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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 이야기

문화유산 미스토리 경주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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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5년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신라 경주를 지켰던
신라 사직을 지켰던 그런 궁성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김재홍 교수 / 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고대 국가가 형성된 시점에 국왕과 국가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지금으로 치면 랜드마크와 같은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1979년에 시작된 월성벽 발굴은 지금까지도 계속 되고 있다
가히 그 규모를 짐작할만 한데 그러던 2021년 9월 발굴팀에게 계속해서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
1980년대 시작된 20여구의 인골을 포함해서 지금까지 총 27구의 인골이 월성벽 아래에서 발견된 것이다
혹시 신라시대의 공동묘지 였을까? 
아니면, 국가의 근간을 뒤흔들만큼 엄청난 전염병이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전쟁의 흔적인가?! 

장기명 학예연구사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월성 발굴 조사팀장
신라의 왕성에서 성을 축조할 때 인골이 나올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습니까? 
오히려 어? 이게 여기서 어떤 맥락에서 이게 들어간 거지?  

무덤이 아닌 성벽 아래에 인골들이 묻혀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인골의 머리 방향과 그 옆에 놓여져 있는 토기 인골을 나무껍질로 덮어놓은 듯한 흔적
그리고, 귀걸이 등 의식을 치른 듯한 유물, 발굴 현장의 모든 것이 하나의 답을 향하고 있었다

김재홍 교수 / 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특히 그냥 갖다 묻은 것이 아니라 
팔찌와 목걸이 같은 것이 있는 걸 봐서 아주 정연하게 의식을 행하고 가지런히 묻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서 성벽의 축조와 관련된 의식 과정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장기명 학예연구사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월성 발굴 조사팀장
성벽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아니면 문지의 액운을 다 잡기 위해 이런 식으로 희생이 치러졌기 때문에 
인신공희, 인신공양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하는 거죠

그랬다 성벽 아래 인골들은 성벽의 완공을 위한 희생자들이었던 것이다

장기명 학예연구사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월성 발굴 조사팀장
이렇게 인신공희가 증거를 충분히 갖추고 신라 왕성에서 처음으로 나왔기 때문에  인신제사의 증거들은 추가 발굴에서도 계속 나왔다. 사람과 같이 희생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소와 말의 뼈! 그리고, 액체류가 담긴 큰 토기 안에 작은 토기가 들어가 있는 특이한 형태제사에 사용된 흔적인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을 제물로 쓴 인신제사의 증거들

과연 그들은 무엇을 위해 사람까지 희생시켜야 했을까?

이기환 기자 / 역사 스토리텔러
페루라든가, 잉카라든가 고대 이집트 중국도 마찬가지인데요
문명의 발상지에는 늘 이런 사람의 제사를 지냈다라는 기록들이 아주 잘 남아있습니다


또 중국 상나라의 갑골문에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노예 100명과 양 100마리를 올린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장기명 학예연구사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월성 발굴 조사팀장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되는 단계부터 좀 보편적으로 나옵니다
사람을 희생하면서까지도 뭔가 국가적으로 대중적으로 퍼포먼스를 해서 장악을 하기 위해서 전세계적으로 남아있는 인신제사의 기록들, 우리나라 역사에는 또다른 인신제사가 없었을까?
인신제사과는 다르지만 우리나라에도 왕이나 귀족이 죽었을 때 사람을 함께 묻는 ’순장’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창녕 송현동 고분에서는 순장된 여성의 인골이 발굴된 바 있다

김재홍 교수 / 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지금까지 인골이 발견된 유적은 대부분이 무덤이었습니다. 
인위적으로 산 사람을 생매장하는 순장 개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월성 성벽에 인골이 발견된 것은 이 건물이 무너지지 말라고 기원하는 측면에서는 목적을 전혀 달리합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목적성을 가진 의례가 행해졌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에 순장과는 또 다른 역사적 의미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월성벽의 축조과정에서 인신제사는 대체 언제, 어떻게 행해졌다고 볼 수 있을까? 

장기명 학예연구사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월성 발굴 조사팀장
저희가 2017년, 2021년 둘 다 인골 세 구가 인신공희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성벽 축성 과정에서 보면 분명해집니다
기초를 다 다진 다음에 그 중심 골조가 들어가는 가장자리 그 지점에 맞춰서 인골이 먼저 인신 희생이 되기 시작합니다

김헌석 연구원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고환경 복원 연구팀장
사람을 희생한다고 하는 어떻게 보면 가장 큰 희생물이고 가장 큰 제물을 바치면서 까지도 이런 것들을 한다고 하는 걸 봤을 때는 신라시대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관심과 집중을 보였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국내 처음으로 확인된 인신제사의 증거 경주 월성벽
국가의 주요 건축을 위해 살아있는 사람을 매장하는 고대인들의 믿음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김재홍 교수 / 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신라의 국왕이 천 년간 거주한 곳이 월성입니다. 
지금까지 ‘월성’ 하면 단순하게 흙을 쌓은 성벽이라 생각했습니다마는 특히 인신 제사가 그중에 핵심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런 걸 통해서 단지 성벽이 구조물로서만 의미를 갖는 게 아니라 당시 신라인들의 사고방식 그리고 당시 사회 구조를 
알 수 있는 측면에서 의미를 가집니다

유적은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유적을 통해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출처: 문화유산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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