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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 이야기

혼례(婚禮)

혼례(婚禮)

혼례 / 초행
가족
 
의식행사
 
혼인을 행할 때 수반되는 모든 의례와 그 절차를 지칭하는 용어. 혼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접기/펼치기내용 요약음성 재생

혼례는 혼인을 행할 때 수반되는 모든 의례와 그 절차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혼인이란 원칙적으로 남녀 두 개인의 결합이지만 두 가족의 결합이기도 하다. 사회마다 개인과 가족의 중시 정도가 다르다. 개인의 결합을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혼례가 그다지 중시되지 않고 절차도 비교적 간소하지만, 가족의 결합을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의례 자체를 중요시하며 격식을 갖추어야 혼인이 인정된다. 동양에서는 가족이 강조되는 경우가 많아 다소 번잡한 절차가 뒤따랐다. 우리나라도 지배층의 예였던 주자의 『가례』가 조선후기에 일반서민에게까지 확대되어 오늘에 이른다.

접기/펼치기정의
 
혼인을 행할 때 수반되는 모든 의례와 그 절차를 지칭하는 용어. 혼례.
접기/펼치기개설

 

혼인이란 원칙적으로 남녀 두 사람의 사회적으로 인정된 성적(性的) 및 경제적인 결합이다. 그러나 두 개인은 각각 하나의 가족 속에서 자라왔고, 하나의 가족구성원으로서 특정한 지위를 가진다는 의미에서 혼인은 두 개인의 결합에 의해서 생기는 두 가족의 사회적 결합이기도 하다.

 

사회에 따라서 개인의 결합을 강조하는가 하면 가족간의 결합을 보다 강조하기도 한다. 개인의 결합을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개인간의 의사가 혼인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혼인과 동시에 두 개인은 독립된 가계(家計)를 영위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혼례가 별로 중요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절차도 비교적 간소하다.

 

반면 혼인의 가족적 결합을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반대의 현상을 보인다. 혼인할 때 두 개인의 의사보다는 가족의 의사가 강하게 반영되고, 혼인한 뒤에도 공동가계(共同家計)의 한 부분을 형성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의례 그 자체를 중요시하며 격식을 따라야 혼인이 인정된다. 특히, 동양에서는 이러한 혼인이 지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혼인을 통해서 두 가족간의 권리와 의무가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혼례는 두 개인이 결합하여 부부가 되었음을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의례일 뿐 아니라 두 가족의 권리와 의무의 표현이기도 하다. 혼례는 크게 볼 때 통과의례(通過儀禮) 중의 하나이다. 통과의례란 인간이 태어나서 일생을 통하여 출산 · 성인식 · 혼인식 · 장례식 등 사회적 지위와 인정을 받기 위하여 거쳐야만 하는 의례를 말한다.

 

혼례는 크게 두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혼례식만을 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양가(兩家)가 혼담(婚談)이 오가기 시작하면서 혼인과 관련된 모든 행위를 말한다. 전자는 좁은 의미의 혼례이고, 후자는 넓은 의미의 혼례가 된다.

 

현재 혼례식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넓은 의미의 혼례는 그 기본구조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 다만 우리의 전통적인 혼례가 유교적인 혼례 이전의 내용과 절차에 유교적인 혼례를 습합시켜서 지역에 따라 어느 방식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리 나라 혼례의 역사는 우리 민족이 이 지구상에서 생활을 영위해온 역사만큼이나 긴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인류가 태초부터 혼인을 하였고, 이에 관련한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혼례는 하나의 풍속이기 때문에 어떤 시기에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하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혼인제도에 비추어 삼국시대에는 불교식의 화혼례(花婚禮)가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시대에 불교가 성행하였고 상례(喪禮)도 불교식이 많았기 때문에 혼례도 불교식을 따랐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상류사회에서는 불교식을 따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혼례의 여러 절차 중에서 사주(四柱)를 보내고, 택일(擇日)을 하며, 송복(送服)과 함(函) 보내는 것 등은 비록 조선조의 그것과 같지는 않더라도 예로부터 행해졌을 것이다. 특히, 신랑의 초행(醮行) · 재행(再行) · 전안지례(奠雁之禮) · 동상례(東床禮), 신부의 우귀(于歸)와 현구례(見舅禮) 등은 그 기반이 삼국시대부터 이미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신부집에서 혼례를 행하고 신부가 자녀를 출산하여 성장한 뒤에야 시가로 간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때 이미 신랑의 초행과 재행이 있었으며, 신부의 우귀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안지례는 목안(木雁), 즉 나무기러기를 놓고 신랑이 절을 하는 의식인데, 목안에 관한 의례와 풍속은 동북아시아 여러 민족에게 분포된 하나의 풍속이므로 우리 나라에서도 상당히 오래된 풍속임을 알 수 있다. 동상례와 현구례 또한 비록 중국식 명칭으로 표기되었다 하더라도 신랑다루기 폐백으로 불려온 우리의 옛풍속이다.

 

이 밖에도 대례상(大禮床)의 상차림 내용이나 합근지례(合卺之禮) · 교배지례(交拜之禮)의 내용도 주자(朱子)의 『가례(家禮)』 영향 이전 즉, 고려 이전에 이미 행하여졌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주자의 『가례』에 없으면서도 예로부터 전승해왔기 때문이다.

 

혼례가 보다 체계화하고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인 것 같다. 이미 고려말에 주자의 『가례』를 수용하면서 그 바탕을 갖기는 하였다. 그러나 지배계층의 예로 규정되어 시행된 것이 조선 초기인 데 반해 일반서민의 예로 확산된 것은 조선 말기인 것으로 보인다.

 

주자의 『가례』가 고려 말기에 들어와서 정몽주(鄭夢周)의 건의에 따라 지배계층에서 준수할 것을 적극 권장한 점과, 조선 초기에 완성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대부 · 사 · 서인의 관혼상제가 기록된 점, 조선시대의 중기에 예서(禮書)가 한글로 번역되어 보급된 점 등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일제시대 이후, 이러한 가례에 익숙하지 않거나 서구적 교육의 영향을 받은 계층에서는 지나치게 형식적인 전통적인 혼례를 반대하고 이른바 신식결혼식을 만들게 되었다. 신식결혼은 1890년대에 생긴 ‘예배당결혼’이 처음이었다.

 

이와 함께 1900년대에는 불교계에서도 불식화혼법(佛式花婚法)이 등장하였으며, 1930년대에는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를 중심으로 오늘날의 예식장에서 행하는 사회결혼(社會結婚)이 보급되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조선총독부에서 1934년에 발표한 〈의례준칙〉과 1961년의 〈의례준칙〉, 1969년의 〈가정의례준칙〉은 전통혼례의 변화를 초래하게 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의례준칙〉은 주자의 『가례』를 중심으로 하였으며, 1969년의 〈가정의례준칙〉은 1961년의 〈의례준칙〉이 별다른 효과가 없자 처벌규정을 추가하여 발표한 것이다. 특히, 이 준칙은 사치스러운 약혼식과 청첩장의 남발, 혼인잔치, 호화롭고 번잡한 혼례식 등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접기/펼치기전통혼례

혼례의 절차로서 예서에서 말하는 것과 실제의 관행과는 차이가 있다. 예서에서는 의혼(議婚) · 납채(納采) · 납폐(納幣) · 친영(親迎)으로 나누어지는 데 반하여, 실제의 관행에서는 의혼 · 대례(大禮) · 후례(後禮) 등으로 나누어진다.

 

예서의 혼례를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한다면 실제의 관행은 실제적인 모델이다. 실제적인 관행을 중심으로 전통혼례 절차를 보기로 한다.

의혼

양가가 중매인을 통한 상호의사를 조절할 때부터 대례를 거행하기 이전까지의 절차를 의혼이라고 한다. 예서에서 말하는 친영 이전의 절차가 여기에 포함된다. 실제의 관행에서는 여기에 납채 · 연길(涓吉) · 송복 · 납폐 등이 포함된다.

 

납채

납채(納采)란, 예서에 의하면 양가가 중매인으로 하여금 내왕하게 하여 말을 통하도록 하고 여자 쪽의 허락을 기다린 다음, 처음으로 신랑측 혼주(婚主)가 예서에 있는 서식에 따라 신부집에 편지를 보내는 것을 말한다. 서식은 주소 · 관직 · 성명을 적고 간단한 문구로 혼인을 하게 되어 기쁘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다.

 

이 때 신랑집에서는 납채서를 써서 아침 일찍 사당에 고한다. 납채서가 신부집으로 보내지면 신부집 혼주가 대문 밖에 나와서 안으로 맞아들여 납채서를 받아 북향하여 재배한다. 다음에는 사당에 고하고 답서를 전달한다. 신랑집에서는 답서를 받으면 또다시 사당에 고한다. 예서의 이러한 절차에 해당하는 실제의 관행은 중매인을 통하여 사주를 보내는 것이다.

 

사주는 사성(四星) · 주단(柱單) · 단자(單子)라고도 한다. 양가에서 중매인을 통하여 의사를 교환한 뒤 선을 보아 혼인하기로 결심하면, 처음 보내는 서신이 사주이다. 사주에는 신랑의 생년월일을 간지(干支)로 적고, 그것을 다섯 번 접어 봉투에 넣는다. 봉투의 전면에는 ‘사주’ 또는 ‘사성’이라 쓰고, 후면에는 ‘근봉(謹封)’이라고 쓴다.

 

이것을 싸릿대를 쪼개어 끼우고 양 끝을 청홍실로 묶은 다음 홍보(紅褓)에 싸서 신부집에 보낸다. 격식을 갖추는 집에서는 사주 외에 청혼서(請婚書)를 같이 보내는데 주혼자(主婚者)의 명의로 된 서신이다.

 

앞에서 기술한 납채서식을 청혼서의 내용으로 하는 집도 있고, 한문에 능한 사람은 장황한 문장으로 청혼서를 쓰기도 한다. 청혼서를 강서(剛書)라고 하는 지방도 있다. 신부집에서는 상 위에 홍보를 덮고, 혼주가 정중하게 사주를 받아서 놓는다.

 

사주를 받는 것은 현대로 말하면 약혼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혼인을 거절하려면 사주를 받지 않아야 하며, 사주를 받은 뒤에 혼인을 거절하면 이혼이 되는 것이다. 여유가 있는 집은 사주를 받는 날 떡을 해서 잔치를 한다.

 

연길

사주를 받은 신부집에서는 신랑집에 택일단자(擇日單子)를 보낸다. 이것을 연길(涓吉)이라고 하는데, 속칭 날받이라고도 한다.

 

택일단자는 전안(奠雁)할 연월일시와 납폐할 연월일시를 기입한 단자로서 따로따로 기입하기도 하지만, 전안일시만 쓰고 납폐일시는 동일선행(同日先行)이라고만 쓰는 경우도 있다.

 

격식을 따지는 집에서는 전안 · 납폐일시 외에 신랑 · 신부가 보아서는 안 될 사람의 간지, 그리고 앉아서는 안 될 방위 등을 기입하기도 한다. 택일단자는 봉투에 넣어 봉투 겉의 전면에 ‘연길(涓吉)’이라고 쓴 다음 중매인 또는 복많은 사람편으로 신랑집에 보낸다. 택일단자에 허혼서(許婚書)를 동봉하기도 한다.

 

허혼서의 서식은 납채 때의 답례서와 동일하게 하거나 별도의 문장을 만들기도 한다. 연길을 받은 신랑집에서는 잔치를 하기도 한다. 택일단자를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보내는 지방도 있다. 이러한 택일을 ‘맞택일’이라 한다.

 

송복

송복(送服)이란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예물을 보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봉치’ 또는 ‘짐보내기’라고도 한다. 예서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모든 지방에서 다 행하는 것은 아니고 일부 지방에서 행한다.

 

전라도 지방의 예를 보면, 날을 정하여 신부옷감 · 이불 · 솜 · 명주 · 광목 · 패물 · 술 · 떡을 싸서 한짐을 만들고, 이것을 모두 물목기(物目記)에 적어 신부집에 보낸다. 이 날 신부집과 신랑집에서는 친척이 모여 잔치를 한다.

 

납폐

예서에 의하면 납폐(納幣)란 납폐서(納幣書)와 폐백(幣帛)을 신부집에 보내는 의식을 말한다. 함 두 개에 각각 납폐서와 납폐를 넣어 신부집에 보내면, 신부집에서는 상 위에 받고, 북향재배한다. 그리고 답서를 신랑집에 보낸다. 납폐서의 서식은 납채와 유사하고, 폐백으로는 청단(靑緞)과 홍단(紅緞)의 채단(綵緞)을 보낸다. 실제의 관행으로는 납폐라 하면 함보내는 것으로 행하고 있다.

 

함에 넣는 물건은 지방과 사회계층, 빈부에 따라 다르지만 반드시 넣는 것은 신부의 상 · 하의 두 벌과 패물 · 혼서지(婚書紙)이다. 혼서지란 위에서 말한 납폐서로서 예장지(禮狀紙)라고도 하며 일종의 혼인문서이다.

 

송복이라는 절차가 없는 지방에서는 많은 예물을 함에 넣기도 한다. 예컨대 비단 · 이불감 · 솜 · 돈을 넣고, 부귀다남(富貴多男)을 상징하는 곡물이나 목화씨 · 숯 · 고추 등을 넣기도 한다.

 

함은 흔히 ‘함진애비’라 하여 하인에게 짊어지게 하여 초행 전날에 보내거나 초행의 전안의례를 올리기 전에 전하기도 한다. 지방에 따라서는 첫아들을 낳은 복많은 사람이 함진애비가 되기도 한다. 함을 받을 때는 마루에 상을 놓고 그 위에 홍보를 덮은 뒤 받기도 하며, 상 위에 시루를 놓고 그 위에 받아 얹기도 한다.

 

함을 받는 사람은 신부의 어머니나 복많은 여자가 받는다. 함을 받은 뒤 바로 안방으로 가져가 깔고 앉으면서 “복 많이 들었네.” 하면서 함에 손을 넣어 손에 잡히는 옷감이 무슨 색이냐에 따라 부부의 길흉을 점치기도 한다.

 

그리고 함진애비를 후하게 대접하여 보낸다. 오늘날에는 신랑 친구가 함진애비가 되어 혼인 전날 신부집에 전하고 후한 대접과 함값을 받는 풍속이 행하여지고 있다.

 

대례

대례(大禮)란 실제의 관행에서 의혼의 절차를 거쳐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서 행하는 모든 의례를 말한다. 즉, 초행과 전안지례 · 교배지례 · 합근지례 · 신방 · 동상례가 여기에 포함된다.

 

대례를 좁게 해석하면 전안지례와 교배지례 · 합근지례 중에서 전안지례를 소례(小禮)라 하고, 교배지례와 합근지례를 대례라 한다. 예서에는 친영이라 하여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여 오는 모든 절차를 포함시키고 있으며, 실제의 관행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예서의 친영에 포함된 절차는 신랑집의 주혼(主婚)이 사당에 고사를 하고, 다음에는 초례(醮禮:주인이 그 아들을 시켜 술을 맛보게 한 뒤 신부를 맞아 오라고 명하는 의례)를 행한다. 신랑이 신부집에 도착하여 기다리면 신부집에서도 신부와 그 주인이 사당에 고하고 초례를 행한다.

 

그 다음에는 신랑이 신부의 주인에게 기러기를 전하고 신부와 함께 집에 돌아온다. 신랑집에 도착한 신랑과 신부는 교배지례 및 합근지례와 유사한 의례를 행하고 신방을 차린다.

 

이튿날 아침에 신부는 시부모 · 시조부모의 순서로 폐백을 드리고, 집안 친척들에게 인사를 올린다. 3일 만에 신부는 주혼의 안내로 사당에 참배한다. 이튿날 신랑이 신부의 부모를 찾아가 폐백을 드리고, 신부 아버지의 안내로 사당에 고사를 한다. 실제의 관행에서 찾아볼 수 있는 넓은 의미의 대례는 다음과 같다.

 

초행

초행(醮行)은 신랑과 그 일행이 신부집에 가는 것으로서 초행걸음이라고도 한다. 신랑 외의 신랑 일행에는 상객(上客) · 후행(後行)이 포함되며, 때로는 소동(小童)이라 하여 어린이 2명이 끼기도 한다.

 

여기서 상객은 조부가 계시면 조부가 되나 여의치 않으면 아버지나 백부(伯父), 장형(長兄)이 되기도 한다. 후행은 근친(近親) 중 2, 3명이 된다. 신랑 일행이 신부집 마을에 도착하면 신부집에서는 인접(人接) 또는 대반(對盤)이라 하여 안내인을 보내 일행을 정방에 맞이한다.

 

정방은 지방에 따라서 노점 · 주점 · 사초방이라고 하는데, 신랑이 온 방향에서 신부집을 지나지 않는 집의 방이어야 한다. 신랑 일행이 정방에 들면 요기상이 나온다. 간단한 요기가 끝나면 신랑은 사모관대(紗帽冠帶)를 하고, 때에 맞추어 예를 행할 신부집으로 향한다. 신부집에 들어설 때 부정을 퇴치하는 뜻에서 짚불을 놓아 신랑이 그것을 넘어가도록 한다.

 

전안지례

전안지례(奠雁之禮)란 신랑이 신부의 혼주에게 기러기를 전하는 의례를 말한다. 신랑이 신부집에 들어가서 처음 행하는 의례이다.

 

이 때부터 의식의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롭기 때문에 예절과 한문에 능한 노인으로 하여금 홀기(笏記)를 불러달라고 부탁하여 의례를 진행한다. 전안지례를 위해서 신부집에서는 미리 대문 안 적당한 곳에 멍석을 깔고 병풍을 두른 앞에 작은 상을 놓고, 상 위에 홍보를 덮어놓는다.

 

이 상을 전안상이라 하며, 이것을 포함한 모든 시설을 준비해놓은 곳을 전안청이라 한다. 신랑이 신부집에 들어오면 전안청에 안내된다. 홀기의 부름에 따라 신랑이 전안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면 하인이 나무로 만든 기러기 즉, 목안을 신랑 손에 쥐어준다. 신랑은 이것을 받아 상 위에 놓고 읍(揖)을 한 다음 일어서서 4배(四拜)를 한다.

 

신랑이 절을 하는 사이에 신부의 어머니가 목안을 치마로 받아들고 신부가 있는 안방에 던진다. 이 때 목안이 누우면 첫딸을 낳고, 일어서면 첫아들을 낳는다고 전한다. 이와 같은 전안지례는 기러기와 같이 의리를 지키겠다는 서약의 뜻을 지닌다.

 

교배지례

교배지례(交拜之禮)란 신랑과 신부가 마주보고 교배하는 의례이다. 전안지례가 끝나면 신랑은 대례상 앞으로 안내되어 동쪽에 선다. 신부가 원삼(圓衫)을 입고 손을 가린 한삼(汗衫)으로 얼굴을 가린 채, 수모의 부축을 받아 마주선다.

 

신랑이 대례상 앞에 나온 뒤 신부가 마주서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신랑이 신부집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비로소 머리를 얹기 때문이다. 신랑 · 신부가 대례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뒤 먼저 수모의 도움으로 신부가 재배하고 신랑은 답으로 일배한다.

 

다시 신부가 재배하면 신랑은 답으로 일배한다. 이렇게 하면 교배지례는 끝난다. 교배지례에는 대례상 또는 교배상(交拜床)이라고 하는 상을 준비한다. 상 위에는 촛대 · 송죽(松竹) · 장닭 · 쌀 · 밤 · 대추 · 술잔 등을 놓는다.

 

지방에 따라서는 송죽 대신 꽃을 놓고, 시루에 기름종지를 얹고 불을 피우거나, 용떡이라 하여 가래떡을 둘둘 말아놓기도 하며, 봉황이라 하여 문어포를 오려 봉황을 만들어 얹기도 한다.

 

합근지례

합근지례(合卺之禮)란 신랑과 신부가 서로 술잔을 나누는 의식을 말한다. 교배지례가 끝나면 수모가 상에 있는 표주박 잔에 술을 따라 신부에게 주어 약간 입에 대었다가 다시 받아서 신랑의 대반, 즉 신랑의 곁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에게 준다.

신랑에게 주면 받아서 마신다. 답례로 대반이 다른 표주박에 술을 따라 신랑에게 주면 신랑이 입에 대었다가 대반을 통하여 수모에게 건네준다. 신부에게 주면 신부는 입에 대었다가 내려놓는다. 이렇게 두 번 반복한 후 셋째잔은 서로 교환하여 마신다.

 

그리고 안주를 들고 합근지례를 마친다. 합근지례도 대례상을 마주보고 행하며, 이때 사용하는 표주박은 두 개를 준비한다. 표주박은 청실과 홍실로 묶는다. 표주박이 없으면 술잔을 사용하기도 한다.

 

합근지례는 술을 교환하여 하나가 된다는 의식이다. 즉, 지금까지 속해 있던 사회적 관계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행위이다.

 

신방

합근지례가 끝나면 신랑과 신부는 각각 다른 방으로 들어간다. 신랑은 사모관대를 벗고 신부집에서 새로 만든 도포 또는 두루마기로 바꿔 입는다. 이것을 ‘관대벗김’ 또는 ‘관대벅금’이라 한다.

 

그러고 나서 신랑과 상객이 큰상을 받는다. 큰상을 받으면 손을 대는 시늉만 하고 물린다. 큰상의 음식은 그대로 광주리에 담아서 신랑집에 보낸다. 신랑집에서는 이 음식을 보고 신부집의 음식솜씨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상객은 큰상을 물린 다음 사랑방에서 신부집 어른들과 인사를 나눈다. 옛날에는 상객이 신랑의 신방지내는 것을 보기 위하여 하룻밤을 묵고 갔으나, 근년에는 당일 귀가한다. 상객이 떠날 때 신부가 나와 절을 하는 지방도 있고, 서로 보지 않고 귀가하는 지방도 있다.

 

지방에 따라서는 다음날 동상례에 쓸 비용이라 하여 상객이 얼마간의 돈을 내고 오기도 한다. 저녁때가 되면 신방을 꾸민다. 신부집 안방을 신방으로 하거나 더 나은 방이 있으면 그곳을 신방으로 한다.

 

신랑이 먼저 들어가 있으면 혼례복을 입은 신부가 들어온다. 이어 주안상이 들어오는데, 이 상에는 술과 간단한 안주를 놓는다.

 

주안상의 술을 나눈 다음, 신랑은 신부의 족두리 예복을 벗긴다. 족두리는 반드시 신랑이 풀어주어야 한다. 이 때 ‘신방지킨다’ 또는 ‘신방엿보기’라 하여 가까운 친척들이 신방의 창호지를 뚫어 엿본다. 촛불을 끄면 모두 물러난다.

 

촛불을 끌 때는 반드시 신랑이 옷깃으로 바람을 내어 꺼야 한다. 입으로 불어 끄면 복이 나간다고 전한다. 첫날밤을 지낸 이튿날 아침이면 신방에 잣죽이나, 대례상에 얹어 놓았던 용떡으로 끓인 떡국을 가져온다. 그러고 나서 처음으로 장인과 장모에게 절하며, 가까운 친척들에게도 인사한다.

 

동상례

점심 때를 전후하여 신부집의 젊은이들이 모여앉아 ‘신랑다루기’를 하는데, 이것을 동상례(東床禮)라고 한다. 신랑에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해서, 그 답이 신통하지 않으면 신랑의 다리를 끈으로 묶어 힘센 사람이 일어서서 짊어지거나, 대들보에 매어 발바닥을 방망이나 몽둥이로 친다.

 

신랑이 소리를 지르면 장모가 나와 말리고 음식대접을 한다. 양반집에서는 신랑에게 시(詩)를 읊게 하거나 화(話)를 맞추도록 하여 신랑의 학식과 지혜를 떠보기도 한다.

 

후례

혼례의 중심인 대례가 끝나면 신부가 신랑집으로 오는 의식과, 신랑집에 와서 행하는 의례가 남는다. 이러한 의례들을 후례(後禮)라고 할 수 있다.

 

후례는 신부가 신랑집에 와서 행하는 의례가 주가 된다. 절차는 다르지만, 예서에서는 이러한 내용의 의례를 친영이라는 절차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 실제의 관행에서 보이는 후례의 절차는 우귀 · 현구례 · 근친 등이 있다.

 

우귀

신부가 시집으로 오는 것을 우귀(于歸) 또는 신행(新行)이라고 한다. 또는 신부가 시집으로 오는 의례라 하여 우례(于禮)라고도 한다. 예서에는 당일에 우귀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의 구식혼례에서는 당일우귀(當日于歸)도 있고, 사흘 뒤에 시집에 가는 3일우귀(三日于歸) 혹은 3일대반(三日對盤)도 있다.

 

이 밖에도 며칠 만에, 또는 몇 달 만에, 때에 따라서 해를 넘겨서 우귀하는 경우도 있다. 달을 넘겨서 우귀하는 것을 ‘달묵이’라고 하며, 해를 넘겨서 우귀하는 것을 ‘해묵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해묵이’를 많이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해묵이’의 관습은 오래된 것으로 옛날로 소급할수록 해묵이가 길었고, 현재도 농촌에 가면 해묵이한 노인을 볼 수 있다.

 

이이(李珥)의 사례에서도 이러한 풍속을 볼 수 있다. 외손자가 외가(外家)에 오래 있다가 성숙한 뒤에 우귀하기 때문에 우리 나라는 중국보다 외조부모와 외숙에 대한 상복기간(喪服期間)이 긴 것이다.

 

또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고구려조의 기록에 “서옥(婿屋)을 짓고 남자가 와서 동숙(同宿)하기를 원하면 이를 허락하며, 여자는 자녀를 출산하고 성장한 뒤에 남가(男家)로 간다.”는 것도 해묵이를 말하는 것이다.

 

해묵이나 달묵이를 할 경우 신랑이 몇 차례 신부집에 다니러 간다. 이것을 재행 혹은 재행걸음이라 한다. 그러나 3일우귀가 생기면서 재행갈 시간이 없어졌다. 그래서 사흘 안에 재행의 형식을 갖추기 위해서 생긴 것이 인재행(引再行)이다. 이것은 첫날 신부집에서 자고, 다음날 밤을 신부집의 이웃마을에서 자고, 사흘째 다시 신부집에 와서 신부와 함께 우귀하는 것을 말한다.

 

신부가 우귀할 때에는 신부를 비롯하여 상객 · 하님 · 짐꾼이 행렬을 이룬다. 신부가 가마를 타고 갈 때는 가마 위에 호피(虎皮)를 얹고, 신부의 방석 밑에는 목화씨와 숯을 깐다.

 

길이 먼 경우에는 종이쪽지를 몇 개 가져가면서 개울을 건너거나 서낭당을 지날 때마다 하나씩 던진다. 이렇게 하면 잡귀를 피할 수 있다고 한다. 신부가마가 신랑집 가까이 오면 사람들이 나아가 목화씨 · 소금 · 콩 · 팥 등을 뿌려 잡귀를 쫓는다.

 

또는 대문에 짚불을 피워 넘어오도록 하여 잡귀를 쫓는다. 신부가마가 대문을 들어서면 대청 앞에 가마를 세우고 신랑이 가마의 문을 열어 신부를 맞는다. 이어 가마 위에 얹었던 호피를 지붕에 던져올려, 신부가 도착했다는 것을 표시한다.

 

현구례

현구례(見舅禮)란 신부가 시부모와 시가의 사람들에게 절을 하는 것으로, 폐백이라고도 한다. 신부집에서 장만해온 닭찜 · 안주 · 밤 · 대추 · 과일 등을 상 위에 차려놓고 술을 따라 올리며 절을 한다.

 

절을 받는 순서는 시조부모가 계셔도 시부모가 먼저 받고, 그 다음에 시조부모가 받는다. 다음에는 세대순으로 백숙부모(伯叔父母) · 고모내외(姑母內外) · 외숙내외(外叔內外) · 이모내외(姨母內外)가 절을 받고, 동항렬(同行列)의 형제자매는 맞절을 한다.

 

어른들은 절을 받으면서 예물을 주거나 대추나 밤을 치마 밑에 넣어주면서 축원을 한다. 양반가에서는 현구례 때 술을 올리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술잔을 올리는 것이 관례이다.

 

현구례가 끝나면 신부와 신부상객은 신랑집에서 큰상을 받는다. 이것도 대례 때와 같이 손을 대는 시늉만 하고 물리면 신부집으로 보낸다. 이어 상객과 하님 등은 모두 돌아간다.

 

다음날 아침, 신부는 일찍 일어나 단장을 하고 시부모에게 문안인사를 올린다. 문안인사는 시부모가 그만 하라는 말을 할 때까지 계속되지만, 대개 사흘 만에 시부모가 그치라고 한다.

 

시집에 온 지 사흘 동안은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데리고 가까운 친척의 집에 다니면서 인사를 시킨다. 친척들은 신부에게 식사를 대접한다. 사흘이 지나면 부엌에 들어가 일을 시작한다.

 

근친

근친(覲親)이란 신부가 시집에 와서 생활하다가 처음으로 친정에 가는 것을 말한다. 요즈음에 와서는 구식혼례에서도 우귀한 지 1주일 만에 근친을 가지만 옛날에는 신부가 시가에서 첫 농사를 짓고 직접 수확한 것으로 떡과 술을 만들어가지고 근친을 갔다.

 

근친 때는 많은 예물을 가져가며, 친정에서 쉰 다음 돌아올 때도 많은 예물을 가져온다. 근친 때는 신랑이 동행을 하며, 이 때 장모가 사위를 데리고 친척집을 다니며 인사를 시키고, 친척들은 식사대접을 한다. 신부가 근친을 다녀와야 비로소 혼례가 완전히 끝난 것이 된다.

 

접기/펼치기현대의 혼례

일제시대부터 우리 나라에는 이른바 신식결혼식이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전통적인 혼례를 구식혼례라 하고, 이와 대비되는 결혼식을 말한다. 신식혼례가 구식과 크게 다른 것은 식장(式場)과 복장이다. 신식혼례에서 신랑은 사모관대가 아니라 양복을 입고, 신부는 원삼족두리가 아니라 면사포를 쓰고 드레스를 입는다.

 

이 밖에도 의례의 절차도 크게 달라졌다. 더구나 기독교 · 불교 등 종교의식에 의한 혼례도 현대의 혼례로 등장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현대의 혼례로 이른바 신식혼례와 교회식 혼례를 보기로 한다.

 

신식혼례

신식혼례는 전통적인 혼례 즉, 구식혼례보다 절차가 간소화되었다. 일반적인 절차를 보면 의혼 · 결혼식 · 후례를 들 수 있다.

의혼

구식혼례에서는 중매에 의하여 의혼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혼인을 결정하기 위해서 양가의 탐색이 선행되고 궁합과 선을 보았다.

 

오늘날에는 중매혼도 많지만 연애혼이나, 중매와 연애를 절충한 혼인도 행해지고 있다. 구식혼례와 달리 중매혼이라 하더라도 신랑과 신부가 맞선을 보고 혼인을 결정하고 있다. 특히, 구식결혼에는 없지만 신식결혼에서는 약혼식을 하기도 한다.

구식결혼에서는 신랑집에서 사주를 보내고 신부집에서 이것을 받으면 혼인을 계약한 뜻을 지녔지만, 신식결혼에서는 양가의 가까운 친척들이 정해진 장소에 모여 약혼식을 거행하고 있다.

 

초기에는 신부집에서 약혼식을 하였으나 이럴 경우 신부집 사람들의 노고가 크기 때문에 음식점을 택하여 약혼식을 하게 되었다. 약혼식은 양가의 친척들이 처음 만나는 기회이기 때문에 중매인이나 양가를 잘 아는 사람이 사회를 본다.

 

사회자는 양가의 친척을 소개하고, 신랑 · 신부를 소개한다. 다음에는 신랑 혼주가 신부 혼주에게 사주를 전달하고 예물을 교환한다. 예물로는 반지나 시계 등이 보통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약혼식을 하지 않는다.

 

이 때는 양가의 혼인이 결정되면 신랑집에서 사주를 보내고 신부집에서 택일을 하여 신랑집에 보낸다. 사주와 택일은 전통혼례의 방식을 따른다. 다만 택일은 양가의 사정을 고려해야 되기 때문에 사전에 충분히 상의하여 신부집에서 결정한다.

택일이 되면 양가가 상의하여 예물을 준비한다. 신부집의 예물은 결혼식 전에 ‘함보낸다’ 하여, 신랑의 친구나 친척들이 짊어지고 신부집에 전한다. 이 때 함을 지고 간 사람들은 함값이라 하여 돈을 요구하여 받고 푸짐한 대접을 받고 돌아온다. 이와 같이 함보내는 절차는 전통혼례의 납폐에 해당하는 것이다.

 

결혼식

신식결혼식은 예식장에서 주례(主禮)가 주관하여 예식을 행한다. 그러나 1960년 이전과 〈의례준칙〉이 발표된 1961년 이후의 결혼식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구분하여 먼저 1960년 이전까지의 신식결혼식을 살펴보겠다.

 

결혼식장 앞에는 신랑측과 신부측의 접수부가 따로 있고, 손님들은 축하금(祝賀金) 또는 부조금(扶助金)을 접수부에 내고 식장에 들어가 앉는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주례가 먼저 단(壇) 앞에 선다. 다음에는 신랑의 입장을 알린다. 신랑이 입장할 때는 신랑이 선두에 서고 뒤에 세 명의 들러리가 따른다.

 

신랑이 입장을 끝내면 신랑의 오른쪽에 들러리들이 일렬로 선다. 이어서 신부 입장을 알리면 결혼행진곡에 발을 맞추어 신부가 입장하는데, 이번에는 들러리가 앞에 서고 소녀 두 명이 신부 앞에서 꽃가루를 뿌려준다.

 

신부가 신랑 왼쪽에 서면 신부 들러리 세 명이 신부 왼쪽에 일렬로 선다. 꽃가루를 뿌려준 소녀 두 명은 신랑과 신부 앞에 선다. 다음에는 주례가 혼인을 선언하고, 혼서(婚書)를 읽는데 신랑은 신부를 아내로 맞아 백년해로할 것임에 대하여 대답을 듣고, 신부가 아내의 도리를 다할 것임에 대한 맹세를 얻은 뒤 이것을 축하객에게 공포한다. 이어 주례의 주례사와 내빈축사가 있다.

 

내빈축사는 명사 · 유지들이 결혼을 축하하는 것이지만 양가를 안배하여야 하며, 축사가 많으면 좋은 것이었다. 축사가 끝나면 축가가 있다. 이어서 신랑 · 신부의 맞절과 예물교환, 내빈에 대한 답례를 한다. 다음에는 신랑측 대표가 내빈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피로연에 참석할 것을 부탁한다.

 

결혼식이 끝나면 신랑 · 신부가 결혼행진곡에 발맞추어 퇴장을 하며, 이 때 오색종이와 테이프를 던지면서 결혼을 축하해준다. 행진이 끝나면 다시 앞으로 나와 기념사진을 찍는다. 기념사진은 신랑 · 신부와 주례가 한 장, 신랑 · 신부와 그 친척들이 한 장, 그리고 신랑 · 신부와 그 우인(友人)이 한 장을 찍는 것이 보통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더 찍기도 한다.

 

1961년에 〈의례준칙〉이 선포되면서 혼례에 큰 변화가 초래되었다. 〈의례준칙〉에 의해서 달라진 것 중의 하나가 예식장 입구에서 내빈에게 축하금을 받지 못하게 하고, 또한 답례품을 주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것은 혼례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상행위와 유사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청첩장을 돌리는 행위도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여전히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다. 이 밖에도 혼례식에서 내빈축사를 일절 금하도록 하여, 축사는 주례의 주례사에 한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축가와 들러리의 참석, 예물교환의 절차도 금하였다.

 

이 결과 결혼식은 주례의 임석, 양가 혼주의 점촉(點爥), 신랑과 신부 입장, 신랑 · 신부 맞절, 혼인서약, 성혼(成婚)선언, 주례사, 내빈에게 신랑 · 신부 인사하기, 결혼행진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물론 아직까지도 기념촬영은 있다.

 

후례

신식결혼식을 거행하면 바로 집에 가는 것이 아니라 신혼여행을 다녀온다. 피로연이 끝나면 신랑 · 신부는 조용히 첫날밤을 지낼 수 있는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보통 3, 4일의 신혼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신부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신랑집으로 가서 폐백을 한다.

 

요즈음은 보기 드문 일이지만 한때는 신혼여행을 가기 전에 예식장에서 신식결혼식을 올리고 고향에 가서 구식혼례를 올리는 것이 농촌에서 유행하였다. 이것은 노인들이 신식결혼식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교회식 혼례

종교의식에 따른 결혼식은 크게 보아 불교식 결혼, 천주교식 결혼, 개신교식 결혼, 신흥종교의 교회에서 행하는 합동결혼식 등이 있다. 천주교에서는 혼배성사(婚配聖事)라 하여 신자가 가질 수 있는 일곱 개 성사(聖事) 가운데의 하나로 혼배(婚配)를 올린다.

 

일반 미사의 중간에 신부(神父)는 혼배에 필요한 교서(敎書)를 읽어 신랑 · 신부를 축성하고, 신랑 · 신부가 천주(天主)의 자녀로서 성가정(聖家庭)을 이룩할 것을 신에게 맹세하게 된다. 그 뒤 축성된 반지 즉, 혼배반지를 교환하고, 신랑과 신부의 손을 포개어놓고 신의 축복을 내려준다. 그리고 영성체로 이어지는 미사를 끝으로 혼례는 완료된다.

 

개신교교회의 결혼식도 천주교와 유사하게 혼례예배(婚禮禮拜)를 올린다. 목사의 주례로 하나님에게 신랑 · 신부가 결혼을 맹세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비는 목사의 기도가 있다. 다음에는 성가정을 위한 목사의 축복이 있고 성가대의 혼배축가(婚配祝歌), 예배의 순으로 진행된다.

 

신흥교회의 합동결혼식은 수백 쌍의 신랑 · 신부가 한 장소에서 행하는 것으로, 특히 통일교(統一敎)의 합동 결혼식은 유명하다. 결혼식의 절차는 개신교의 혼례예배와 매우 비슷하다.

 

접기/펼치기참고문헌
『삼국지(三國志)』
『전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문화재관리국)
『한국전통사회의 관혼상제』(장철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한국의 혼속(婚俗硏究)』(김종명, 대성문화사, 1981)
『한국의 민속』(김성배, 집문당, 1980)
『관혼상제』(이민수, 을유문화사, 1975)
『한국의 민속』(임동권,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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