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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이야기

명지 소금- 한 알 한 알 금쪽같았던 조선의 소금

국제신문에서 지난 2016년 11월부터 연재한 "이야기 공작소-낙동강 하구 스토리 여행"을 아래와 같이 소개하오니

부산의 숨은 이야기를 즐기시기 바랍니다.

이야기 공작소-낙동강 하구 스토리 여행 <2> 명지 소금- 한 알 한 알 금쪽같았던 조선의 소금

은근한 기다림의 맛 '자염'…고단한 삶 참고 버틴 선조들 닮아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6-11-27 20:06:19
  •  |  본지 13면


- 바닷물 끓여 만드는 전통방식
- 불순물 적고 미네랄 풍부 장점
- 낙동강 명지가 최적의 생산지
- 대동여지도에도 '자염최성' 기록

- 오곡 다음으로 귀한 대접에
- 임금 수라상에도 올랐지만
- 백성들 고혈 짜내 만들어
- 일제 강점기 거치며 생산 중단

'자염최성(煮鹽最盛).'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나오는 문구다. 자염은 바닷물을 끓여서 만든 소금. 화분처럼 생긴 큼지막한 가마솥에 바닷물 가득 담고 장작불을 지피면 물은 증발하고 소금이 남았다. 그걸 자염이라 한다. 자염최성은 '자염이 최고로 번성하다'는 뜻이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목판본은 1861년 처음 나왔다. 조선 방방곡곡을 다니는 발품으로 지도를 완성했다. 조선팔도 곳곳으로 발품을 팔아 한 글자 한 글자 지명을 써 넣었다. 어떤 곳은 지역 특색을 함께 표기했다. '자염최성'은 어떤 지역 특색이었다. 그러니까 자염은 요즘으로 치면 어떤 지역 특산품이었다.

자염최성 네 글자를 표기한 곳이 어딜까. 낙동강 명지도다. 낙동강 하류에 큰 섬을 그리고 명지도, 자염최성, 백사장이라고 표기했다. 대동여지도에는 부산 전역이 나오지만, 자염이니 백사장이니 지역 특색을 표기한 곳은 명지가 유일하다. 해운대도 나오고 몰운대도 나오지만 부산 그 어디에도 백사장이라고 표기하지 않았다.

자염최성과 백사장. 명지에 이르러 입을 다물지 못했을 김정호가 상상이 된다. 조선 최고의 자염 생산현장과 아스라이 펼쳐지는 백사장이 심금을 울렸으리라. 그리하여 김정호는 먹물을 듬뿍 묻혀 한 글자 한 글자 자염최성 또박또박 쓰고 그 아래 또 또박또박 백사장이라고 썼으리라. 대동여지도 명지도에 손가락을 문지르면 금방이라도 소금이 묻어날 것 같고 모래가 묻어날 것 같다.

   
1940년대 명지 전오염(煎熬鹽) 생산소의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모습. 이곳에서는 바닷물을 가열해 소금 결정체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 부산 강서문화원 제공
자염 생산은 자연조건이 걸맞아야 했다. 지형과 기후가 절대적으로 작용했다. 첫째, 개펄의 질이 좋아야 했다. 개펄의 모래 입자가 지나치게 잘거나 지나치게 굵으면 염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잘지도 않고 굵지도 않은 명지 모래톱 모래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 둘째, 땔감이 풍부해야 했다. 명지 갈대밭은 풍부한 땔감 공급처였다. 셋째, 일조량이 풍부하고 바람이 잘 통해야 했다. 햇볕과 강바람 바닷바람이 들쑤시던 낙동강 하구 명지는 그야말로 최적의 자염 생산지였다.

명지 소금은 백금 같은 소금이었다. 한 알 한 알 금쪽같았다. 그래서 임금님 수라상에 올랐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맥이 끊겼다. 광복을 맞고 나서 몇몇 뜻있는 인사들이 염전을 복구했지만 채산이 맞지 않았다. 결국 1960년대 자취를 감췄다. 1907년 용호동과 인천에 들어온 일본식 천일염이 한국 전통방식의 자염을 밀어낸 것이다. 전북 곰소만 등 몇 군데 자염 염전, 영도 국립해양박물관과 전남 신안 소금박물관의 자염 체험, 충남 태안 자염축제 등이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대동여지도' 속 명지도(鳴旨島). 자염(바닷물을 끓여서 만든 소금)이 최고로 번성하다는 뜻의 자염최성(煮鹽最盛)이 표기돼 있다.
자염과 천일염은 여러모로 다르다. 무엇보다 자염은 약이다. 세종 임금은 과로로 쓰러지면 소금국을 마시고 기력을 회복했다. 물론 자염 소금국이었다. 은근한 불로 24시간 끓여서 얻는 자염은 불순물이 적고 입자가 곱다. 그리고 덜 짜다. 자염으로 맛을 낸 음식은 짠맛에 밀리지 않고 제 맛을 낸다고 한다. 전문가 말로는 미네랄도 풍부하다. 전오염(煎熬鹽)은 일제강점기 등장한 용어. 달여서 볶은 소금으로서 바닷물에 열을 가한다는 면에선 자염과 비슷했다. 명지 전오염은 당대 최고의 소금이었다.

자염의 역사는 어떻게 될까. 한국 전통 소금인 만큼 꽤 오래된다. 1500년 된 자염 전설이 전북 고창에 전한다. 선운사 검단선사가 도적 떼에게 자염 만드는 방법을 알려줘 생계를 잇게 했다는 전설이다. 고려 문인 안축(1282∼1348)이 쓴 시에 자염이 언급된다. 국문학사를 공부하면 앞머리에 등장하는 '관동별곡' 지은이가 안축이다.

안축은 자염 염전을 목격하고 시를 남겼다. '뜨거운 열기와 연기 그을음/ 끓이는 훈기에 눈썹이 까맣게 탔네./ 하루 종일 백 말의 물을 끓여도/ 소금 한 섬 채울 수 없네./ 슬프다, 저 소금 끓이는 사람들이여.'

늙은이가 자식, 손자와 함께 새벽부터 저녁까지 바닷물을 길어 열 수레나 되는 나무를 지펴도 소금 한 섬 얻기가 힘든 극한의 현장을 목격하고 쓴 시다. 소금쟁이 등골 빠지게 하는 소금 세금을 꼬집는다. 암행어사 박문수도 명지 소금과 밀접하다. 영조 때 조정에선 그를 소금장수라 불렀다. 흉년을 타개하기 위해 명지에서 소금 사업을 하자고 발의한 이가 박문수다. 1730년대 그가 명지에서 소금 2만 섬을 생산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들만 83명 둔 것으로 알려진 조선 최고의 부자 김생도 소금장수였다.

소금은 오곡 다음으로 귀했다. 귀해서 나라에 바치는 진상품이었다. 명지 소금은 조선 태조 때부터 관청 소유, 관유가 되었다. 해마다 일정량을 나라에 바쳤다. 대신 쌀과 옷감을 받았다. 소금 관유는 현대 전매제도 시초다. 관유가 되면서 생산의욕과 생산량이 떨어지자 중종 때 사유화하였다. 그러다 영조 때 다시 관이 염전을 점유하는 공염제를 시행했다.

공염제를 시행하면서 명지도에는 소금 굽는 가마 72개가 놓였다. 비슷한 무렵 산창(蒜倉)을 지금의 대동면 예안리 마산마을에 세웠다. 산창은 관이 관리하던 소금 곳간이었다. 이곳에 쌀 1500섬을 두고 쌀 1섬과 소금 2섬을 맞바꾸었다. 한 섬은 열 말이다. 관리는 처음엔 실무책임자인 별장이 맡았다. 그러다 소금의 귀함을 고려해 부사가 맡았다가 직급이 더 높은 경상도 관찰사가 맡았다.

   
조선시대 명지 소금을 지킨 경상도 관찰사 김상휴·홍재철 송덕비. 부산 강서구 명지동 영강마을에 세워져 있다. 박수정 사진작가
강서구 명지동에는 경상도 관찰사 송덕비가 두 기 있다. 영강마을 부산해경 명지파출소 담벼락에 있다. 태풍 사라호가 강타했던 1959년 중리마을에서 옮긴 것으로 둘 다 명지 소금과 밀접하다. 명지 소금 관련 폐단을 없애줘 고맙다며 세웠다. 송덕비 주인공은 당대 경상도 최고위 관리였던 경상도 관찰사 김상휴와 홍재철이다. 김상휴는 순조 22년(1822) 2월 도임해 이듬해 12월 이임했다. 홍재철은 헌종 6년(1840) 9월 도임해 1842년 4월 이임했다. 송덕비는 각각 1824년 2월과 1841년 10월 세웠다. 홍재철 송덕비는 재임 중에 세웠다는 게 마뜩잖다.

김상휴 송덕비는 개석이 우아하다. '이수'다. 개석은 비석 지붕. 용 무늬 지붕을 이수라고 한다. 비석은 개석(蓋石)과 대석(臺石), 비신(碑身)으로 이뤄진다. 대석은 받침돌이고 비신은 비석 몸통이다. 송덕비 앞면은 김상휴를 찬양하는 시를 새겼고 뒷면은 세운 이유를 밝힌 산문을 새겼다. 비석에 새긴 시를 명(銘)이라 하고 산문을 서(序)라 한다. 명은 공덕을 노래하고 서는 내력을 이야기한다.

송덕비에는 소금 염(鹽)이 모두 여섯 번 나온다. 염민(鹽民)이 3번, 수염민(首鹽民)과 염정(鹽丁), 염색(鹽色)이 각 한 번이다. 그리고 산창도 나온다. 염민과 염정은 소금 굽는 사람, 수염민은 염민 우두머리, 염색은 산창을 감독하는 관리이다. 염전 폐단은 염색에게 있으므로 염색 소임을 영원히 없앤 것과 수군을 비롯한 관리가 염민을 괴롭히지 못하게 한 것, 강 연안 각 읍에서 염선을 붙잡아 두는 폐해를 바로잡은 것 등을 칭송한다. 홍재철 송덕비는 대단히 구체적이다. 앞면은 자금 삼천 냥을 내놓아 염민을 구한 공덕을 기리고 뒷면은 명지 공염전 규모와 3천 냥 쓰임새를 밝힌다. 비석 뒷면 앞 대목을 옮긴다. 영조 공염제 시행 초기인 1740년대와 100년 후인 1840년대 명지 염전을 들여다 보는 귀한 대목이다. 쉬운 한자를 써서 해독이 쉽다.

영묘을축년 공염설시지초 칠십이부지염전 점축위삼십칠부(英廟乙丑年 公鹽設始之初 七十二釜之鹽田 漸縮爲三十七釜).

여기서 부(釜)는 소금 굽는 가마솥이다. '영조 임금 을축년(1745) 공염 실시 초창기에는 솥 72개를 건 염전이었는데 점차 축소되어 37개만 남았다'는 뜻이다. 이어서 '땔감이 귀해 금과 같다'며 3천 냥을 내어 땔감 구매비를 지원한 공덕을 밝힌다. 1841년 세운 비석이니 지금으로부터 150년 더 된 이야기지만 구체적인 수치를 나열해 당대 명지 염전 실상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당시 명지에서 매년 바쳤던 공염은 3천 섬. 소금 한 섬의 원가는 1냥 5전이었다. 소금 한 섬을 얻기 위해 땔감은 5전 어치를 썼다. 그러나 땔감 구매비가 모자라 3천 섬을 채우기는 역부족이었다. 홍 관찰사는 이듬해 신축년(1841) 가을에 걷어야 할 소금 1천 섬에 섬당 1냥의 땔감 비용을 미리 주었다. 5전 더 넉넉하게 줬던 것이다. 봄에 걷는 소금 2천 섬에도 2천 냥을 지원, 매년 3천 냥이 지원되게 하였다. 홍재철 송덕비가 세워진 내력이다. 홍 관찰사 송덕비는 기장군에도 있다.

명지는 김도 유명했다. 명지 낙동김은 한국에서 손꼽던 김이었다. 명지에선 소금도 금이었고 김도 금이었다. 대파, 쌀, 갈미조개, 게젓도 알아줬다. 명지 게젓은 사촌과도 나눠 먹지 않는다고 했다. 같은 음식이라도 이름 앞에 명지가 붙으면 뭔가 달랐고 뭔가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명지는 맛집 천국이었다. 명지가 육지화되고 개발되면서 맛집 명지도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 빈자리, 비어서 허전한 자리를 전어가 꿰찼다.

다 같은 전어라도 다 같은 전어가 아니다. 이름 앞에 명지가 붙은 전어와 명지가 붙지 않은 전어는 하늘과 땅 차이다. 그 차이를 알려면 낙동강 하굿둑 지나서 명지시장에 가면 된다. 전어축제가 열리는 매년 8월 말이면 명지 전어, 가을 전어가 명지를 구수하게 한다. 낙동강 하구를 구수하게 한다.


# 일제침탈 아픈역사 담긴 '천일염'

- 구한말 일본이 국내 생산장 설치
- 경제성 높아 자염 밀어내고 확산

천일염의 원조인 인천 주안염전.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이 지난해 9월 펴낸 '한국 최초·인천 최고 100선'의 한 꼭지다. 일본에서 인천으로 천일염이 들어온 해는 1907년. 구한말 풍전등화의 시기였고 일제가 목청껏 핏대 세우던 시기였다. 같은 해 부산 용호동에도 일본 소금 생산 시험장이 들어섰다.

용호동 소금은 전오염이었다. 천일염은 일본이 1895년 집어삼킨 대만에서 제조방식을 배운 소금이었고 전오염은 일본식 제염이었다.

1907년 염전은 한일 합작이었다. 주안염전은 일제 통감부가 기획하고 조선 탁지부가 호응해 빚었다. 인천 주안면 십정리에 중국인 기술자를 고용해 시험용 염전 1정보를 축조했다. 부산 용호동 염전은 통감부가 기획해 조선해수산조합본부 산하에 둔 시험제염 용호출장소가 그 시작이다. 염전 규모는 2정보가 넘었다. 1정보는 3000평, 1만 ㎡ 가까이 된다. 어마어마한 염전이 장자산 자락과 LG메트로 일대에 조성됐다. 자염과 전오염, 절충식 염전이 혼재했다.

   
일제가 조성한 염전은 조선 팔도로 뻗어 나갔다. 1908년 평안도 광량만염전을 위시해 황해도와 경기도 등지로 퍼졌다.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염전은 1907년에서 1944년까지 대략 6000정보에 이른다. 경제성이 높았던 천일염은 급기야 조선 자염, 일본 전오염을 몰아내고 '소금 삼국지' 최후의 승자로 등극했다. 천일염은 일제 침탈의 유산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중국 소금이며 신토불이 우리 소금이 된 지 오래다. 지금 서해안 태안 등지에서 생산하는 천일염은 세계 최고급의 품질을 자랑한다.

동길산 시인

공동기획: 부산광역시 낙동강 관리본부,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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