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부산의 이야기

[국립 인간극장] 기사 모음

지난 1월 부터 국제신보에서 연재하고 있는 [국립 인간극장]에서 매회 부산의 장인, 꾼들에 대한 이야기를 김민주기자에 의해 소개해 오고 있다. 이 기사를 통해 부산지역의 문화의 한 맥이 어떻게 이어오고 있는지를 알 수 있어 관심있는 네티즌들에게 이를 모아 소개하고자 한다. 

 

 

 

[국립 인간극장] <9> 장도 - 임장식 장인

여성 정절 강요한 칼? 장도는 생필품이자 장인의 예술품이었다

  • 김민주 기자 min87@kookje.co.kr , 이우정 PD
  •  |   입력 : 2022-03-22 19:39:27
  •  |   본지 15면
 
   
- 무형문화재 보유자 후보 임 장인
- 칼자루·칼집 만들어 문양 새기고
- 칼날 제작까지 모든 공정 수행

- 왕 하사품·예물 등 사치품이면서
- 서민 생활용품이기도 했던 장도

- ‘실용적 공예품’ 인기 누렸지만
- 1960년대 커터칼 등장 이후
- 순식간에 역사 뒤안길 밀려나
- 명맥 잇기조차 어려운 현실

- “쓰임새 잃었다고 멈출 수 없어
- 선조 기술 후대에 잘 물려줘야”

은장도(銀粧刀)가 여성 정절의 상징으로 떠오른 건 현대에 와서다. 꾸밈칼로도 불리는 장도(粧刀)는 고려 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일상에서 다양한 용도로 애용되던 생활용품이었다. 군주가 관직에 오른 신하에게 내리는 하사품이자 혼례함에 포함되는 예물의 하나였다. 칼자루와 칼집에 문양을 새겨넣어 장신구 기능도 했다. 그럼에도 TV 사극에서 여성이 자신의 목숨을 끊어 절개를 지키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 탓에 잘못된 인식을 낳았다.

임장식 장인이 장도의 자루집을 불에 달구고 있다. 이우정 PD
장도는 고려가 원나라와 교류할 때 한반도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목 민족이 사용하던 단도를 우리 풍속에 맞도록 개량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원나라에서 유입된 단도는 칼집이 없는 투박한 형태였지만 우리 선조들은 보관의 편의성을 위해 칼집을 만들었다. 칼집 재질에 따라 목장도(나무)나 은장도로 불렸다. 칼날은 예외 없이 강철로 만들었다. 조선시대 장인들이 열처리해 만든 강철날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합금 기술을 개발하기 전까지는 가장 견고한 칼날이었다고 한다.

조선조 들어 장도는 일반 백성들도 사용할 만큼 보편화된다. 서민들은 주로 목장도를 주문했다. 은젓가락이 포함된 첨사도는 당상관급의 고위 양반만 사용할 수 있었다. 실제 외부에서 식사를 하거나 음식물 속에 독이 들었는지 여부를 판별하는 용도로도 사용됐다.

궁궐에는 왕실과 중앙관청이 사용할 물품을 제작하는 경공장(京工匠)이 따로 있었다. 이들의 생산 목록에 늘 장도가 포함됐다. 당시 장도는 적어도 3개 분야의 경공장이 분업해 제작했다. 장도의 주인이 정해지면 이에 걸맞은 소재로 칼자루와 칼집을 재단한다. 자루·집에 문양을 새기는 세공은 다른 장인의 몫이다. 그 사이 장도의 칼날을 만들기 위한 주물 작업이 완료되면 칼자루와 결합한다. 하나의 종합예술인 셈이다.

임장식 장인이 올해 4인시에 만든 인월도. 진주시 장도장전수교육관 제공
현대의 장도장(粧刀匠)은 세 가지 작업을 홀로 수행한다. 중앙·지역 무형문화재로 이름을 올린 장인 가운데 요즘도 여전히 장도를 만드는 이는 경남 무형문화재 10호 장도장 보유자 후보인 임장식(62) 장인이 유일하다. 부친이자 선대 보유자인 임차출(1987년 경남도 무형문화재 지정) 선생 사후 보유자 평가가 진행되고 있다. 경남도와 진주시는 사실상 임 장인을 보유자로 인정해 전수관 사용 및 제작·후학 양성을 지원하고 있다. 진주 장도장전수교육관에서 임 장인을 만나 전통 장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주인 죽이는 무서운 칼, 장도에 대한 편견을 벗겨내려 여러 시도를 해봤지만 정말 어렵더군요. 장도가 이렇게 무서운 칼로 인식돼 있다 보니 선물하기를 망설이는 사람도 많습니다. 민간에서 장도를 찾는 사람이 사라진 건 이런 이유도 크다고 봅니다. 물론 전통 장도를 계승해나가는 데도 어려움으로 작용합니다.” 임 장인의 하소연이다.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상황은 전혀 달랐다. 장도는 1960년대 후반까지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널리 사용됐다. 그는 “연필을 깎거나, 과일을 자르거나, 수염을 다듬을 때도 장도를 사용했다. 스님들은 품에 장도를 넣고 다니며 머리를 밀 때도 썼다”고 설명했다. 과거 가장 많이 만든 장도는 새 을(乙) 자와 비슷하게 생긴 새을자도였다. 진주에서 장도를 만들어 대구·대전의 관광지나 경주 수학여행지에서 팔면 수입이 꽤 괜찮았다고 한다. 경남에선 한 마을 전체가 장도 제작으로 생계를 이었던 사례도 있다.

장도의 위상은 1960년대 후반 공장들이 칼을 대량 생산하면서 꺾인다. 임 장인은 작업장 한 켠에서 접이식 커터칼을 꺼내보이며 “간단한 장도라도 하나를 만들어내는 데 평균 2, 3일 걸린다. 반면 커터칼은 순식간에 찍혀나온다”며 “가격도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아무리 공임을 낮추더라도 장도가 1000원이라면 커터칼은 100원이다. 더 가볍고 보관도 편리하다. 애초 경쟁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실용성을 띠던 전통 공예품이 순식간에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난 셈이다.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문화재 예·기능 영역까지 제한을 둔 것도 악영향을 끼쳤다. “내가 만든 장도 가격은 개당 수십만~수백만 원대입니다. 이전엔 경남도지사가 해외를 방문할 때 장도를 선물용으로 구입하곤 했는데 김영란법이 제정되면서 ‘관청 납품’은 완전히 끊겼어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제자 키우는 일도 쉽지 않다. 현재 임 장인의 전승 계보에는 이수자 한 명밖에 없다. 임 장인은 “장도의 매력에 빠져 배우고 싶다는 사람은 꽤 있다. 대부분 직장인이다”면서 “코로나19로 전수관이 2년 넘게 폐쇄되다시피 했다. 계속 배움에 뜻을 둘 후학이 얼마나 되는지 분명치 않다”고 말했다.

장도를 만들 때 느끼는 재미는 전통을 이어나가는 중요한 동력이다. 젊었을 적엔 쪼이질(새가 모이를 쪼듯 망치로 정을 미세하게 쳐 금속 위에 문양을 새기는 장도 기법)에 희열을 느껴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요즘은 세태 변화로 인해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제약이 크다. “대장간이라는 건 역사책에나 등장할 뿐 실생활에서는 볼 수 없게 됐어요. 장도장이라면 세공과 주물 작업에 모두 능해야 하는데 쉽지 않지요. 풀무를 다루는 일은 대장간에서 10년은 배워야 할 수 있는데 가르칠 여건이 잘 안 돼요.” 이런 탓에 임 장인의 제자들은 장도에서 ‘날’ 기능은 제쳐둔 채 칼자루와 칼집을 세공하는 것만을 제한적으로 배우고 있다.

올해는 임 장인에게 각별한 해다. 조선 임금이 지니는 장도는 인월도(寅月刀) 또는 사인검(四寅劍)이라 불렸다. 모두 호랑이를 상징하는 인(寅) 자가 들어간다. 12년에 한 번 4개의 인시(호랑이를 상징하는 해·월·일·시)가 겹칠 때 장인은 오직 임금만을 위해 벼린 날로 장도 등 무구를 만들었다. 호랑이의 영험성이 날에 깃들어 주군을 지켜주길 바라는 의미다. 임금 아닌 다른 자가 4인시에 만들어진 칼을 지니면 그 자체로 반역. 올해 4인시는 지난 2월 18일 새벽 3시~5시 사이였다. 임 장도장 또한 이날 정성을 다해 날을 가다듬었다.

이 장도가 제 주인을 만날 수 있을까. 임 장인은 “원래 칼날을 만들고 나면 ‘군자도’나 ‘일편심’이라는 글귀를 날에 새겨 넣었다. 요즈음은 ‘군자도’는 새기지 않는다. 군자라 할 만한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라며 웃었다. “장도가 쓰임새를 잃고 뒷전으로 밀려난 듯 보이는 것은 사실이에요. 그래도 선조의 기술을 후대에 올바르게 물려주는 게 내 사명입니다. 언젠가 인월도나 군자도를 자격 있는 이의 손에 쥐여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어요.”

※ 제작지원 BNK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립 인간극장] <9> 장도 - 임장식 장인 : 국제신문 (kookje.co.kr)

 

[국립 인간극장] <8> 붓 - 김종춘 모필장

수백 번 빗질로 날카로운 촉끝 … 이런 붓이어야 칼 이긴다

  • 김민주 기자 min87@kookje.co.kr, 이우정 PD
  •  |   입력 : 2022-03-15 19:49:17
  •  |   본지 13면

- 서예나 서화의 도구 뛰어넘어

- 기술발전에도 대체불가한 붓
- 만드는 필장과 유통하는 필상
- 과거 고급기술자로 대우 받아

- 울산시 무형문화재 3호 김 씨
- 10대 때부터 평생을 바친 장인
- 1m 산마필 수천만 원 호가도

- “1950년대 내놓는 족족 팔려
- 수요 줄며 배우려는 이 없어
- 기력 따를 때까지 이어갈 것”

필화(筆禍)의 사전적 의미는 ‘붓으로 쓴 글 때문에 일어난 사단’이다. 붓은 단순히 서예나 서화의 도구를 뛰어넘어 하나의 선비정신이자 권력에 대한 항거의 상징으로 인식됐다. 예나 지금이나 붓은 쓰임에 따라 누군가를 찌르는 칼이기도 하고 때로는 입신양명의 수단이기도 했다.
 
                                          김종춘 모필장이 붓을 만들고 있다. 이우정 PD
 
붓은 누구나 한 번쯤 쥐어 봤음직한 물건이다. 붓은 다른 필기구와는 구분되는 대체 불가성을 갖고 있다. 펜이나 연필·크레파스·파스텔로는 대신할 수 없는 붓만의 독특한 쓰임새 말이다. 한없이 섬세하면서 때로는 화폭을 찢어발길 듯 거칠다. 기술이 발달해 글쓰기 도구가 PC 자판으로 대체된 요즘도 붓은 뒷방으로 밀려나지 않고 고유의 영역을 공고히 했다.

붓의 연원은 기원전 2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근거는 중국 신석기 시대와 상주·서주시대 유적인 앙소 채색토기. 이 토기에서는 ‘붓이 아닌 다른 것으로 새겼다고 볼 수 없는’ 문양들이 발견된다. 붓의 ‘대체 불가’가 논거인 셈이다.

당시 붓도 현재처럼 동물의 털을 모아(촉) 나무관(붓대)에 고정시키는 방식으로 제작됐다. 좋은 붓은 ‘생명선’이라고도 불리는 촉 끝이 날카로워야 한다. 붓모는 굽은 털 없이 길이가 가지런해야 한다. 탄력이 있으면서도 유연해야 먹을 균일하게 뿌릴 수 있다. 그러면서도 모난 데 없이 둥글며, 낱낱의 털은 곧으면서 수명이 길어야 한다.

국내에선 족제비 꼬리털, 소·양의 겨드랑이털, 산토끼털 등이 이런 까다로운 조건을 맞출 수 있는 붓모로 사용돼 왔다. 털을 삶아 기름기를 뺀 후 빗질로 가다듬기를 수백 차례, 정돈된 털을 촉으로 모아 붓대에 꽂는다.
 
 
                                               김종춘 모필장이 제작한 산마필. 크리애드 제공

울산시 무형문화재 3호 김종춘(80) 모필장은 10대 시절부터 전통기법을 지켜 붓을 만들어온 장인이다. 김 모필장의 울산 작업장을 찾아 70년 가까운 세월을 붓 만드는 데 바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김 모필장은 6·25 전쟁이 끝난 16세 나이에 경남 밀양에서 붓으로 일가를 일군 김형찬 선생 필방에서 붓을 배웠다. “스승의 필방에서 일하던 기술자가 20명, 그 기술자마다 딸린 조수가 1, 2명씩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시다’라고 표현하던 조수에게 정식 월급은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한 달에 하루 꼴로 휴가를 주며 그때 쓸 수 있는 용돈 정도를 챙겨 줬다고 한다.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붓 만드는 일을 배운 지 3년 만에 김 모필장은 스승으로부터 호비칼·치계(치게)·작죽칼(치죽칼)을 받을 수 있었다. 호비칼은 나무의 속을 파내는 데 쓰이는 칼이다. 치계는 붓모를 빗어 정돈하는 데 필요하다. 작죽칼(치죽칼)은 붓대가 되는 나무를 매끈하게 다듬을 때 사용된다. 붓을 만드는 데 필요한 3가지 핵심 도구이자 스승이 ‘필장’으로 인정한 제자에게 하사하는 선물이기도 하다.
 
                                             김종춘 모필장이 제작한 대형 산마필. 크리애드 제공

이후 김 모필장의 자취를 따라가보면 근대와 현대를 잇는 붓 제작·유통의 궤적을 엿볼 수 있다. 이름 높은 스승에게서 칼과 치계를 하사받은 필장이라고 해서 곧장 자신의 필방을 차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신 어딜 가든 굶어죽지 않는 고급 기술자로 대우받았다. 이들 필장을 모셔다가 붓을 만들게 하고, 이 붓을 직접 유통하던 이들이 필상(筆商)이다.

김 모필장이 스승의 그늘을 떠나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이는 대전 필상 박원서 씨였다. 그는 박 씨의 집에 3개월간 머물며 붓을 만들었다. 박 씨는 초등학교 문방구와 필방에 이를 내다 팔았다. 김 모필장은 “1950년대는 아직 연필·펜보다는 붓으로 글자를 쓰는 이가 더 많던 시절이다. 내놓는 족족 팔려나가는 재미에 정신 없이 붓을 만들어내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고급기술을 배우려 수소문하던 김 모필장은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1961년 광주로 흘러든다. 이곳에서 그는 광주 ‘진다리붓’의 대가 안종선 선생의 문하에 들어 기술을 익힌다. 진다리붓은 흰염소의 겨드랑이털로 제작하는데, 수컷의 털만을 사용하며 시기적으로는 매년 1~3월 사이 모은 털을 최상품으로 친다. 황토흙과 쌀겨를 섞어 먹인 오죽(烏竹)을 짚으로 문지른 뒤 햇볕에 2, 3개월 말려 한 토막씩 자른 것을 붓대로 사용한다.

밀양과 광주의 명인들로부터 붓을 배운 김 모필장은 이후 광주와 밀양, 대구 등지에서 제작을 이어가며 이름을 떨쳤다. 1968년 대구필상 이쾌돈·우홍철 씨와의 만남을 계기로 서울 인사동 대신당필방에 붓을 납품하기 시작했다. 김 모필장은 “서예나 회화를 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인사동 대신당필방은 명성이 드높은 곳이었다”고 설명했다. “결혼하면서 이듬해 서울에 정착했어요. 서울의 방 한칸 월세가 1500원가량이던 때인데, 그때 만든 굵기 18㎜ 붓 한 필이 2만 원에 팔려 나갔습니다.” 당시 좋은 붓에 대한 수요와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80년대 들어 붓의 원료가 되는 짐승 털을 구하기 점차 어려워졌다. 김 모필장도 그동안 사용되지 않던 털을 이용해 붓을 만드는 궁리를 시작한다. 그렇게 찾은 게 말의 꼬리털이다. 그는 “호주산과 내몽골산 말 꼬리털을 가져다 산마필을 만들었다. 당시 돈 100만 원을 주고 원료를 구해다 인사동에 내놓으니 1000만 원 수익이 났다”고 했다. 산마필은 그대로 그의 ‘시그니처’ 붓이 됐다. 그가 만들어내는 길이 1m 남짓 대형 산마필은 무게가 8㎏, 가격은 수천만 원을 호가한다.
 
 
                                                                     김종춘 모필장

그럼에도 김 모필장은 붓 만드는 일에 대해 “배우러 오는 이가 없다. 배우는 것 자체가 힘들 뿐더러 적자를 면하기 어렵다는 걸 모두가 아는 모양”이라며 씁쓸해했다. 고급 교양이 된 서예·회화 애호가들 사이에선 여전히 김 모필장의 붓을 찾는 이들이 있지만, 일반 수요가 크게 줄어 ‘명장’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을 버틸 이가 없다는 의미다.

울산시 모필장의 전승 계보에 이름을 걸친 이들도 김 모필장의 가족들로 한정된다. 문화재 보유자 아래에는 전수교육사·이수자·전수장학생 등 배분이 있는데 실제 김 모필장의 부인 박금식 씨와 딸 김근애 씨만 전수장학생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울산시에 따르면 이들은 2016년부터 5년간 전수장학생만 지냈을 뿐 이수자로는 승급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김 모필장은 문화재 보유자이면서도 자신의 기술을 펼칠 수 있는 ‘사업거리’를 늘 고민한다. 그는 “대학 연구팀과 함께 서예에 쓰이는 먹을 기계적으로 생산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20년 쯤 전부터는 신생아의 배냇머리를 이용해 붓을 만들어주는 소일을 했는데 액자 등을 포함해 한 필당 20만 원 안팎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며 “1980년대에도 붓의 위기가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서예붐이 전국에 불면서 한동안 호황이 이어졌다. 전통은 이어지는 것 자체로도 가치가 있지만, 볕이 들 것 같지 않은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다만 한평생을 붓 만드는 일에 바친 만큼, 기력이 따를 때까지는 붓 만드는 일을 이어갈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새겨넣듯 말했다.


※ 제작지원 BNK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220316.22013003935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