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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이야기

피란수도 부산을 이야기한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과 대담프로 부산BBS불교방송 박찬민가자가 진행하는 ‘부산역사'S Talker’ 대담프로를 소개한다.

주1회  피란수도를 배경으로 8월3일 현재 총 14회를 아래와 같이 진행하였다. 

피란수도 부산을 이야기한다(7편)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부산역사'S Talker) "피란수도 부산 시절 용두산 화재에 국보급 문화재도 소실"
박찬민 기자 | 승인 2020.06.15 09:05
● 출 연 :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
● 진 행 : 박찬민 BBS 기자



부산BBS가 진행하는 ‘부산역사'S Talker’ 시간입니다. 피란수도 시절 부산이야기를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이 시간은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님과 함께 합니다. 김한근 소장님 안녕하세요?


피란수도 시절과 관련한 부산지역 마을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난시간에 용두산공원의 피란민 판자촌 시절의 에피소드 몇가지를 소개하셨는데 오늘은 어디서 부터 이야기를 해 볼까요?
-오늘은 피란시절 용두산공원에서 발생했던 안타까운 이야기 한가지 전해드리고 아미동 피란민부락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문화체육부 산하에 국립국악원이 있습니다. 이 기관은 신라시대부터 전승되어 온 궁중음악기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데 신라에서 고려, 조선, 대한제국시대를 거치면서 시대에 맞는 명칭을 사용하다 일제강점기 이왕직아악부로 이어져 왔습니다. 해방후 구궁중아악기관이 해체된 후 한때 구왕궁아악부로 존속했는데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해인 1950년 1월에 국립국악원이라는 직제가 법으로 공포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정식 개원을 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피란수도 부산 시절인 1951년 4월 10일 용두산공원 자락에 국립국악원을 정식 개원했습니다. 당시 국립국악원이 개원되었던 장소가 현재 광복로에서 용두산으로 오르는 에스컬레이터 끝자락 조금 못가서 오른쪽에 작은 운동 쉼터가 있는 곳입니다. 앞시간에 이곳 석축에 용두산 대화재 흔적을 볼 수 있다고 소개드렸던 그 장소입니다.

1903년 복병산 북쪽 자락의 일본인 묘지와 용두산(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이곳은 일제시기 부산도서관이 개관한 장소인데 한국전쟁 시기 부산도서관은 동광동 옛 부산부청으로 옮겨가고 이 옛 도서관 건물에 국립국악원을 개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용두산 자락의 국립국악원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역사적 비극이 발생합니다. 한국전쟁이 갑자기 발발하면서 문화재들도 부산으로 이전해 왔는데 그 가운데서 창덕궁에 소장하고 있던 왕실 유물들은 국립국악원 창고로 소개해서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구황실에서 임금님이 사용하시던 국보적인 서적과 여러가지 물품, 장식품, 그리고 역대 조선왕 가운데 12분의 어진이 함께 보관되어 있었지요. 1953년 8월 정부가 서울로 환도했지만 왕실 유물들을 보관할 공간이 정비가 안되었던지 이 왕실 유물들은 그때까지 부산에 남겨져 있었답니다.

지난 시간에 54년 12월 10일 용두산대화재가 발생하여 일대 피란민 부락 1천 여채를 소실시켰다고 소개드렸는데 당시 이 화재에서는 왕실 유물들은 손상을 입지 않았답니다. 이 용두산대화재 이후 화재민 이주 대책을 세우는 동안 일부 피란민들이 화재가 발생했던 옛 집터에 다시 판자집을 조성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보름만인 12월 26일 새벽에 용두산 남쪽 언덕의 판자촌에서 불이 나서 판자집 약 600호가 소실됩니다. 이 화재로 국립국악원 창고에 보관 중이던 조선왕조 12명의 어진영 가운데 9명의 임금 어진과 궁중일기 등 약 4천여 점 중 3천 5백여 점이 화마에 소실되는 비극이 발생한 겁니다.
한국전쟁 피란시기 많은 대형 화재가 발생해서 인명 피해도 많았지만 이런 국보급 문화재 소실이라는 비극도 발생했습니다. 왕실 어진영은 전주 풍남동에 위치한 경기전에 소장되어 있는데 현재 태조, 세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순종 임금의 어진 만 봉안되어 있습니다.

1910년대 초 부민산에서 바라본 서구와 중구(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다음은 아미동 비석문화마을로 이어진다고 하셨는데 ‘비석문화마을’이라는 표현이 어딘가 익숙치 않은데 어떤 곳인가요?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은 서구 아미동 사하구 감천동과 이웃한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약 10년 전부터 감천문화마을이 부산 도시투어의 핵심 공간으로 떠오르면서 이곳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이 과거 일본인 공동 납골묘 자리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독특한 공간의 주거라는 것에 주목을 받게 됩니다. 수 년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수소문하여 찾는 곳이 되면서 문화마을이라는 명칭을 덧붙인 것입니다.

아미동은 조선후기 동래군 사천면 구 초량리에서 1866년 즉 개항 10년전 사하면 부민리에 속했다가 30년뒤인 1896년 동래군에서 부산부로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부민동 일부를 곡정(谷町) 1, 2정목으로 편성했다가 해방 후 일제식 동명 개정 때 아미동으로 바꾸었다 합니다. 공식 기록은 이렇게 나오는데 이미 1924년 발행된 지도에 아미동이라는 기록이 나타나 있어 오래 전부터 토속적으로 부르던 지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1910년대 토성동 현 서구청 뒤에서 바라본 아미동모습(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일제강점기 곡정이라는 지명을 지닐 정도로 아미동은 부산대학병원이 자리한 주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산골짝에 해당하는 지형입니다. 부산대학병원 뒤쪽에 있는 아미파출소에서 아미초등학교 앞을 지나 산상교회 앞을 거쳐서 감천문화마을로 가는 도로가 조선시대 옛길인데 산비탈이 매우 심해서 산자락 길을 가면서 옆으로 서너번 꺽이는 형태로 도로가 나 있습니다. 산상교회 앞에 감천문화마을 입구에 이르는 곳은 아미고개라 불렀던 곳입니다. 이 길은 과거 조선시대 동래에서 부산진을 거쳐 다대진으로 가던 지름길로 이 일대에서 용두산 주변 원도심을 바라보는 풍광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다대진으로 가는 길목이고, 원도심을 한 눈에 조망되는 공간이라하셨는데 이곳에 일본인 공동 납골묘를 조성하게된 된 이유가 있는가요?
-1876년 부산항이 근대 개항장이 되면서 과거 초량왜관 지역이었던 광복동과 용두산 공원 일대가 일본전관거류지가 됩니다. 이후 많은 일본인들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고 들어와서는 한반도를 거점으로 이웃한 만주까지 넘나들면서 농업, 어업, 공업을 비롯해서 금융과 서비스업까지 전 분야에 걸쳐 투자하면서 나중에는 가족들까지 데리고 와서 눌러 앉고 살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치 그들의 땅처럼 여기게 되고 결국 이곳에서 사망한 사람들이 그들의 생활 거점 인근에 묘를 조성하기 시작합니다. 초기에는 조선 정부와 교섭 끝에 대청동과 동광동에 연이어 있는 복병산 남쪽 자락에 공동묘지를 조성했는데 차츰 일본인 전관거류지를 확대하면서 1905년부터 대청로를 넓히는 등 시가지 정비에 착수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청로 주변 복병산 자락을 절개해서 도로를 넓히는 공사를 착수하면서 그들의 공동묘지를 아미동으로 옮기기 시작한 것이 1906년 입니다.



아미동과 곡정이 나타나 있는 1924년 발행 부산지도 부분(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그런데 왜 이곳 아미동을 택했는가 인데 당시 이곳은 다대포로 가는 길목이어서 도로가 확보되어 있고. 게다가 아미동 일대는 부산의 3대 빈촌지역 가운데 하나였답니다. 조선 정부와 합의하에 진행되는 일이라는 것을 표면에 내세우고는 힘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니 집단 항의를 받을 염려가 적었던 것이지요. 게다가 묘지를 조성한 곳에서 내려다 보면 죽은 자가 그들이 일구어 놓은 부산이라는 도시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지요. 그러니 후손들 입장에서는 먼저 이곳을 개척한 어른들, 당신들이 일구어 놓은 곳을 마치 감상하듯 내려다 보면서 후손들을 격려해 달라는 의미였던 거라고 봅니다.

아미동에 화장장까지 건설했다면서요?
-1900년대 초에 부산에 화장장이 세 곳 있었습니다. 좌천동 증산 남쪽 기슭, 영도 영선동 삼거리, 그리고 아미동에. 이 아미동 화장장은 지금 중구 신창동 대각사 자리에 들어서 있던 일본불교 동본원사 부산별원이 사설로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자리를 지금 아미동 은천교회 주변으로 보고 있습니다.

박찬민 기자 highha@bbsi.co.kr
<저작권자 © BBS불교방송,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상은 7편(2020.6.15)의 대담 내용을 소개한 것으로 이하 아래의 제목을 클릭하면 BBS불교방송에서 올린 원본 기사를 읽을 수 있다.
피란수도 부산을 이야기한다(14편) 박찬민 기자 2020-08-03 10:08
피란수도 부산을 이야기한다(13편) 박찬민 기자 2020-07-27 09:42
피란수도 부산을 이야기한다(12편) 박찬민 기자 2020-07-20 09:00
피란수도 부산을 이야기한다(11편) 박찬민 기자 2020-07-13 09:00
피란수도 부산을 이야기한다(10편) 박찬민 기자 2020-07-06 09:47
 
피란수도 부산을 이야기한다(9편) 박찬민 기자 2020-06-29 09:00
피란수도 부산을 이야기한다(8편) 박찬민 기자 2020-06-22 09:00
피란수도 부산을 이야기한다(7편) 박찬민 기자 2020-06-15 09:05
피란수도 부산을 이야기한다(6편) 박찬민 기자 2020-06-08 09:00
피란수도 부산을 이야기한다(5편) 박찬민 기자 2020-06-01 09:00
 
피란수도 부산을 이야기한다(4편) 박찬민 기자 2020-05-25 09:00
피란수도 부산을 이야기한다(3편) 박찬민 기자 2020-05-18 09:00
피란수도 부산을 이야기한다(2편) 박찬민 기자 2020-05-11 09:34
피란수도 부산을 이야기한다(1편) 박찬민 기자 2020-05-04 09:23

 

<< 관련 기사>>

부산의 화장장 변천 현황

 

 ○ 아미동 화장장

  부산항이 개항되면서 일본인들은 지금의 중구와 서구를 중심으로 정착하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부산 각처에 흩어져 있던 공동묘지를 일본인 전관거류지 외곽지대였던 부산부 곡정(谷町) 아미산으로 옮겼다. 지금의 부산 서구 아미동 산 19번지 감천고개에서 산상교회까지 이어지는 감천고갯길 일대는 일제강점기 시절 공동묘지가 있던 곳이다

  부산부에서는 부내에 흩어져 있는 사영(私營) 화장장(火葬場)인 영도․부산진․아미산․대신리의 화장설비가 불완전하여, 1929년(소화 4) 1월 곡정(谷町) 2정목(지금의 아미동 천주교아파트 자리)에 부영(府營) 화장장을 신설하였다.

  당시 화장장 부지는 968평3합, 건물은 136평6합이며, 화장시설은 무연무취특허일신식 2기의 설비로 1시간내외에 완전소각 가능하였다 한다. 1933년(소화 8)의 화장장 이용횟수가 1,480회에 달하였다.

  부산부의 화장장 신설에 대하여 곡정(谷町) 주민들의 화장장 이전과 관련한  반대는 오늘날과 같이 지역 주민들에게는 심각한 문제로 받아드려졌던 것 같다. 1928년 1월 28일자『동아일보』에 “부산 곡적 화장장 문제”에 대한 기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부산 곡정(현 아미동) 한 복판에 화장장을 설치하기로 부협의회에서 결정하여 도지사의 허가를 얻게 되었음으로 그 부근주민은 즉시 반대운동을 일으키어 열렬히 활동 중이라 함은 기 보도한 바 있다. 비단 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인측에서도 이 운동에 참가하야 어디까지 그 화장장 설치를 중지시키고야 말 기세를 보이는데 전번 곡성 주민대표가 상경하야 정무총감을 방문 진정한 결과 부협의회에 다시 협의하야 그래도 듯지 안커든 다시오라는 회답이 있었음으로 위원들은 부산에 온 후 방금 수구(水口)신임경남지사와 부산부윤을 방문하고 교섭중이라 하며 곡정민측에서는 불원간 화장장위치 반대 부민대회를 개최하고 더욱 반대의 기세를 놉힐터이라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화장장이 이곳 아미동으로 통합 이전한 이후 장례행렬이 날마다 줄을 잇고 화장장에서는 유족들의 곡성이 계속되면서 불에 타는 시체의 악취가 온 마을에 풍겼다. 그 이후 아미동이라 하면 화장막을 연상케 하여 마을의 발전에도 큰 지장을 가져왔다.

  당시 화장장 이전은 지금의 서구와 중구의 일본인 주거지 일대를 도시계획에 맞춰 효과적으로 개발하기 위해 방해가 되는 묘지와 화장장 등의 시설을 인근 외곽지역으로 한데 모은 것이다.

  이후 아미동 공동묘지에는 화장과 납골 문화가 발달한 일본인들의 가족묘와 개인묘가 빼곡히 들어섰다. 화장장의 연기가 아미골을 뒤덮었고, 제물로 차려진 음식은 까치들을 불러 모았다. 화장장 부근 지금의 '까치고개'란 이름도 이때 생겼다. 1945년 8월 15일 패망과 함께 일본인들은 황급히 귀국길에 올랐다. 수백여 기의 일본인 무덤은 그대로 남겨졌다. 5년 뒤 한국전쟁으로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아미동 공동묘지는 피난민들의 삶의 터전으로 탈바꿈했다.

  중구 보수동이나 영도구 청학동 등 다른 피난민 정착지역에 비해 아미동의 무덤 일대는 땅을 골라 천막만 치면 간단히 집을 지을 수 있었다. 가족묘 주위를 직사각형으로 두른 경계석과 외곽벽은 그 자체가 훌륭한 집벽이 됐다. 이곳 주민들에 의하면, "당시에는 마땅히 집을 지을 재료가 없어 주변에 널브러진 비석과 상석 수백여 개를 하나씩 가져다 건축자재로 썼다"면서 "생존을 위해서 무덤 위도 마다하지 않던 시절이었다"고 어려웠던 지난날을 회고했다.

  실제로 아미동 감천고갯길 주변 600여 세대가 살고 있는 16, 17, 19통 일대에는 지금도 골목과 집 주변 곳곳에서 비석과 상석 등 옛 일본인 무덤의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아미동 화장장은 부산의 변두리 지역이었던 지금의 부산진구 당감동으로 옮겨지면서 아미동은 도로가 확장과 더불어 발전을 이루기 시작했다.

 

 

 ○ 당감동 화장장

  당감동 화장장(堂甘洞 火葬場)은 1957년 12월 10일 서구 아미동 화장장이 부산진구 당감동 산 5번지에 택지를 확보하여 건평 172평의 철근콘크리트조 본건물 1동, 사체안치실 등 4동의 부속건물을 건립하고, 화장로 7기로 1일 최대 처리능력 56구의 처리시설을 갖추고, 1959년에 이전 업무를 개시하였다.

  화장장 이전할 당시의 주위는 민가도 없는 산언덕이었다. 그 산언덕에 화장장과 쇄골실, 대합실, 매점 등을 갖추고 있었다. 설치 당시는 인가를 멀리한 지역이었는데 도시인구의 팽창 따라 주택가가 산비탈을 따라 올라오게 되었다. 그러나 화장장 굴뚝의 연기는 쉴 날이 없었고, 화장장 길로는 장의차의 행렬이 계속되었다. 화장장 주위는 살이 타는 악취와 함께 곡성이 요란했다. 당감동이라면 화장장을 연상케 했다.

  당감동 화장장 일대는 도시의 팽창으로 계속 주택이 들어서서 시가지로 바뀌어갔다. 비록 화장장이 들어선 뒤에 형성된 주택가 주민이라 해도 날마다 보는 장의차에 혐오감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민들의 이전요구가 해를 거듭하는데 따라 거세어졌다.

  지금의 부산진구 당감4동 바로 위의 사거리에 극락교(極樂橋)라는 다리가 있었다. 이승에서의 마지막 다리라 하여 장의차가 잠시 멈추었다가 출발하여 상주(喪主)들의 눈물을 꽤나 흘리게 했던 그 회한의 다리도 1991년 당감천의 복개 공사와 함께 영원히 자취를 감추었다.

  당감동 화장장은 화로 7기 규모로 시설 노후와 협소로 인하여 이용 시민들의 불편이 가중되었고, 1978년 이후 이미 부산시는 당감동 화장장의 이전을 추진하기 위해 총 21개소(부산지역 5, 경남지역 16)의 후보지를 검토하였으나 후보지 인근 및 장의차량 통과지역 주민반대와 관할 도․시․군의 거부로 중단된 바 있다.

  부산시는 화장장 부지를 1987년 부산시교육위원회에 매도했다. 따라서 당감동 화장장은 1987년 11월 30일 폐쇄되었다. 이후 화장장의 이전을 계속 추진하였으나 옮겨가려는 자리마다 지역민의 반대가 거세었다. 부산시는 민원으로 인해 화장장을 가지지 못하여 부산시민들은 1987년 10월부터 경상남도 관내 3개 시설(마산시, 진해시, 밀양시)을 분산 이용하여 오다가 1992년부터 마산화장장 시설을 이용하였으나 이용에 따른 불편이 많은 실정이었다.

  당감동 화장장 자리에는 부산진구 부전동(현 롯데백화점 자리)에 있던 부산상업고등학교(지금의 개성고등학교)가 현대식 건물을 신축하여 1989년 4월에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변지역은 도심 재개발과 아파트 신축 등으로 주택지로 변모하여 옛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1970년대 화장장 모습(출처 당감국민학교)

원본보기

 

1980년대 당감동 화장장 모습 출처 진구청

 

현재의 모습 

 

 ○ 영락공원

  부산시에서는 1992년 12월 이후 부산시 의회와 협의하여 비용의 최소화 기준 및 사업추진 등의 용이성을 고려한 후보지 선정기준을 설정하고 이 기준에 따라 주요 후보지 중 자치구(금정구)에서 관리하던 금정구 두구동 산 83-13번지 부산시립공원묘지 지역이 최적지로 선정되어 1993년 3월 12일 기본계획을 발표하였으나, 혐오시설이라는 이유로 지역주민들의 거센 반대에 직면하게 되었다.

  부산시의 계획발표 이후 지역 주민들의 반대 목소리가 높아지자 해당구인 금정구의회에서는 건립계획 취소결의안을 채택하였으며, 지역 주민들은 건립반대를 위해 시위농성 133회, 민원서류 제출 44건, 초등학생 등교방해 2개교, 통장사퇴 70명, 국회 및 시의회 청원 2회, 행정심판 제기 2개 부처(환경처, 건설부), 행정소송 제기(부산고법) 등 반대를 위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였다. 초기에는 도로점거, 알몸시위, 단식농성 등 시위가 극렬했으며, 청와대, 국회, 정부종합청사 앞에서도 농성을 했다.

  이후 부산시에서 지역 주민대표, 주민과의 대화와 설득하는 등 여러 차례의 대화와 대담을 통하여 최신식 시설 설치를 약속하였다. 영락공원 건립지 주변의 5개 동 주민들은 대화자체를 거부한 채 '화장장 건립 무조건 반대'원칙을 고수한 반면, 금정구에서는 지역 현안문제 해결을 위한 「금정구 지역발전 추진협의회」를 구성하고 시설 영향권내 지역주민 숙원사업 해결과 함께 지역의 장기발전을 위한 대단위 사업추진을 부산시에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부산시에서는 연차별 장기지원계획을 수립하여 지역 주민을 위한 문화시설 등 다양한 숙원사업을 추진하였다. 또한 시의회의 의견 수렴 등을 통하여 지역주민과의 합의를 통하여 1994년 4월 22일 사업계획을 확정하였다.

  부산시 금정구 두구동에 위치한 영락공원은 화장로 15기의 화장동, 9개소의 빈소가 있는 장제동, 납골당(영락원) 3개 동(1,000평)과 오수정화시설(1식), 주차장(2,626평) 및 녹지대(2,682평)로 구성되어 있다. 관련시설은 진입도로와 고속도로 I.C 설치, 3.5km의 전용하수관로 등이다. 입지여건은 2~3개의 능선으로 완전차단, 은폐된 산 속에 위치함으로써 인접지역 주민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고속도로를 통한 진입이 가능하였다.

  1995년 3월 최첨단시설인 무연․무취를 자랑하는 시립영락공원(화장장과 장례예식장)을 개원하여 기존의 시립공원묘지와 함께 관리 운영하여 오다가, 1999년 1월 시설관리공단에 수탁 운영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부산추모공원

  부산시는 전국 지방자치단체 중 최고의 화장율(2005년 현재 74.8%)를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화장에 대한 시민들의 선호도 여론조사 결과 86.54%가 화장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락공원의 공설봉안시설은 2007년 12월 만장이 예상되어 추가시설 확충이 요구되면서 추모공원 조성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2007년내에 봉안당 건립하고, 2008년 3월 부산추모공원 조성공사 준공을 목표로 사업을 추진하여 왔다.

 부산추모공원 조성은 기장군 정관면 두명리 산 79-6번지 일원에 사업비 553억원(국비 82억원․시비 42억원, 부산도시공사 429억원)이며, 사업기간은 약 6년간(2001. 12~2008. 4)으로 그 시설규모의 면적은 257,805㎡[봉안당 4,260㎡(10만위), 가족납골묘원 61,155㎡(12만위), 벽식 납골묘 10,290㎡(3만위), 부대시설 67,440㎡, 공원녹지 114,660㎡]이다.

  새로이 조성하는 부산추모공원 조성사업은 추모공원부지 내에 자연생태학습장, 가족나들이 공간, 연못, 산책로, 주차장 등 휴식공간과 화장시설을 제외한 공설봉안시설(봉안당, 가족봉안묘)을 함께 설치하여 부산시민들의 늘어나는 봉안 수요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사업이다.

 부산추모공원 조성예정지가 선정되자 2001년 12월 장묘시설 조성방침 결정과 2002년 5월「기본계획 및 도시계획시설결정 용역」을 발주하여 25개 예비후지를 선정하였다. 2003년 8월에는「부지선정위원회」를 구성하여 3차례의 심의회와 현장실사를 거쳐, 11월에「부지선정위원회」를 개최하여 기장군 정관면 두명지구를 최종 후보지로 결정하였다.

  이후 해당 지역주민의 반대와 인근 양산시 동면 지역과의 갈등이 표출되었다. 2005년 1월 양산시민과의 갈등은 일부 상수도보호구역 해제로 합의를 하였다. 부산시는 2005년 6월 23일 주민대표와 반대추진위원회 초청간담회를 통해 정관지역 인센티브 제공의 구체적 협의를 도출하여 두명리 이주단지 추진일정, 주민지원사업 및 추모공원내 부대시설 등 운영권에 관한 사항을 합의하였다.

  2005년 6월 중에 정관지역 주민대표들이 국내․외 선진 장사시설 견학을 협의하였고, 7월 7일에는 추모공원 조성 협상(안)을 주민자치위원장, 군의원, 이장단, 자생단체 대표, 면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선진장사시설 견학, 주민설명회 등 협상안을 승인하였다.

  이러한 사업 추진의 과정은 부산시․양산시․기장군 지역주민간의 갈등을 최소화하여 사업을 완성시킨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여 향후 유사한 사업의 추진에 모범적 모델이 되었다. 2006년도 행정자치부 주관「상생협력․갈등 관리부분」에서「부산추모공원 조성사업」이 부산시(양산시)를 우수기관으로 선정하였다.

  2006년 11월 15일 부산추모공원조성계획 결정 및 고시하여, 12월 20일 부산추모공원 조성사업실시 계획이 인가되어 2007년 1월 5일 봉안당 건립신축공사가 착공되었다. 3월 29일에는 ‘부산추모공원’으로 명칭이 확정되었다.

  2007년 12월 31일 부산시와 시설관리공단간 시설 위탁계약 체결, 2008년 2월 14일 준공하여 봉안당 업무를 개시하였다. 2009년 7월 10일부터는 가족봉안묘, 봉안담(벽식) 업무를 개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부산일본인 위령비

  1929년 부산 각처에 흩어져 있던 공동묘지를 일본인 전관거류지 외곽지대였던 부산부 곡정(谷町, 지금의 아미동) 아미산으로 옮겨왔다. 광복과 패망이라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 내몰린 일본인들에게 객지에서 묻힌 친지들의 유골을 수습해서 돌아갈 여유란 없었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후에 개별적으로 송환된 유골도 있으나, 여전히 많은 일본인 유골과 위패 등이 주로 시내 서구 아미동 화장장 근처에 방치되어 있었다.

  한․일 국교정상화 이전인 1962년 5월, 당시 김현옥 부산시장이 인도적인 생각에서 시내에 산재해 있던 유골, 과거장 등을 한곳에 모아, 같은 당감동 화장장 옆에「日本人塚移安之碑」라고 새긴 비석과 납골당을 건립하였다.

  1987년 11월 30일 당감동 화장장이 폐쇄되고, 1988년 도시재개발 계획에 의해 당감동의 화장장 이전을 계기로 일본인위령비도 옮기게 되었지만, 1991년 10월, 토지, 이전비용 등 부산광역시가 전액 부담하여 부산시립공원 묘지내의 현재 위치에 일본인위령비와 납골당이 새롭게 건립되었다. 납골당에는 1,528 남짓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1969년부터 이를 관리해 온 단체는 일제시대 한국인과 결혼한 일본여성들의 친목단체인 ‘부용회(芙蓉会) 부산본부’이다. 위령비 청소와 주변 경관 정리는 물론, 납골당 내부 청소와 페인트칠까지 영락공원, 즉 부산시가 시설물 관리 차원에서 도움을 주고 있다.

  부용회에서 매월 정기적으로 청소를 하고 있고, 피안(춘분, 추분에 행해지는 불교행사)에는 부용회(芙蓉会)가 재부산일본국총영사관 관계자 및 부산일본인회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공양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