였다.
수초혜繡草鞋는 조선시대 궁중 무용인 망선문望仙門을 출 때 신던 여자 신이다. 녹색 전氈으로 신울을 대고 꽃무늬를 수놓았으며, 신의 코와 뒤축에 구름무늬를 수놓고 코에는 붉은 상모를 달아 화려하게 장식하고 끈을 달았다. 의궤에 나오는 기녀들의 혜의 명칭을 보면 백피혜白皮鞋, 수초혜, 초록혜草綠鞋, 홍수혜紅繡鞋 등 다양하다.
여성용 마른신 중 특히 비단에 수를 놓은 수혜는 꽃신, 수꽃신이라고도 한다. 가죽이나 베를 여러 겹 붙인 위에 청홍색의 무늬 있는 비단 또는 공단 등을 두르고 다시 비단 색깔과 반대되는 색실로 매화, 대나무, 나비 등을 수놓은 것으로, 주로 젊은 부녀자들이 사용하였다. 신울 좌우 앞부분에 평수와 이음수로 화문을 수놓고 신코를 아름답게 보이도록 초록색으로 장식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선조 때 허난설헌의 한시 구절에 수혜가 있어, 당시 양반가 부녀자들의 치장으로 착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제혜祭鞋는 제복에 착용하며, 가죽이나 무명을 사용하고, 신코 부분에 백색의 넓은 선 장식이 있다. 이 밖에도 승혜僧鞋는 승려들의 마른신으로 융을 재료로 하여 푹신하다.
형태가 특이한 발막신 또한 마른신의 한 가지로 상류층 노인들이 주로 신었으며, 뒤축과 신코에 꿰맨 솔기가 없고 코끝이 넓적하다. 발막신은 뒷발막과 앞발막이 있는데, 뒷발막은 검정 가죽에 백마 도리를 두르고 뒤꿈치가 통으로 솔기가 없다. 앞발막은 외코신의 모양으로 뒷발막과 같으나 신코 위에 백마피로 원형圓形을 펴서 대고 경분輕粉을 칠했다.
흑혜黑鞋는 외피를 검은색 모직, 검은색 녹피 또는 자색 우단으로 하고 내피는 백피로 되어 있다. 주로 검정색의 가죽으로 만들며 장식이 없는 단순한 것이다. 흰색 사슴 가죽으로 도리와 근피를 둘렀고 안창은 담이 깔려 있다. 앞코에 코실과 뒤축에 칙실로 마무리한다. 울이 낮은 것은 젊은 층이 선호하였고, 신울이 비교적 높은 것은 노년층에서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착용하나, 그 형태의 차이가 있다. 남자의 것은 신코가 넓고 뒤축이 높은 신으로 조선 말기에 유생들이 신었다. 여성용은 신코가 뾰족하고 높은 형태로 되어 있다.
흑피혜黑皮鞋는 조선시대 백관의 조복과 제복에 착용한 신이다. 『사례집요四禮輯要』를 보면 흑피혜의 구조에 대한 설명으로 “가죽으로 만든 혜, 가죽을 사용한다. 덧대는 바닥은 발의 모양에 따른다. 혹은 징을 붙이기도 한다. 네 변은 난간을 둘러서 이어지게 한다. 코는 구형句形으로 하여 발 앞부분을 받는다.”라고 하였다. 흑혜와 흑피혜는 장식이 없는 것이 유사하지만, 흑피혜는 가죽으로 만들고 흑혜는 천이나 가죽을 검정색으로 염색하거나 붉은색, 파란색의 우단으로 만든다. 또 앞축과 뒤축 중심에 흰 실로 코실과 칙실을 만들어, 이 두 가지 형태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마혜麻鞋는 생삼生麻이나 삼, 닥나무를 소금물에 담갔다 엮어 만들어 ‘승혜繩鞋’, ‘삼신’이라고 부르며, 곱게 만든 것이 많아 ‘미투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조선시대 양반들을 비롯해 중인 계급까지 광범위하게 착용되었다. 미투리는 형태가 매우 날씬하며, 신코가 길고 독특하게 짜여 있고, 신바닥이나 총이 조밀하게 되어 있다. 중인 계급이 가장 많이 신었던 미투리는 총을 대략 50~60개를 세워 만든다. 미투리의 주재료는 닥나무인데 경상북도 월성의 닥이 특히 유명했다고 한다. 지혜紙鞋는 종이로 노를 꼬아 만들고 마와 함께 삼기도 하는데, 곱게 짜서 만들기 때문에 지총미투리라고도 한다.
특징 및 의의
혜와 함께 목이 없는 신의 명칭으로 ‘리履’가 혼용되어 사용되는데, 조선시대에는 목이 없는 신을 혜로 통칭하여 부르게 되었다. 리는 혜보다 이른 시기에 중국 문헌에 가죽신[革履], 짚신[草履]의 기록으로 등장한다. 중국 『설문통훈정성說文通訓定聲』의 기록에 보면 ‘구屨’가 가장 이른 명칭이고, 한나라 이후에는 리라 했고, 뒤이어 혜라 부른 것으로 나온다. 그러므로 조선 이후 리는 사용하는 빈도에 따라 점차 혜로 바뀌어 목이 없는 신의 통칭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도설에 나와 있는 리의 형태는 『악학궤범』의 오피리烏皮履, 『세종실록世宗實錄』 왕세자관복의 흑리黑履, 『춘관통고春官通考』 문무관 관복의 리, 『경모궁의궤景慕宮儀軌』의 리 등이 있다. 이들은 끈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였는데, 대체로 발등을 많이 감싸는 오늘날 발목 양말 형태였다. 여기에 신코 장식으로 구름무늬 장식이 대부분이었다. 이에 비해 조선 말기의 리는 서민용 초리草履 와 정교하게 짠 미투리가 대부분이었다. 초리는 ‘짚신’이라고 하는 것으로 신코가 짧고 엉성하게 짜인 것이 많다. 왕골 짚신, 부들 짚신 등이 있는데, 특히 왕골[莞草]과 부들[香蒲] 등을 가늘게 꼬아서 촘촘히 삼은 고운 짚신도 있다. 골풀로 만들어 상제喪制가 초상 때부터 졸곡卒哭 때까지 신는 엄짚신[菅履, 菅屨]도 있다.
참고문헌
관련 콘텐츠
운혜, 흑피혜, 녹피혜
출처: 혜(鞋) - 한국민속대백과사전 (nfm.go.kr)
화(靴)
조선시대 문무백관이 관복에 착용한 목이 긴 신.
- 역사
- 내용
- 특징 및 의의
- 참고문헌
역사
고구려에는 자피화紫皮靴·오피화烏皮靴·말화袜靴 등의 기록이 있고, 신라에는 자피화·오피화 등이 있는데, 형태에는 큰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재료에 따라 흑피화黑皮靴·흑화·전피화猠皮靴·기자화起子靴·협금화·백목화·백화白靴·화자·피화·목화木靴 등으로 명명되어 있다. 그 외에 방수용 수화자水靴子, 秀靴子가 있다. 신분이나 용도에 따라 구분하여 신었으며 재료에 따라 이름이 다르나 형태는 유사하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남자용 화의 재료로 자피紫皮, 오경추문자피烏麖皺紋紫皮를 쓰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자색 가죽과 검은 사슴의 주름진 가죽으로 만든 화는 신분이 높은 귀족만 착용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신분에 따라 무늬가 있는 백옥·검은 물소 뿔·철·놋·동 등으로 만든 화대를 따로 달아 묶었다.
고려시대에 왕과 백관의 관복제도가 시행되면서 관복용 화가 제도화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문종의 공복 일습에 화가 포함되었던 기록이 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도 공석에서 신는 신의 제도가 구체화되고 있다. 실물 전래품으로는 안동 태사묘에 14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는 화靴 한 점이 있는데, 조선시대 화의 형태와 유사하다.
조선시대에는 백관들의 관복제도에 1품에서 9품까지 공복에 흑피화를 신고, 상복에는 1품에서 3품 당상관만 협금화를 신도록 하였다. 1430년(세종 12) 서인· 상공·공사·천인이 신지 못하도록 하였고, 이후 조선 말기에는 관리들의 화가 목화로 통일되어 관복용으로 착용되었다. 목화는 19세기에 등장하는 명칭으로 ‘목이 있는 신’의 표음 용어로 해석된다.
내용
화는 재료와 기능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재료도 신분에 따라 다르나,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피화가 가장 많았다. 『악학궤범樂學軌範』에는 흑피로 만든다는 기록이 있으며, 사슴 가죽에서부터 고라니·담비·말·살쾡이 가죽에 이르기까지 온갖 동물의 가죽이 폭넓게 사용되었다. 또 화의 겉감과 안감을 각기 다른 가죽을 사용한 것도 많다. 신목은 흑색 천으로 만들고 털[氈]·가죽·융·금단 등으로 겉을 씌웠다. 솔기에는 색깔 있는 천이나 가죽으로 선[揮]을 둘렀다. 오늘날 벨벳과 같이 고운 털이 돋게 짠 우단이나 삼베 등을 소재로 쓰기도 하였으며, 검정색 무명을 누벼서 만든 누비화에 대한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전해지는 조선] 말기 유물들은 대부분 융이나 우단· 모직·무명 등의 포를 사용하였으며, 왕실용은 목 주위에 녹색 운문단 금衿을 달아 특별히 화려하게 만들었다. 『한주전서寒洲全書』에도 목화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두 겹 바닥은 혜와 같고, 혹은 나무 조각을 사용하기도 했으며, 위로 정강이의 반까지 싼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발목 위로 올라오는 신’, 즉 ‘신목이 있는 신’ 형태의 다른 기록과 일치한다.
화의 구성을 보면 말靺 부분과 혜鞋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모두 여섯 조각이 봉제되어 육합화六合靴 형태이다. 여섯 조각으로 봉제된 솔기의 사이에는 ‘휘揮’라고 하는 흑색·자색·백색의 가느다란 가죽 선을 1~3줄 넣어 주었다. 신목의 입구에는 ‘도리[回伊]’를 둘러 마무리하는데 가죽이나 홍색·자색·녹색 모직 천을 사용하였다. 여기에 발을 편안하게 하기 위하여 족의足衣 중 하나인 버선 형태의 ‘정精’을 화 속에 신기도 했다. 전해지는 유물 중에는 2~5조각으로 다양하게 봉제되어 만들어진 화가 많다. 뒤의 상단에는 5cm 정도의 트임이 있으며, 앞부분 상단에도 백피로 만든 짧은 고리 형태의 신끈이 달려 있다. 유물의 바닥은 가죽·무명·융으로 밑창과 중창, 안창을 하고 백색 분칠로 마무리되어 있다.
『상방정례尙方定例』에 기록된 왕의 화는 흑궤자피화黑麂子皮靴, 흑사피화黑斜皮靴이다. 겉감 가죽은 흑궤자피나 흑사피로 만들고, 안감으로 백녹피를 사용해서 만든다. 여기에 동일 가죽인 흑궤자피 또는 흑사피로 신목 주위에 단[衿]과 도리를 둘렀다. 고라니나 담비 등의 고급 재료로 만들어 사용하고, 여름철에는 흑서피黑黍皮 또는 흑당피로 화로 만들어 신었다. 『국혼정례國婚定例』에도 대군의 가례에 담비 가죽으로 만든 검은 가죽신[黑斜皮靴]을 신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외에 검은 담비 가죽으로 만든 투혜[黑斜皮套鞋], 검은 곰 가죽으로 만든 삽혜[黑熊皮靸鞋]가 있다. 여기에 정精을 함께 갖췄다. 기록에 보면 정의 겉감은 백색 비단[白紡紬] 또는 백당피로 되어 있고, 목의 윗부분은 화와 같은 녹색 광직으로 만든 버선 형태이다. 「궁중발기宮中撥記」에도 화와 같이 진상된 정의 기록이 있으므로 왕실에서는 화와 정이 일습으로 화의 착용 시 함께 착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에는 조선시대 왕세손의 관례 때 청금포靑錦布를 입고 세조대細條帶(도포나 전복· 창의에 착용하는 가느다란 띠)와 흑화자를 착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방 관아의 으뜸 벼슬[使]과 정사를 돕는 부사副使가 승선할 때, 또 관에 머무를 때 학창의鶴氅衣와 흑화자를 신는다고 하였다. 『국혼정례國婚定例』에도 왕비 가례 시 역시 정사와 부사, 주인도 검은 빛깔의 신, 흑화자를 신는다고 하였다. 또, 의궤에 나오는 악공들의 화는 오화烏靴·호화胡靴·수화자·흑피화·흑화 등으로 명칭이 다양하다.
화는 색깔에 따라 흑피화, 백피화 등으로도 구분하는데, 백피화는 문무백관들이 시복時服에 신는다고 하였다. 국상 시에는 백색 단령과 함께 신으며 백목화라고도 부른다. 유물을 보면 백색 무명으로 만들고, 외피는 두껍게 하고 내피는 얇은 면을 사용하였다. 5조각으로 된 5합 목화로 봉제선 사이에는 백녹피로 도리와 선[揮]을 두었고, 가죽으로 된 밑창에는 앞과 뒤 끝부분에 세 개씩의 징이 박혀 있다. 초상화 가운데에도 상복 차림에 백화를 신고 있는 모습이 있다. 1778년(정조 2)과 1793년(정조 17)에 백화 착용과 사치를 방지하기 위해 백화 만드는 것을 금지하도록 분부한 내용으로 보아 멋을 부리는 관리들이 백화를 신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피화猠皮靴는 무두질한 양가죽으로 만든 화로 추정되며, 부드럽고 가벼운 양가죽 재질이 특징으로 봄과 여름에 착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유화油靴는 유혜와 같이 기름을 먹인 가죽으로 만든 것이며, 조선 세조대에 흑사피유화黑斜皮油靴, 말가죽 유화[馬皮油靴]를 하사한 기록이 있다. 기름을 먹여 방수한 것으로 ‘수혜자水鞋子’, ‘수화자’라고 하기도 하였다. 무관들이 전지에 나갈 때 활을 쏘거나 걷기에 편리하게 하기 위해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신바닥에 기름을 먹인 면이나 피혁 또는 종이를 깔고 만든 것이 특징이다. 베를 접어서 만들기 때문에 매우 두껍고 단단하여 진흙 길을 걸어도 스며들어 젖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며, 오랜 시간 야외에서 행군을 했던 무관들에게 유용하였다.
1479년(성종 10)부터 1481년(성종 12)까지 매해 중국의 명나라 사신에게 백록피협금기자화白鹿皮挾金起子花를 하사한 기록이 확인된다. 화는 흑웅피黑熊皮로 만들고, 청색과 자색의 사피斜皮를 써서 꽃 그림을 새기고, 선線은 청사피靑斜皮로 하였다는 것으로 되어 있어, 꽃모양의 장식이 있는 화를 선물한 것으로 추정된다. 협금화는 ‘쇠를 끼운 화’라는 뜻으로 바닥에 특별히 징을 박은 것으로 보인다. 1465년(세조 11), 시중의 무리와 불량배들까지 협금화를 착용하므로 금제를 엄격히 내리도록 청한 기록과 예종대 당하관]의 협금화 착용을 금한 기록이 있다.
분투혜分套鞋 또는 투혜套鞋는 방한용 및 방습용 덧신의 일종으로 추위를 막거나 신을 보호하기 위해 신 위에 덧신었다. 추운 겨울날 백관들이 궁궐 뜰[殿庭]의 조회 때나 나다닐 때[行幸], 맞이하거나 보낼[迎送] 때 털로 만든 이엄과 분투혜 착용을 허용하였다. 이 밖에도 병이 있고 연로하여 신고자거나 궐문 밖에서 조회를 기다릴 때, 행차 중 길에서 대기[路次]할 때, 그리고 각 관아에서 우두머리가 일을 보기 위해 채비를 차릴[坐起] 때도 착용하게 하였는데, 형태는 평상용보다 크게 만들어 화 위에 신는 가죽신으로 추정된다.
특징 및 의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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