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흥신과 조엄 3대의 인연
임란 첫날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부산진성을 2시간 만에 함락 시킨 후 다대 진을 공격해왔다. 첨사는 두성 산을 가로질러 안산 앞을 접근하는 수백 명의 왜적의 수를 파악하고 병사들을 매복시켜 기습으로 공격을 하고 달아나는 적은 정면에선 진로를 차단,
수없는 적을 사살하여 첫 교전에서 승리를 거둔다.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온 왜장 고니시 유키나카는 동래성을 치기위해 병력을 집결 시키던 중 다대포에서 쫓겨 온 부하 장수에게서 패전 보고를 받자 조선에 백전노장인 자기 장수와 맞설 장수가 있다니 예상하지 못한 돌발 사태에 난감해 하면서 작전을 세운다. 조선 수군의 최고 높은 계급의 장군이 다스리고 있는 독진이긴 하나 1000명 이하의 병력을 확인한 고니시는 2,000여명의 정예 병력으로 수륙 양동작전으로 형형색색의 깃발과 누각이 있는 왜선들로 바다를 가득 메운 가운데 조총으로 무장한 병력들을 앞세워 성을 향해 개미떼처럼 밀고 쳐들어왔다.
적이 성 밑에서 사닥다리로 기어오르자 첨사는 칼을 높이 들고 공격신호를 내린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화살, 기름과 불길에 왜적은 근접공격을 포기하고 원거리에서 조총으로 거리를 좁혀온다. 조총을 이겨내려면 거리를 두지 말고 맞붙어 싸워야한다. 놀란 병사들이 진영을 빠져나가고 사방이 포위되자 동생 흥제가 내가 앞을 막을 터이니 형님은 객사지붕 위 로 오르라고 소리친다. 흥제와 군관이 기왓장을 뜯어 기어오르는 왜병을 막는다. 이때 밑에서 첨사를 조준한 왜병이 쏜 총성과 함께 첨사가 쓰러진다. 첨사를 끌어안은 흥제에게 또 한발의 총성이 울린다. 두 형제는 죽음을 무릅쓰고 치열한 혈전을 벌이다 고립무원의 성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친다.
명문에서 태어난 윤흥신
조부 윤여필은 중종반정의 정국공신이고 아버지 윤임은 수군절도사와 찬성을 지냈으며 장경왕후가 고모였다 어머니는 여흥 이씨로 8형제 중 다섯째로 태어난 공은 여섯 살 되던 1545년 을사사화로 아버지와 형 세분이 대역죄로 사사당하고 관노로 전락한다.
그러나 조부 윤여필이 공신이며 80고령이라 가벼운 부처(付處 3등 이하의 죄인은 가까운 곳으로 보내며 관리는 지방 관찰사가 한다. 가족정도는 만날 수 있음)로 5년의 형을 받아 풀려난 후 16세까지 도움을 받아 희망과 용기로 관노 생활에서 살아남는다.
1567년 명종 에이어 왕위에 오른 선조는 을사사화 때 화를 입었지만 살아남은 노수신, 유희춘 등에게 사면복관을 취하였고 이후 노수신이 영의정이 되어 1577년 12월 윤임이 신원복관 되면서 윤흥신도 32년간의 종살이서 풀려난다.
다음해인 선조 11년에는 공신의 후손이라는 자격과 아버지의 무과경력을 인정받아 무과별시에 응시하여 출사 하였고 이후 무장의 길을 걷는다. 3년 후는 진천현감이 되나 글을 모른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최고 권력자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기에 노비로 전락했으니 살아남은 것 만해도 천운이지만 집안싸움으로 역사의 희생양 이 된 윤흥신은 그 후 10년의 관원생활을 어렵게 이어간다.
이후 반복되는 생활이 아버지 윤임의 좋지 못한 세간평판과 관련이 있음을 안 후 살기위해 우의정 유성룡을 대감을 찾아간다. 온갖 수모를 겪고 살아온 윤흥신을 찬찬히 훑어본 대감은 선친이 수군절도사를 지냈고 지금까지의 무장경력을 보아 수군진영에 적당한 자리가 있으면 천거해 주겠다는 답을 한다.
선조23년 10월 어전회의에서 다대진을 첨사영으로 승격시키고 첨사를 누구를 보내야할지 선조의 의견에 우의정 유성룡은 “전하, 무인으로서 장재가 있고 품계가 절충에 이른 사람은 윤흥신 밖에 없습니다. 정국공신 윤여필의 손자라 충정 또한 믿을 수 있어 말씀 드린 것입니다. 선조는 우의정 유성룡의 추천을 승낙한다.
“윤흥신을 당상관 절충장군으로 하여 다대첨사에 명하노라.”
윤흥신은 막내 동생 흥제와 다대포를 떠나면서 부인 신 씨에게 아들을 신신 당부한다. 38살에 노역에서 풀려나 마흔이 넘어 혼인하고 마흔둘에 아들 성을 얻었다. 더욱이 집안이 화를 입어 8형제 중 유일하게 대를 이을 후손인 10살배기 아들 성을 두고 천리밖 땅 끝 왜구들이 날뛰는 위험한 임지로 향한다.
다대진의 전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잘 나타나 있지 않다. 이는 당시 서평포․다대포․부산포 등이 모두 지금의 부산영역이지만, 다대진은 부산진보다 군사적 비중이 낮고 규모도 작으며 당시로 보아서는 외떨어진 곳이라서 상황을 잘 전할 수 없었던 것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당시 다대진 첨사였던 윤흥신에 관한 기록도 임진왜란이 끝난 1604년(선조 37) 6월 25일에 공포된 선무공신록권(宣武功臣錄券)에 원종(原從) 1등 공신으로 올라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의 업적이 이렇게 묻혀버린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윤흥신이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워 순절한 사실에 대한 기록은 단편적이지만 확실히 드러난다.
- 1604년(선조 37) 6월 25일에 공포된 선무공신록권(宣武功臣錄券)에 원종(原從) 1등 공신으로 올라
-《선조실록 宣祖實錄》에는 다대진 첨사 윤흥신이 순절한 기록을 ‘윤흥신은 왜적에 항거하여 싸우다가 죽었다’고 적고 있고,
-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 懲毖錄》에는 ‘다대진 첨사 윤흥신은 힘써 싸우다가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 선조 때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구사맹(具思孟)의 《조망록 弔亡錄》에는 윤흥신이 왜적을 맞아 싸운 내용이 간략하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이책에서는 윤흥신을 특별히 기록하고 주석을 달았다.
왜적이 성을 포위하자 힘껏 싸운 끝에 이를 물리쳤다. 이튿날 대군의 왜적이 쳐들어오니 군졸은 모두 도망하였는데, 윤흥신은 홀로 남아 온종일 활을 쏘다가 성이 함락되자 죽었다
고 기록하고 덧붙여 그를 애도하는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 인조 때의 학자 신령(申靈)이 쓴 《재조번방지 再造藩邦志》에는 ‘도적이 병사를 나누어서 서평포․다대포를 함락케 했다. 다대진 첨사 윤흥신은 힘껏 싸웠으나 피살되었다.’고 한다.
- 그 뒤 1764년(영조 40) 당시 동래부사 강필리(姜必履)가 지은〈윤공사절기 尹公死節記>에는 다른 글에 씌어진 윤흥신과 관련된 기록을 모두 인용하여 임진왜란 당시 그의 행적을 적었다. 그와 동시에 다대진 첨사였던 윤흥신의 전공이 밝혀지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성에서 순절한 이정헌(李庭憲)의 행장(行狀)에도 ‘적이 먼저 부산을 함락하고 군사를 나누어 동래 및 여러 포진(浦鎭)을 함락시키니 다대진 첨사 윤공이 죽었다.’라고 하였다.
이렇듯 윤흥신의 순절 사실은 분명했지만 조엄(趙曮)이 동래부사로 부임하기 이전까지는 그 사실이 밝혀지지 않은 채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아무리 외딴곳에서 있었던 일이지만 위와 같은 기록까지 있었는데도 정작 동래성을 비롯 다대포진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이다.
1757년(영조 33) 조엄이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이틀 후 충렬사(忠烈祠)를 참배할 때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과 부산진 첨사 정발(鄭撥), 그리고 여러 이서(吏胥)와 노비까지 모셔져 있는데 윤흥신만이 빠져 있는 사실을 의아하게 여겼다. 이 사실을 안 조엄은 윤흥신의 사적(史蹟)을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먼저 ≪읍지 邑誌≫를 꼼꼼히 살펴보고 1758년 7월 1박2일 일정으로 다대포를 직접 방문하기까지 하였다. 임란 후 부임한 다대첨사는 수많았지만 무관심으로 인해 윤흥신에 관해 들을 수 가 없었다. 세월이 너무 오래되어 윤흥신에 대한 기록과 당시의 전황을 들려 줄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 때 다대포 어민 한인범(후일 한광국으로 개명)으로부터 다대진에서 윤흥신에 관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듣게된다. 이후 1761년(영조 37) 그가 영남감사(嶺南監司)가 되었을 때, 경상도 내에 효열과 충절이 두드러진 사람을 포상할 것을 예조(禮曹)에 상소할 때 윤흥신의 증직(贈職)을 청원하였다.
그 뒤 1762년 조엄이 통신사로 일본에 갈 때 이해문(李海文)이 수행원으로 따라가게 되었다. 그 때 조엄이 이해문에게 윤흥신의 사적을 이야기해 주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이해문은 일본에서 돌아와 다대진 첨사가 되었을 때, 1766년(영조 41) 다대포 성안(지금의 다대초등학교)에 윤공단(尹公壇, 부산시 지정문화재 기념물 제9호)을 세우고 해마다 음력 4월 15일에 제사를 첨사영에서 올렸다. 이해문은 단(壇)을 설치하고도 순절비를 세우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조엄에게 윤공의 사적을 써 줄 것을 간청하니 당시 조정의 부제학(副提學)으로 있던 조엄이 ‘다대포첨사 윤공 전망사적서’(多大浦僉使 尹公 戰亡事蹟敍)를 쓰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윤흥신이 임진왜란 당시 장렬히 순절한 내용을 적은 글들을 상세히 인용하며 그를 추향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1766년 윤흥신은 송공단(宋公壇 : 당시는 동래읍성내 이외의 부산진 전사자도 송공단에 모셔져 있었음)에 추향되고 1772년(영조 48)에는 충렬사에 추향되었다. 그러나 이해문은 순절비를 세우려다 이를 이루지 못한 채 임지 다대포를 떠났다. 그런 가운데 홍국영과의 마찰로 김해로 귀양 간 조엄은 윤흥신 첨사 순절비에 관한 뜻을 아들 조진관(趙鎭寬)에게 전하고 1777년(정조 원년) 세상을 떠났다.
그 후 헌종(憲宗) 때 이조판서에 임명된 조진관은 아버지 조엄이 윤양후의 술책에 넘어가 인사를 잘못한 사실을 들어 2번에 걸쳐 판서직을 고사하고 아버지의 유언을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다대포를 방문한다. 병조판서를 지낸 조진관은 이해문 첨사가 세웠다는 윤공단을 찾았으나 단만 만들고 비석을 갖추지 못한 체 제사를 지내고 다대를 떠난 후 후임첨사가 단마저 헐어버린 사실에 낙담한다. 다시 이조판서에 오른 그는 생의 마지막 관직이 될 것을 알고 아들 조인영을 불러 이제 이조판서를 끝으로 6조 판서를 다 해보는 마지막 벼슬에 올랐어도 윤공 단을 세우라는 네 조부의 유지를 실천 못했으니 참담 하다고 하자 23살의 나이로 출사 전 이었지만 순조19년 장원급제할 만큼 총명했던 조인영은 “언젠가 실행할 날이 오겠지요” 라고 답한다. 이에 윤 첨사를 위해 지은 순절비문을 아들 조인영에게 맡기고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1841년(헌종7) 4월 영의정에 오른 조인영은 동래부사 홍종응을 불러 명령이나 다름없는 지시를 내린다. 지금부터 84년 전 나의 조부께서 시작한 일로 마무리 하지 못한 일을 영의정이 된 내가 마무리할 시점이라 시에 능하고 명필인 홍공을 동래 부사직을 맡겼으니 일을 잘 마무리 해 달라는 부탁을 하며 충렬사에 윤흥신공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게 한 사람이 나의 조부이며 선친께서는 조부의 유지를 받들어 윤흥신 첨사가 전사한 다대진 첨사영 연못자리에 충절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려 하였으나 다대첨사들의 비협조로 세우지 못하고 돌아가시면서 남기신 비문을 33년간 보관해오다 이제야 조부와 선친의 뜻을 받들 수 있는 기회라며 비문을 전한다. 이에 동래부사 홍종응은 1841년(헌종 7) 첨사가 돌아가신 4월안에 순절비를 세우고자 밤낮으로 작업을 진행하여 정해진 기일에 비석제작을 완료하고 다대포 첨사영 연못자리에 단을 짓고 비석을 세워 윤공단 제를 올리게 된다. 윤흥신 사후 249년 만에 그의 전공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현재 서 있는 비의 전반부 글은 조진관 자신이 적은 것이며, 후반부 글은 홍종응 부사가 첨가하여 기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원래의 제단과 순절비는 다대성 안(현 다대초등학교)에 있었는데 1970년 부산시에서 현재의 다대동 뒷산으로 옮겼다. 제단 중앙에 있는 비석 정면은 ‘僉使尹公興信殉節碑(첨사윤공흥신순절비)’라 새겨졌고 뒷면에는 윤흥신의 사적이 12행으로 기록되어 있다. 1976년에는 부산시에서 비석의 단을 개축하여 홍살문을 세우고, 1978년에는 재실 1동을 짓고 석축공사를 하였다. 현재 제향은 음력 4월 15일 동민(洞民) 중심으로 올려지고 있다.
윤흥신의 일생도 흥미롭지만 윤공단과 순절비 건립을 위해 노력한 풍양 조씨 3대의 이야기는 더욱 진지하다. 조엄이 윤흥신의 공적을 발굴하고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윤공단을 만들지만 권력다툼 속에 허물어지고, 아들 조진관을 거쳐 손자 조인영에 이르러서야 윤공단과 순절비가 건립된다. 3대 84년이 걸린 이 이야기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역사 속에 사장되어 가는 인물을 대를 이어가며 기억하려는 한 가문의 노력이 쉽게 잊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명문 풍양조씨 3대가 84년에 걸쳐 왜 이토록 윤흥신 공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을까? 비록 윤흥신과 아무런 연고도 없지만 풍양 조씨 가문(조엄-조진관-조인영)의 투철한 역사 인식의 결과일 것이다
임진왜란 기간 :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 ~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다대진의 전투 4월 12일, 일본군의 제1대는 재빠르게 부산에 상륙해, 다음 13일 다시 배를 타, 미테로 나누어져 출항. 그 하나가 다대진의 사이를 향해 쇄도했다. 이 전투로는 조선군의 다대진을 지키는 다대포첨사 윤흥신과 제1 대의 대장(선봉) 고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가 싸우게 되었다. 윤흥신의 형제인 윤흥제도 전투에 참가했다.
조선군의 지휘관은, 적의 기병을 막기 위해 못을 뿌려, 성벽 위에 수비병을 재빠르게 배치하고 화살을 발사하게 했다. 한편, 고니시유키나가는 항구에 상륙하고 성에 가까워져 항복을 권고했지만, 「왕명이라면 내리지만, 토끼에 모퉁이, 왕에게 허가를 청할 것」이라고 반시간 벌기와도 잡히는 거부를 하셨다.
일본군은 화승총의 원호를 받으면서 굴의 물을 배수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화승총에 의해서 조선측의 수비병은 무력화 되었다. 부산진의 싸움과 같이, 조선병은 화승총에 우려를 이루어, 유효한 반격을 할 수 없었다. 조선군은 일본군이 굴을 배수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일본군은 방벽까지 직접 가까이 하게 되었다.
야밤중, 유키나가는 기습해 목석 흙덩이를 굴에 던지고, 오전 4시부터 8시의 사이에 이것을 묻어 버렸다. 조선 측에 의한화살의 련 쏘아 맞혀나 투석 등에 대항하면서, 일본군은 공성탑(비제)이나 사다리를 이용하고, 화승총의 원호 중(안)에서 성벽에 올랐다. 유키나가는 곧 바로 일본의 기를 세우게 했다.
윤고신은 제일 방위선이 찢어진 것을 보고, 거짓의 퇴각을 실시한 후, 갑자기에 반격을 개시했지만, 격렬한 난전이 되었다. 윤고신은 전사해, 일본측은 사이를 점거했다.
絵本太閣記
반지본 12편 84권 오카다기요쿠잔(岡田玉山) 화작
1797 ~1804 연간
〈그림책〉독본의 형식을 결정 짓는 것과 동시에, 장편 사전 독본의 선편(先鞭)을 붙인 기념비적 작품. 7편에 걸치는 내용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천하의 정권을 잡는 이야기이며, 실록 「태각진현기(太閤真顕記)」를 주소재로서 큰폭으로 정리, 가필을 베풀어 재구성한다. 1804년 6월, 막부에 의해 절판을 명령받아 1859년이 되어 재판이 허가되었다. 본작품은, 현재까지 계승해지는 히데요시 전설을 정착시키는데 큰 역할을 이루어 내려 그 의의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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