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신문으로 보는 음식 > 전통 음식과 식재료의 변화
일제 강점기까지 생산되었던 전통소금, 자염(煮鹽)
자염은 옛날부터 만들어오던 소금이다. 바닷물을 어느 정도 갯벌에서 증발시킨 후 남은 액을 솥에 끓여 만든다. 1908년 인천 주안 등지에서 국가적인 사업으로 천일염전을 대규모로 만들었지만, 전통방식으로 만드는 자염이 곧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자염은 일제시대를 지나 1950년까지 생산되었다. 그러나 경제성이 낮아 일제시대부터 생산량이 줄어들고 있었다. 일제시대부터 1950년까지 자염을 생산했던 대표적인 지역이 낙동강 하구의 김해군 명지·녹산 염전이었다. 이 일대에 자염이 생산된 것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들어와 일본식 전통소금인 자염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까지 소금은 바닷물을 솥에 끓여서 만들었다. 바닷물을 솥에 넣고 바로 끓이려면 땔감이 많이 들었으므로 어느 정도 증발시킨 다음 끓였다. 소금물을 솥에 넣고 불을 때서 증발시켜 만들었으므로 이러한 소금을 자염(煮鹽)이라 하였다. 대한제국기 조선의 소금 만드는 과정을 관찰한 미국인 헐버트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동해안 가까이에 있는 널따란 평지에는 장방형의 터가 마련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로 개천이 나있다. 이 개천에 펌프나 큰 국자로 물을 댄 다음 3-4인치의 두께로 표면을 단단하게 바른 갈색의 저수장으로 물을 끌어 들인다. 물이 증발함에 따라서 갈색의 저수장에서 소금이 남는다. 그것들을 끌어 모은 다음 무거운 소금물을 말리는 큰 통으로 운반한다. 이 소금물은 석회석으로 만들어진 큰 솥에서 불을 때어 증발시킨다. 석회석은 조개를 태워서 만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소금은 매우 거칠고 불결하지만 이용되고 있다.
(H.B. 헐버트 지음, 신복룡 옮김, 『대한제국멸망사』, 평민사, 1985. )
1908년 인천 주안 등지에서 국가적인 사업으로 천일염전을 대규모로 만들었지만 전통방식의 자염이 곧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자염은 일제시대를 지나 1950년까지 생산되었다. 그러나 경제성이 낮아 일제시대부터 생산량이 줄어들고 있었다. 일제시대부터 1950년까지 자염을 생산했던 대표적인 지역이 낙동강 하구 김해군의 명지·녹산 염전이었다. (유승훈, 「명지·녹산 염전의 소금 생산 특징과 변천」,『한국민속학』44, 2006)
명지․녹산 염전은 남해안에서 가장 유명한 소금 생산지였는데 한말까지 영남 지역의 소금은 거의 명지․녹산 염전에서 공급해왔다고 볼 수 있다. 낙동강 하구는 제염업의 요건을 잘 갖춘 곳으로 1950년까지 이곳에서 전통 소금인 자염을 생산해 왔다. 이 당시 염전은 김해군 명지면과 녹산면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었다.
한말 중국에서 수입한 천일염과 조선의 서해안에서 만들어진 천일염이 부산으로 유입되고, 동래의 분개염전에 일본식 염전이 설치되었다. 인근에 일본식 염전이 들어서면서 명지․녹산 염전도 일본 염전의 영향을 받았다. 낙동강 하구 지역은 서해안같이 천일염전을 만들 수 없었으므로 기존 조선식 자염 생산방식이 일본식 자염 생산방식으로 바뀌었다. 일본에는 우리나라 서해안같이 넓은 간석지가 없어 천일염을 만들 수 없었으므로 일본의 전통소금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바닷물을 끓여서 만드는 것이었다.
명지·녹산 염전은 바닷물이 밀물에 들어올 때 물을 가두어 소금을 만들었다. 일본식 영향은 바닷물을 땅바닥에 모아 햇빛에 말린 후 저수장으로 갈 때 땅 속에 관을 묻어 가는 것과 소금물 끓이는 솥이 기존 기존 석회석과 흙으로 만든 솥에서 철솥으로 바뀐 것이다. 철솥은 주물이 아니라 철판 3개를 볼트로 조인 형태로, 크기는 세로 11척, 가로 9척이고 깊이는 4촌이었다. 낙동강 하구에서 철부(철솥)는 1950년대까지 사용되었다. 철부는 1880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만들어 졌으며, 개항장의 일본인 거류지를 통해서 들여왔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가마가 하나 추가되어 앞가마와 뒷가마로 이어졌다. 뒷가마는 앞가마의 열을 받아 미리 저장한 바닷물의 온도를 높이기 위한 시설이었다. 소금물을 끓이는 연료도 갈대에서 석탄으로 바뀌었다. 낙동강 하구는 유명한 갈대생산지라 조선시대까지 갈대를 연료로 썼다. 갈대에 비해 석탄은 화력이 강하고 가격이 싸서 19세기 후반부터 명지․녹산 염전은 일본인 기술자에게 석탄 사용법을 전수받으려 하였다. 석탄사용이 정착된 것은 아궁이 구조가 석탄을 때기 좋게 변화한 1920년 부터였다. 1920년부터 철과 내화벽돌로 아궁이를 만들면서 석탄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석탄을 때어 만든 소금의 결정이 크고 색깔이 순백하지 않아서 갈대도 같이 사용되었다. (이상 유승훈, 「명지·녹산 염전의 소금 생산 특징과 변천」,『한국민속학』44, 2006)
참고자료
단행본H. B. 헐버트 지음. 대한제국멸망사. 서울: 평민사, 1958.
논문유승훈. "명지 · 녹산 염전의 소금 생산 특징과 변천." 韓國民俗學 44 no.1 (2006): 234-274.
집필자강문석
근대 신문으로 보는 음식 > 개항 이후 들어온 음식과 식재료
천일염을 다시 정제한 꽃소금, 재제염
재제염은 꽃소금이라고도 하는데 천일염을 물에 녹여 불순물을 제거하고 가열하여 결정시킨 것이다. 대한제국기 중국에서 천일염이 많이 수입되었기 때문에 재제염공장은 한국내에서 천일염이 생산되는 1908년 이전 1904년 부산에서 처음 설립되었는데 일본인이 운영하는 것이었다. 이후에도 한국내 재제염공장은 모두 일본인이 경영하였다. 부산지역의 경우 재제염 공장이 해방이 될 무렵까지 20여개 있었는데 주로 부산의 영도(영선동‧대교동‧봉래동)에 위치하였다. 영도에 재제염공장이 위치한 것은 영도가 천일염을 실은 선박이 드나들기 좋은 곳이었고, 영도에 무쇠솥을 만드는 주물공장이 많았기 때문이다.
재제염은 꽃소금이라고도 하는데 천일염을 깨끗한 물에 녹여 불순물을 제거하고 다시 가열하여 결정시킨 것이다. 결정의 모습이 눈꽃모양이기 때문에 꽃소금이라고 하며, 재제염(再製鹽)이라고도 한다. 염화나트륨 88% 비율이다.
천일염은 바닷물을 염전으로 끌어와 바람과 햇빛으로 수분과 함께 유해 성분을 증발시켜 만든 가공되지 않은 소금으로 굵고 반투명한 육각형의 결정이다. 천일염에는 칼슘, 마그네슘, 아연, 칼륨, 철 등의 무기질과 수분이 많아서 채소나 생선을 절일 때 쓴다. 김치를 담그거나 간장, 된장 등을 만들 때도 쓰인다. 몸에 좋은 무기질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 반면 독성물질도 다소 함유 하고 있는데 김치, 간장, 된장을 만드는 과정에서 발효되면서 유해 성분이 없어진다. 그러나 국이나 찌개 등에 간을 할 때 천일염을 넣으면 독성물질을 먹을 수 있으므로, 제재염이 만들어졌다.
한국에서 천일염이 처음 생산된 것은 1908년이다. 제재염은 이후에 만들어졌을 것 같지만, 그 이전에 중국산 천일염이 많이 들어온 시기에 이미 생산되었다. 근대 재제염에 대한 신문기사는 단편적이어서 김승의 연구(김승, 「식민지시기 부산의 수산가공업과 수산가공품 현황」, 『역사와경계』101, 2016.)를 바탕으로 근대 재제염의 역사를 알아본다.
국내에서 재제염이 생산된 것은 1904년이다. 고노미 미쯔사부로(許斐光三郞)가 부산진역 부근에 공장을 설치한 것이 효시였다. 이 무렵 유통 되고 있었던 소금은 구덩이에 바닷물을 모아 흙가마나 무쇠 가마 등에 넣고 끓여서 소금을 채취했던 전통 방식의 자염(煮鹽 또는 煎熱鹽)과 개항 이후 일본과 대만, 중국 등으로부터 수입된 값싼 천일염이었다. 고노미에 의해 시작된 부산의 재제염은 러일전쟁 이후 일본 이주민이 급증하는 것과 맞물려 전국적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 결과 1934년 부산에서 재제염을 생산했던 공장이 11개 정도였고, 해방될 무렵에는 20여개의 재제염 공장이 가동되었다.
이들 11개 재제염 공장 대부분은 영도(영선동‧대교동‧봉래동)에 이었다. 영도는 천일염이 선박을 통해 부산항으로 들어올 경우 지리적으로 유리했고, 제재염 생산설비인 무쇠솥을 만드는 주물공장들이 많았다. 영도는 경남에서 제일 큰 일본인 이주어촌이 형성되어 있었고, 1916년 무렵에는 200여 척의 선박이 항상 집결해 있을 정도로 수상교통과 수산업이 발달했다. 또한 일제식민지 시기부터 최근까지 선박 건조 및 수리와 관련된 많은 조선소들이 많았다. 1932년 부산의 철공업 공장 54개 중 주물(鑄物)‧주조(鑄 造)‧단야(鍛冶)‧철공(鐵工)‧과부(鍋釜) 등을 제작했던 17개의 공장이 영도에 있었다.
고노미는 1928년 당시 10명의 제염업자가 납입한 전체 영업세 943원 중 39%(367원)에 해당하는 영업세를 납입했을 만큼 부산을 대표하는 제염업자였다. 그는 1925년 6월 부산염업상회를 설립하였는데 이 회사의 자본금은 1만원이었다. 고노미와 함께 부산에서 재제염 사업을 크게 한 사람이 시라이시 우마타로(白石馬太郞)이다. 그는 1906년 부산으로 와 용호동 일대의 2만평의 분개(盆介)염전과 재제염 공장을 경영했다. 분개란 ‘소금을 굽는 동이(盆)가 있는 포구((浦口)‧개(介)’라는 뜻으로 조선시대부터 자염을 만들던 곳이다. 시라이시는 1915년 5월 영도에도 재제염 공장을 설립함으로 고노미와 함께 부산을 대표하는 제염업자로서 성장하였다. 그는 재제염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면서 부산 제3 금융조합과 목도신탁(牧島信託)주식회사, 토지와 주택 매매업을 관장했던 부산상사주식회사 등의 평의원과 감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렇게 재제염 공장을 운영했던 일본인들은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해방되면서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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