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량왜관 복원 프로젝트 기사 모음
국제신문에서 2009년 12월부터 2010년 1월 사이에 연재된 상기 제목의 기사모음을
아래와 같이 소개합니다
초량왜관 복원 프로젝트 <3> 흔적과 유산
37계단 너머 120년 전 초량왜관 끝자락에 맞닿다
- 국제신문
- 박창희 이노성 기자 chpark@kookje.co.kr
- 2009-12-31 22:20:44
- / 본지 3면
- 초량왜관 시대 끝나고 조계지·전관거류지 주요시설 있던 곳
- 숨겨온 역사 흔적, 곳곳이 개발로 신음
- 용두산 중심으로 중·동구 시가지는 옛 초량왜관과 일치
- 광복동·동광동 일대 짙게 밴 일본풍까지 관광자원 활용해 '치유의 역사' 열어야
■부산의 왜색풍
- 숨겨온 역사 흔적, 곳곳이 개발로 신음
- 용두산 중심으로 중·동구 시가지는 옛 초량왜관과 일치
- 광복동·동광동 일대 짙게 밴 일본풍까지 관광자원 활용해 '치유의 역사' 열어야
■부산의 왜색풍
부산의 원도심 골목에는 왜색풍이 혼재한다. 광복동이나 동광동 일대를 걸어 보면 술집이나 음식점, 호텔 입구에 일본어로 된 광고 문구를 쉽게 접할 수 있다. 'カラオケ'(가라오케) 'ホテル'(호텔) 'すし'(스시, 초밥) 'おでん'(오뎅, 어묵꼬치) 같은 간판들이 그것이다. 아예 한글이 없고 일본어로만 된 상호도 눈에 띈다. 중앙동 소라계단 옆 '겐짱카레'의 주인은 일본인이다. 근래 '일본식' 퓨전식당이 늘고 있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 이곳의 왜색풍은 거부할 수 없는 낯선 바람처럼 떠돈다. 광복동에서 동광동 쪽으로 난 골목길은 아예 일본서적 골목으로 통한다. 부산사람의 어투에도 일본어가 변용되어 사투리처럼 쓰이는 어휘가 적지 않다.
왜색풍의 기원은 가깝게는 일제 시대로, 아주 멀리는 구석기 신석기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왜곡된 임나일본부설도 왜의 한반도 침략사의 단편이다. 우리 역사에는 왜(倭), 왜구(倭寇), 왜적 등 다양한 모습의 일본인이 등장한다. 일본인을 보는 시각이 복잡할 수밖에 없다.
조선 세종 때는 삼포(제포, 염포, 부산포)가 열려 왜인들의 거주가 허용되고, 임진왜란 후에는 두모포왜관(부산 수정동 일원), 1678년에는 용두산 일대에 초량왜관이 설치되어 200년간 존속한다. 여기서 한일 간 무역과 외교, 문물 교류가 상시적으로 이뤄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왜관은 평화·공존의 창구였다.
1876년 강제 개항과 함께 초량왜관이 일본인 거류지로 바뀌고, 부산은 일제 식민지 도시로 재편된다. 부산은 식민과 탈식민의 양가성을 지닌 채 일제 강점의 터널을 빠져나왔으나, 거리와 골목 깊숙이 배어든 왜색을 지워내지 못했다. 교역과 관광을 빌미로 한 왜색과의 기묘한 동거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원도심에 스며든 왜색은 일본 관광객을 부르는 주술인 동시에 독립과 저항의 기호로 작용한다. 그 근원에 초량왜관 시공간이 드라마틱하게 흐르고 있다.
■37계단에 묻어난 시간
왜색풍의 기원은 가깝게는 일제 시대로, 아주 멀리는 구석기 신석기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왜곡된 임나일본부설도 왜의 한반도 침략사의 단편이다. 우리 역사에는 왜(倭), 왜구(倭寇), 왜적 등 다양한 모습의 일본인이 등장한다. 일본인을 보는 시각이 복잡할 수밖에 없다.
조선 세종 때는 삼포(제포, 염포, 부산포)가 열려 왜인들의 거주가 허용되고, 임진왜란 후에는 두모포왜관(부산 수정동 일원), 1678년에는 용두산 일대에 초량왜관이 설치되어 200년간 존속한다. 여기서 한일 간 무역과 외교, 문물 교류가 상시적으로 이뤄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왜관은 평화·공존의 창구였다.
1876년 강제 개항과 함께 초량왜관이 일본인 거류지로 바뀌고, 부산은 일제 식민지 도시로 재편된다. 부산은 식민과 탈식민의 양가성을 지닌 채 일제 강점의 터널을 빠져나왔으나, 거리와 골목 깊숙이 배어든 왜색을 지워내지 못했다. 교역과 관광을 빌미로 한 왜색과의 기묘한 동거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원도심에 스며든 왜색은 일본 관광객을 부르는 주술인 동시에 독립과 저항의 기호로 작용한다. 그 근원에 초량왜관 시공간이 드라마틱하게 흐르고 있다.
■37계단에 묻어난 시간
부산 중구 동광동 부산호텔 쪽에서 광복동 쪽으로 가다 보면 용두산공원으로 오르는 석재 계단을 만난다. 동광동 2가 11번지, 주민들이 '구 일본영사관 계단'으로 부르는 곳이다. "120년쯤 됐어요. 아마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계단일 겁니다. 이 부근에 관수가(館守家)와 왜관의 주요 시설이 있었어요. 관수는 대마도에서 파견한 왜관의 우두머리를 말하지요."
부산민학회 주경업 회장은 초량왜관의 옛터를 안내하며 연방 혀를 끌끌 찬다. 소중한 역사 현장이니 보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반향이 없었다. 반향은커녕 남은 곳조차 속절없이 식당이나 모텔 따위로 바뀌어갔다. 계단이라도 남은 게 신기할 정도다. 계단은 폭 4m가량의 육중한 화강암을 37개 단으로 정교하게 쌓았다. 모서리가 닳고 구석구석 이끼가 끼었지만 전체 외형은 건재하다. 일제의 치밀함이 120년을 건너 다가온다. 초량왜관 시대가 끝나고 일본조계지·전관거류지로 바뀌던 시기의 자취로 보인다.
■중·동구의 원형 공간
1783년에 그려진 작자 미상의 '초량왜관도'에는 용두산을 중심으로 자리한 11만 평 규모의 왜관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흡사 작은 왕궁 같다. 하지만 일제가 북항 매립을 위해 영선산 착평공사(1909~1912)를 하면서 초량왜관은 원형이 거의 사라진다. 옛 지도에 나타난 초량왜관 자리와 지금의 중·동구 시가지 구획이 거의 맞아떨어진다. 중·동구 지역사에서 초량왜관을 떼어낼 수 없는 이유다.
원래 초량왜관은 용두산을 중심으로 동관과 서관으로 구성되었다. 동광동 부산호텔 주변을 차지했던 동관에는 관수(館守)와 무역 업무를 담당한 장기체류자들이 거주했고, 현 신창동 대각사 일원의 서관은 주로 객관으로 사용되었다. 동관은 동광동 백산기념관이 있는 백산거리를 따라 개시대청(開市大廳)과 재판옥, 동향사가 자리했다. 백산거리는 초량왜관 해변 쪽 담장이 지나던 자리로 추정된다. 현 대청동 광일초등학교는 일본 사신을 맞아 연회를 베풀던 연향대청(晏饗大廳)이 있었던 곳이다. 대청동이란 지명이 여기서 유래한다. 이 파란만장의 역사 현장이 무관심 속에 잊혀지고 있다.
■은폐에서 치유로
부산민학회 주경업 회장은 초량왜관의 옛터를 안내하며 연방 혀를 끌끌 찬다. 소중한 역사 현장이니 보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반향이 없었다. 반향은커녕 남은 곳조차 속절없이 식당이나 모텔 따위로 바뀌어갔다. 계단이라도 남은 게 신기할 정도다. 계단은 폭 4m가량의 육중한 화강암을 37개 단으로 정교하게 쌓았다. 모서리가 닳고 구석구석 이끼가 끼었지만 전체 외형은 건재하다. 일제의 치밀함이 120년을 건너 다가온다. 초량왜관 시대가 끝나고 일본조계지·전관거류지로 바뀌던 시기의 자취로 보인다.
■중·동구의 원형 공간
1783년에 그려진 작자 미상의 '초량왜관도'에는 용두산을 중심으로 자리한 11만 평 규모의 왜관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흡사 작은 왕궁 같다. 하지만 일제가 북항 매립을 위해 영선산 착평공사(1909~1912)를 하면서 초량왜관은 원형이 거의 사라진다. 옛 지도에 나타난 초량왜관 자리와 지금의 중·동구 시가지 구획이 거의 맞아떨어진다. 중·동구 지역사에서 초량왜관을 떼어낼 수 없는 이유다.
원래 초량왜관은 용두산을 중심으로 동관과 서관으로 구성되었다. 동광동 부산호텔 주변을 차지했던 동관에는 관수(館守)와 무역 업무를 담당한 장기체류자들이 거주했고, 현 신창동 대각사 일원의 서관은 주로 객관으로 사용되었다. 동관은 동광동 백산기념관이 있는 백산거리를 따라 개시대청(開市大廳)과 재판옥, 동향사가 자리했다. 백산거리는 초량왜관 해변 쪽 담장이 지나던 자리로 추정된다. 현 대청동 광일초등학교는 일본 사신을 맞아 연회를 베풀던 연향대청(晏饗大廳)이 있었던 곳이다. 대청동이란 지명이 여기서 유래한다. 이 파란만장의 역사 현장이 무관심 속에 잊혀지고 있다.
■은폐에서 치유로
지난 24일 열린 '초량왜관 복원 포럼' 1차 회의에서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원도심 재생의 키워드로서 초량왜관을 주목했다. 초량왜관이 은폐해야 할 유산 또는 만지면 덧나는 상처가 아니라, 잠자는 역사의 곳간을 열어 당당하게 관광자원으로 활용하자는 주문이었다.
1차 과제는 확고한 역사 인식과 자신감 회복이다. 경성대 강동진(도시공학과) 교수는 "일제 잔재를 소멸하기 위한 근원적 접근이 필요하다"면서 "초량왜관이 우리 것이란 인식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아직도 '일본 콤플렉스'에 휩싸여 있는 것과 달리, 일본은 저만치 앞서가며 실속을 챙기고 있다. 공항이나 관광지에 한국어판 지도나 안내서 비치는 기본에 속한다. 규슈(九州) 신칸센(후쿠오카~가고시마) 열차를 타면 한국어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도쿄역의 지하도 안내판에 한국어가 추가된 지도 오래다.
정의화 국회의원은 "북항재개발과 KTX 완전개통, 제2 롯데월드 사업 등 원도심권에서 진행되는 변화에 맞춰 초량왜관을 포함한 저팬타운 조성을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경업 회장은 "일본를 딛고 넘어서야 부산의 근대 원형과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초량왜관 못지않게 동래읍성 같은 전통 문화재와 근대유적의 보존·관리에도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 백제병원·장춘여관… 왜관과 근대유산 함께 복원을
1차 과제는 확고한 역사 인식과 자신감 회복이다. 경성대 강동진(도시공학과) 교수는 "일제 잔재를 소멸하기 위한 근원적 접근이 필요하다"면서 "초량왜관이 우리 것이란 인식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아직도 '일본 콤플렉스'에 휩싸여 있는 것과 달리, 일본은 저만치 앞서가며 실속을 챙기고 있다. 공항이나 관광지에 한국어판 지도나 안내서 비치는 기본에 속한다. 규슈(九州) 신칸센(후쿠오카~가고시마) 열차를 타면 한국어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도쿄역의 지하도 안내판에 한국어가 추가된 지도 오래다.
정의화 국회의원은 "북항재개발과 KTX 완전개통, 제2 롯데월드 사업 등 원도심권에서 진행되는 변화에 맞춰 초량왜관을 포함한 저팬타운 조성을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경업 회장은 "일본를 딛고 넘어서야 부산의 근대 원형과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초량왜관 못지않게 동래읍성 같은 전통 문화재와 근대유적의 보존·관리에도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 백제병원·장춘여관… 왜관과 근대유산 함께 복원을
초량왜관 옛터인 부산 중·동구는 근대문화유산의 보물창고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초량왜관의 설문(設門·출입문)이 있었던 청관거리(부산역 맞은편)로 들어서면 고색창연한 4층 붉은 벽돌집이 눈에 띈다. 1930년 건축된 부산 최초의 근대식 종합병원인 옛 백제병원이다. 초량객사가 있었던 봉래초등학교를 지나 옛 영선고갯길로 오르면 낡은 한옥 한 채가 기다린다. 일제 강점기 경남도청을 방문한 고위 관리들이 묶어가던 80년 역사의 장춘여관이다.
부산 중구 힐사이드 호텔로 오르는 골목 계단의 빈터는 영도대교 가설공사로 희생된 조선인 인부 17명을 기리는 위령탑이 있었던 장소. 하지만 이 탑은 1953년 역전 대화재 때 소실됐다. 남성여고 옆 중화요리점인 한성각 일대는 1924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사인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있었던 곳. 또 동광동 부원맨션 자리에는 일제강점기에 징용으로 끌려가는 가족들의 무사귀환을 바라던 '관해루'가 있었다. '석기시대 만두집' 아래로 보이는 3층 건물은 미국인 의료 선교사 찰스 휴스테츠 어빈(한국명 어을빈) 목사가 거주하던 곳이다. 바로 옆 칠성방앗간은 한국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안겨준 양정모 선수의 생가. 한국전쟁의 추억이 서린 40계단이 이 영선고개에 위치해 있다. 경성대 김민수(도시공학) 교수는 "원도심에는 근대부산의 기억들이 수없이 많다"면서 "용두산의 미래를 담는 큰 틀 속에서 근대부산과 초량왜관의 복원이 함께 논의됐으면 한다"고 했다.
초량왜관의 설문(設門·출입문)이 있었던 청관거리(부산역 맞은편)로 들어서면 고색창연한 4층 붉은 벽돌집이 눈에 띈다. 1930년 건축된 부산 최초의 근대식 종합병원인 옛 백제병원이다. 초량객사가 있었던 봉래초등학교를 지나 옛 영선고갯길로 오르면 낡은 한옥 한 채가 기다린다. 일제 강점기 경남도청을 방문한 고위 관리들이 묶어가던 80년 역사의 장춘여관이다.
부산 중구 힐사이드 호텔로 오르는 골목 계단의 빈터는 영도대교 가설공사로 희생된 조선인 인부 17명을 기리는 위령탑이 있었던 장소. 하지만 이 탑은 1953년 역전 대화재 때 소실됐다. 남성여고 옆 중화요리점인 한성각 일대는 1924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사인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있었던 곳. 또 동광동 부원맨션 자리에는 일제강점기에 징용으로 끌려가는 가족들의 무사귀환을 바라던 '관해루'가 있었다. '석기시대 만두집' 아래로 보이는 3층 건물은 미국인 의료 선교사 찰스 휴스테츠 어빈(한국명 어을빈) 목사가 거주하던 곳이다. 바로 옆 칠성방앗간은 한국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안겨준 양정모 선수의 생가. 한국전쟁의 추억이 서린 40계단이 이 영선고개에 위치해 있다. 경성대 김민수(도시공학) 교수는 "원도심에는 근대부산의 기억들이 수없이 많다"면서 "용두산의 미래를 담는 큰 틀 속에서 근대부산과 초량왜관의 복원이 함께 논의됐으면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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