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지역의 일본군 포진지
1930년 완공된 용호동의 장자등 포진지는 높이 3m, 내부 길이 45m, 연면적 1천652㎡ 규모의 거대한 지하 요새다. 1924년부터 약 600여 명의 조선인이 동원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지하 공간은 1개 대대가 주둔할 수 있을 정도로 넓다. 즉, 용호동의 장자등 일본군 포진지는 부산·경남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포대가 설치된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강서구 가덕도 외양포 마을 언덕에 있는 일본군 요새 사령부.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포진지와 대항 새바지 일본군 인공 동굴이 있다. 이와 관련된 국제신문과 부산일보 기사를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이야기 공작소 <5-6> 오륙도·이기대 스토리텔링- 응답하라, 장자등 포진지
"적군 오면 해안포로 박살 내버릴테다" 일제, 대한해협 길목 요새화
- 박창희 선임기자 chpark@kookje.co.kr
- | 입력 : 2013-05-13 19:57:42
- | 본지 6면
부산 남구 용호동 오륙도 SK뷰 아파트 옆에 남아 있는 장자등(오륙도) 일본군 포진지. 1930년대 이후 일본군 대대병력이 주둔했다는 곳이다. 6·25 전쟁 후 육군 문서보관소로 이용하다 최근 폐쇄했다. |
조선인 인부가 일일이 손으로 팠다
무게 100t 넘는 전함 함포 설치하고
콘크리트 덮는 공사하다 사상자 속출
대마도 포대와 완벽한 방어전략 완성
하지만 히로시마에 원자탄 투하되자
일제 침략 야욕은 보기 좋게 꺾였다
장자등 포진지에도 폭탄 4발 떨어졌다
포신은 날아가고 포진지는 주저앉아
6·25전쟁 때 軍 문서보관소 사용했고
한때 나환자촌 새우젓 창고 '역사 현장'
오륙도 SK뷰 아파트 옆 임시 통로를 통해 들어가 본 일본군 포진지 내부. 일부가 매몰됐으나 여전히 삼엄한 기운이 감돈다. 한때 용호동 주민들이 젓갈 창고로 이용하기도 했다. |
용호동 일대에는 일본군 포진지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오륙도 옆 거무섬(나암)의 포진지 해수표. |
오륙도 SK뷰 아파트 옆의 동굴 통로. |
이곳 포진지에 설치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포탑과 포신. |
◇"두 기생 무덤 있어 이기대 이름 지어져…몇 년 전 직접 발견"
- 향토사 연구위원 왕정문 씨 주장
- 임진왜란 때 왜장 끌어안고 죽어
- 과거 기생조합서 매년 위로 행사
※'오륙도-이기대 스토리텔링'은 〈6회〉로 끝이 나고, 다음주부터는 '송상현 광장 스토리텔링'이 이어집니다.
※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 남구, 국제신문
이야기 공작소 <5-6> 오륙도·이기대 스토리텔링- 응답하라, 장자등 포진지 : 국제신문 (kookje.co.kr)
<< 관련기사>>
용호동 일본군 포진지 찾은 日 사학자
"일제 강점기 수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입니다. 아프고 불편한 역사일수록 보존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일본국립역사민속박물관의 쇼지 아라카와(63) 교수의 말이다. 쇼지 교수를 비롯한 일본인 사학자 4명은 지난 11일 방한해 부산 남구 용호동에 위치한 '장자등 일본군 포진지'를 찾았다. 일본의 근대사를 연구하는 이들은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군이 부산과 경남지역 일대에 구축한 군사시설에 관한 사료를 수집하고 있다.
이들은 가장 먼저 용호동의 장자등 일본군 포진지부터 방문했다. 부산·경남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포대가 설치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1930년 완공된 장자등 포진지는 높이 3m, 내부 길이 45m, 연면적 1천652㎡ 규모의 거대한 지하 요새다. 1924년부터 약 600여 명의 조선인이 동원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지하 공간은 1개 대대가 주둔할 수 있을 정도로 넓다. 최대 사거리 30㎞가 넘는 구경 41㎝ 포대 2문이 배치돼 일대 해상 전력의 핵심 역할을 했다.
하지만 종전 이후 미군이 포대를 해체한 뒤 장자등 포진지는 70여 년간 흉물처럼 방치됐다. 실제 본보 취재진이 동행했을때 지하 요새 내부의 철근은 모조리 뜯겨져 나갔고, 그 자리는 각종 폐기물과 쓰레기들이 대신 들어앉은 상태였다. 마스크를 착용했지만 악취가 진동했고, 거미줄이 사방에서 달라붙었다.
쇼지 교수는 "부산처럼 해안 포대가 많이 설치됐던 대마도의 경우 정부 차원의 복원작업이 이뤄져 답사는 물론 교육과 체험시설로도 이용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장자등 포진지 복원 시도가 있었다. 남구청은 2010년 자체적으로 '용호동 일본군 포진지 개발구상 및 타당성 조사'를 실시해 이 일대를 복원, 역사 체험 학습장으로 조성하고자 했다. 하지만 재원 조달에 발목이 잡혀 사업 자체가 무산됐다.
남구문화원에서 활동한 왕정문(71) 향토사연구위원은 "이곳에 포진지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혀져 가는 실정"이라며 "간이 형태라도 일부 구간을 복원해 교육현장으로 활용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안준영 기자 jyoung@
출처: 용호동 일본군 포진지 찾은 日 사학자 - 부산일보 (busan.com)
부산 이야기길 <2> 가덕도 외양포 포진지 터
주민 노역으로 만든 일본군 요새…100년 전 포성 들리는 듯
- 최영지 기자 jadore@kookje.co.kr
- | 입력 : 2013-05-30 00:01:49
- | 본지 30면
외양포 마을 언덕에 있는 일본군 요새 사령부.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포진지 터에는 탄약고, 방공호 등으로 쓰였던 공간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곳을 덮고 있던 대나무와 칡덩굴을 다 걷어내 말끔한 모습이다. |
- 끝에 난 작은 창으로 포신 내밀었을 듯
- 외양포 마을 건물은 과거 일본군 막사
- 산자락 오르면 거대한 포진지 만나
- 콘크리트 진지 둘레로 제방 쌓아 방어
- 러시아 발트함대 상대 치열한 전투
부산 강서구 가덕도는 작은 섬이지만 역사의 아픔을 많이 지니고 있는 곳이다. 일본군이 전쟁 승리를 위해 우리 국민을 강제 동원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러일전쟁의 자취가 생생하다. 역사는 아픔과 기쁨의 다양한 모습이 공존한다. 그런 모습 중 돌이키고 싶지 않은 것도 기억해야만 같은 괴로움을 겪지 않는다. 100년 전 전쟁의 현장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당시의 고통과 현재 평화의 중요성을 공감할 수 있다.
■ 대항 새바지 일본군 인공 동굴
대항포 새바지 일본군 인공동굴의 끝에 뚫여있는 사각형 창문을 동서대 강해상 교수가 가리키고 있다. |
열린 동굴 내부는 폐스티로폼과 어구, 빈 플라스틱 젓갈 통들이 나뒹굴었다. 한발 들어서자 바깥보다 영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키 175㎝ 정도의 남자라도 허리를 곧게 펴고 설 수 있을 높이와 폭 3m, 길이는 15m 정도 되는 굴이었다. 동굴의 끝에는 정사각형의 작은 창이 나 있다. 이곳으로 포신을 내밀어 러시아 함대 공격을 대비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동굴들은 서로 이어져 있어 무기를 옮기거나 요새로 쓰기에도 적합한 공간일 듯싶었다. 해변에서부터 2~3층 높이에 있으므로 훌륭한 요새 역할을 했을 것이다.
현재는 안전을 고려해 동굴 내부에 콘크리트를 발라 보강했다. 100년 전 가덕도 주민을 억지로 동원해 뚫게 했을 때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0여 년 전에는 외부보다 낮은 기온을 유지하는 동굴 특성상 주민들이 김치나 젓갈 등을 발효하는 창고로 사용했다. 지금은 폐어구들과 쓰레기가 들어찬 버려진 공간일 뿐이었다.
■ 외양포 일본군 요새 사령부
10분가량 걸어 올라가면 군대 훈련장인가 싶은 외양포 포진지 터와 마주하게 된다. 마을 산자락이라 아래 해변이 훤하게 내려다보인다. 지금은 '경치가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당시는 포 발사 굉음과 화약, 무기들이 가득 찬 살벌한 공간이었다. 이곳은 칡덩굴과 대나무들로 덮여 폐허나 마찬가지였던 것을 15년 전 강서구청에서 정비해 현재는 말끔한 모습이다. 콘크리트 진지, 탄약고, 무기고이자 방공호로도 사용되었으리라 짐작되는 공간이 잘 보존돼 있었다.
100여 년 전 일본군 제4사단 휘하 진해만 요새사령부가 주둔했던 곳이다. 당시 이곳에 있던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강제 이주시켜 만들었다. 가로 30m, 세로 70m 크기의 진지에는 최대 8대의 곡사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포진지를 둘러가며 제방을 5m로 쌓아 외부에서 잘 발견되지 않도록 설계했다.
동행한 최부림 부산관광공사 차장은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정보력이 무척 뛰어났다. 무적함대라 불리던 러시아 발트함대가 가덕도 앞바다로 지나간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3개월 동안 이곳과 대항 새바지 인공 동굴에서 포 발사 연습을 했다"고 설명했다. 함께 간 강해상 동서대 관광학부 교수도 "발트함대는 도대체 포가 어디서 발사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반격은커녕 바다에서 궤멸해 수장됐다"고 덧붙였다.
포진지에서 내려오는 도중 마을 3~4곳에서 일본군이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터도 볼 수 있다. 그중 지금도 주민이 식수로 사용하는 우물이 있다.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우물대와 지붕처럼 만들어진 것이 일본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우물에 양수기를 설치해 퍼올려 사용하는 듯했다. 두레박은 없지만 맑은 물이 충분해 보였다.
# 가덕도 등대
- 일제 원활한 수탈 목적…조선 왕실 압박해 건설
- 군부대 통과해 1주일 전 방문 허가 필요
- 현재 기념관으로… 등대 옆엔 숙박시설
일제가 조선 왕실을 압박해 강압적으로 지은 가덕도 등대. 등대 설치 후 일본 선박의 좌초 건수가 줄었다고 한다. |
가덕도 등대도 우리 어민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 아니다. 일본군이 원활한 수탈을 위해 조선 왕실에 압력을 가해 건설한 역사가 있다. 당시 등대 시설이 전혀 없었는데, 우리 앞바다를 항해하던 일본 배들의 좌초가 잦았다. 그러자 일본은 조선 왕실을 압박해 비용을 부담하게 한 뒤 자신의 설계대로 짓도록 했다.
100년 전 등대로 쓰이던 곳은 현재 기념관으로 남아있고 바로 옆에 등대로 쓰고 있는 것이 따로 있다. 7~8층 높이로 걸어서 올라가 볼 수 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쯤 전망대로 나가면 가덕도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현재는 가덕도 등대체험을 신청하면 등대 옆에 숙박시설에서 묵어갈 수도 있다.
# 가는 길과 먹을 곳
- 포진지는 걸어서… 등대는 차로
외양포 일본군 요새 사령부로 가는 길에 볼 수 있는 민가. 100년 전 일본군 막사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주민이 살고 있다. 그린벨트 지역인데다 국방부 소속 땅이라 증·개축이 금지돼 있기 때문이다. |
이야기길이 시작되는 대항포의 가덕도 소희네집(051-971-8886)에서 해산물 정식과 회를 맛볼 수 있다. 한 상에 밥과 국, 여러 가지 해산물이 차려져 나온다. 예약 필수, 매주 월요일 휴무.
사진=이진우 프리랜서
※공동기획:국제신문, 부산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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