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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이야기

동래부사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

동래부사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

<동래부사접왜사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조선 후기 동래부사가 일본의 사신을 맞이하는 장면을 도해한 병풍 그림이다. 한일 양국을 대표하는 관리들의 만남을 묘사한 일종의 기록화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 뿐만 아니라 동래 지역의 주요 건물과 지형 등을 상세히 묘사한 지도 성격의 그림으로서, 각 인물들의 복식 등을 자세하게 그린 풍속화로서, 그리고 동래 지역에서 활동한 화사들에 의해 부산 지역에서 생산된 그림으로서 회화사적으로 높은 가치가 있다. 

<동래부사접왜사도>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보다 상세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한국기록관리학회지 제16권 제2호 2016에 수록된 부산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송정숙 교수의 “기록으로 본 부산의 산업변동과 로컬리티”에서 <동래부사접왜사도>에 관한 부분을 발췌하여 아래와 같이 소개함을 밝힌다. 

                                                                <지도 1> 1735년경의 경상도 동래부

                             <지도 2> 1872년 동래읍성도 (김기수, 2013, p. 22)

 

                      <사진 1> 동래독진대아문 (일제가 동래 금강공원에 옮겨놓았던 동래부 동헌의 앞대문)

 

동래부 동헌의 앞대문이었던 “동래독 진대아문(東萊獨鎭大衙門)" 현판 아래 양쪽기둥에 걸린 주련에 ‘교린연향선위사(交隣宴 餉宣慰司)’와 ‘진변병마절제영(鎭邊兵馬節制 營)’이라 기록되어 있다. 오른쪽 기둥의 ‘鎭邊兵 馬節制營’은 이곳 동래부가 ‘진변 병마절제사 의 영'이란 뜻으로, 임진왜란 전에는 경상좌병 영 휘하 경주거진의 지휘를 받다가 임란 후에 독립된 동래진(鎭)으로 승격했다는 점에서 군 사적 요충지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진(鎭)은 행정단위인 읍을 군사단위인 진으로 하는 체계 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왼쪽 기둥의 ‘交隣宴 餉宣慰司’는 ‘일본사신을 접대하는 관아’라는 뜻으로 부산이 외교적으로도 요충지임을 보여주고 있다(윤용출, 1989, pp. 6-7). 동래부는 남쪽 변방 땅 끝에 위치해서 실로 가장 중요한 관방으로서2) 18세기 중반에는 조 선에서 여섯 번째로 큰 고을이었다. 동래부는 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행정중심의 여타 읍성과 달리 조선후기 대일외교 관계가 회복된 이래 12차례에 걸친 조선통신사 교류 등 조선과 일 본 양국간에 유일한 대일외교의 창구로서(김기 수, 2013, p. 22) 동래부사는 대일외교 및 무역 을 주도하였다. 이는 <그림 1>, <그림 2> <동래 부사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에도 잘 나 타나 있다

 

2) “本司에서 回啓하지 못한 公事 가운데 각 處의 關防 형편을 논한 狀啓와 上疏를 覆啓한 例에 의해 別單에 획일적 으로 論列해 들인다는 계와 그 別單”, 비변사등록, 숙종 32년(1706) 4월 14일.

<그림 1> 진주박물관소장 동래부사접왜사도 병풍 제1폭~제5폭

<그림 2> 진주박물관소장 동래부사접왜사도 병풍 제6폭~제10폭

진주박물관소장  동래부사접왜사도 6~10촉과 같은 내용의 동래부사접왜사도 

 

위 동래부사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 는 동래부사가 일본의 사신을 맞이하는 의례장 면을 연속적으로 묘사한 10폭 병풍이다. 동래읍 성을 기점으로 하여 왜관까지 가는 경로와 주변 경관, 조선 접대 인력의 행렬을 담고 있으며 숙 배례, 연향의례를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심민 정, 2015, p. 142). 2.2 조․일 양국의 통상지구, 부산포 뺷신증동국여지승람뺸 산천조에 의하면, “부산 (釜山)은 동평현(東平縣)에 있으며, 산이 가 마솥 모양과 같아서 이렇게 이름지었다. 그 아 래가 바로 부산포(釜山浦)인데, 상주하는 왜인 의 집들이 있으며3) 북쪽으로 현까지의 거리는 21리이다." 관방조에는 “부산포진(釜山浦鎭) 은 현의 남쪽 21리에 있으며, 좌도수군 첨절제사 의 진영이 있다. 옛날에는 상주하는 왜호가 있 었는데, 1510년(중종 5)에 조정에서는 삼포왜 란을 진압한 이후 드디어 왜호 두는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4)고 한다. 이후 임신약조 체결로 1512년에 제포를 단일 왜관으로 일본과 무역을 재개하였으나, 1541년 제포에서 조선관군과 일 본인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자 제포의 왜관을 부 산포로 옮겼다. 임진왜란으로 부산포왜관을 폐 쇄(3차)하였다가, 1603년에 절영도에 임시왜관 (1603-1607)을 설치하였다. 1607년에 두모포 (현 부산 수정동)에 왜관을 설치했다가 부산진 성이 가깝다는 이유로 1678년 초량(현 부산 용두 산공원 일대)으로 왜관을 옮겼다(송정숙, 2011, pp. 275-276) (<지도 3> 왜관의 위치변화 참조).

 

3) 이는 1407년에 설치한 부산포(현 부산진 시장 일대)에 설치된 왜관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419년 이종 무의 대마도 정벌로 부산포왜관을 폐쇄하였다(1차). 1423년에 부산포에 왜관을 다시 설치하였다.

4)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3, 경상도 동래현. 이는 삼포왜란으로 인한 부산포왜관 폐쇄(2차)를 의 미한다.

      <지도 3> 왜관의 위치변화 (김기수, 2013, p. 22)

                                                      <그림 3> 초량왜관도5)

 

조선조는 500년 동안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외국인의 국내 거류는 원칙적으로 금지하였다. 이와 같은 쇄국의 시대에 왜관이 소재한 부산포 는 조선과 일본 양국에게 ‘밖으로 향한 열린 창 구’였다. 왜관은 부산진과 다대진에 둘러 쌓여 있는 고립된 지역에 있었다. 왜인들을 감시하는 장치는 보다 엄격하고 조직적으로 시행되었다. 초량왜관은 높이 2m의 돌담으로 사방이 둘러싸 여 있었으며, 왜관 밖에는 6개의 검문소를 설치하였고, 1709년에는 설문(設門)을 만들어 조선 인과 일본인을 차단하는 경계를 만들었다(김동 철, 2006b, pp. 339-340). 일본과 조선의 무역은 대마도인들을 통하여 왜관에서 주로 이루어졌 다. 그들은 중국산 견직물과 백사(고급 생사), 조선산 인삼 무역에 주력하였다. 조선은 일본에 서 수입한 은을 가지고 중국에 가서 비단을 샀 다. 일본—왜관—서울—베이징으로 이어지는 ‘은의 길’이 생겼다. 조선의 사신과 상인들이 중 국에서 수입한 백사와 견직물은 ‘은의 길’을 역 류하여 일본 최대의 견직물 산지인 교토로 갔다. 교토는 ‘은의 길’(실버로드)의 출발점이자, ‘비단길’(실크로드)의 종착지였다(김동철, 2006b, p. 343). 이로 볼 때 왜관이 있던 부산포 일대는 쇄국시대에 조선과 일본이 교역하는 통상지구 였다고 하겠다. 1876년(고종 13) 2월 3일에 대관 신헌(申櫶) 과 일본 특명전권변리대신(特命全權辨理大臣) 흑전청륭[黑田淸隆, 구로다 기요타카]이 수호 조약에 서명함에 따라 부산항이 개항장이 되었다(고종실록, 권13, 고종 13년 2월 3일).

 

5) <초량왜관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돌담 안쪽이 초량왜관, 왜관 북쪽에 일본사절을 접대하는 연향대청이 있다. 산너머 왜관 관계의 관청인 성신당, 통사청, 유원관이 보인다. 오늘의 부산역 서북쪽에 설문이 설치되었는데(1710), 이것은 밀무역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설문 안쪽에 있는 것이 초량객사로 일본사절이 부산에 오면 먼저 객사에 안치된 국왕의 전패에 순향숙배를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