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부터 국제신문에 연재 중인 김동철 부산대 사학과 교수의 "왜관…조선 속의 일본"에 관한 기사모음을 아래와 같이 소개합니다.1409년 부산포왜관으로 출발하여 17세기에 500여 명 일본인 거주하기 시작했고 한일 외교·무역·문화·풍속 등 다양한 교류 중심지로 자리매김한 조선속의 일본이! 왜관에 숨겨진 내력을 알아보자
왜관…조선 속의 일본 <11> 비석에 새겨진 왜관
무단통행·밀수 적발 땐 사형… 5개 금지조항 새긴 제찰비 세워 통제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9-10-16 18:53:18
- | 본지 19면
- 초량왜관 완공 뒤 체제 정비 차원
- 동래부사 질서 유지용 규제 마련
- 그 내용 담은 비석들 곳곳 설치
- 설치장소나 숫자 사료마다 달라
- 옛 그림 속에선 정문 안에 위치
- 소통사들이 세운 이택수 선정비
- 왜관 대규모 수리공사 내역 담겨
- 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 내용은
- 조상들 대일 교린 업적 기린 것
부산박물관 뜰에 약조제찰비, 동래부사이택수 선정비, 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가 서 있다. 원래 있던 곳을 떠나 이리 온 것이다. 비에는 초량왜관과 관련된 중요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때문에 약조제찰비(부산시 기념물 제17호)와 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유형문화재 제48호)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초량왜관과 1683년 약조제찰비
‘제찰’은 금지 내용이나 그것을 게시한다는 뜻이다. 1683년 계해약조의 내용을 적은 것이다. 1678년(숙종 4)에 초량왜관이 완공되자, 동래부사 이복(1676.7~1679.2)은 새 왜관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1678년 7개 항목의 절목(무오절목)을 만들었다. 이 절목을 실시하기 위해, 1682년(숙종 8) 통신사(정사 윤지완)는 대마도 당국자와 의논하여 내용을 조정하였다. 동래부사 남익훈(1681.2~1683.3)은 7개 항목을 돌에 새기기 어려우므로, 4개만 새기자고 1682년 11월 조정에 보고하였다. 비변사는 4개 항목을 어긴 자는 모두 왜관 밖에서 사형한다는 항목을 하나 더 추가하였다. 5개 항목을 즉시 비에 새겨 왜관 안에 세운 것은 아니다. 1683년 역관 박유년과 일본인이 의논한 뒤 5개 항목을 비에 새겨, 8월에 왜관 안에 세운 것이다. 이 비가 약조제찰비다.
비는 어디에 몇 개나 세워졌는지 정확하지 않다. 약조제찰비에는 왜관 안, ‘증정교린지’에는 경계를 정한 곳, 일본 자료에는 왜관·사카노시타·복병소에 세웠다고 한다. ‘초량화집’에는 2개라고 하였다. 비는 초량왜관 그림에도 그려져 있다. ‘조선도회’란 그림에는 ‘제찰’이라 쓴 비가 수문(정문) 안에 있다. ‘제찰’이란 표기는 없지만 수문 밖에 제찰비 모양의 비가 있는 그림도 있다. 이처럼 비 위치도 그림에 따라 차이가 있다. 부산박물관으로 오기 전에는 용두산공원에, 일제시기에는 부산부청 앞뜰에 있었다.
비 앞면에는 ‘약조제찰’이란 큰 글씨와 다음 5개 항목이 적혀 있다. ① 지정된 통행 범위를 함부로 벗어난 자 ② 일본인의 밀수 자금을 주고받은 자 ③ 왜관 안에서 밀수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④ 5일마다 왜관에 잡다한 물건을 보낼 때, 일본인은 색리(향리)·고자(창고 담당자)·소통사(하급 통역관) 등을 구타해서는 안 된다 ⑤ 두 나라 범죄인은 모두 왜관 밖에서 형을 집행한다. 이 5개 항목 외에 ㉠ 왜관 일본인은 통행증이 있어야 훈도·별차에게 갈 수 있다 ㉡ 각 항목의 제찰을 써서 왜관 안에 세워 준수하게 한다는 시행 규정이 적혀 있다. 왜관의 근본적인 문제인 4개 조항 중 3개가, 위반하면 사형에 처할 정도로 강력한 규정(제찰)이다.
■소통사와 1774년 동래부사 이택수 선정비
훈도·별차 2명의 일본어 통역관이 일본인을 상대로 통역은 물론 외교·무역 등 실무를 담당하는 것은 과다한 업무였다. 이들을 돕는 부산 출신 하급 통역관이 소통사다. 소통사가 근무하는 통사청은 유원당이라 불렀다. 소통사들은 1774년(영조 50) 3월에 동래부사 선정비를 세웠다. 선정비는 통칭해서 부르는 것이고, 거사비·불망비 등 다양한 이름이 있다. 비의 정식 이름은 ‘부사 이공택수 만세불망비’다. 원래는 동구 수정동에 있었다. 선정비는 대체로 수령이 교체된 뒤에 세우지만, 이 비는 재임(1773.8~1774.6) 중에 세운 것이다. 비 앞면 32자 중에 중요한 것은 ‘화관보간 인미책비’란 첫 8자다. 화관(왜관) 수리공사 책임자인 부사의 공을 칭송하였다. 다음 부사 김제행(1774.8~1776.7) 때인 1755년에 초량왜관 동관 204칸, 서관 941칸의 대규모 수리공사가 완료되었다. 1775년에 완료되었지만, 공사는 이택수 때인 1774년 1월에 시작되었다. 공사 시작 2개월 뒤에 비를 세운 것이다. 비는 왜관과 관련하여 통사(소통사) 이름으로 세운 유일한 비다. 또 왜관 수리공사와 관련된 유일한 비다. 왜관 대신 ‘화관’이라 쓴 것이 주목된다. 화관은 일본식 표현이다. 조선 측 사료에도 없는 것은 아니나, ‘조선왕조실록’(1392~1863)에서는 470년 동안 단 2건(1695?1809년)뿐이다. 화관은 소통사의 인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어다.
■소통사와 1906년 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
초량왜관이 종말을 고한 지 30년이 지난 1906년 9월 박기종·김낙준 등이 세운 비다. 비 이름은 ‘유원각에 선생안(또는 유원각선생의 안)을 묻고 선조를 회상한다’는 뜻이다. 비에 ‘매안’(안을 묻다), ‘예구진’(옛 보배를 묻다)이란 글자가 있다. 유원각은 통사청(유원당)이므로, 유원각선생은 소통사를 가리킨다. 비는 동구 초량 6동에 있었다. 부산박물관으로 옮기기 위해, 2000년 9월 21일 비를 들어 올렸다. 비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선생안 등 중요한 자료가 나올 것이라는 추측·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비는 9월 26일 현 모습을 하게 되었다.
비 뒷면에는 세운 유래·사람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국가는 사병산 아래에 유원각을 두고,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뽑아 직책을 맡겼다. ‘교린’은 국가 중대사다. 옛날 우리 선조가 여기서 자라고, 이 일에 종사하면서 직분을 다했다. 지금 후손이 벼슬길에 계속 나가는 것은 선조의 음덕 때문이다. 유원각 옛터에 비석을 세운다’는 요지다. 비를 세운 사람은 ‘계장 종2품 판리공사 박기종, 감독 정3품 참서관 김낙준과 정3품 참봉 김중호, 공원 참봉 정동률, 유사 박용규와 이용택’ 6명이다. 박기종(1839~1907)은 1860~70년대에 소통사로 활동하면서, 가장 중요한 직책인 배통사·수통사를 역임했다. 박기종은 1876년 1차 수신사(정사 김기수), 1880년 2차 수신사(정사 김홍집), 김낙준은 1881년 조사시찰단(12명 암행어사) 때 통사로 참여하였다. 박기종은 부산항 경찰관·경무관, 다대진첨사, 외부참서관, 판리공사 등, 김낙준은 일본주재공사 번역관·부산항 번역관·동래우체사장·부산우체국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박기종·김낙준 등은 선조들이 소통사로 활동하면서 대일 교린에 힘쓴 것을 기념하여 비를 세웠다. 박기종은 1905년 6월 ‘판리공사’에 임명되었다. 그가 받은 최고 직급이다. 조상의 음덕 때문이라 생각하고 ‘계장’으로 건립을 주도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다음 해 별세하였다. 사람은 가고 비만 남았으니, 필자의 상상일 뿐이다. 2001년 문화재위원회에서 열띤 토론이 있었다. 비각이 문제였다. 전례가 없는 모습 때문에 일본풍이 짙다는 것이다. 결국 비각은 남겨두고, 비만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행방불명된 현덕윤 송덕비(추사비)
초량왜관 북쪽 언덕 너머에는 ‘임소’가 있었다. 일본어 통역관(왜학역관)인 훈도·별차가 근무하는 곳이다. 변박의 왜관그림(1783년)을 보면, ‘성신당’과 ‘빈일헌’ 건물이 있다. 성신당은 훈도, 빈일헌은 별차의 집무처·거주지다. 두 건물은 1727년(영조 3)에 훈도 현덕윤(1676~1737)이 세운 것이다. ‘성신당’ 이름도 직접 지은 것이다. 현덕윤과 동래부사 등 많은 사람이 성신당 기문을 지었다. 1729년 ‘재판차왜’로 온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가 1730년 8월에 지으면서, ‘성신교류’의 상징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부산 지역민이 현덕윤의 공로를 기리는 송덕비를 세웠으나, 실물은 남아있지 않다. ‘소대풍요’(별집보유)에 16자 비문과 ‘변방 백성이 추사(돌이켜 생각)하여 비를 세웠다’는 내력이 적혀 있다. 16자는 “믿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어짐으로 사물을 접하네. 공은 관방(변방)에서 크고. 은혜는 고을 백성에게 흡족하네”라는 내용이다.
비 이름은 추사비·송덕비·불망비 등 어느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비는 성신당 주변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유원각비·이택수비가 널리 알려진 것도 20년에 불과하다. 행방불명된 현덕윤비 등 많은 비가 찾아지기를 기대한다.
김동철 부산대 사학과 교수
- 동래부사 질서 유지용 규제 마련
- 그 내용 담은 비석들 곳곳 설치
- 설치장소나 숫자 사료마다 달라
- 옛 그림 속에선 정문 안에 위치
- 소통사들이 세운 이택수 선정비
- 왜관 대규모 수리공사 내역 담겨
- 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 내용은
- 조상들 대일 교린 업적 기린 것
부산박물관 뜰에 약조제찰비, 동래부사이택수 선정비, 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가 서 있다. 원래 있던 곳을 떠나 이리 온 것이다. 비에는 초량왜관과 관련된 중요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때문에 약조제찰비(부산시 기념물 제17호)와 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유형문화재 제48호)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70년대 약조제찰비(용두산공원 안·왼쪽), 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부산박물관 뜰) |
‘제찰’은 금지 내용이나 그것을 게시한다는 뜻이다. 1683년 계해약조의 내용을 적은 것이다. 1678년(숙종 4)에 초량왜관이 완공되자, 동래부사 이복(1676.7~1679.2)은 새 왜관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1678년 7개 항목의 절목(무오절목)을 만들었다. 이 절목을 실시하기 위해, 1682년(숙종 8) 통신사(정사 윤지완)는 대마도 당국자와 의논하여 내용을 조정하였다. 동래부사 남익훈(1681.2~1683.3)은 7개 항목을 돌에 새기기 어려우므로, 4개만 새기자고 1682년 11월 조정에 보고하였다. 비변사는 4개 항목을 어긴 자는 모두 왜관 밖에서 사형한다는 항목을 하나 더 추가하였다. 5개 항목을 즉시 비에 새겨 왜관 안에 세운 것은 아니다. 1683년 역관 박유년과 일본인이 의논한 뒤 5개 항목을 비에 새겨, 8월에 왜관 안에 세운 것이다. 이 비가 약조제찰비다.
비는 어디에 몇 개나 세워졌는지 정확하지 않다. 약조제찰비에는 왜관 안, ‘증정교린지’에는 경계를 정한 곳, 일본 자료에는 왜관·사카노시타·복병소에 세웠다고 한다. ‘초량화집’에는 2개라고 하였다. 비는 초량왜관 그림에도 그려져 있다. ‘조선도회’란 그림에는 ‘제찰’이라 쓴 비가 수문(정문) 안에 있다. ‘제찰’이란 표기는 없지만 수문 밖에 제찰비 모양의 비가 있는 그림도 있다. 이처럼 비 위치도 그림에 따라 차이가 있다. 부산박물관으로 오기 전에는 용두산공원에, 일제시기에는 부산부청 앞뜰에 있었다.
비 앞면에는 ‘약조제찰’이란 큰 글씨와 다음 5개 항목이 적혀 있다. ① 지정된 통행 범위를 함부로 벗어난 자 ② 일본인의 밀수 자금을 주고받은 자 ③ 왜관 안에서 밀수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④ 5일마다 왜관에 잡다한 물건을 보낼 때, 일본인은 색리(향리)·고자(창고 담당자)·소통사(하급 통역관) 등을 구타해서는 안 된다 ⑤ 두 나라 범죄인은 모두 왜관 밖에서 형을 집행한다. 이 5개 항목 외에 ㉠ 왜관 일본인은 통행증이 있어야 훈도·별차에게 갈 수 있다 ㉡ 각 항목의 제찰을 써서 왜관 안에 세워 준수하게 한다는 시행 규정이 적혀 있다. 왜관의 근본적인 문제인 4개 조항 중 3개가, 위반하면 사형에 처할 정도로 강력한 규정(제찰)이다.
■소통사와 1774년 동래부사 이택수 선정비
동래부사 이택수 선정비(부산박물관 뜰) |
■소통사와 1906년 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
초량왜관이 종말을 고한 지 30년이 지난 1906년 9월 박기종·김낙준 등이 세운 비다. 비 이름은 ‘유원각에 선생안(또는 유원각선생의 안)을 묻고 선조를 회상한다’는 뜻이다. 비에 ‘매안’(안을 묻다), ‘예구진’(옛 보배를 묻다)이란 글자가 있다. 유원각은 통사청(유원당)이므로, 유원각선생은 소통사를 가리킨다. 비는 동구 초량 6동에 있었다. 부산박물관으로 옮기기 위해, 2000년 9월 21일 비를 들어 올렸다. 비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선생안 등 중요한 자료가 나올 것이라는 추측·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비는 9월 26일 현 모습을 하게 되었다.
비 뒷면에는 세운 유래·사람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국가는 사병산 아래에 유원각을 두고,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뽑아 직책을 맡겼다. ‘교린’은 국가 중대사다. 옛날 우리 선조가 여기서 자라고, 이 일에 종사하면서 직분을 다했다. 지금 후손이 벼슬길에 계속 나가는 것은 선조의 음덕 때문이다. 유원각 옛터에 비석을 세운다’는 요지다. 비를 세운 사람은 ‘계장 종2품 판리공사 박기종, 감독 정3품 참서관 김낙준과 정3품 참봉 김중호, 공원 참봉 정동률, 유사 박용규와 이용택’ 6명이다. 박기종(1839~1907)은 1860~70년대에 소통사로 활동하면서, 가장 중요한 직책인 배통사·수통사를 역임했다. 박기종은 1876년 1차 수신사(정사 김기수), 1880년 2차 수신사(정사 김홍집), 김낙준은 1881년 조사시찰단(12명 암행어사) 때 통사로 참여하였다. 박기종은 부산항 경찰관·경무관, 다대진첨사, 외부참서관, 판리공사 등, 김낙준은 일본주재공사 번역관·부산항 번역관·동래우체사장·부산우체국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박기종·김낙준 등은 선조들이 소통사로 활동하면서 대일 교린에 힘쓴 것을 기념하여 비를 세웠다. 박기종은 1905년 6월 ‘판리공사’에 임명되었다. 그가 받은 최고 직급이다. 조상의 음덕 때문이라 생각하고 ‘계장’으로 건립을 주도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다음 해 별세하였다. 사람은 가고 비만 남았으니, 필자의 상상일 뿐이다. 2001년 문화재위원회에서 열띤 토론이 있었다. 비각이 문제였다. 전례가 없는 모습 때문에 일본풍이 짙다는 것이다. 결국 비각은 남겨두고, 비만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행방불명된 현덕윤 송덕비(추사비)
초량왜관 북쪽 언덕 너머에는 ‘임소’가 있었다. 일본어 통역관(왜학역관)인 훈도·별차가 근무하는 곳이다. 변박의 왜관그림(1783년)을 보면, ‘성신당’과 ‘빈일헌’ 건물이 있다. 성신당은 훈도, 빈일헌은 별차의 집무처·거주지다. 두 건물은 1727년(영조 3)에 훈도 현덕윤(1676~1737)이 세운 것이다. ‘성신당’ 이름도 직접 지은 것이다. 현덕윤과 동래부사 등 많은 사람이 성신당 기문을 지었다. 1729년 ‘재판차왜’로 온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가 1730년 8월에 지으면서, ‘성신교류’의 상징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부산 지역민이 현덕윤의 공로를 기리는 송덕비를 세웠으나, 실물은 남아있지 않다. ‘소대풍요’(별집보유)에 16자 비문과 ‘변방 백성이 추사(돌이켜 생각)하여 비를 세웠다’는 내력이 적혀 있다. 16자는 “믿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어짐으로 사물을 접하네. 공은 관방(변방)에서 크고. 은혜는 고을 백성에게 흡족하네”라는 내용이다.
김동철 부산대 사학과 교수
▶[국제신문 공식 페이스북] [국제신문 인스타그램]
관련기사
- 왜관…조선 속의 일본 <10> 왜관 정문 앞에 조시가 서다
- 왜관…조선 속의 일본 <9> 왜관에서 만난 조선 동물-매와 호랑이
- 왜관…조선 속의 일본 <8> 일본어 통역관들, 그들은 어디에서 살았을까?
- 왜관…조선 속의 일본 <7> 초량왜관 출입 감시하는 두 개의 문, 수문과 설문
- 왜관…조선 속의 일본 <6> 1678년 4월 23일 왜관 이사가는 날
- 왜관…조선 속의 일본 <5> 3일과 8일, 대마도 상인과 무역한 동래 상인들
- 왜관…조선 속의 일본 <4> 사라진 왜관, 남겨진 고관
- 왜관…조선 속의 일본 <3> 1547년, 그해 부산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나?
- 왜관…조선 속의 일본 <2> 왜관의 시작-제포, 부산포, 염포에는 일본인이 살았다
- 왜관…조선 속의 일본 <1> 프롤로그- 부산은 왜 최초의 개항장이 되었나?
'부산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란수도 부산 논문공모전 시상식 (0) | 2020.07.22 |
---|---|
조방낙지 (0) | 2020.05.31 |
기수역의 변화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 (0) | 2019.09.15 |
브산의 특별한 이야기 모음 (0) | 2019.09.15 |
이상헌의 광고풍속도 기사 모음 (0) | 2019.09.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