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의 규장각 다시 읽기 <12> 임진전란도
치열했던 부산전투 `한눈에 잡히게` 묘사
이시눌이 1834년 비단에 그린 족자그림
정발의 첩, 패전 앞두고 자결하는 모습도
위기의 시기에 '충성 이념' 전달 노린 듯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2006-10-01 20:42:38
- / 본지 20면
임진왜란이 끝나고 240년이 지난 1834년에 화원 이시눌이 그린 '임진전란도'. 부산 다대포진과 부산진 두 성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 장면을 담고 있다. |
규장각에는 화폭의 형태로 제작된 대형 그림들이 몇 점 소장되어 있다. 주로 국가적 사업에 의해 제작된 기록화이다. 이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19세기에 제작된 '임진전란도'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240년이 지난 그때 왜 이런 그림을 만들었을까?
▲1592년 4월, 절박했던 부산진과 동래부의 전투 장면 묘사
'임진전란도'는 1834년(순조 34년)에 화사(畵師:화원을 높여 부르는 용어) 이시눌(李時訥)이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과 다대포진의 전투 장면과 주변의 지리적 환경을 묘사한 족자 그림이다. 1축의 족자이며, 비단에 그려져 있다. 그림 자체의 크기는 141(세로)×85.8(가로)cm 정도이며, 족자까지 합하면 172×99cm 크기이다. 그림의 우측 하단에는 '만력임진후이백사십삼년(萬曆壬辰後二百四十參年) 갑오육월일(甲午六月日) 화사(畵師) 본부 군기감관(本府 軍器監官) 李時訥'이라는 관지(款識;낙관 기록)가 적혀 있어서, 1834년 6월에 화원 이시눌이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이시눌에 대해서는 화원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 조선시대 서화가에 대해 정리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이나 '조선왕조실록' 등에 이시눌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림에서 담고 있는 전투는 근경(近景)의 다대포진과 원경(遠景)의 부산진 두 성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 장면이다. 이 중에서 화면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은 원경의 부산진 전투다. 임진왜란의 전투 상황을 다룬 그림으로는 동래부 소속의 화원 변박(卞璞)이 1760년에 역시 전대의 작품을 모사하여 그린 것으로 보이는 '부산진순절도'와 '동래부순절도'가 있는데, 구성 방식이나 색채의 선택 등을 볼 때 이시눌이 이 그림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본 그림은 두 성에서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 전투 상황을 묘사했으며, 근경 근처의 해안지형을 많이 넣은 점에서는 변박의 모사본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임진전란도' 전체의 그림은 위에서 내려다 본 것처럼 부감법(俯瞰法)을 써서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하였으며, 조선군에 비해 왜군의 수를 훨씬 많이 그려 넣어 군사적으로 조선이 열세에 있었음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각 인물들은 계급과 역할에 따라 그 크기를 차등화하여 그리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그림의 중심부는 부산진과 다대포진을 빽빽이 둘러싼 왜적의 모습과 엄청난 물량의 선박이 전투에 동원된 모습이 치열한 전투상황과 함께 묘사되어 있다. 둥그렇게 쌓은 성의 사방에는 각각 문루(門樓)가 있고 남문에는 '수(帥)' 깃발과 함께 조선의 병사가 밀집해 방어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해안과 연결된 산수의 모습도 매우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그림의 곳곳에 설명을 부기(附記)하여 당시의 상황을 그림과 기록으로 전달해주는 기록화의 성격을 잘 띠고 있다.
▲순절한 사람들의 비석과 제단까지 기록
그림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근경 왼편에는 다대포진의 전투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성의 사방에는 문루가 있고 왜적과 대치한 남문의 안쪽에는 장수 깃발이 크게 그려져 있다. 조총과 창검을 무기로 몰려 들어오는 왜적에 아군이 힘겹게 대항하고 있는 모습이다. 다대포진의 남쪽에는 몰운대(沒雲臺), 고리도(古里島), 팔경대(八景臺) 등이 그림과 함께 표지되어 있으며, 몰운대가 그려진 아랫부분에는 설명이 부기되어 있다. 설명에 따르면 몰운대 위에 서 있는 장수는 이순신의 선봉장인 정운(鄭運:1543~1592년) 장군이며 그 옆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정운의 부하임을 알 수 있다.
원경의 그림은 부산진 전투로 이 그림의 중심을 이룬다.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선봉 고니시 유키나가는 병선 700여 척을 앞세우고 부산포에 침입하였다. 갑작스러운 왜군의 침공에 부산진에서는 첨사 정발을 중심으로 결사항전하였다. 그림은 이곳의 치열한 전투 상황을 압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남문을 사이에 두고 왜적과 아군이 팽팽히 맞선 모습 하며, 성 주변을 빼곡이 둘러싼 왜군들, 지원을 위해 대량의 선박까지 출동시킨 상황 등이 나타나 있다. 남문 밖에는 왜병의 시체가 쌓여 있는 것도 기록하였으며, '帥' 깃발 뒤쪽에는 한 여인이 자결하는 모습도 나타난다. 부기된 설명에 의하면 부산진 첨절제사 정발(1553~1592년)의 첩인 애향(愛香)이 패배를 앞두고 자결하는 장면이다. 애향의 자결 모습을 그려넣어 긴박한 상황을 보다 생생히 묘사하는 한편 여인의 정절을 강조하고 있다.
'임진전란도'는 주요 상황 그림과 함께 전투에서 순절한 인물들이 후대에 추숭된 상황을 보여주는 기록을 곳곳의 여백에 배치하고 있다. 그림의 우측 상단에는 부산진의 함락과 함께 순절한 부산진 첨절제사 정발과 그의 첩 애향, 노비 용월 및 함께 순직한 사람들의 비석과 제단을 넣었으며 좌측 상단에는 다대포 첨절제사 윤흥신(?~1592년)과 함께 순절한 사람들의 비석과 제단을 그려넣고 설명을 가하고 있다. 이에 의거하면 '정공단(鄭公壇)'은 1766년에 부산진첨사 이광국(李光國)이 정발이 순절한 곳에 세웠다는 것과 매년 4월 14일에 첨사가 제사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윤공단(尹公壇)'은 첨사 이해문(李海文)이 1765년에 세운 것으로, 윤흥신이 전사한 장소가 다대포진의 연못 터였음이 나타난다.
▲19세기까지 이어지는 임진왜란의 기억
'임진왜란도'는 기록화 전문 화가인 이시눌의 정밀한 묘사로 인하여 임진왜란 당시 전투의 생생한 모습을 접할 수 있다. 성의 구조와 군사 배치를 비롯하여 전투에 사용된 무기와 복장, 전함의 구조, 일대의 지리적 정보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전투에 관계된 구체적인 지명, 전투 후에 제단과 비석이 들어선 상황까지 기록하여 전쟁 이후 이 지역이 성역화되어가는 모습도 접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부산진과 동래부에서 최선을 다해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을 국가적 차원에서 계속 그리게 한 것은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게 하는 한편, 위기의 시기에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 전쟁 영웅 행적정리· 홍보 활발
- 정조시대 간행 '이충무공 전서'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_print.asp?code=0530&key=20061002.22020204236
"신병주의 규장각 다시 읽기"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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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 ⑭기록화로 전해진 임진왜란
조선군 결사항전·전사장면 생생히 묘사
◇충무공 이순신의 초상화. |
#1. 1592년 4월, 절박했던 그 순간
1592년 4월13일 일본군은 총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선봉대는 4월14일 부산진을 침공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부대였다. 부산진 첨사 정발(1553∼1592)이 항전하다가 전사하고, 15일에는 동래부사 송상현이 동래성을 사수하다가 전사하였다. 당시 일본군 선발대는 ‘싸우려면 싸우되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비켜라’는 나무 팻말을 세웠지만, 동래부사 송상현은 ‘싸워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비키기는 어렵다’는 글귀를 팻말에 적어 일본군 진영에 보내면서 결사 항전의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신식무기 조총으로 무장한 2만명의 일본군을 2000명의 군사와 도성민으로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송상현은 전사하였다. 임진왜란 초 조선의 항쟁 의지를 대표했던 정발과 송상현의 죽음은 당대로 끝나지 않았다. 이들의 결사항전의 충절은 후대에도 널리 기억되었고, 마침내 ‘임진전란도’의 주인공으로 되살아난다.
‘임진전란도’는 1834년(순조 34)에 화원(畵員) 이시눌이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과 다대포진의 전투 장면과 주변의 지리를 묘사한 족자 그림이다. 비단으로 된 1축 족자에 그려져 있다. 그림에서 묘사하고 있는 전투는 다대포진과 부산진 두 성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 장면으로, 화면의 중심에는 부산진 전투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임진전란도’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부감법(俯瞰法)을 써서 전투 장면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하였으며, 조선군에 비해 왜군의 수를 훨씬 많이 그려 넣어 군사적으로 조선이 열세에 있었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림의 중심부에는 부산진과 다대포진을 빽빽이 둘러싼 왜적의 모습과 엄청난 물량의 선박이 전투에 동원되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둥그렇게 쌓은 성의 사방에는 문루(門樓)가 있고 남문에는 ‘수(帥)’ 깃발과 함께 조선의 병사가 밀집해 방어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해안과 연결된 산수의 모습은 매우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그림의 곳곳에 설명을 부기(附記)하여 당시 상황을 자세히 전달해 주는 기록화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거북선이 처음 출동한 임진왜란의 사천해전 기록화. 상처 부위를 만지고 있는 사람이 이순신 장군이다. |
#2. 순절자 비석과 제단까지 기록
그림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가까운 장면 왼편에는 다대포진의 전투 모습을 그리고 성의 사방에는 문루가 있고 왜적과 대치한 남문 안쪽에는 장수 깃발이 크게 그려 있다. 조총과 창검을 무기로 몰려 들어오는 왜적에 아군이 힘겹게 대항하고 있다. 다대포진 남쪽에는 몰운대(沒雲臺), 고리도(古里島), 팔경대(八景臺) 등이 그림과 함께 표시되어 있다. 설명에 따르면 몰운대 위에 서 있는 장수는 이순신의 선봉장인 정운(鄭運·1543∼1592) 장군이며 그 옆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정운의 부하임을 알 수 있다. 정운은 이순신이 가장 아꼈던 장군으로, 그가 부산진 전투에서 사망하자 비통한 심정을 ‘난중일기’에 기록하기도 하였다.
멀리 보이는 그림은 부산진 전투로 이 그림의 중심을 이룬다. 갑작스런 왜군의 침공에 부산진에서는 첨절제사(종 3품 무관으로서 각 지방의 큰 진(鎭)을 지휘함, 첨사라고도 함) 정발을 중심으로 결사 항전하였다.
그림은 이곳의 치열한 전투 상황을 압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남문을 사이에 두고 왜적과 아군이 팽팽히 맞선 모습 하며, 성 주변을 빼곡이 둘러싼 왜군들, 지원을 위해 대량의 선박까지 출동시킨 상황 등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남문 밖에는 왜병의 시체가 쌓여 있는 것도 기록하였으며, ‘帥’ 깃발 뒤편에는 한 여인이 자결하는 모습도 나타난다. 부기된 설명에 의하면 부산진 첨사 정발의 첩인 애향(愛香)이 패배를 앞두고 자결하는 장면이다. 애향의 자결 모습을 그려 넣어 전란의 긴박한 상황을 생생히 묘사하는 한편 여인의 정절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임진전란도’에는 전투에서 순절한 인물들이 후대에 추숭된 내력이 곳곳의 여백에 배치되어 있다. 그림 우측 위에는 부산진 함락과 함께 순절한 부산진 첨사 정발과 그의 첩 애향, 노비 용월 등의 비석과 제단을 넣었으며 좌측 상단에는 다대포 첨사 윤흥신(?∼1592)과 함께 순절한 사람들의 비석과 제단을 그려 넣고 설명을 곁들였다. 최근 우리 정부는 연평해전에서 희생한 사람들의 흉상을 제작하여 그 공로를 길이 전하려는 의지를 나타냈다. 이러한 사례 역시 전쟁에 대한 기억을 영원히 남겨 후대의 귀감으로 삼겠다는 국가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1592년 부산진(그림 상단성)과 다대포진의 치열한 전투상황을 세밀하게 묘사한 ‘임진전란도’(이시눌, 1834). |
‘임진전란도’는 기록화 전문 화가인 이시눌의 정밀한 묘사로 인하여 임진왜란 당시 전투의 생생한 모습을 접할 수 있는 작품이다.
성의 구조와 군사 배치를 비롯하여 전투에 사용된 무기와 복장, 전함의 구조, 일대의 지리 정보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전투에 관계된 구체적 지명, 전투 후에 제단과 비석이 들어선 상황까지 기록하여 전쟁 후 이 지역이 성역화되어 가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을 겪은 지 240년이 지난 시점에 이와 같은 그림이 그려진 사실에서 19세기에도 임진왜란은 국가에서 주도하는 기록화의 주요한 소재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전란과 같은 국가적 위기를 항상 경계하게 하고, 위기의 시기에 치열하게 항전했던 충신을 포상하는 조치를 계속적으로 취한 국가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충의 이념을 기록화를 통해 압축적으로 전달한 것이다. 장수를 따라 자결하는 여인의 모습을 표현하여 여성의 정절을 강조한 것도 주목된다.
이 작품은 유교 이념에서 특히 중시한 충과 정절을 그림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신하와 백성들의 교화에 큰 몫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회화사적 측면에서는 전투 장면과 인물을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라든가, 뛰어난 색채 감각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19세기 화원들이 그린 기록화가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부산진과 동래부에서 최선을 다해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을 국가적 차원에서 계속 그리게 한 것은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게 하는 한편, 위기의 시기에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분위기를 널리 조성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임진전란도’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조선사회에서 보급하고자 하는 충성과 정절의 이념을 전파하는 홍보 매체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4. 정조, 성웅 이순신을 기억하다
조선 후기에는 전쟁 영웅에 대한 추숭 사업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특히 왜란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의 행적을 국가 차원에서 정리하고 홍보하는 작업이 널리 이루어졌다. 문무를 겸비한 군주 정조는 1795년(정조 19) 충무공 이순신의 유고 전집을 간행할 것을 명했다. 1793년 이순신을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1794년 정조가 직접 이순신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은 것은 이순신 존숭 작업의 완결판이었다. ‘이충무공전서’에는 각종 문헌에 나오는 이순신에 관한 기록과 전쟁 중에 올린 장계(狀啓), 진중(陣中)에서 쓴 일기 등이 포함되었다. 특히 책에 수록된 2개의 거북선 그림은 거북선의 실체를 밝히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규장각에서 활동한 신하 유득공, 이만수가 편찬을 총지휘했으며, 정성을 들인 활자(정유자)와 화려한 표지가 책의 품위를 높여주고 있다.
편찬 후에는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에 직접 보관하였다. ‘이충무공전서’의 간행은 이순신이라는 구국 영웅의 행적을 널리 알림으로써 임진왜란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는 한편, 혹시라도 전란이 다시 터지면 이순신과 같은 영웅이 재탄생하기를 염원한 시대 분위기와도 맞물려 있었다.
1960년대 5·16 군사정변과 함께 이순신은 성웅으로 다시금 우리에게 다가왔다. 조국을 위기에서 구한 무인 이순신과 구국의 혁명임을 강조한 군인 박정희의 이미지가 비슷해서였을까. 박정희 정권 시대 이순신 동상이 광화문 사거리에 우뚝 솟았고, ‘성웅 이순신’이라는 제목은 ‘문화교실’이라는 명목 하에 중·고등학생은 물론이고 초등학생까지 꼭 보아야 할 영화로 자리를 잡기도 했다. 이순신은 조선후기 정조 시대, 현대의 박정희 시대에 특히 그 이미지가 강조되고 그에 관한 기록들은 저술로, 영화로 탄생했다. 조국을 위기에서 구한 전쟁 영웅 이순신의 기억은 시대를 초월한 후대의 기록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순신의 기억을 통해 위기의 시기에 또 다른 전쟁 영웅의 출현을 고대하는 점은 조선시대나 현재나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건국대 사학과 교수 shinby7@konkuk.ac.kr
2008060300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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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04 08:3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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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 ⑭기록화로 전해진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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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egye.com/content/html/2008/06/03/20080603001914.html
석 점의 동래부순절도 "부산엔 없다"
▲ ② 송상현 동래부사는 소복을 입은 채 의연하게 죽음을 준비했다(송상현공 종가본).
임진왜란 당시 송상현 부사와 동래백성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치열한 전투를 벌인 동래성 싸움을 묘사한 전쟁기록화인 동래부순절도. 올해 3월 일본 교토 고기레카이(古裂會) 경매에서 1834년 동래부 무관 변곤이 그린 동래부순절도를 수집가 심우희 씨가 낙찰받아 국내에 들여왔다. 이 그림을 개관 준비 중인 울산박물관이 사들여 공개했다.
이렇게 해서 국내에 동래부순절도는 모두 세 종류가 공개된 셈이다. 그린 시기를 확인하기 어려운 송상현 공 종가 소장 동래부순절도(115㎝×148.5㎝), 1760년 변박이 그린 동래부순절도(96㎝×145㎝), 1834년 변곤이 그린 동래부순절도(90㎝×134㎝).
■ 동래성 함락일에 되돌아본 '동래부순절도' 뒷얘기
송상현 공 종가·육군박물관 이어 울산박물관 최근 경매작 획득
세 그림은 동래성에서 왜군의 침략부터 항전까지의 이야기를 한 화면에 담고 있어 전체 구도에선 비슷하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송 부사의 의연한 모습과 북문 밖으로 말을 타고 울산병영으로 도망치는 경상좌병사 이각의 모습을 극명하게 대조시킨 것도 유사하다.
세밀하게 보면 조금 다르다. ①변박의 그림은 좀 더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서 적극적으로 전투상황을 묘사했다. 변박의 그림에선 지붕 위에 올라간 두 아낙네가 기와를 깨뜨려 직접 던지는 등 더욱 격렬한 항전 장면이 담겨 있다. ②송상현 공 종가본은 지붕 위에 올라간 두 아낙네가 기왓장을 깨뜨려 주면 동래백성 김상이 이를 왜군에게 던지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송상현 공 종가본에는 인물 옆에 이름을 붙여놓았다.(변박 그림에선 인물 옆에 이름이 없는 대신 뒤에 따로 화기를 붙인 것이 다르다.) ③변곤의 그림은 전체적으로 변박의 그림과 구도가 비슷하지만, 조선군의 얼굴을 동그랗게 그려 민화풍의 성격이 짙고 송상현 공에게도 충렬공이란 시호를 부가하는 등 등장인물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붙였다.
변박의 그림이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충렬사에 전해오던 1709년 작 순절도가 낡아서 새로 그린 점이란 걸 감안하면 60~70년의 세월을 두고 낡은 그림을 새로 그리면서 동래부에서 임진왜란의 아픈 기억을 기리는 현창사업을 계속해 왔음을 알 수 있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변곤은 변박의 일가 손자뻘인데 둘 다 동래부 천총(정3품의 무관직)을 지냈다.
한편 항전의 현장인 부산에는 아쉽게도 동래부순절도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지난 1978년 충렬사가 복원 개관하면서 충렬사전시관에서 줄곧 전시하던 송상현 공 종가본은 원소유주인 여산 송씨 문중이 지난 2000년 5월 되찾아갔다. 게다가 안락서원이 보관하던 변박의 그림은 63년 숭무정신 현양을 이유로 육군사관학교에서 가져간 뒤 보물로 지정되면서 육군박물관의 간판 유물이 돼 버렸다. 그 뒤 부산의 유림들이 단체행동까지 해 가면서 순절도의 반환을 요구해 1년씩 대여기간을 연장하는 방식으로 지난 2008년 7월 부산박물관에 돌아왔다. 하지만 석연찮은 이유로 장기대여는 물거품이 돼 2009년 1월 육군박물관으로 되돌아간 상태.
이번에 공개된 변곤의 그림도 일본 경매에서 부산의 한 수집가가 부산박물관에 기증할 요량으로 응찰했지만, 낙찰자보다 낮은 가격을 써내는 바람에 무산됐다는 후문이다. 동래성이 함락된 게 1592년 음력 4월 15일이었으니, 양력으로 따지면 바로 오늘이다. 세 그림을 싸움의 현장인 부산에서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기대는 이대로 접어야 할까?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
이렇게 해서 국내에 동래부순절도는 모두 세 종류가 공개된 셈이다. 그린 시기를 확인하기 어려운 송상현 공 종가 소장 동래부순절도(115㎝×148.5㎝), 1760년 변박이 그린 동래부순절도(96㎝×145㎝), 1834년 변곤이 그린 동래부순절도(90㎝×134㎝).
■ 동래성 함락일에 되돌아본 '동래부순절도' 뒷얘기
송상현 공 종가·육군박물관 이어 울산박물관 최근 경매작 획득
세 그림은 동래성에서 왜군의 침략부터 항전까지의 이야기를 한 화면에 담고 있어 전체 구도에선 비슷하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송 부사의 의연한 모습과 북문 밖으로 말을 타고 울산병영으로 도망치는 경상좌병사 이각의 모습을 극명하게 대조시킨 것도 유사하다.
세밀하게 보면 조금 다르다. ①변박의 그림은 좀 더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서 적극적으로 전투상황을 묘사했다. 변박의 그림에선 지붕 위에 올라간 두 아낙네가 기와를 깨뜨려 직접 던지는 등 더욱 격렬한 항전 장면이 담겨 있다. ②송상현 공 종가본은 지붕 위에 올라간 두 아낙네가 기왓장을 깨뜨려 주면 동래백성 김상이 이를 왜군에게 던지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송상현 공 종가본에는 인물 옆에 이름을 붙여놓았다.(변박 그림에선 인물 옆에 이름이 없는 대신 뒤에 따로 화기를 붙인 것이 다르다.) ③변곤의 그림은 전체적으로 변박의 그림과 구도가 비슷하지만, 조선군의 얼굴을 동그랗게 그려 민화풍의 성격이 짙고 송상현 공에게도 충렬공이란 시호를 부가하는 등 등장인물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붙였다.
변박의 그림이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충렬사에 전해오던 1709년 작 순절도가 낡아서 새로 그린 점이란 걸 감안하면 60~70년의 세월을 두고 낡은 그림을 새로 그리면서 동래부에서 임진왜란의 아픈 기억을 기리는 현창사업을 계속해 왔음을 알 수 있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변곤은 변박의 일가 손자뻘인데 둘 다 동래부 천총(정3품의 무관직)을 지냈다.
한편 항전의 현장인 부산에는 아쉽게도 동래부순절도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지난 1978년 충렬사가 복원 개관하면서 충렬사전시관에서 줄곧 전시하던 송상현 공 종가본은 원소유주인 여산 송씨 문중이 지난 2000년 5월 되찾아갔다. 게다가 안락서원이 보관하던 변박의 그림은 63년 숭무정신 현양을 이유로 육군사관학교에서 가져간 뒤 보물로 지정되면서 육군박물관의 간판 유물이 돼 버렸다. 그 뒤 부산의 유림들이 단체행동까지 해 가면서 순절도의 반환을 요구해 1년씩 대여기간을 연장하는 방식으로 지난 2008년 7월 부산박물관에 돌아왔다. 하지만 석연찮은 이유로 장기대여는 물거품이 돼 2009년 1월 육군박물관으로 되돌아간 상태.
이번에 공개된 변곤의 그림도 일본 경매에서 부산의 한 수집가가 부산박물관에 기증할 요량으로 응찰했지만, 낙찰자보다 낮은 가격을 써내는 바람에 무산됐다는 후문이다. 동래성이 함락된 게 1592년 음력 4월 15일이었으니, 양력으로 따지면 바로 오늘이다. 세 그림을 싸움의 현장인 부산에서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기대는 이대로 접어야 할까?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
종 목 |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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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동래부순절도 (東萊府殉節圖) |
분 류 | 유물 / 일반회화/ 기록화/ 순절도 |
수량/면적 | 1점 |
지정(등록)일 | 2013.08.16 |
소 재 지 | 울산광역시 남구 두왕로 277 (신정동, 박물관) |
시 대 | 조선시대 |
소유자(소유단체) | 울산광역시 |
관리자(관리단체) | |
상 세 문 의 | 울산광역시 남구 문화체육과 052-226-5413 |
동래부순절도에 대한 설명입니다.
1592년(선조25년) 4월 15일 동래성에서 왜군의 침략을 받아 싸우다 순절한 송상현 이하 군민들의 항전 내용을 그린 기록화로, 1834년 4월 동래부 천총이었던 변곤이 그렸다.화면구성은 중앙에 동래읍성을 두고 성 내부에는 동래부의 군사들을, 외부에는 왜인들의 모습을 성의 윤곽에 따라 배치하여 중앙 중심의 구도를 취하고 있다. 치열하였던 교전의 전말을 한 화폭에 효율적으로 담기 위해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조감법을 사용하였다.
화면의 근경에는 결전을 시작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고, 읍성의 동문 위쪽 비로봉 근처로는 왜군이 읍성을 넘어 성내부로 침입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객사 앞으로는 패전을 직감한 송상현이 조복을 갈아입고 임금님께 하직인사를 하고 있으며, 좌우로 양산군수 조영규와 겸인 신여로를 그려 넣었다. 성곽 북문 밖으로는 도망가는 경상좌병사 이각과 군사들이 그려져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동래부순절도는 육군박물관에 소장된 변박의 작품과 송상현 종가 소장본이 있다. 두 작품에 비해 변곤의 동래부순절도는 가장 후대의 것이나, 화기가 기록되어 명확한 제작시기와 제작자를 제시해 주는 것은 이 작품뿐이다. 또한 변박작품과 송상현 종가 소장본과 달리 변곤의 동래부순절도에서는 주요 인물 옆에 인물명과 더불어 증직명이 부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중요 산수명도 명기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게다가 회화적인 측면에서 당시의 궁중기록화나 회화식 지도의 특징이 나타나며, 초기적인 원근법과 인물표현의 비례 등을 살펴볼 때 19세기 회화연구에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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