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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 이야기

‘문방사우’를 쓰는 사람, 만드는 사람

 

[2023 가을, 겨울호-학교 조선시대] ‘문방사우’를 쓰는 사람, 만드는 사람

작성자 : 관리자작성일 : 2024-01-02조회수 : 131

 

‘문방사우’를 쓰는 사람, 만드는 사람

종이·붓·먹·벼루는 전통시대 문인들의 삶에서 떨어질 수 없는 물건들이다. 예로부터 이것들을 벗이라 부르며 예찬하는 문인들의 작품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이것들을 만들어 바치는 이들은 감당할 수 없는 부역에 시달리면서 이를 견디지 못해 삶의 터전을 버리고 도망가거나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부짖으면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였다. 누군가에게 더없는 보물이 누군가에게는 더없는 고통이라는 이 이율배반적인 성격이 조선의 문방사우가 지녀야 할 숙명이었다.

글 노경희 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부 교수

좁고 길게 자른 한지를 꼬아 끈을 만들고 그것을 다시 엮어 물건을 만드는 지승 공예. 옻칠 팔각소반, 국립중앙박물관.
문방사우가 그려진 책가도 병풍, 국립중앙박물관.
종이·붓·먹·벼루를 부르는 이름들

‘문방사우’는 문인들의 네 가지 벗, 곧 문인들의 방에서 만들어지는 글과 글씨, 그림을 위한 가장 중요한 도구인 종이(紙)·붓(筆)·먹(墨)·벼루(硯)를 지칭한다. ‘벗’ 이외에 ‘사보(四譜)’ 또는 ‘사후(四侯)’라고도 불렀다. ‘사보(四譜)’는 송대 문인 소이간(蘇易簡)이 문방사우에 대한 작품을 모아 엮은 책인 『문방사보(文房四譜)』에서 유래하였다. ‘사후’는 『문방사보』에 실린 「문숭사후전(文嵩四侯傳)」에서 이것들을 ‘제후’라 의인화하여 높여 부른 말로, 종이 호치후(好.候), 붓 관성후(管城候), 먹 송자후(松滋候), 벼루 즉묵후(卽墨候)가 그것이다. 이런 식으로 문방사우를 사람처럼 묘사한 작품들은 당나라 문인 한유(韓愈)의 <모영전(毛穎傳)>[『한창려집(韓昌黎集)』 권36, 「잡문」]이 대표적이다.

모영은 강주(絳州)의 진현(陳玄), 홍농(弘農)의 도홍(陶泓), 회계(會稽)의 저(楮)선생과 벗으로 친하게 지내며 서로 밀어주고 이끌어주고, 그 나아가고 머물기를 반드시 함께 하였다.

여기서 ‘모영’은 붓의 재료인 ‘털(毛)’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붓의 친구인 먹과 벼루, 종이에 대해 묘사한 것들도 각기 그 재료와 명산지, 성질 등을 표현하였다. ‘강인(絳人)’은 먹의 명산지인 산서성 지역의 강주(降州) 사람임을 말한다. ‘진현(陳玄)’은 오래 묵힐수록(陳) 그 빛깔이 더욱 현묘해진다는(玄) 뜻으로 먹의 다른 이름이다. ‘홍농’은 하남성에 있는 벼루 산지로 유명한 지역이다. ‘도홍’은 ‘도자기로 만든 벼루’라는 뜻인데 벼루 가운데 물이 모이는 곳이 있어 ‘웅덩이(泓)’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회계’는 닥나무의 산지로 유명하며, ‘닥나무(楮) 선생’은 그 껍질로 만드는 종이를 말한다. 한유가 <모영전>에서 붓·벼루·먹·종이에 인격을 부여한 이래, 후대에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문방사우를 주제로 지은 글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19세기 명필로 유명했던 조선 문인 박윤묵(朴允.)은 <문방사우명>을 지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존재집(存齋集)』 권24]

“문방의 네 가지 벗은 내가 아침저녁 함께한 것들로 오랫동안 서로 더불어 있었기에 자세히 알고 있다. 종이에서 그 깨끗함(潔)을 취하고, 벼루에서 그 장수(壽)를 취하고, 붓에서 그 바름(正)을 취하고, 먹에서 그 색(色)을 취하여, 그것을 자기에게 비춰보면 또한 깨닫고 힘쓰게 할 만한 점이 있기에 <사우명(四友銘)>을 지어 곁에 둔다.”

이상의 문방사우에 대한 옛 글은 이것들을 가지고 시서화를 즐기는 고상하고 전아한 문인들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여기에는 선비 정신이라고 할 깨끗하고, 바르고, 장수하고, 아름다운 성질이 잘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그 재료와 제조 방법, 그것을 만드는 이들의 삶에 대한 관심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자연으로 만든 인간의 도구

문방사우를 부르는 여러 이름들은 이 물건들을 만드는 재료에서 유래하였는데, 그 모두는 자연에서 나왔다. 저선생은 종이의 재료인 닥나무(楮)에서 유래했고, 관성후와 모영은 각기 붓을 만드는 대나무(管)와 동물의 털(毛)이며, 송자후는 송연먹의 재료가 되는 소나무(松)에서 따왔고, 석허중(石虛中)은 벼루의 재료인 돌(石)을 뜻한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을 인간 문명의 도구로 바꾸는 이들을 우리는 ‘장인(匠人)’이라 부른다. 장인들은 이 거칠고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존재를 달래가며 사람의 손 안에서 쓰일 도구들로 만드는데, 이는 곧 자연과의 소통 때로는 투쟁으로 이루어졌다.

 
- 종이(紙)

한지(韓紙)는 닥나무와 황촉규(黃蜀葵, 닥풀)를 주요 재료로 하여 고도의 숙련된 기술과 장인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완성된다. 닥나무를 베고, 찌고, 삶고, 말리고, 벗기고, 다시 삶고, 두들기고, 고르게 섞고, 뜨고, 말리는 아흔 아홉 번의 손질을 거친 후 마지막 사람이 백 번째로 만진다 하여 옛사람들은 한지를 ‘백지(百紙)’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종이는 매우 질기고 튼튼하여, 비단은 500년을 가고 종이는 1,000년을 견딘다는 ‘견오백 지천년’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한지가 이렇게 ‘질긴’ 성질을 갖게 된 이유는 닥나무 껍질의 섬유질을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이다. 원료를 맷돌로 갈지 않고 방망이로 두드려 섬유질을 풀어 만들었기 때문에, 종이 표면에 섬유질이 살아 있어 때로 고르지 못하기도 하지만 대신 매우 질기게 되었다. 이러한 한지의 질기고 튼튼한 성질을 이용하여 상자·항아리·표주박 등 다양한 물품을 만드는 지승공예가 발달하였다. 우리나라 장인들은 섬유질로 인해 지면(紙面)이 거칠어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지막 공정으로 종이를 여러 장 겹쳐 놓고 디딜방아 모양의 기구로 골고루 내리치는 ‘도침(搗砧, 도련)’ 작업을 고안하여, 표면을 치밀하고 매끄럽고 윤기가 흐르게 만들었다. ‘윤택이 나고 흰빛이 아름답다’라는 고려지의 명성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교지 등의 문서를 담아 운반하거나 보관하던 교지통. 몸통은 대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그 위에 종이를 덧대었으며, 뚜껑은 종이로 된 골격에 목제 원형판을 붙이고 종이를 덧대었다. 국립민속박물관.
교지통과 교지
 
- 붓(筆)

붓은 털을 모아 원추형으로 만들어 붓대에 고정시킨 것이다. 붓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재료는 동물의 털이다. 털은 보통 들짐승의 것을 사용하지만 때로는 새의 깃털이나 식물을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 조상들은 족제비 꼬리털인 황모(黃毛)와 노루 겨드랑이털인 장액(獐腋)·재래종 염소 털인 양모(羊毛)를 선호하였으며, 그중에서 특히 황모필이 중국에까지 유명하였다. 붓의 기능에 따라 사용하는 털이 달라졌는데, 그 좋고 나쁨은 결국 털의 선택에 따라 결정되었다. 붓 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모(整毛)’ 작업이다. ‘정모’는 ‘길이별로 골라내기 위해 털을 가지런히 세우는 작업’이다. 원모는 가죽이 약간 붙어 있는 상태로 채취되기 때문에 이 가죽과 기름기를 제거하고 필요한 털만을 가려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얇고 가벼운 털들을 한 올 한 올 가지런히, 털의 앞뒤가 뒤바뀌지 않도록 정리하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기에 고도의 숙련된 기술이 요구된다. 또한 털의 종류에 따라 각기 성질이 다른 만큼 오만가지 털들의 성격을 잘 파악해야 한다.

붓을 만드는 도구들, 국립민속박물관.
 
- 먹(墨)

먹은 나무나 기름을 태운 그을음(煙煤)을 아교에 섞어 흙처럼 고정한 것이다. 전통시대의 먹은 재료에 따라 송연묵과 유연묵으로 구분된다. 송연묵은 늙은 소나무의 송진이 모여 있는 관솔 부분을 태워 나온 그을음에 아교와 향료를 섞어 만든 것이며, 유연묵은 오동나무나 채소의 씨를 태운 연기에서 얻은 그을음으로 만들었다. 우수한 먹은 벼루에 갈 때 찌꺼기가 생기지 않으며 향기와 윤택이 난다. 좋은 먹은 최고의 그을음을 얻을 때 가능하며, 그것을 반죽하여 굳히는 아교 또한 매우 중요하다. 먹을 만드는 과정은 복잡한데, 그을음을 채취하여 아주 가는 체로 쳐서 아교풀로 개어 반죽한 다음, 절구에 넣어 충분히 다진다. 그것을 목형(木型)에 넣고 압착한 다음, 꺼내어 재(灰) 속에 묻어 서서히 수분을 빼며 말린 것이다. 여름철에는 아교가 빨리 상해 냄새가 나고 겨울철에는 잘 마르지 않아 애를 먹기 때문에 봄, 가을철에 만드는 것이 적당하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대부터 우수한 품질의 먹을 만들어 사용해왔으니, 고구려의 승려 담징(曇徵)이 서기 610년에 먹과 제묵법을 일본에 전한 사실이 『일본서기』에도 전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고려 시대 먹 <청주 명암동 출토 ‘단산오옥(丹山烏玉)’명 고려 먹>, ‘단산’은 단양의 옛 이름이며, ‘오옥’은 먹의 별칭 ‘오옥결(烏玉.)’의 약칭이다. 단양의 먹은 『실록』과 『여지승람』에 “먹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단산오옥’이다.”라고 기록될 정도로 우수한 먹이다. 201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국립청주박물관.
 
- 벼루(硯)

벼루는 재료에 따라 흙으로 구운 토연(土硯), 토연에 유약을 발라 구운 도연(陶硯), 벽돌이나 기와로 만든 전연(塼硯)과 와연(瓦硯), 나무로 만든 목연(木硯), 옥으로 만든 옥연(玉硯) 등 다양하지만, 역시나 가장 많은 것은 돌로 만든 석연(石硯)이다. 석연은 다시 돌의 빛깔에 따라 검정색인 오석연(烏石硯), 자주빛을 띠는 자석연(紫石硯), 푸른빛의 녹석연(綠石硯)으로 구분된다. 우리나라에는 특히 검정색의 오연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의 벼루는 처음에는 도자기벼루가 주로 제작되었으나 고려 시대부터 돌벼루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벼룻돌은 지표에 드러난 것은 풍화로 결이 바스라져 쓸 수 없어, 주로 계곡 물의 바닥에 있는 수중석이나 땅속 깊이 묻혀 있는 돌을 쪼개어 쓴다. 적당히 곱고 부드러워 사그락사그락 먹이 잘 갈리고, 먹물이 탁하지 않아 써 놓은 글씨에 광채가 나고, 갈아 놓은 먹물은 벼루에 흡수되지 않는 것이 최상급의 벼룻돌이다. 전통 방식의 벼루 제작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원석을 찾아 채취하는 것과 ‘봉망(鋒.)’을 세우는 작업이다. 먹이 잘 갈리기 위해서는 먹을 가는 바닥면이 지나치게 매끄러워서는 안 되며 미세한 요철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를 ‘봉망’이라 하고, 이를 세우는 과정을 ‘봉망 세우기’라 한다. 좋은 벼루는 봉망이 미세하고 균일하며, 오래 사용해도 계속해서 봉망이 생성된다.

나전 기법으로 장식한 벼루함, 필기도구 상자로 서안 옆에 둔다. 뚜껑이 있는 상단에는 벼루와 먹을 넣고, 중간에는 서류나 소도구를 보관하며, 하단의 열린 공간에는 종이나 책, 연적 등을 올려놓는다. 대구대학교 중앙박물관.
 
조선의 관장(官匠) 제도와 장인들의 피폐한 삶

전통시대에는 손으로 물건을 만드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을 ‘공장(工匠)’이라 불렀다. 『재물보(才物譜)』에 따르면 ‘공(工)’은 ‘마음을 공교하게 하고 손을 수고롭게 하여 기물을 만드는 사람(工其心, 勞其手, 成器物者/善其事也)’이며, ‘장(匠)’은 ‘모든 공(工)을 다 일컫는 말(百工通稱)’이라 한다. 우리에게 좀더 익숙한 표현으로 ‘장인(匠人)’과 ‘쟁이’가 있다. 조선 시대의 공장은 크게 관청에 소속된 ‘관장(官匠)’과 개인적으로 작업하는 ‘사장(私匠)’으로 나뉘고, 관장은 다시 서울의 관아에 소속된 ‘경공장(京工匠)’과 지방의 군현에 소속된 ‘외공장(外工匠)’으로 구분된다. 문방사우와 관련해서는 종이를 만드는 지장(紙匠), 붓을 만드는 필장(筆匠), 먹을 만드는 묵장(墨匠), 벼루를 만드는 연장(硯匠)이 있다. 우리나라 종이는 중국에 조공품으로 많이 보냈고, 조선 초기부터 서책 출판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인쇄용으로 다량 필요했다. 이에 국가에서는 일찍부터 중앙에 종이 만드는 기관인 조지서와 지방에 지소(紙所)를 설치하고 지장들을 배치하였다. 조지서에 경공장 지장 81명과 지방에 외공장 지장 698명을 두었는데 이는 경외장 중 가장 많은 숫자였다. ‘필장’은 경공장에 속하여 왕실과 관청에 필요한 붓을 제작하였다. 민간에서는 ‘붓장’이라 불리는 이들이 붓을 제작하여 ‘필방’을 통해 판매하였다. 먹을 만들던 묵장은 경공장과 외공장에 소속되어 국가에서 필요한 먹을 제조하였다. 벼루를 만드는 이를 벼루장 또는 연장이라 하는데, 『경국대전』에서는 따로 공장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다. 조선의 장인 제도는 재정의 궁핍과 관료들의 횡포 등의 이유로 연산군과 중종 대를 전후하여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양란으로 인한 재정 결핍으로 장인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못하면서 18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관아에 장인을 두는 관장제가 붕괴되기 시작하고, 19세기에는 거의 사장(私匠)들이 차출되었다. 우리나라 문방사우는 중국과 일본에도 인기가 많아 조공과 선물용으로 수요가 많았다. 이에 늘 장인들에게 감당하기 힘든 양이 공물로 할당되었고, 민간의 장인들도 물품 제작에 충원되었다. 특히 전통적으로 주요 인쇄출판 장소였던 사찰의 경우 지나친 종이 부역으로 승려들이 다 도망가 절이 텅 비어 폐사될 지경에 이른 사례도 적지 않았다. 울산시 울주군의 천성산 자락에 자리하던, 지금은 부도와 초석 몇 점만이 그 존재를 증명하는 ‘운흥사(雲興寺)’라는 절은 17세기 후반 조선의 대표적인 불경 출판 장소였다. 당시 해인사에 버금갈 정도의 인쇄 작업을 하였고, 현재 통도사의 성보박물관에는 운흥사에서 간행한 불서 16종의 판목 673점이 보관되어 있다. 불경을 잘 만드는 사찰마다 가혹한 종이 생산 부역이 떨어졌고 이 일에 지친 승려들이 절을 떠나는 일이 빈번한 가운데, 결국 운흥사도 18세기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찰터 인근에는 지금도 종이의 재료인 닥나무가 자생하고 있고 인근 마을 중에 ‘닥나무마을’이란 뜻을 지닌 ‘저리(楮里)’도 있다. 닥나무 껍질을 벗기거나 삶아 씻어 잘게 부술 때 사용하는 딱돌로 추정되는 넙적바위가 경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물을 담았던 석재 수조도 남아 있어 이곳에서 종이를 만들었으리라는 흔적만은 여전하다. 붓과 먹은 특히 소모품이기 때문에 매년 나라에서 소용되는 양이 적지 않았다. 거기에 중국이나 일본과의 교역품에도 황모필 등의 붓이 특산물로서 포함되어 있었다. 실록에서는 필장과 묵장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수량이 할당되어 고통에 시달리는 내용이 종종 나타난다.

본조에서 매달 각 아문에 진배(進排)하는 숫자는 황모(黃毛) 9백 37자루, 고모(羔毛) 70여 냥, 진묵(眞墨) 3천 1백 25개인데, 이 외에 여러 곳에서 별도로 진상하는 숫자가 날로 더하고 달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 필묵의 숫자로 값을 계산해 보면 한 달에 들어가는 목면이 15동(同) 남짓한데 호조에서는 다만 목면 6동만을 지급해 주고 있으니, 이것은 3분의 1에 해당됩니다. 원래 붓 만드는 장인의 숫자가 4~5명인데 가난으로 구걸하는 신세인 데다가 여러 곳에서 침해를 받고 있으니, 매달 10동에 달하는 목면을 어디에서 조달할 수가 있겠습니까. 집과 가재도구마저 팔고 나서 울부짖는 이들이 길거리에 가득하며 심지어 격쟁을 하고 도산까지 하는데, 이는 실로 힘이 부치고 형세가 절박하기 때문에 여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 『광해군일기』 「1621년(광해 13년) 6월 24일」

공조에서 매달 각 관청에 진상하는 붓과 먹의 개수가 엄청난 수량이지만, 정작 그 비용은 3분의 1만 치르고, 장인의 숫자는 터무니없이 적어 이들이 도산하여 길거리에서 울부짖는 비참한 사정을 보여주고 있다. 깨끗하고 바르고 장수하고 아름다운 네 가지 벗들은 누군가에게는 수탈과 고통의 대상일 뿐이었다. 우리나라 문방사우의 뛰어남과 명성 뒤에는 이러한 이름 모를 장인들의 아픔이 함께 어려 있음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정선의 세검정, 조선 시대 조지서가 있던 세검정 지역을 그렸다. 국립중앙박물관.
17세기 해인사와 함께 대표적인 불경 인쇄 사찰이었던 운흥사의 절터와 그곳의 부도와 수조. 저 수조를 사용하여 종이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울산광역시 포토울산(울산사진DB).

 

출처; 월간문화재 - 월간문화재 - 월간문화재 - 참여/소식 - 한국문화재재단 (chf.or.kr)

 

한국문화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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