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부산의 이야기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의술인 동산 김형기

 

삼일절 103주년(2022.3.1)을 맞이하여 사상출신으로 의술을 펴면서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동산 김형기선생을 소개합니다.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의술인 동산 김형기

 

학생대표들과 만세시위운동
3·1운동 주동자 지목돼 징역형
병원수입금, 독립운동자금 지원
 
동산 김형기
 

동산 김형기(1896∼1950 행불) 선생은 사상구 삼락동 낙동강 둔치에서 3남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천석꾼 부친(김욱권)은 개화 바람을 타고 만주에서 광산사업을 크게 벌이다가 실패하여 땅과 가산을 모두 잃고 양산 상북면으로 이사 간다.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사상명진학교(지금의 사상초등학교)와 동래고등보통학교(동래고)를 졸업한 선생은, 16세 때 결혼한 처가의 도움으로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의대)에 진학한다. 4학년 때 당시 유일한 학생조직인 재경유학생회 회장을 맡으면서 민족대표 33인 중 박희도(朴熙道)와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해외유학생들의 독립운동 등에 관한 정세를 전해 듣고 학생대표들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조선독립선언서'를 지역대표와 학교대표에게 배포하였다.

 
인물감시카드에 기록된 동산김형기
 

기미년 3월 1일, 탑동 파고다공원 앞에 모인 수천의 군중 앞에서 불참한 민족대표 33인을 대신하여 학생대표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재판 판결 등의 기록) 군중과 함께 거리로 뛰쳐나와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6일째 되는 날 시위 주동자로 지목된 김형기를 비롯한 학생 74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1년 6개월의 옥살이를 마치고 경성의전을 졸업한 선생은 호를 동산(東山)이라 하고, 이후부터 김형기가 아닌 김동산으로 불려진다. 의사 김동산은 울산에서 공의를 시작으로 기장 대변에서 `동산의원'을 개원한다. 1926년 중구 영주동 봉래초등학교 북쪽의 3층 목조건물을 빌려 병원을 옮겨온다. 일제 강점기 김형기의 동산의원은 최천택, 박희창, 이기주, 오상순 등 항일활동을 하던 인물들이 자주 출입하는 거점이 되었다. 동산 선생은 병원 수입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비밀리 지원하는 등 항일 운동을 암암리에 도우고 있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동산의원은 대청동 남일초등학교(지금의 광일초등) 정문 앞 동쪽으로 옮긴다.

해방 후 동산 선생은 미군정청 경남고문회의 고문으로 선임되고, 조국건국준비위원회 경남본부가 귀환동포를 구호하기 위해 조직한 귀환동포 경남구호회 회장을 맡아 구호활동을 전개하였다. 해방된 해 12월엔 동광동 3가 26번지(백산기념관 건너편)에 〈대중신문〉을 창간하여 발행인으로 언론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대중신문〉의 논지는 중도노선에 속하였으나, 좌우대결이 극심했던 당시의 정치상황에서 사찰당국으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감시를 받기도 하였다. 결국 "향후 일체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며 대중신문에서 손을 떼고 본분인 의사로서만 충실할 것"이라는 성명서를 신문에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6·25가 발발하자 동산 선생은 전쟁 중 좌익계로 분리되어 1950년 8월 부평동의 사촌동생 집에서 체포되어 정보기관에 연행되고 만다. `김두봉과의 내외종간'이라는 터무니없는 이유를 빌미 삼아 빨갱이라는 굴레를 씌워 영문도 모르게 잡혀갔고, 그들의 손에 의하여 어디서 무슨 죄목도 모른 체 죽임을 당하고 만다. 그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게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은 `동산' 이름만 들어도 빨갱이로 몰리는 것이 두려워 돌아앉아 말문조차 닫으니 동산 김형기란 이름은 기억 속에서 지워지고 사라져 버렸다.

 
 
영주동에서 개원한 동산의원 
 
낙동강수해 때 엄궁에서 수재민을 치료하는 동산김형기(왼쪽 사진)을 보도한 1934년 7월28일자 동아일보 기사
미군정 경남도지사고문단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 동산김형기)

해방 후 동산 선생은 미군정청 경남고문회의 고문으로 선임되고, 조국건국준비위원회 경남본부가 귀환동포를 구호하기 위해 조직한 귀환동포 경남구호회 회장을 맡아 구호활동을 전개하였다. 해방된 해 12월엔 동광동 3가 26번지(백산기념관 건너편)에 〈대중신문〉을 창간하여 발행인으로 언론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대중신문〉의 논지는 중도노선에 속하였으나, 좌우대결이 극심했던 당시의 정치상황에서 사찰당국으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감시를 받기도 하였다. 결국 "향후 일체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며 대중신문에서 손을 떼고 본분인 의사로서만 충실할 것"이라는 성명서를 신문에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6·25가 발발하자 동산 선생은 전쟁 중 좌익계로 분리되어 1950년 8월 부평동의 사촌동생 집에서 체포되어 정보기관에 연행되고 만다. `김두봉과의 내외종간'이라는 터무니없는 이유를 빌미 삼아 빨갱이라는 굴레를 씌워 영문도 모르게 잡혀갔고, 그들의 손에 의하여 어디서 무슨 죄목도 모른 체 죽임을 당하고 만다. 그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게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은 `동산' 이름만 들어도 빨갱이로 몰리는 것이 두려워 돌아앉아 말문조차 닫으니 동산 김형기란 이름은 기억 속에서 지워지고 사라져 버렸다.

 

함께 연행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부산 지역의 항일독립운동가 최천택(崔天澤)은 "빨갱이라 자백하라고 강요당하던 동산이 가혹한 고문을 못 이겨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다"고 그의 자서전에 기록하여 동산의 마지막을 증언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은 당시에 함께 붙잡혀간 요산 김정한(樂山 金廷漢)의 기록에도 찾아 볼 수 있다.

 

동산 김형기의 항일투쟁 사실은 31년 전 우연히 발굴된다. 1989년 서울에 살고 있던 동산 선생의 증손녀(김지경·당시 20세)가 천안독립기념관에서 자신과 같은 본적을 가진 독립투사 김형기란 이름을 발견하면서다. 이 같은 사실은 곧 종친회에 알려졌고 종친회는 정부기록보관소에서 동산의 재판판결문까지 찾아내게 되었다. 이 기록을 근거로 1990년 광복절에는 건국훈장애족장을 추서 받는다. 사후 54년 만에 나라에서 동산 김형기 선생의 독립운동과 활동을 증명 받는 순간이었다. 그의 시신 없는 가묘는 경남 양산시 하북면 성천마을 집안 선산에 모셔졌다. 1998년엔 사상구 모라동 김녕김씨 유두문중 재실 유원재 정원에 `애국지사 동산 김형기 선생비'를 세웠다. 대한광복회와 낙동문화원, 김녕김씨 유두문중이 함께 세운 기념비이다. 

 
첫 시작한 2017년 삼일절 추모행사
삼일절 100주년 추모행사

사상생활사박물관과 지역민간단체(사상알리미)와 유두문중은 2017년 삼일절 부터 `애국지사 동산 김형기 선생비'를 참배, 헌화하고 동산 선생의 정신을 기리는 조촐한 추모행사를 시작하였다. 이후 삼일절 100주년을 맞은 2019년 삼일절에는 120여명의 구민이 참여하여 동산선생을 비롯 오택, 황용주, 정호중 등 사상출신의 독립운동가를 추모하고 애도하는 행사를 거행하였다. 삼일절 102주년(2021.3.1)에는 코로나-19의 상황으로 소수의 인원만 참여한 가운데 헌화, 추모행사를 가진바 있다. 삼일절 103주년이 되는 이번 삼일절(2022.3.1) 역시 코로나-19로 인해 작년과 같이 간소한 추모식을 할 예정이다.

 

102주년 추모행사 때 헌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