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부에 도착한 일본 사신 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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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명칭 : 東萊府使接倭使圖,동래부사접왜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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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 한국 -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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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질 : 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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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문화예술 - 서화 - 회화 - 일반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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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 : 세로 85cm, 가로 46cm
임진왜란으로 단절된 한∙일관계는 1609년 6월에 체결한 기유약조(己酉約條)으로 다시 회복되었으나, 이 때부터 조선에 오는 일본 사절단 일행은 이전처럼 상경하여 왕을 배알하지 못하고 초량왜관에서 왕의 전패(殿牌: ′전′자를 새겨 세운 나무패)에 나아가 절을 하는 것으로 대신하게 되었다. 이 열 폭 병풍은 조선에 온 일본 사절을 대접하기 위하여 동래부사가 초량의 왜관으로 길을 나서는 장면과 왜관 객사에서 사절 일행이 절하는 광경 등을 시간적 구성에 따라 면을 나누어 그린 것이다.
즉 첫째 폭에서 일곱째 폭까지는 윤산(輪山) 아래 자리한 동래성으로부터 동래부사가 관원들을 앞세우고 초량왜관 설문(設門)으로 들어가는 행렬 장면을 묘사하였고, 여덟째 폭은 일본사절이 초량객사(草梁客舍 ) 뜰 아래에서 왕의 전패에 예를 올리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아홉째 폭에는 조선 역관(譯官: 통역을 맡아보는 관리)들의 숙소인 성신당(誠信堂)과 빈일헌(賓日軒)이 그려져 있으며, 마지막 열째 폭은 연향대청(宴享大廳)에서의 연회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전체적인 그림의 시점은 부감법(俯瞰法)에 따라 정면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도를 취하고 있으며 산과 주요 건물, 지명 등이 쓰여져 있어 당시 동래지역의 지도를 보는 듯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동래부사 일행이 초량왜관으로 나설 때 동래읍성 남문을 나와 행차를 시작하였는데, 첫째폭에서는 동래읍성을 묘사하였다.
동래읍성의 둘레는 1,962m, 높이 0.5~3m이며, 넓이는 103,647㎡이다. 삼한시대에 건립되었으나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 사이에 수축(修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을 위시해 군·관민이 함께 장렬한 전투를 벌였던 최대의 격전지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어 있던 것을 1731년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이전보다 훨씬 큰 규모로 성을 쌓았는데, 이 성이 현재 그 흔적으로 남아 있는 읍성의 기원이다.
읍성에는 동·서·남문과 암문(暗門)의 4개 문이 있고 각 문에는 문루(門樓)가 있었는데, 동문을 지희루(志喜樓), 서문을 심성루(心成樓), 남문을 무우루(無憂樓), 암문을 은일루(隱一樓)라 하였다.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는 익성(翼城)을 두었고 나머지 3개 문에도 옹성을 설치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부산진성(釜山鎭城)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관방조(關防條)〉를 보면 둘레 1,689자, 높이 13자의 견고한 성으로 해수(海水)가 남문(南門) 부근까지 와 닿았다고 한다. 한때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도 이곳에 있었으며, 울산 개운포(開雲浦)로 옮긴 뒤 첨절제사(僉節制使)가 있었다. 범천증산성(凡千甑山城)을 쌓을 때 부산진성의 석재를 이용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영가대(永嘉臺)는 일본에 파견되었던 조선통신사행과 관련이 깊은 부산의 명소이다. 광해군 6년(1614년)에 당시 경상도 관찰사 권반은 부산진성 서문 밖의 호안이 얕고 좁아 새로 선착장을 만들고자 이때 바다에서 퍼 올린 흙이 쌓여 작은 언덕이 생겼고 이곳에 나무를 심고 정자를 만들었다. 이 정자가 바로 永嘉臺다. 영가대란 이름은 권반의 고향이 안동인데, 이 안동의 옛 이름이 永嘉(영가)였다. 영가란 뜻은 ‘두(二) 물(水)이 만나서 아름다운(嘉) 경관을 자아낸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二水最嘉(이수최가 - 두 물이 만 나서 만들어 내는 가장 아름다운 곳)를 뜻하는 말이다. 1624년 일본 사절의 접대를 위해 조정에서 선위사로 파견된 李敏求(이민구)가 성밖에 축조된 대를 보고 감탄하여 이를 쌓은 권반의 관향을 따라 ‘영가대’라 호칭한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가마를 타고 가는 이가 동래부사고 그 뒤에 말을 탄 인물이 부산 첨사이다. 동래부사는 지방 행정 조직인 동래부의 수령으로 왜관을 관할하였다. 부산 첨사는 왜관에서 가장 가까운 진인 부산진을 책임졌던 종3품 무관이다. 효종 2년 10월 11일 [승정원일기]에 보면, “동래의 고을됨은 오직 일본과 접해 있음에 있다(東萊爲邑 專屬接倭)”고 했을 만큼 동래는 조선후기 대일본 외교의 유일한 창구이자 변방을 지키는 방어기지로서 특별한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설문은 이제 이곳을 지나면 머지 않아 왜관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문이다. 왜관으로 가는 사람들을 1차적으로 검사하는 문이었다.
초량객사에서 일본사신들이 엎드려 숙배례하는 모습이다.
조선인 통역관의 집무소가 보인다. 이들 건물 중 대표적인 건물이 왼쪽에 있는 성신당이고, 오른쪽 건물은 숙소인 빈일헌이다.
연향대청에서 조선측에서 베푸는 연회가 끝나면, 일본인은 연회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왜관 안으로 조선측 관리들을 초청해서 연회를 이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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