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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이야기

한광국 구폐불망비

한광국 구폐불망비(韓光國 捄弊不忘碑)

 

 

윤공단 어귀 계단 오른쪽에 이경재 영세불망비(李景在永世不忘碑), 이승운 만고불망비(李乘運萬古不忘碑) 등의 선정비군 12기와 함께 보존되어 있다.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있는 조선 후기 다대진 아전 한광국(韓光國)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한광국 구폐불망비(韓光國捄弊不忘碑)는 다대진의 아전 한광국이 1763년(영조 39) 주민의 숙원 사업인 곽전(藿田)[미역밭]의 면세를 실현하는 데 공헌한 일을 기려 1861년(철종 12) 8월 다대 포구의 주민들이 세웠다. 구폐불망비는 폐습을 구제한 것을 잊지 못함

 

그가 세상을 떠나자 남해안 항, 포구 일부 어민들이 그의 묘지 앞에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861년에 '진리 한광국 구폐불망비(鎭吏 韓光國 救弊不忘碑)'를 세웠으나, 전국 각 항, 포구 어민 모두가 입을 모아 “일부 어민들만의 일이라고 할 수 없다”며, 엽전 한닙씩 각출하여 다대포 입구(다대포 현대아파트 길 건너편 해송아파트 자리)에 비각을 짓고 공덕비를 1908년에 세웠으며, 비문에는 “절충 한광국 구폐불망비”라 했고, 뒷면에는 “융희 2년 무신 4월 각 포민 개립”이라 새겨져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묘지와 불망비는 도로학장공사와 아파트공사로 흔적도 남아있지 않으며, 묘지에 있던 불망비는 마땅히 둘 곳이 없어 방치되었다가 사하구 다대동 산24  현 윤공단 옆 ‘다대고을 첨사 윤덕비’옆에 놓여 있으며, 1908년에 세운 불망 개립비는 비각도 없이 원불교 교당 뒤편 뜰로 옮겨지고 청주 한 씨 다대포 10대 후손들이 살피고 있다

 

 

한광국불망비는 2기로 고마운 마음이 그만큼 컸다. 하나는 다대포 윤공단 경내에 있고 하나는 윤공단 맞은편 원불교 다대교당 뜰에 있다. 비석 제액과 세운 연도는 진리한광국구폐불망비는 1861년이고, 절충한공광국구폐불망비는1908년이다. 진리(鎭吏)는 다대진 아전, 구폐(捄弊)는 폐단을 바로잡음, 절충은 정3품 무신 당상관. 하급관리인 아전을 정3품 절충으로 과하게 격상한 것은 그만큼 고마운 마음이 컸음을 말해주고 있다.

한광국 구폐불망비는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산24번지 윤공단(尹公壇) 내에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98㎝, 너비 34㎝, 두께 13㎝이다. 대좌는 없고 비석의 상부는 둥글다.

 

비의 앞면에는 ‘진리 한광국 구폐 불망비(鎭吏韓光國捄弊不忘碑)’라는 비제(碑題)가 적혀 있고, 뒷면 음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새겼다.

“세 가지 썩지 않는 것 가운데 공로를 이루는 것과 덕을 베푸는 것이 그 둘을 차지하지만, 지난날 공로와 덕이 있었는데도 정당한 보답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 고을에는 미역밭이 있는데 이는 실로 부주(涪州)의 여지(荔枝) 공납……과 같은 병폐인지라, 이 때문에 포구의 여러 민가들이 거의 다 없어져 버렸다. 공이 이것을 병폐로 여겨 감영과 서울 관청에 진정하면서, 여러 번 빈사할 지경을 겪으면서도 비로소 조정의 허가를 받게 되었으니, 이때가 건륭 28년[1763] 가을 8월이었다.
[三不朽 立功立德 居其二 疇有功德而不酬 玆州之有藿田 固非連□□珠之往復 而實是涪荔武芽之瘡痏 數些浦戶 以此幾無 公病之 呈營呈京司 累濱死境 始蒙朝家允旨 乃乾隆二十八年秋八月也]
지금까지 그 혜택을 받은 것이 그 얼마인가? 우리 다대진의 관문 방비도 예로부터 후망(候望)하기 힘든 폐단이 있었는데, 이것도 모두 고쳐졌다. 그러므로 공의 공로와 덕은 산수(山水) 간에 가득하니 아마 현한(峴漢)의 비석…… 보다 더 오래갈 것이다. 숭정 기원 후 네 번째 신유년[1861] 8월 포구 주민들이 세우다. 이원복·왕선웅·이한동·김정지·김시천·김일원·권윤·김작사·김동완, 화주 최상운·김정원·전인복[至今受賜 爲如何哉 本鎭關防 古有候望之弊 幷此俱革 然則公之功德 在山在水間 殆壽於峴漢之碑也夫 崇禎紀元後四辛酉八月日浦民立 李元福 王先雄 李漢東 金正之 金時天 金一元 權允 金作沙 金東完 化主 崔尙運 金正元 田仁福].”

 

다대진 아전 한광국을 기리는 한광국 구폐불망비(韓光國捄弊不忘碑)는 조선 후기 천민 신분 포구어민을 평민으로 격상시키고 포구 주민들의 곽전 공납에 관해 알 수 있게 해 주는 소중한 자료이다.

[부산의 비석] 8. 다대포 한광국불망비

차례도 제때 못 지낸 천민 설움 씻어준 조선시대 민권운동가

입력 : 2015-09-20 [20:06:43] | 수정 : 2015-09-21 [14:53:41] | 게재 : 2015-09-21 (21면)


이복남









윤흥신 그리고 섣달그믐 신정다례 타파한 한광국

부산의 대표적인 향토사학자인 한건(70) 다대문화연구회 회장이 사하구청(구청장 이경훈)의 요청으로 지난 10년간에 걸친 다대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다대포 역사 이야기'를 펴냈다. 

한건 회장의 고희(古稀)를 겸해 열린 이날 출판기념회는 부산시민재단(이사장 박희두), 부산을 가꾸는 모임(회장 서세욱), 영광도서(대표이사 김윤환), 다대문화연구회 공동 주최, 사하구와 해군작전사령부 후원으로 지난 4일 오후 7시 동주대학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열렸다.

 

 


가을밤을 수놓은 출판기념회는 ‘다대표 역사 이야기’에 윤흥신, 정운 등의 장군이 등장한 덕분인지 해군작전사령부가 후원을 했는데 해군군악대의 부산갈매기, 소양강처녀, 울고 넘는 박달재 등의 흘러간 노래로 시작되었다.

이경훈 사하구청장은 축사에서 한건 선생을 잘 모시겠으며, ‘다대포 역사이야기’를 초·중·고생에게도 알리려고 현재 만화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한건 선생은 부산대 상대를 졸업했고 그동안 자동차 등의 무역업을 했다는데 부친 한상준(사망)의 뒤를 이어 지난 10년간 윤흥신 장군과 정운 장군의 향사를 모시면서 다대포의 역사와 한학을 공부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대포를 살다간 역사적 인물들을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발굴하면서 사하구청의 지원을 마다하고 ‘다대포 역사 이야기’를 사비로 출판해서 비매품으로 배포를 했단다. 덕분에 필자도 ‘다대포 역사 이야기’의 공짜로 얻었다.

‘다대포 역사 이야기’는 임진왜란의 명장 윤흥신 장군의 일대기와 그를 기리는 윤공단을 세우기 위하여 조엄, 조진관, 조인영으로 이어지는 풍양 조씨 3대 이야기, 정운 장군의 순의비 등 다대포를 살다간 역사적 인물들을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말하고 있다.

‘다대포 역사 이야기’는 제1장 윤공단 순절비, 제2장 풍양 조씨 3대, 제3장 임진왜란 개전일과 첨사, 제4장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민권운동가 한광국의 구폐 불망비에 대한 연구, 제5장 충장공 정운 장군의 다대포 향사 축문에 대한 영구, 제6장 사라졌거나 잊혀진 다대포 경치 등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대포 역사 이야기’를 읽어나가는 동안 필자도 잘 모르는 역사적 사실에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특히 저자인 한건 선생은 전공하지 않았음에도 역사나 한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고향 다대포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임진왜란의 개전일 등 윤흥신 장군에 대해서는 필자도 잘 몰랐던 사실들이라 흥미로웠다.

윤흥신(尹興信)은 고려 대원수 윤관 장군의 후손으로 파평 윤씨 완도공파에 속하는 양반의 후손이다. 조선조에 와서 조부 윤여필은 연산군을 축출한 중종반정의 정국공신이고, 아버지 윤임은 수군절도사를 거쳐 찬성을 지냈으며, 고모는 중종의 계비로 인종을 낳은 장경왕후이다.

그런데 중종 10년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고 한 달여 만에 산후병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2년 후 중종은 같은 파평 윤씨 집안인 윤지임의 딸을 제2계비로 삼았는데 문정왕후가 명종이 된 경원군을 낳자 윤씨 집안 간에 왕권을 다투는 암투가 벌어져 을사사화로 연결되면서 윤흥신의 기구한 인생은 시작되었다.

1545년 윤흥신이 여섯 살 때, 인종이 죽고 경원군이 보위에 올라 명종이 되자 을사사화로 윤임과 16살이 넘는 아들 3명은 사사되었으나, 할아버지 윤여필은 공신이며 80세의 고령이라 5년형을 받고 윤흥신은 아직 어려서 16살이 될 때까지 관노로 살게 되었다.

1567년 명종의 뒤를 이은 선조는 을사사화에 살아남은 사람들을 사면 복관하였는데, 선조 10년 윤임이 복관되면서 윤흥신도 32년간의 종살이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었다. 다음해인 선조 11년 윤흥신은 공신의 후손이라는 자격으로 무과별시로 과거 급제하여 선조 13년 진천현감을 제수 받았다. 

선조 15년 윤흥신은 사헌부에 불려가 문초를 받게 된다. 이유는 윤흥신이 글을 모른다는 것이었는데 결국은 그의 부친 윤임에 대한 평판 때문이었다. 윤흥신은 10년 가까운 관원생활에서 이런 일이 계속되자 우의정 유성룡 대감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씀 드리고 동생과 함께 조용히 지낼 수 있는 벽지로 보내줄 것을 부탁한다. 

선조 23년
“윤흥신을 당상 정충장군으로 하여 다대첨사에 명하노라.”

선조 24년 1월 윤흥신은 첨사영 다대포에 다대 첨사로 부임하였는데 1년여의 세월이 흐른 선조 25년(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다음날 윤흥신 첨사는 장렬히 전사하게 된다.

제4장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민원운동가 한광국 구폐불망비(韓光國 救弊不忘碑)에 대한 연구이다. 

조선 영조 때 다대포 사람 한광국의 상소에 의해서 정월 초하루 아침에 신정다례를 지내던 신정관아망배제도(新正官衙望拜制度)는 폐지가 되었으나 섣달그믐날 제사를 지내는 풍습은 아직도 남아 남아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섣달그믐 신정다례 풍습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그 이유를 모른 채 ‘우리 집안은 옛날부터 그렇게 지내오고 있어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포구를 중심으로 옛 어민과 뱃사람들의 후손이 모여살고 있는 전통마을에는 아직도 이 풍습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한건 선생은 지금까지도 섣달그믐 신정다례를 행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금부터라도 구 폐습을 폐기하고 앞으로는 정월 초하루에 올바른 신정다례를 지내 줄 것을 제안하고 있다.

 ‘다대포 역사 이야기’에서 한건 선생이 밝힌 한광국 구폐불망비(韓光國 救弊不忘碑)에 대한 내용을 보면 섣달그믐 신정다례는 조선 초기부터 시작된 모양이다.

불교 국가인 고려에서 유교와 유학을 근간으로 하는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면서 고려에서 지배세력이었던 승려와 절을 사회에서 격리시키고자 엄격한 신분제도를 시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 사회는 전 국민을 반상(班常)으로 나누었다. 반에 속한 사람은 귀족계급이었고, 상에 속한 일반 국민은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구분하였는데, 사농공상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연히 천민으로 귀착되었다. 그러나 농업을 중시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인식으로 상민임에도 물일하는 사람들은 천시하여, 어부나 수군까지 천역에 포함시켰다. 

조선시대 천역(賤役)이란 관청에서 허드레 일을 하는 하급 노비, 형을 집행하는 하급 병사, 지방관청에서 잔일을 하는 하급 노비, 봉수대의 봉군, 역참의 역졸, 조운창의 수군, 수영의 수군 등의 7가지 직업을 천역이라 하고 이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칠반천역이라고 했다. 

천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정월 초하루 아침에, 자신이 전직 종사자임을 표시하는 표를 하고 관아에 모여 고을 사또에게 예를 올려야 했다. 천역인 사람들도 조상제사는 지내야 했는데 정월 초하루에는 사또에게 예를 올려야 하므로 어쩔 수 없이 신정 하루 전인 섣달그믐에 조상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며, 이 풍습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의 천역에는 관아에 메이지 아니한 자유직업인이라도 선원이나 어업조사자, 수군 등 물일하는 사람들은 출신에 관계없이 천민대우를 받았다. 이를 인간차별로 본 사람이 있었으니 조선 영조시대의 한광국이었다. 

한광국은 다대포 사람으로 과거를 보지 않은 백운거사인데 한학에는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광국은 다대포 관아에서 일을 보게 되었는데 다대포에는 대부분이 물일하는 사람들이라 새해가 되면 섣달그믐에 신정다례를 지내고 새해아침에는 고을 사또에게 망배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 같은 사회제도에 분노를 느꼈던 것이다.

한광국은 여러 차례 서울을 방문하여 상소문을 올린 결과 영조 39년(1763년) 8월, 다대진에서부터 구 폐습 즉 천역들의 정월 초하루 새벽에 사또에게 망배하는 폐단을 혁파한다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 일이 전국적으로 시행하게 되자 이에 감격한 물일하는 사람들이 한광국의 공덕을 기리는 불망비를 그의 사후 100년에 걸쳐 두 차례나 세운 것이 오늘 날까지 다대포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구폐불망비(救弊不忘碑)란 구폐(救弊) 즉 구습(舊習)의 폐해(弊害)를 바로잡았으니 후세 사람들이 잊지 않도록 이런 사실을 적어서 비석을 세웠다는 것이다.

한건 선생은 한광국의 구폐불망비(救弊不忘碑)의 내용을 증명하면서 한광국은 구폐인 섣달그믐의 신정다례를 혁파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민권운동가라고 했다. 
 



그리고 제5장에서는 정운 장군의 다대포 향사에 대한 축문 및 순의비 비문 등을 해설했다.

한건 선생이 해설 한 정운 장군의 순의비 첫 장만 옮겨 보자.

東萊之沒雲臺者 故鹿島萬戶 贈兵曹判書 鄭公運殉義之地也
동래의 몰운대는 녹도만호에서 사후 병조판서로 추증 된 정운 공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곳입니다.

‘다대포 역사 이야기’는 부산을 가꾸는 모임의 서세욱 회장이 편집을 했는데, 서세욱 회장의 편집후기에서도 한건 선생은 한학 실력이 출중하다고 되어 있다.

한문으로 되어 있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충렬사지, 난중일기, 일본외사(日本外史) 등을 우리들이 읽을 수 있도록 번역하고 해설하여, 다대포를 살다간 역사적 인물들을 스토리텔링으로 엮어 주신 한건 선생에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글을 몰라서 파직 당했던 윤흥신은 왜 한글 즉 언문을 쓰지 않았을까. 섣달그믐 신정다례의 폐습을 철폐한 한광국은 칠반천역을 위해서 노력한 민권운동가인데 왜 한글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칠반천역들이 그 어려운 한문을 알기나 했을까. 정운 장군의 순의비도 전부 한문이니 일반 국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하지는 않았을까.

http://www.hsnwel.or.kr/gnuboard4/bbs/board.php?bo_table=board_column4&wr_id=569
기사입력: 2011/10/11 [11:33]  최종편집: ⓒ 문화저널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