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수역의 변화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 [ 汽水域-變化- ]
분야 | 생활·민속/생활, 지리/인문 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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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부산광역시 사하구, 강서구 |
시대 | 현대/현대 |
출처 | 디지털부산문화대전-기수역의 변화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 |
목차
영남 지방의 젖줄 낙동강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강인 압록강[790㎞] 다음으로 큰 하천인 낙동강[522㎞]은 태백 산맥과 소백산맥으로 둘러싸인 영남 지방[경상남도·경상북도]을 흘러가면서 영남 사람들의 생활 터전을 가꾸어 주고 있다. 낙동강은 강원도 태백시 함백산에서 시작해 남으로 흐르며 경상북도 봉화·안동·예천·상주·구미·칠곡·고령을 지나, 경상남도에서는 밀양과 김해를 거치고 부산으로 내려와 남해로 유입한다. 낙동강의 발원지로부터 남해로 유입하는 낙동강 하구까지의 거리는 대략 522㎞로 알려져 있으나 발원지에 대한 논쟁으로 인해 정확한 거리는 확인하지 못한다.
낙동강의 발원지로 자주 논의되는 곳은 태백시의 황지, 태백산 장군봉(將軍峰) 밑 용정(龍井), 금대봉(金台峰) 중턱의 너덜샘, 또 그 아래쪽 용소(龍沼) 등이다. 너덜샘[태백산 천의봉의 비탈에 쌓여 있는 돌무더기에서 솟아 나오는 샘]은 낙동강 하구로부터 무려 506.17㎞나 떨어져 확인 가능한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지류다. 낙동강 하구로부터 가장 먼 발원지로 1983년 6월 5일 한국하천연구소에서 이곳이 최장 발원지라는 푯말을 세웠다.
예부터 가장 잘 알려진 낙동강 발원지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대동지지(大東地志)』 등에서 낙동강의 근원지로 기록하고 있는 황지 연못이다. 태백 시내 중심지에 있는 황지 공원의 커다란 비석 아래 깊이를 알 수 없는 상지·중지·하지로 이루어진 둘레 100m의 소(沼)에서 하루 5,000t의 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용정(龍井)은 태백산 9부 능선 높이 1,470m 높이에서 흘러 나와 남한에서는 가장 높은 곳에서 솟는 자연 샘물로 낙동강의 발원지로 꼽히는 곳이다.
낙동강의 발원지 논쟁은 복잡한 하계망의 특성과 관련 있다. 하천은 상류부의 수많은 지류가 계곡을 침식하여 모여들며 하나의 큰 강을 만든다. 이렇게 지류들이 모이면 강폭이 넓어지며 수심이 깊은 강의 본류를 이루게 된다. 최초의 지류를 1차수 하천이라고 하며, 이 1차수 하천이 2개 합류하면 2차수, 다음은 3차수 하천으로 구분한다. 낙동강은 태백 산맥과 소백산맥에서 시작하는 최초 지류인 1차수 하천 4만 7,581개가 합류하는 과정을 통해 8차수에 이르면 최종 본류가 형성된다.
상류부에서 급경사를 형성하며 흐르던 낙동강은 중상류부에서는 낙동강 유역에 안동과 대구 등의 침식 분지를 형성하고, 진영·삼랑진 등지의 중하류에서는 우포 늪과 주남 저수지와 같은 저습지와 호소가 형성된 범람원을 형성하고, 하류부에 이르면 낙동강 삼각주를 형성한다.
낙동강 하구의 모습
낙동강 본류는 강의 하구에 도달하면 하도의 경사가 완만해지면서 유속이 현저히 낮아지며, 상류에서 운반해 온 흙과 모래를 쌓아 하중도[섬]를 만든다. 낙동강의 하구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 배수문 우안으로부터 국도 노선을 따라 서구 하단동을 연결한 선으로 보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거대한 삼각주의 발달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하중도의 형성으로 본류는 동낙동강[낙동강]과 서낙동강, 평강천 등으로 분류되어 흐르게 된다.
경상남도 김해의 동쪽 끝 낙동강 서안의 대동면과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1동의 북단 경계에서 상류로부터 운반되어 오던 토사가 이곳을 중심으로 퇴적하면서 강 가운데에 섬을 만드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대저도다. 낙동강이 대저도를 퇴적시키면서 낙동강은 강 한가운데에 생겨난 대저도의 동편과 서편의 두 갈래로 갈라져서 흐르게 된다. 이렇게 낙동강이 큰 흐름으로 흘러내리다가 두 갈래로 나누어진 곳에 수문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대저 수문(大渚水門)이다.
이렇게 낙동강이 갈라지기 시작하는 곳에 대저 수문이 막고 있고, 이 수문을 지나는 하천이 서낙동강이다. 낙동강이 남쪽인 다대포 쪽으로 곧장 흐르는 동낙동강 수로에는 맥도, 을숙도 등 소수의 하중도가 만들어져 있다. 대저 수문을 지나 서쪽 유로를 따라 흐르는 서낙동강 수로에는 대저도, 대사도, 맥도, 중사도, 평위도, 천자도 등 수많은 섬[하중도]이 만들어져 있다. 동낙동강은 낙동강 하구둑을 지나고, 서낙동강은 녹산 수문을 지나 남해로 흘러든다.
남해로 흘러드는 하구에서는 삼각주 전면으로 대마등, 새등, 백합등, 나무싯등, 도요등, 새부리등, 진우도와 같은 연안 사주 지형이 발달하여 있다. 낙동강 하구의 하중도와 바다로의 유입부에 형성되는 연안 사주 지형은 낙동강 삼각주의 형성 과정과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삼각주의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
낙동강 삼각주 기수역의 생활
낙동강 삼각주는 그 크기가 예상을 넘어선다. 삼각주 평야의 크기는 남북 간 길이가 약 32㎞, 동서 간 폭이 좁은 곳은 6㎞, 넓은 곳은 16㎞에 이르며, 약 80m 두께로 모래와 흙이 퇴적되어 형성된 젊은 땅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점점 더 자라나고 있다. 낙동강이 운반해 오는 흙과 모래가 낙동강 하구에 퇴적되면서 형성된 낙동강 삼각주 평야는 넓은 대평원의 비옥한 농터로 일찍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고,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이 터전에는 각종 농산물이 풍부하게 자라났다. 또한 낙동강 하구 삼각주 부근에는 강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기수역(汽水域)이 형성되었다. 기수역에는 담수 어종과 바닷물고기 등이 몰려들어 예부터 어족 자원이 풍부하고 다양한 생태계가 발달하였다.
낙동강 하구둑이 만들어지기 전 낙동강 하구는 강물과 바닷물이 섞이던 기수역이었다. 바닷물은 밀물 때 북쪽으로 삼랑진을 거쳐 수산까지 영향을 미치고, 썰물이 되면 낙동강 하구로 흘러와 바닷물과 만나게 된다. 기수역은 민물과 바닷물이 자유롭게 섞이는 곳이다. 기수역에서는 조수 간만의 차에 따라 다양한 생물이 산다. 새와 육상 동물은 물론이고 장어, 재첩, 가물치 따위 어자원도 풍부하다. 기수역의 염분 농도는 0.5~30‰(퍼밀)[1,000분의 1]로 광범위하고 계절·강수량 등에 따라 변화도 많다. 밀물과 썰물이 그대로 오고 가는, 다양한 생물이 살 수 있는 서식지다. 기수역은 이러한 생태적인 특성 외에도 강 안쪽으로도, 바다 쪽으로도 열려 있는 공간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도요 마을 이야기
낙동강 하구 기수역 부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옛 삶의 형태는 낙동강변의 도요 마을[경상남도 김해시 생림면 도요리] 이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가야와 신라 시대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전해지는 도요 마을은 가야 시대부터 낙동강을 따라 배가 드나들던 곳으로 전해지며, 당시 3,000호 이상이 살았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도요저[저(渚)는 섬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지명], 도요진으로도 불렸다. 이곳은 당시 남해와 바로 이어지는 해역이었다. 도요 마을은 일찍부터 낙동강변 기수역에 자리한 어촌 마을이었다. 『중종실록(中宗實錄)』에 도요리에 1,000호 이상의 사람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어 마을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전기 문신이었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도요저(都要渚)」라는 글에서 당시 도요 마을의 모습을 알 수 있는데, “김해와 밀양이 경계선에 있다. 이곳 주민 수백 호는 대대로 생선 파는 것을 업으로 삼고 농사를 짓지 않았다.”고 설명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동쪽 이웃에 딸 있어 서쪽 이웃에 시집가고/ 남쪽 배에 고기 오면 북쪽 배에 나눠준다./ 한 조각 강가 땅에 사는 일 어려워도/ 자손들 끝내 밭 갈고 김 맬 생각 않더라.
도요 마을은 대규모 취락 형성의 근거가 농업이 아닌 어업이었던 곳으로, 해운과 낙동강 수운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였다. 현재 이 지역은 삼각주의 성장으로 바다와 단절되며 부산의 근교 지역 특성을 반영해 농업과 근교 농촌으로 발달하였다. 도요 마을을 위시한 낙동강변 마을들은 기수역의 변화로 어업에서 농업으로 그리고 농업에서 다시 새로운 도시형 기능이 들어서면서 옛 강변 기수역에서 고기 잡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 덕포동 풍어제
덕포동에는 주민의 안녕과 평안을 빌던 하강선대[할매 당산]와 상강선대[할배 당산]가 있다. 강선대(降仙臺)라는 이름은 말 그대로 신선이 내려왔던 곳으로 일제가 낙동강 제방을 쌓기 전까지는 배가 드나들던 포구였다. 이곳은 몰운대, 태종대, 오륜대 등과 함께 부산의 8대 명승지의 하나로 수려한 경관을 자랑했던 곳이다. 30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강선대를 관리하는 진선계라는 모임에서 낙동강에서의 어로 작업으로 많은 물고기를 잡아 올릴 수 있도록 기원하는 풍어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지금은 전통을 잇는 의미에서 매년 12월 초하루에 용왕에게 풍어를 비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2. 낙동강변 나룻배
낙동강 양안에는 여러 곳에 나루터가 있었다. 구포에서 대동으로, 덕두에서 사상[모라, 덕포]으로 연결되는 항로가 있었다. 나룻배는 주민[학생 통학]이나 상품 운반을 목적으로 운행되었으며, 뱃삯은 사공에게 직접 지불하였다. 나룻배는 규모가 작았지만 강을 건너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으며, 처음에는 어업과 나룻배를 겸하였다. 점차 하구 지역에서 농사짓는 사람이 늘며 정구지[부추]·파 등의 농산물 운송과 이용객이 늘어나 나룻배를 전업으로 하는 사공이 생겨났다고 한다.
3. 낙동강 하구 지역의 전통 어로 활동
해수와 담수가 섞이는 낙동강 하구 기수역에는 조기, 가오리, 황복과 같은 고급 어종도 많이 잡혔다. 이곳의 전통 어업은 수역의 지형이나 조류 등 생태적 특성을 고려한 독특한 방법의 다양한 전통 어로 활동이 행해졌는데, 이를 통해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4. 어망추 어법
낙동강 하구에서는 고대의 어로 도구인 어망추를 이용한 어로 작업이 행하여졌다. 원통형의 어망추는 물고기를 잡는 어망에 쓰였던 부속품으로, 어망에 달아 물속에 가라앉게 하는 도구이다. 어망추는 신석기 시대부터 있던 어구로 토제(土製)와 석제(石製)로 만들어진 어망추가 발굴되었다. 낙동강 하구에서 발견되는 어망추는 원통형으로 내부에 구멍이 뚫려 있고, 그물에 맬 수 있게 되어 있다. 주로 낙동강 삼각주의 구릉 지역에 분포하는 조개더미[貝塚]와 함께 발견되어, 삼각주의 형태 변화를 짐작하게 한다.
5. 낙동강 뱀장어 잡이
낙동강 하구에서는 뱀장어를 주낙으로 잡았는데, 뱀장어는 예나 지금이나 잡기도 힘들고 양도 많지 않은 귀한 어종이다. 뱀장어는 민물에서 사는 어종이지만, 여름철 홍수 때면 하구로 떠내려 온다. 바다와 마주치는 기수역까지는 뱀장어가 떠내려 오지만 민물 어종이라서 바다로는 가지 않는다. 이 때문에 떠내려 온 뱀장어는 하구 기수역인 명지도와 맥도, 덕두, 대동, 매리 등지에서 어부들에게 많이 잡혔다.
하구 기수역에서 뱀장어는 살아 있는 미꾸라지[마을 아이들이 잡아 온 것을 사서 쓰거나 통발로 직접 잡기도 함]를 낚시 바늘에 꿰어 달아 잡았으며, 이를 ‘산박 치다’라고 하였다. 미꾸라지가 없으면 기수역에서 사는 맛조개나 참맛[바다에 사는 맛조개], 게맛[강에서 사는 담수 패종], 홍게비[붉은색을 띠며 강가 흙속에서 사는 갯지렁이로 썰물 때 갯벌이 드러난 강가에서 잡는다], 청게비[바다에 사는 지렁이로 푸른색을 띠고 있다]도 뱀장어 미끼로 쓰였다.
미끼가 준비되면 주낙에 1m 간격으로 낚시를 달아 강에 넣는다. 주낙의 한바탕[한바퀴] 길이는 약 150m 정도로, 여기에 낚시 150~200개를 꽂는다. 하루에 이 주낙 다섯 바퀴를 강에 띄우고 많이 잡히는 날에는 1관[3.75㎏ 또는 4㎏] 정도를 잡았다고 한다. 지금도 낙동강 하구둑 바깥에서는 일본으로 수출하려고 실뱀장어를 잡는 어선이 있다.
6. 낙동강 잉어 잡이
낙동강 하구에서는 귀한 대접을 받는 민물고기 잉어가 많이 잡혔다. 잉어는 지방에 따라 여러 가지 전설과 설화가 전해지는데, 잉어의 도움을 받아 어려움을 이겨 냈다고 하여 먹는 것을 금한 집안도 있었다고 한다. 하구에서 잉어가 많이 잡히는 때는 상류에서 폭우가 내려 큰물과 함께 잉어가 떠내려 오는 여름철이었다. 큰물에 떠내려 온 잉어는 낙동강 하구에 모여들었다가, 홍수가 그치면 바닷물을 피해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잉어는 맥도에서 덕두를 거쳐 구포, 대동면을 지나 매리로 이동해 삼랑진을 지나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잉어가 거슬러 올라갈 때면 이동 경로에 속한 각 포구 어부들은 잉어 철을 맞았다. 잉어 잡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잉어의 생태에 맞추어 하류에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며 행하여졌다.
잉어 어획 방법은 투망[초망]이나 그물, 그리고 주낙까지 다양하였다. 미끼는 쌀이나 보리 딩기[쌀이나 보리의 부드러운 겨]로 만든 떡밥을 조금씩 떼어 내서 낚시에 매달았다. 이렇게 잡은 잉어들은 도시로 팔려 나갔는데, 여름철 더위로 땀을 많이 흘려 기력이 떨어진 사람들에게 잉어를 푹 고아서 국물을 마시게 하였다. 잉어는 주로 고아서 먹거나 찜을 해서 보양식으로 먹었다.
7. 기타 어획 어종
대저 수문에서는 뜰채[그물]로 백어를 잡았다. 백어는 통째 씻어 초고추장에 비벼 그대로 마실 수 있어 지역민들은 ‘국수고기’라고도 불렀다. 입안에 넣어 후룩 마시면 부드럽고 목을 넘어가는데 술안주로 많이 먹었다. 봄철에는 웅어가 많이 잡혔고, 2~6월경에는 참게가 흔해 게장을 담그거나 된장에 조림을 하기도 했으며, 일부는 게젓을 담갔다.
8. 재첩
낙동강 하구는 재첩이 가장 많이 잡히던 지역이다. 강바닥에 지천으로 흩어져 있는 재첩을 배를 타고 다니면서 기다란 대나무 막대기 끝에 머리 빗는 빗과 같은 모양의 갈고리로 강바닥을 긁어 올려 잡았다고 한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썰물 때를 기다려 어선 한쪽에 큰 물 풍선[천막 만드는 천으로 고무풍선 같은 것을 만들어]을 부착하고 반대쪽에는 대나무 갈고리와 같은 어구[그레이]를 여러 개 달아 놓고, 썰물을 받아 서서히 강바닥을 훑으면서 강물에 쓸려 내려가며 잡아 올리기도 하였다.
수확한 재첩은 부인네들이 제첩국으로 만들어 부산 장터나 마을 곳곳을 다니면서 “재첩국 사이소, 재첩국 사이소” 하면서 팔았다고 한다. 숙취 해소에 좋다는 재첩국은 한때 부산의 아침 식탁에 자주 오르던 음식이다. 재첩 진국은 간이나 황달 같은 병자의 병을 다스리는 데 큰 효과가 있다고 전한다. 큰 솥에 아무 것도 넣지 않고 불에 달구어 솥에 강한 열이 나면 재첩을 순식간에 집어넣는다. 재첩이 뜨거운 열기에 입을 벌려 체내의 수분을 토해 내는데, 재첩이 토해 낸 국물이 ‘진국’이다. 이 진국은 식히면 어릴[묵처럼 엉키는 것을 칭하는 방언] 만큼 진하다.
재첩을 이용한 다양한 향토 음식을 보자. 먼저 재첩국은 일반적으로 뽀얀 색깔의 국물에 파릇파릇한 부추를 섞어 먹는데, 낙동강 어부들은 김치를 넣어 국을 끓여 즐겼다. 또 재첩에 미나리, 파[잔파], 방마, 고사리를 넣고 쌀가루와 밀가루, 갈분 가루를 넣어 걸쭉하게 한 재첩찜을 해 먹었으며, 재첩을 까서 그 알맹이에 초장과 미나리·오이·봄상치[쌈]·쑥갓 등의 채소를 섞어 먹는 재첩회도 있다.
낙동강 하구 기수역은 겨울철에도 기온이 온화하여 강이 결빙되지 않아 1년 내내 재첩의 생존이 가능한 최적 서식지였으나, 낙동강 유역 개발과 하구둑 건설 이후 낙동강 하상[땅바닥]의 토사 부패가 심해 서식이 불가능해졌다. 현재 국내에서는 하동 재첩이 가장 유명한데, 낙동강 하구 재첩 서식이 확인되고 재첩을 인공 양식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변화가 기대된다.
9. 낙동강 고기잡이
낙동강 하구에는 수많은 섬이 있어 배가 없이는 생업도 이동도 불가능하였다. 이 지역 배는 이동 수역이 어디인가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하였다. 강배는 배 밑창이 평평하고 바다 배는 밑창이 둥글고 중간이 뾰족하여 높다란 파도도 이기게 되어 있다. 낙동강 하구의 강배는 ‘반티배’라고 불렀다. 이곳 주민은 대부분 고기잡이가 주업이었으며, 약 10% 정도만 어업과 농업을 겸하였다. 이곳으로 흘러 와 어업을 하던 사람들 중에는 빈곤층이 많았다.
기수역에서 잡힌 물고기와 패류[굴, 조개] 등은 나룻배를 이용하여 강 건너 지금의 구포·삼락·사상 쪽 장터로 가서 판매했다. 그중 뱀장어나 도다리, 꼬시래기[망둑어], 잉어 등의 고급 어종은 구포 선착장에 가져가 그곳에 모여든 중간 상인에게 판매하였다. 중간 상인들이 고급 어종을 부산 시내로 가지고 가서 파는 구조가 정착되면서 구포 일대에 어민과 중간 상인이 모여들어 상권이 형성되었다.
한국의 덴마크로 불리던 삼각주 농업
가야 시대에는 삼각주 전 지역이 해수면 아래에 있었고, 이후에도 농업 기술 미숙과 저습지 배수 시설 문제 등으로 농경이 불가능한 환경이었다. 삼각주 지대에서 농업 활동은 토사 퇴적으로 지대가 높거나 작은 언덕 지대를 중심으로 소량 이루어졌고, 갈대로 뒤덮인 저습지가 대부분을 차지해 자급적 어로 활동이 주를 이루었다.
낙동강 삼각주에서 본격적으로 농경 활동이 이루어진 것은 1900년대 초 일본인이 들어와 대저도 북단 서낙동강변을 따라 배 과수원을 조성하면서부터다. 이 지역에서 재배된 배는 1905년 경부선 개통 이후 구포역을 통해 전국으로 출하되며 구포 배로 불리게 된다. 구포 배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는데, 이후 배 과수원으로 개간되었던 지역에 논과 밭이 조성되며 농업 활동이 전개되었다.
1916년 11월에는 대저수리조합이 설립되어 현재의 사덕리를 중심으로 수리 사업을 통해 농경지를 늘려 나갔다. 농경지 침수를 막으려고 1930년대에 대저 수문 및 녹산 방조 수문과 낙동강변의 제방 축조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공사로 13만 정보에 달하는 농경지가 홍수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지역의 마을 분포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하구 지역에서는 논농사와 구포 배를 위시해 과수 재배 지역이 확대되었다.
1960년대 이후에는 인근 부산 지역이 대도시로 급성장하며, 이농 현상으로 인구 감소가 발생하고 농업 활동도 변화되었다. 벼농사 중심에서 소채류 외에 시설 작물을 특화하며 근교 농업 지역으로서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1970년대부터 주거지 인근이나 하천 부지에 시설 농업 단지를 형성하여, 봄에는 노지 상태에서 채소를 재배하고 가을이 되면 비닐하우스에서 호박·토마토·배추·오이 등을 생산하였다.
남해안에 연한 온난한 기후 조건을 바탕으로 호박의 경우 10월에 파종하여 1월에 수확하며, 토마토는 12월에 파종하여 4월에 수확하고, 배추는 11월 중순에 심어 3월 중순에 수확하며, 오이는 12월에 파종하여 2월에 출하해 고소득을 올렸다. 한때는 명지 대파가 유명해져 전국으로 팔려 나갔고 현재는 토마토, 오이, 딸기를 비롯한 화훼류 재배가 성하다. 특히 대저 짭짤이 토마토[삼각주 토층 내 지하수 층에 있는 염분 때문에 독특한 색깔과 맛을 냄]는 맛이 특이해 비싼 값에 팔려 나간다. 하구둑이 건설된 이후 이 지역의 원예 농업 지대는 한발이나 염해의 위험이 줄어들어 호황을 누렸으나 최근 서부산 지역이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낙동강 하구둑 건설이 가져온 문제들
낙동강 중상류부에서부터 하천 유역에 공업 단지와 주거지가 대규모로 조성되고 중하류 범람원 주변은 대규모 농경지로 개발되면서 낙동강 하구 지역도 변화되기 시작한다. 하천 수는 농업용수와 공업용수, 주거용수로 이용되는데, 하천 수위가 낮아지면 오염도는 높아지게 된다. 또한 하천 곳곳에 제방과 둑, 댐이 건설되면 물의 흐름을 막는 변화가 발생하는데, 특히 낙동강 하구둑 건설은 이전 시기와 이후 시기를 구분할 만큼 큰 변화를 유발하였다. 낙동강 하구둑 바깥의 남쪽 바다는 낙동강 하구둑이 축조되기 전에는 낙동강의 연장 해역이었지만, 하구둑이 건설되면서 강과 바다는 단절되었다.
1987년 하구둑이 건설되기 전 낙동강 하구는 민물과 바닷물이 자유롭게 섞이는 전형적인 기수역이었다. 보통 염도 0.5‰ 이하의 물은 담수, 30‰ 이상은 해수라고 보고, 기수역은 염분 농도는 0.5~30‰로 광범하게 보는데, 하구둑이 생기면서 상류 쪽 기수역은 거의 사라졌다. 하류 쪽도 민물이 공급되지 않으면서 사실상 짠물이어서 엄밀한 의미의 기수역이라고 할 수 없다.
조수 간만의 차로 다양한 생물이 사는 기수역은 새와 육상 동물은 물론이고 장어, 재첩, 가물치 따위 어자원도 풍부하다. 계절과 강수량 등에 따라 변화도 많다. 하구둑 건설 이후 물고기 종수가 급감하며 기수역의 특성이 사라진 것이다. 1995년 9월의 조사 결과 낙동강 하구에 출현한 어종은 29종으로 하구둑 완공 전인 지난 1986년 90종에 비해 67.7%나 크게 줄어든 것으로 확인된다. 특히 민물과 바닷물을 오가는 기수성 어류가 지난 1986년 18종에서 1종으로 감소하여 웅어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하구둑 건설로 낙동강을 오가던 밀물과 썰물이 차단되며 하구둑 바깥의 남해에는 토사 퇴적 양이 늘어나기도 하였다. 다대포와 가덕도 사이의 바다에 대마등, 맹금머리등, 옥림등, 백합등, 나무싯등, 도요등, 새등, 진우도와 같은 새로운 육지가 만들어지고, 다대포 해수욕장 전면 바다에 2011년부터 새부리등이 육지로 드러나고 있다.
낙동강 하구둑 건설 이후 하구둑 인근 4개 구[강서구, 사상구, 사하구, 북구]의 토지 이용도를 보면, 공업 지역과 도시 지역이 급증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85년 48만 1,400㎡ 불과했던 4개 구 공장 용지가 2001년 1.292㎢로 167% 증가했고, 도로도 1985년 81만 3,300㎡에 그쳤으나 2001년 1.57㎢로 92.5%나 늘었다. 주거 지역도 1985년 대지가 1.50㎢에 불과했으나 2001년 2.65㎢로 77%나 급증했다. 하구 매립 사업이 잇따라 대지, 공장 용지, 도로 등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낙동강 하구 끝단에 자리한 홍티 포구의 현재 모습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홍티 포구는 하구둑이 놓이기 이전까지는 황금 어장이었으나 현재는 주변이 매립되며 무지개 공단이 들어서고 조류의 변화로 모래톱이 형성되면서 삶의 형태가 바뀌어 버렸다. 모래톱으로 인해 배가 다니기 힘들게 되고 어자원도 많이 줄어들어 수익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매립되기 전 마을 주민 대부분은 어업에 종사했으나 현재는 많은 사람이 주변 공단 지역으로 출퇴근하고 있다.
아직 조업을 계속하는 사람들도 새벽 5시에 나가 오전 8~9시에 들어와도 치솟는 기름 값과 적은 어획량으로 어려움이 많다. 어민들은 “낙동강 수문을 상시 개방해 조류의 순환을 활발하게 한다면 어자원도 늘어날 텐데….”라며 어업 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정비를 원한다.
장림 포구 모습도 홍티 포구와 비슷하다. 1987년 낙동강 하구를 둑으로 가로막기 전까지 장림 포구 일대는 최고 바다 어장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걸망으로 숭어를 건져 올렸다. 만조가 빠지는 급물살에는 밤새도록 멸치를 잡았다. 펄펄 끓인 소금물에 급히 삶아 건조하면 멸치 염포가 되어 하룻밤에 17포씩 어시장 경매에 넘겼다. 물살이 약할 때는 물밑 끌망으로 도다리와 홍대[큰 새우]를 잡았다.
1987년 하구언 공사 뒤부터 낙동강 하구 고기잡이도 예년 같지 않다. 어종도 바뀌었고 어획량도 턱없이 줄었다. 계절마다 바뀌는 물때 찾아 새로운 어장을 찾아서 일터도 바꿔야 했으니 작업 양상이 변할 수밖에 없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조업을 나갔던 황석용(黃錫龍)[69세]은 이런 변화 앞에서 이곳을 안내하기 위해 생태 연구자들과 동행을 하게 되었고, 현재는 어장일 틈틈이 이들과 함께 낙동강 하구를 구석구석 누비고 다니며 ‘낙동강 파수꾼’, ‘낙동강 지킴이’라 불린다.
하구둑 건설을 신호탄으로 하구 주변 지역 매립과 공단 및 주거지 확대, 신항만 건설 사업 등 개발이 가속화하며 낙동강 하구 기수역은 조류·어류의 생태계 교란과 급격한 지형 변화를 겪고 있으며, 주민들의 삶도 혼란에 빠져 있다. 기수역을 배경으로 대를 이어 전개되던 어업 활동과 1900년대부터 시작된 농경 활동, 도시적 생활양식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담수와 해수가 섞이는 기수 생태계는 무수한 수서·저서 생물의 생명을 잉태해 동양 최대 철새 도래지를 만들었지만, 1987년 11월 을숙도를 가로지르는 하구둑이 완공되면서 강과 바다를 단절시키며 회귀성 어류나 수서 생물이 줄어들고 철새가 떠나는 등 환경 파괴 논란을 불러 일으켜, 지역 최초의 환경 보호 단체가 결성되기도 하였다.
최근 매립과 신항 건설까지 이어지며 하구역 일대 물길이 막히고 유속이 느려져 하구에 쌓이는 모래 양이 급증하고 있다. 모래가 뻘 위를 덮으면서 사주들이 모래 지반화 되고 퇴적으로 모래섬끼리 붙어 버리는 육지화도 진행 중이다. 어업과 양식이 어려워지는 것은 물론 철새 도래지도 사라질 위기다. 또 가덕도 눌차 쪽은 수위가 높아져 침수 피해 등 재난까지 우려된다.
변화의 기로에 선 기수역
이렇듯 많은 문제가 계속해서 불거지자 지역 어민과 전문가들 사이에서 강물과 바닷물의 상시 소통이 해결책이라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전문가들은 을숙도 서쪽 둑에서 구포 대교까지 여수로를 건설하거나 수문을 완전 개방하자는 대안을 내놓고 있다. 여수로 건설 방안은 비용 부담과 홍수 대책이 고민거리다. 수문 개방은 염해 방지 대책이 뒤따라야 한다. 수중보 건설과 취수원 이전, 대체 상수원 확보 방안 등이 거론되고 있다. 어느 방법을 택하든 예산 문제가 뒤따르고, 단시일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012년 부산광역시는 낙동강 하구둑 수문을 열어 기수역을 확대하기로 방침을 확정하였다. 이에 따라 앞으로 3년간 하구둑 수문 개방 정도에 따른 바닷물 역류와 생태계 변화를 모니터링한다. 앞서 부산광역시는 환경부에 낙동강 하구둑 수문 개방을 사상 처음으로 공식 건의했다. 1987년 하구둑이 생긴 지 25년 만에 기수역 복원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낙동강 기수역을 생활 터전으로 삼는 어민들은 하구둑의 수문을 여는 것만으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한다.
낙동강 하구 기수역은 현재 잃어버린 기수역을 찾기 위해 변화하고 있다. 지난 100년간 낙동강은 너무 빠르게, 너무 많은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이제 개발과 보존이 공존하는 공간, 전통과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가기 위한 출발점에 낙동강 기수역이 서 있다. 그 가운데에는 생활 터전의 변화로 힘겨워하던 기수역 주변 주민들이 자리하고 있다.
참고문헌
- 『김해 농조 80년사』(김해농지개량조합, 1996)
- 『부산의 자연 마을』2-강서구(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07)
- 후지와라 겐죠, 「낙동강 삼각주 평야의 개발」(『부산 연구』2, 2005)
- 「사라졌던 낙동강 하구 재첩 다시 등장」(『연합 뉴스』, 1993. 11. 12)
- 「하구둑 건설 이후 낙동강 하구 어자원 고갈」(『연합 뉴스』, 1995. 9. 20)
- 「낙동강 하류 지도 바뀐다…대형 모래톱 생기고 생태계 변화」(『동아 일보』, 2004. 4. 21)
- 「낙동강 하구둑 20년-빛과 그림자」(『부산 일보』, 2004. 11. 18)
- 「낙동강 하구둑 20년, 생태 복원에 머리 맞대자」(『부산 일보』, 2007. 7. 9)
- 「낙동강 하구를 열자-④ 댐 완전 개방 기로에 선 네덜란드」(『부산 일보』, 2007. 7. 12)
- 「‘낙동강 하구둑’ 물길 트나」(『부산 일보』 2009. 1. 22)
- 「낙동강 하구 새 땅 38만㎡ 찾아 30년 퇴적 작용 영향…구청 보존 등기 작업」(『한국 일보』, 2010. 6. 6)
- 「낙동강 하구둑 수문 열어도 식수원 염분 피해 거의 없다」(『경향 신문』, 2010. 11. 15)
- 「기수역 왜 중요한가-민물·바닷물 만나는 ‘다양한 생물 보고’」(『부산 일보』, 2012. 4. 24)
- 「낙동강 하구둑 열자-막혔던 강과 바다, 25년 만에 물길 트인다」(『부산 일보』, 2012. 5. 29)
- 「낙동강 하구둑 열자-1부 물은 흘러야 한다4-뱃길, 사람 길도 열자 “막힌 물길만 열면 머지않아 기수역·생태계 복원될 것”」(『부산 일보』, 2012. 6. 22)
- 「낙동강 하구둑 열자-1부 물은 흘러야 한다5-남은 반대 논리 ‘취수원 염분 피해’ 줄일 묘수, 정부 나서야」(『부산 일보』, 2012. 6. 29)
- 「기수 환경 복원 위해 하구둑 개방 관련 용역 돌입」(『부산 일보』, 2013. 8. 8)
- 「2014 부산, 우리가 잊고 지내는 것들4-순환 포구를 삼킨 마천루, 도시 생명의 물길을 막다」(『부산 일보』, 2014. 3. 31)
[네이버 지식백과] 기수역의 변화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 [汽水域-變化-]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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