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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이야기

부산지역의 일본군 포진지

부산지역의 일본군 포진지

1930년 완공된 용호동의 장자등 포진지는 높이 3m, 내부 길이 45m, 연면적 1천652㎡ 규모의 거대한 지하 요새다. 1924년부터 약 600여 명의 조선인이 동원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지하 공간은 1개 대대가 주둔할 수 있을 정도로 넓다. 즉,  용호동의 장자등 일본군 포진지는 부산·경남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포대가 설치된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강서구 가덕도  외양포 마을 언덕에 있는 일본군 요새 사령부.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포진지와 대항 새바지 일본군 인공 동굴이 있다. 이와 관련된 국제신문과 부산일보 기사를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이야기 공작소 <5-6> 오륙도·이기대 스토리텔링- 응답하라, 장자등 포진지

"적군 오면 해안포로 박살 내버릴테다" 일제, 대한해협 길목 요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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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남구 용호동 오륙도 SK뷰 아파트 옆에 남아 있는 장자등(오륙도) 일본군 포진지. 1930년대 이후 일본군 대대병력이 주둔했다는 곳이다. 6·25 전쟁 후 육군 문서보관소로 이용하다 최근 폐쇄했다.
 
오륙도 해안가 절벽 포진지 공사에
조선인 인부가 일일이 손으로 팠다
무게 100t 넘는 전함 함포 설치하고
콘크리트 덮는 공사하다 사상자 속출
대마도 포대와 완벽한 방어전략 완성

하지만 히로시마에 원자탄 투하되자
일제 침략 야욕은 보기 좋게 꺾였다
장자등 포진지에도 폭탄 4발 떨어졌다
포신은 날아가고 포진지는 주저앉아

6·25전쟁 때 軍 문서보관소 사용했고
한때 나환자촌 새우젓 창고 '역사 현장'


   
  오륙도 SK뷰 아파트 옆 임시 통로를 통해 들어가 본 일본군 포진지 내부. 일부가 매몰됐으나 여전히 삼엄한 기운이 감돈다. 한때 용호동 주민들이 젓갈 창고로 이용하기도 했다.
'꽝~꽝~' 지축을 흔드는 요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오륙도 바위섬에 서식하던 바다새들이 놀라 푸드득 날아올랐다. 장자등 포진지에서 포사격 연습을 지휘하던 일본군 장교의 눈가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누구든 들어와 보라지. 해안포 맛을 톡톡히 보여줄테니. 미국이든 러시아든 적국이 들어오면 박살을 내버리는거야. 대일본제국 육군을 누가 넘봐, 흐흐."
 
예고없이 실시된 해안포 사격 연습으로 용호동 주민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강한 진동으로 일부 회벽에 금이 갔다. 장자등(오륙도) 해안포는 무게가 100톤, 구경 16.1인치(410㎜), 포신 길이 18.8m에 달하는 초대형 포였다. 설치된 포는 1기2문이었고 높이가 아파트 3개 층 정도였다. 오륙도 입구 해안가 언덕에 설치된 포의 모습은 영화 나바론요새처럼 웅장하고 위압적이었다.
 
1920~30년대, 일본은 부산 일대를 요새화하고 대륙 침략을 획책하고 있었다. 장자등 포진지도 이 즈음에 구축된다.
 
 
#해수표의 잔해 

   
  용호동 일대에는 일본군 포진지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오륙도 옆 거무섬(나암)의 포진지 해수표.
왕정문(67·남구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 씨의 눈시울이 포르르 떨리고 있었다. 왕 씨는 조선 중기 이후로 대대손손 용호동에서 살아온 토박이다. 오륙도 앞 갯바위에 박힌 해수표를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저게 장자등 포진지의 대포 관측점이야. 해안포는 바다의 조수 수위가 중요하지. 저걸 보고 사격점을 잡아야 하니까 말야. 일본놈들이 어찌나 치밀한지…. "
 
오륙도 방패섬을 기준으로 왼쪽 승두말 앞의 상여돌과 오른쪽 거무섬(나암)에 일본군 포대가 사용했다는 해수표 잔해가 남아 있었다. 풍파 속에서도 존재감을 잃지 않은 일제의 콘크리트 구조물이 순간 무섭게 다가왔다.
 
"어릴 때 저 포진지 동굴에서 친구들과 놀았어. 땅굴같은 포진지 안에서 철제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전쟁놀이를 하고 숨바꼭질도 했어. 그 추억들이 세월과 함께 매몰돼 버렸으니…."
 
왕 씨는 동네 어른들로부터 포진지 공사장에 동원된 조선인 노역자들과 일제의 야욕 등에 대한 얘기를 들으며 자랐다. 그의 아버지 왕석호(91) 옹은 18세 때 포진지 공사장에서 콘크리트 반죽을 했다고 한다. 
 
포진지 공사는 엄청난 난공사였다. 거대한 콘크리트 지하 요새에 100톤 가량의 포탑을 설치하는 공사가 쉬울 리 없었다. 조선소에서라면 크레인과 도크를 이용하여 작업을 할 수 있지만, 해안 포대는 절벽 등에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어서 일일이 사람의 손이 필요했다. 공사는 굴착이 아니라 해안의 산자락을 절개하여 평평하게 만든 뒤 콘크리트 거푸집을 만들어 2, 3중 방수 방습처리를 하여 완공했다. 완공된 포진지 위에는 주변과 같은 소나무를 심어 철저히 위장했다. 이 공사를 위해 600여 명의 조선인 인부가 동원됐다. 공사 과정에서 적잖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러일전쟁과 한반도

   
  오륙도 SK뷰 아파트 옆의 동굴 통로.
1905년 5월 27일 오후 2시께 대한해협.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마침내 대마도 앞 대한해협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7개월 간의 긴 항해로 발틱함대는 몹시 지쳐 있었다. 한국의 진해만과 쓰시마 운하 등에 대기하고 있던 일본의 연합함대가 기동을 시작했다. 양측 함대의 거리가 8㎞ 정도로 좁혀지자 일본 해군 총사령관인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1848~1934) 제독의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일시에 포문이 열렸다. 이때 러시아의 38척의 함대 중 35척이 궤멸되고 3척만이 회생했다. 러일전쟁의 하이라이트다. 결과는 일본의 대승. 제정 러시아의 무적함대를 궤멸시키자, 일본을 보는 세계 열강들의 눈이 달라졌다. 러일전쟁 승리 직후인 1905년 11월 일본은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해 한반도를 손아귀에 넣는다. 오륙도 근해는 일본군의 작전구역으로 들어가 어선들이 마음대로 왕래하기 어려웠다.
 
 
#일제의 해안포 

   
  이곳 포진지에 설치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포탑과 포신.
군국주의 깃발을 앞세운 일본은 부산 일대를 병참기지화 하면서 적국의 본토 공격 및 부산항 공격에 대해 위협을 느껴 주요 공해상의 길목에 포진지를 구축한다. 1900년 초부터 만들기 시작한 일본군 포진지는 부산 기장, 용호동, 영도, 가덕도 외양포, 거제 지심도, 제주도 등 동남해안 11군데에 이른다. 
 
이 가운데 장자등 포진지는 규모가 매우 컸다. 전체 부지는 5000여평, 지하시설 연면적이 500여평에 달했다. 내부는 폭 14m, 길이 45m, 높이 3m의 동굴 형태다. 바닥에는 장비 운반을 위한 레일을 깔았고, 포탄 운반용 수압조절기와 승강기까지 설치했다. 당시로선 첨단 포진지였던 셈이다. 이곳에 일본군 대대 병력이 주둔했다.
 
장자등 포진지에는 군함에 쓰던 함포가 그대로 설치됐다. 1921년 영국과 미국, 일본은 워싱턴 군축조약에 따라 주력 함정 비율을 각각 5:5:3으로 합의했다. 당시 일본은 막강 전함 '도사'와 '아카기'를 건조하면서 구경 16.1인치(410㎜) 함포를 장착하고 있었다. 그런데 군축조약으로 이 전함이 폐기될 상황에 놓이자, 함포를 그대로 떼어와 부산 오륙도와 대마도 북단의 토요포대에 설치한 것이다. 장자등 포진지를 일명 '육상 군함(구남)'이라 부르게 된 건 이런 연유다. 
 
부산 장자등과 대마도 토요포대 사이의 거리는 50㎞. 반면 두 포대의 사거리는 30㎞여서 완벽한 포사격권에 들어갔다. 일본은 대마도 남단과 약 73㎞ 떨어진 후쿠오카 앞 이키섬에도 해안포를 설치, 적의 해상 공격에 대비했다. 한반도 일원을 요새화하려는 일본의 치밀한 방어 전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우던 일제의 야욕은 1945년 8월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투하되면서 보기 좋게 꺾였다. 1945년 6월부터 미군의 B29 포격기가 부산 하늘을 출몰하기 시작했다. 항간에선 일제가 항복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해 7월부터 8월 초에는 오륙도 상공에 B29 폭격기가 배회하더니 장자등 포진지에 폭탄 4발을 떨어뜨렸다. 꽝~꽈꽝~. 장자등 언덕의 대형 포신이 날아갔고, 포진지 일부 터널이 내려앉았다. 미군은 일본군이 사용하던 함포와 총기 등을 배에 싣고 나가 바다에 투척하게 하고 본국 귀환을 종용한다. 한국도 해방을 맞는다.
 
 
#교훈의 역사공원으로
 
"서늘하고 오싹하군요!"
 
왕 씨와 함께 장자등 포진지 내부를 답사하던 부산 남구 김용민 홍보계장이 긴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동굴 안은 칠흑처럼 캄캄했다. 플래시를 하나씩 들었지만 전체를 비춰주진 못한다. 명멸하는 카메라 플래시가 구원의 빛처럼 여겨진다. 굴 천장에 철근들이 흉물스럽게 덕지덕지 붙어 있다. 왕 씨가 혀를 끌끌 차며 말한다. 
 
"주민들이 철근을 빼먹은 자취야. 철근이 돈이 되니까…. 아주 의미있는 일제시대 유적인데, 이렇게 방치를 하니 원형이 훼손되는 거야. "
 
장자등 포진지는 일부가 매몰됐으나, 지금도 콘크리트 구조물과 쌍굴 상당부분이 남아 있다. 6·25 전쟁 이후 뒤편 쌍굴은 군부대의 문서보관소로 이용되다 해군이 넘겨받아 관리 중이며, 바깥쪽 쌍굴은 한때 용호농장 나환자들이 새우젓 숙성 창고로 사용했다.
 
한반도의 일제 포진지를 연구하고 있는 부산KBS 이완희 PD(현 부산KBS 편성제작국장)는 "장자등 포진지는 일제가 한반도 지배를 획책한 실체적 사례라 할 수 있다"고 했다. 지난 2009년 KBS스페셜에 '1945년 한반도는 일제의 결전기지였다'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한 바 있는 이 PD는 의미심장한 제안을 했다.
 
"우리는 역사자원을 너무 소홀히 해요. 이곳에서 전개된 일제의 포진지 공사와 부산항 요새화 과정, 미군에 의한 폭파, 이후 용호동 나환자촌 주민들의 창고 활용까지 모두 이야깃거리 아닙니까. 스토리텔링만 잘 하면 훌륭한 교육자료, 관광자원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장자등 포진지를 관할·관리하고 있는 지자체와 군당국과 응답할 차례다.


◇"두 기생 무덤 있어 이기대 이름 지어져…몇 년 전 직접 발견"

- 향토사 연구위원 왕정문 씨 주장
- 임진왜란 때 왜장 끌어안고 죽어
- 과거 기생조합서 매년 위로 행사

   
 
"이기대(二妓臺) 이야기를 하려면 제대로 알고 해야지. 그렇잖아도 논란이 많은데, 가공을 통한 팩션을 갖다붙이면 논란이 더해지지 않나 말야?"
 
장자등(오륙도) 포진지 터를 함께 답사한 왕정문(67·남구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사진) 씨는 본지의 이기대 스토리텔링에 대해 불만이 적지 않았다. 용호동 토박이로서 '이기대'에 대해 그만큼 많이 듣고 연구 조사한 사람은 없다고 자신하는 그다. 포진지를 안내하면서도 그의 촉수는 이기대에 닿아 있었다. 점입가경, 이야기는 그가 몇 년 전 발견했다는 이기, 즉 두 기생의 무덤으로 모아졌다. 다음은 그와의 인터뷰.
 
-두 기생의 무덤이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문헌과 구전을 통해 안 거죠. 1850년 당시 좌수사가 쓴 '동래영지'에 '좌수영 남쪽으로 15리(6㎞)에 두 명의 기생 무덤이 있어 이기대라 부른다'고 돼 있어요. 공룡바위 부근의 정황과 구전에 비춰보면 거의 틀림없다고 봐요."
 
-이기대는 후대에 지어진 이름이라는데. 
 
"기생이 죽었다고 하니 처음엔 대(臺)를 붙일 수 없었지요. 기록을 보면 이기가, 이기개, 이기총 등으로 나타나기도 해요."
 
-구전 중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도 있다던데.
 
"임진왜란 당시 왜놈들의 승전 파티에 우리쪽 악사 5명과 기생 2명이 갔다고 합니다. 왜장을 끌어안고 죽었으나 당시엔 실족사로 처리된 것 같아요. 하지만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죠."
 
-두 기생의 넋을 위로하는 행사도 있었다죠. 
 
"우리 조부께서 1965년까지 매년 부산 동구 초량동과 서구 충무동 권번(기생조합)에서 기생들을 이곳으로 불러 위로연을 열었다고 해요. 알고 보니, 두 기생의 넋을 위로하는 행사였어요. 그러니까 주민들이 챙기고 있었던 거예요."
 
-남구에서도 무덤을 인정하나요?
 
"남구에서 2011년 9월부터 묘 주변에 울타리를 치고 연고자를 찾는 공고문을 붙였으나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다고 해요. 연말까지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고증작업에 들어가야죠. 어떻게든 관광자원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왕 씨는 인터넷 다음에 '농바우'라는 개인 블로그를 개설, 용호동과 이기대 일대의 지명유래 등을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다.  


※'오륙도-이기대 스토리텔링'은 〈6회〉로 끝이 나고, 다음주부터는 '송상현 광장 스토리텔링'이 이어집니다.

※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 남구,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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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공작소 <5-6> 오륙도·이기대 스토리텔링- 응답하라, 장자등 포진지 : 국제신문 (kookje.co.kr)

 

이야기 공작소 <5-6> 오륙도·이기대 스토리텔링- 응답하라, 장자등 포진지

오륙도 해안가 절벽 포진지 공사에 조선인 인부가 일일이 손으로 팠다 무게 100t 넘는 전함 함포 설치하고 콘크리트 덮는 공사하다 사상자 속출 대마도 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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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기사>>

용호동 일본군 포진지 찾은 日 사학자

입력 : 2016-02-19 15:19:50  수정 : 2016-02-21 12:18:13
 
부산 남구 용호동의 '장자등 일본군 포진지'를 찾은 일본 사학자들이 지하 내부를 살펴보고 있다. 안준영 기자
 

"일제 강점기 수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입니다. 아프고 불편한 역사일수록 보존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일본국립역사민속박물관의 쇼지 아라카와(63) 교수의 말이다. 쇼지 교수를 비롯한 일본인 사학자 4명은 지난 11일 방한해 부산 남구 용호동에 위치한 '장자등 일본군 포진지'를 찾았다. 일본의 근대사를 연구하는 이들은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군이 부산과 경남지역 일대에 구축한 군사시설에 관한 사료를 수집하고 있다.

이들은 가장 먼저 용호동의 장자등 일본군 포진지부터 방문했다. 부산·경남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포대가 설치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1930년 완공된 장자등 포진지는 높이 3m, 내부 길이 45m, 연면적 1천652㎡ 규모의 거대한 지하 요새다. 1924년부터 약 600여 명의 조선인이 동원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지하 공간은 1개 대대가 주둔할 수 있을 정도로 넓다. 최대 사거리 30㎞가 넘는 구경 41㎝ 포대 2문이 배치돼 일대 해상 전력의 핵심 역할을 했다.

하지만 종전 이후 미군이 포대를 해체한 뒤 장자등 포진지는 70여 년간 흉물처럼 방치됐다. 실제 본보 취재진이 동행했을때 지하 요새 내부의 철근은 모조리 뜯겨져 나갔고, 그 자리는 각종 폐기물과 쓰레기들이 대신 들어앉은 상태였다. 마스크를 착용했지만 악취가 진동했고, 거미줄이 사방에서 달라붙었다.

쇼지 교수는 "부산처럼 해안 포대가 많이 설치됐던 대마도의 경우 정부 차원의 복원작업이 이뤄져 답사는 물론 교육과 체험시설로도 이용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장자등 포진지 복원 시도가 있었다. 남구청은 2010년 자체적으로 '용호동 일본군 포진지 개발구상 및 타당성 조사'를 실시해 이 일대를 복원, 역사 체험 학습장으로 조성하고자 했다. 하지만 재원 조달에 발목이 잡혀 사업 자체가 무산됐다.

남구문화원에서 활동한 왕정문(71) 향토사연구위원은 "이곳에 포진지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혀져 가는 실정"이라며 "간이 형태라도 일부 구간을 복원해 교육현장으로 활용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안준영 기자 jyoung@

 

출처: 용호동 일본군 포진지 찾은 日 사학자 - 부산일보 (busan.com)

 

용호동 일본군 포진지 찾은 日 사학자

"일제 강점기 수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입니다. 아프고 불편한 역사일수록 보존하고 기억해야 합니다."일본국립역사민속박물관의 쇼지 아라카와(63) 교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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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이야기길 <2> 가덕도 외양포 포진지 터

주민 노역으로 만든 일본군 요새…100년 전 포성 들리는 듯

  • 최영지 기자 jadore@kookje.co.kr
  •  |   입력 : 2013-05-30 00:01:49
  •  |   본지 30면

 

   
  외양포 마을 언덕에 있는 일본군 요새 사령부.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포진지 터에는 탄약고, 방공호 등으로 쓰였던 공간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곳을 덮고 있던 대나무와 칡덩굴을 다 걷어내 말끔한 모습이다.
 
- 대항포 새바지 언덕에 동굴 3개 존재
- 끝에 난 작은 창으로 포신 내밀었을 듯

- 외양포 마을 건물은 과거 일본군 막사
- 산자락 오르면 거대한 포진지 만나
- 콘크리트 진지 둘레로 제방 쌓아 방어
- 러시아 발트함대 상대 치열한 전투

부산 강서구 가덕도는 작은 섬이지만 역사의 아픔을 많이 지니고 있는 곳이다. 일본군이 전쟁 승리를 위해 우리 국민을 강제 동원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러일전쟁의 자취가 생생하다. 역사는 아픔과 기쁨의 다양한 모습이 공존한다. 그런 모습 중 돌이키고 싶지 않은 것도 기억해야만 같은 괴로움을 겪지 않는다. 100년 전 전쟁의 현장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당시의 고통과 현재 평화의 중요성을 공감할 수 있다.

■ 대항 새바지 일본군 인공 동굴

   
  대항포 새바지 일본군 인공동굴의 끝에 뚫여있는 사각형 창문을 동서대 강해상 교수가 가리키고 있다.
지난 26일 오전에 도착한 대항포 새바지. 낚시꾼과 등산객의 차량으로 해변은 이미 만원이었다. 바닷가 한 쪽에 어구를 제작하는 곳이니 관광객에게 텐트를 치지 말 것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었다. 그 끝에 돌로 된 작은 언덕을 정으로 쪼아 만든 듯한 동굴이 세 곳 보였다. 동굴은 총 3곳으로 가운데는 열려있지만, 양쪽 두 군데는 입구가 막혀 있었다.

열린 동굴 내부는 폐스티로폼과 어구, 빈 플라스틱 젓갈 통들이 나뒹굴었다. 한발 들어서자 바깥보다 영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키 175㎝ 정도의 남자라도 허리를 곧게 펴고 설 수 있을 높이와 폭 3m, 길이는 15m 정도 되는 굴이었다. 동굴의 끝에는 정사각형의 작은 창이 나 있다. 이곳으로 포신을 내밀어 러시아 함대 공격을 대비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동굴들은 서로 이어져 있어 무기를 옮기거나 요새로 쓰기에도 적합한 공간일 듯싶었다. 해변에서부터 2~3층 높이에 있으므로 훌륭한 요새 역할을 했을 것이다.

현재는 안전을 고려해 동굴 내부에 콘크리트를 발라 보강했다. 100년 전 가덕도 주민을 억지로 동원해 뚫게 했을 때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0여 년 전에는 외부보다 낮은 기온을 유지하는 동굴 특성상 주민들이 김치나 젓갈 등을 발효하는 창고로 사용했다. 지금은 폐어구들과 쓰레기가 들어찬 버려진 공간일 뿐이었다.

■ 외양포 일본군 요새 사령부

   
 
외양포 포진지로 올라가는 길에 만난 집들은 하나같이 같은 모습이었다. 1층으로 아이들이 블록으로 집을 지으면 이렇게 만들 것 같은 아주 단순한 형태의 집들이었다. 알고 보니 일본군 막사로 쓰이던 건물에 여전히 사람이 사는 것이었다. 그린벨트 지역인데다 국방부 소속이라 건물의 증·개축이 불가능해 본의 아니게 유지되고 있었다. 지붕만 비가 새지 못하게 손을 본 것을 빼고는 외관이 그대로였다. 약해진 벽을 보강하려고 댄 철판에 녹이 잔뜩 슬어 있었다. 그런 집들에 TV 송신을 위한 접시형 위성통신안테나가 달린 게 아주 이색적이었다. 이런 집 옆에는 공들여 가꾼 텃밭이나 작은 꽃밭들이 소담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100년 전, 군인들이 살던 집이 민가가 되고 화약과 탄피가 난무하던 공간에 꽃들이 웃고 있었다. 결국 인간의 다툼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 앞에서는 아무 힘도 발휘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곳이었다.

10분가량 걸어 올라가면 군대 훈련장인가 싶은 외양포 포진지 터와 마주하게 된다. 마을 산자락이라 아래 해변이 훤하게 내려다보인다. 지금은 '경치가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당시는 포 발사 굉음과 화약, 무기들이 가득 찬 살벌한 공간이었다. 이곳은 칡덩굴과 대나무들로 덮여 폐허나 마찬가지였던 것을 15년 전 강서구청에서 정비해 현재는 말끔한 모습이다. 콘크리트 진지, 탄약고, 무기고이자 방공호로도 사용되었으리라 짐작되는 공간이 잘 보존돼 있었다.

100여 년 전 일본군 제4사단 휘하 진해만 요새사령부가 주둔했던 곳이다. 당시 이곳에 있던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강제 이주시켜 만들었다. 가로 30m, 세로 70m 크기의 진지에는 최대 8대의 곡사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포진지를 둘러가며 제방을 5m로 쌓아 외부에서 잘 발견되지 않도록 설계했다.

동행한 최부림 부산관광공사 차장은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정보력이 무척 뛰어났다. 무적함대라 불리던 러시아 발트함대가 가덕도 앞바다로 지나간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3개월 동안 이곳과 대항 새바지 인공 동굴에서 포 발사 연습을 했다"고 설명했다. 함께 간 강해상 동서대 관광학부 교수도 "발트함대는 도대체 포가 어디서 발사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반격은커녕 바다에서 궤멸해 수장됐다"고 덧붙였다.

포진지에서 내려오는 도중 마을 3~4곳에서 일본군이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터도 볼 수 있다. 그중 지금도 주민이 식수로 사용하는 우물이 있다.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우물대와 지붕처럼 만들어진 것이 일본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우물에 양수기를 설치해 퍼올려 사용하는 듯했다. 두레박은 없지만 맑은 물이 충분해 보였다.


# 가덕도 등대

- 일제 원활한 수탈 목적…조선 왕실 압박해 건설
- 군부대 통과해 1주일 전 방문 허가 필요
- 현재 기념관으로… 등대 옆엔 숙박시설

   
  일제가 조선 왕실을 압박해 강압적으로 지은 가덕도 등대. 등대 설치 후 일본 선박의 좌초 건수가 줄었다고 한다.
등대로 가는 길은 쉽지만은 않다. 군부대 두 곳을 통과해야 하므로 1주일 전쯤 허가를 받아야 한다. 방문자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 주민등록번호와 함께 방문 차량의 종류와 번호도 필요하다. 지날 때도 신분증을 가지고 가야 들어갈 때 맡기고 나올 때 찾아 나올 수 있다. 군사지역이므로 반드시 정해진 절차를 밟아야 한다.

가덕도 등대도 우리 어민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 아니다. 일본군이 원활한 수탈을 위해 조선 왕실에 압력을 가해 건설한 역사가 있다. 당시 등대 시설이 전혀 없었는데, 우리 앞바다를 항해하던 일본 배들의 좌초가 잦았다. 그러자 일본은 조선 왕실을 압박해 비용을 부담하게 한 뒤 자신의 설계대로 짓도록 했다.

100년 전 등대로 쓰이던 곳은 현재 기념관으로 남아있고 바로 옆에 등대로 쓰고 있는 것이 따로 있다. 7~8층 높이로 걸어서 올라가 볼 수 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쯤 전망대로 나가면 가덕도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현재는 가덕도 등대체험을 신청하면 등대 옆에 숙박시설에서 묵어갈 수도 있다.


# 가는 길과 먹을 곳

- 포진지는 걸어서… 등대는 차로

   
  외양포 일본군 요새 사령부로 가는 길에 볼 수 있는 민가. 100년 전 일본군 막사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주민이 살고 있다. 그린벨트 지역인데다 국방부 소속 땅이라 증·개축이 금지돼 있기 때문이다.
가덕도는 섬이지만 2010년 12월 가덕대교가 개통되면서 배를 탈 필요가 없어졌다. 부산에서는 차량으로 가덕대교를 지나 대항포 새바지에 주차하고 걸어서 이동할 수도 있다. 대항포 인공동굴에서 일본군 요새 사령부까지는 걸어서 이동할 만하다. 차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다. 하지만 등대까지 가는 길은 산행 채비를 갖춰야 할 듯하다. 대중교통보다는 차량으로 이동하는 것을 권한다. 단, 산길의 비탈이 심하고 구불구불하므로 운전 미숙자에게는 난코스다.

이야기길이 시작되는 대항포의 가덕도 소희네집(051-971-8886)에서 해산물 정식과 회를 맛볼 수 있다. 한 상에 밥과 국, 여러 가지 해산물이 차려져 나온다. 예약 필수, 매주 월요일 휴무.

사진=이진우 프리랜서

※공동기획:국제신문, 부산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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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이야기길 <2> 가덕도 외양포 포진지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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