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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이야기

"부산 지명은 자성대서 유래됐다" 새 학설

"부산 지명은 자성대서 유래됐다" 새 학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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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釜山)’이라는 지명은 어디서 왔는가. 지명에 ‘산’자가 있는 것을 보면 부산이라는 산이 있을 것이다. 그 산은 어디 있는가.

 그동안 부산 지역 향토사학자들은 동구 좌천동 ‘증산(甑山)’을 부산 지명의 유래가 되는 곳으로 봤었다. 증산의 모양이 가마솥 모양(釜)과 같아 15세기 후반부터 부산으로 불렸다는 점을 들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동구도서관과 증산공원이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부산시지(誌)와 부산시 홈페이지, 부산시가 초등학교 보조교재로 펴낸 『우리고장 부산』에 실려 있다. 증산공원을 부산의 지명 유래가 되는 산으로 사실상 공식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이러한 주장에 이의가 제기되고 있다. 나동욱 부산근대역사관장은 최근 발표한 논문 ‘부산진성을 통한 부산의 명칭 유래 고찰’(부산박물관연구논집 18)을 통해 자성대공원(동구 범일동) 정상을 부산 명칭의 유래라고 주장했다. 심봉근(전 동아대 총장) 동아시아문물연구소장도 지난달 정기 세미나에서 같은 주장을 폈다. 심 소장은 지난 2월 22일 동구 주최로 자성대공원에서 열린 ‘달빛 인문학을 말하다’ 행사에서 ‘역사 속 자성대 가치 재조명’이라는 강의를 통해 시민들에게 현장에서 이러한 내용을 설명하기도 했다. 증산공원과 자성대공원은 4㎞쯤 떨어져 있다.

 

조선 선조 25년(1592) 4월 13일과 14일 이틀 동안 부산진에서 벌어진 왜군과의 전투장면을 그린 것으로,

크기는 가로 96㎝, 세로 145㎝이다.

논란의 그림 ‘부산진순절도’ 조선 후기 화가 변박이 1740년에 그린 ‘부산진순절도’. 위가 부산진성의 모성(母城), 그 아래쪽이 모성에 딸린 자성(子城)으로 2개의 성을 그려 놓았다. 향토사학자들은 이 그림을 근거로 모성이 있던 증산을 부산의 지명 유래로 보고 있다. 하지만 2개의 성이 하나의 진(鎭)으로 이뤄진 경우는 없으며 조선시대 전통적인 읍성 축조 방식과는 다르다는게 나동욱 관장의 지적이다.

 

 부산이라는 이름이 역사서와 지도에 등장하기는 조선시대 전기인 15세기 초다. 『세종실록지리지』 『해동제국기』 등에 ‘부산포(富山浦)’라고 나온다. 부자 ‘부(富)’자를 쓴다. 바다를 낀 해안에 산이 많아서 ‘부(釜)’가 아닌‘부(富)’자를 썼다고 사람들은 풀이하고 있다. 지금 표기인 부산(釜山)으로 바뀐 것은 『동국여지승람』과 『조선왕조실록』에서 1469년(예종 1년) 이후에 나타난다.

 증산을 부산 지명의 유래로 보는 향토사학자들은 『동국여지승람』과 『동래부읍지』 등에 나오는 ‘산이 가마솥(釜) 모양으로 생겨 부산(釜山)으로 일렀다. 그 밑이 부산포다’는 부분을 근거로 제시한다.

 또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건너간 신유(申濡)의 해사록에 ‘산 모양이 가마와 같고 성문이 바다와 붙어 있다’라는 구절도 인용한다. 부산진 성문이 바다와 가깝다는 점을 들어 부산진성 터(범일동 정공단 자리) 뒷산을 증산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나 관장은 바다와 붙어 있는 성문은 자성대가 더 유력하다고 주장한다. 조선 수군들이 배를 대기에도 자성대 쪽 항구가 적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조선은 수군들이 배를 타고 바다에서만 근무하도록 하다가 배와 육지를 오가며 근무하도록 지침을 바꾸면서 주요 전략요충지마다 진(鎭)을 설치한다. 부산진(鎭)도 성종19년(1488년)께 세워졌다.

 심 소장도 증산은 임진왜란 뒤에 생긴 이름으로 일본인들이 왜성을 쌓으면서 증산으로 불렸다고 지적한다. 증산 정상 부분이 평지로 깎여 있는 점도 왜성의 특징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심 소장은 성곽 연구의 권위자다. 심 소장은 “왜성 자리를 부산 지명 유래로 보는 것은 창피한 일이다. 정확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동안 향토사학자들이 증산을 부산 지명의 근거로 보도록 하는 데는 조선 후기 화가인 변박이 1740년에 그린 ‘부산진순절도’(육군박물관 소장)도 한몫했다고 나 관장은 지적한다. 이 그림은 증산 근처에 부산진성의 모성(母城), 그 아래쪽에 부속성인 현 자성(子城)을 그려놓았다. 두 개의 성 가운데 모성이 그려진 증산을 부산진성의 본거지로 판단하면서 부산 지명의 유래로 본 것이다. 그러나 나 관장은 이 그림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68년 뒤에 그린 것으로 신뢰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나 관장은 “부산 지명의 유래를 놓고 학자들끼리 신랄하게 비판하는 자리를 만들어 함께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부산 지명 표지석을 세우자”고 말했다.

김상진 기자

 

 

출처:  http://news.joins.com/article/11775785

 

 

<관련 기사>

 

 

 

             동래순절도
선조 25년(1592) 4월 15일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에서 왜군의 침략에 대응하다 순절한 부사 송상현과 군민들의 항전 내용을 묘사한 그림이다.

비단 바탕에 그린 이 그림은 숙종 35년(1709) 처음 그려진 것을 영조 36년(1760) 화가 변박(卞璞)이 보고 다시 그린 그림으로 크기는 가로 96㎝, 세로 145㎝이다. 위에서 내려다 보는 듯한 기법을 사용하여 치열했던 교전의 장면을 화폭에 나타내었다.

중심에 동래성이 둥글게 자리잡고 있고 남쪽 성루를 중심으로 동래 병사들이 수비하고 있으며 이들을 공격하기 위해 왜병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다. 성곽 아래쪽으로는 왜군과 죽음의 결전을 벌이는 장면이 있고, 성곽 안쪽 중심에는 붉은 조복을 입고 북쪽을 향해 앉아있는 송상현의 순절장면이 그려져 있으며 북문 밖으로는 성을 버리고 달아나는 경상좌변사 이각(李珏)의 무리들이 대조적으로 그려져 있다. 화면 위쪽의 산은 윤곽선을 선으로 나타내고 점을 찍어 표현하였는데 다소 경직된 모습이다.

작품의 격은 그리 높지 못하고 구도나 형태, 필치 등에서 경직된 면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커다란 국난을 맞이하여 끝까지 항전한 민족성을 표현하여 민족적 교훈을 담고 있다.

. 높은 곳에서 전투장면을 내려다 보듯 묘사하였는데, 그림 오른쪽 중간에 부산진 성곽이 배치되어 있고 그 주변을 왜병 및 왜선이 빈틈없이 에워싼 모습은 아군과 적군의 심한 전력의 격차를 보여준다.

그림의 작품성은 전반적으로 높게 평가되지는 않으나, 나라를 수호하는 민족정기를 보여주는 역사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국립중앙박물관 모사도 : 변박필왜관도
1783년(정조7)에 변박이 그린 초량왜관의 전경이다. 조선왕조는 1544년 다른 곳의 왜관은 모두 폐쇄하고 부산포에만 왜관을 설치하였는데, 이후 몇 차례 장소를 옮겨 1678년에 초량왜관이 신축되었다. 이곳에는 조선인 관리 뿐 아니라 일본에서 파견된 500~600명의 일본인이 교대로 근무하였고, 연간 50척의 무역선이 출입하였다. 왜관의 총책임자는 관수라 하였는데 지금의 총영사 역할을 수행하였다. 초량왜관은 조선후기 조선과 일본의 외교.무역의 중심지로서 기능하였다. 그림 상단의 오른쪽에 보이는 설문은 밀무역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며,

설문 아래에 객사가 있고, 객사를 지나 화면 좌측 중각 부분에 일본에서 온 사절을 접대하는 연향대청이 보인다.

그림 오른쪽에는 무역소 및 외교관 숙소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