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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 이야기

“죽은 문화재 보고 ‘야 미치게 아름답네’ 할 줄 알아야 해요”

유홍준(62) 명지대 교수가 최근 답사기를 들고 10년 만에 독자 품으로 돌아왔다. 연속 드라마로 치면 ‘시즌 2(Season two)’의 시작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권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 편은 5월 중순 출간된 이후 ‘서울의 지가’를 올리고 있다. 열흘 만에 서울 주요서점에선 주간베스트 종합 10위권에 진입했다. 5권까지 팔린 책만 해도 260만권. 6권 출간과 더불어 1~5권의 개정판도 출시됐다. 대체 이 시리즈가 이렇게 인기를 잃지 않으며 장수하는 비결은 뭘까.

이번 답사기에도 그의 독특한 글 향기가 가득하다. 남이 보지 못했던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능력, 인생을 균형감 있게 바라보는 관점, 곳곳에 숨어 있는 흥미로운 에피소드와 술술 읽히는 글쓰기 같은 것들이 그의 특장이다.

특히 문화유산과 얽히고설킨 사람 얘기가 흥미롭다. 문화유산을 지키고 가꾸며 혹은 남이 모르는 깨달음을 얻은 채 살아가는 ‘상수(上手: 고수)’들에 대한 얘기는 구미를 돋운다. 경복궁 근정전 앞뜰의 박석(薄石)이 지닌 가치를 발견한 관리소장, 광주비엔날레 대상 수상작의 의미를 천연덕스럽게 해석해내는 촌로, 지게의 의미를 몸으로 알려준 70평생 농사꾼, 노비 출신의 비천한 신분으로 경회루를 설계 시공한 당대 최고의 건축가 박자청 같은 이들이 그런 고수들이다.

인생도처유상수

경복궁 관리소장의 에피소드는 흥미로운 반전이고, 역설이다. 2004년 9월 그가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문화재청장 임명장을 받은 뒤 경복궁 ‘초도순시’를 갔을 때의 일이다. 그가 대뜸 “소장님, 경복궁은 언제가 가장 아름답습니까”라고 묻자 당시 관리소장이던 박연근씨는 그에게 이런 말을 해준다.

“청장님, 비 오는 날 꼭 근정전으로 와 박석 마당을 보십시오. 특히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여기에 와보면 빗물이 박석 이음새를 따라 제 길을 찾아가는 그 동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물길은 마냥 구불구불해서 아무리 폭우가 쏟아져도 하수구로 급하게 몰리지 않습니다. 옛날 분들의 슬기를 우리는 못 당합니다.”(‘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가운데)

박석은 말 그대로 얇고 편평한 화강암판으로 두께는 보통 4치(12㎝)이고 넓이는 구들장이나 빨래판의 두 배 정도 되는 돌을 말한다. 이 박석은 근정전의 월대와 전정, 종묘의 진입로 및 정전과 영녕전의 월대 등 여러 곳에 쓰였다. 그런데 현장에 가서 보면 박석은 크기도 일정치 않고, 표면도 약간 울퉁불퉁하다. 이를 두고 마감을 깔끔하게 하지 않는 우리 건축의 폐단이라며 불만을 토로하는 이가 많다. 더욱이 누가 바닥에 깔린 그런 박석을 눈여겨봤을 것인가. 그러나 유홍준 교수는 여기서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선’의 미학을 발견하고, 이것이 월대의 수직 수평선, 근정전 처마의 가녀린 곡선과 환상적으로 어울리고 있다는 것을 ‘포착’해낸다. 거기에 관리소장이 경험으로 발견해낸 미감(美感)이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다.

“그동안 박석 자체가 갖고 있는 고유한 기능과 미학을 폄하해왔는데, 이것을 복권시키고 싶었어요. 문화재청장으로 있던 당시 깨진 박석이 많았는데 이를 구할 길이 없었어요.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한 결과 강화에 박석광산이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그걸 채취해 2010년 8월15일 경복궁 광화문 월대 복원에 사용하게 됐답니다. 박석의 부활이었지요.”

‘반 학자, 반 딴따라.’

유홍준 교수는 자신을 그렇게 불렀다. 1990년대 초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전국에 답사열풍을 불러일으켰고, 미술사학자를 넘어 인기 강사, 문화재청장, 아름다운가게 이사 등으로 활동 폭을 넓히며 열정적 삶을 살아온 자신에 대해 스스로 붙인 꼬리표다. 베스트셀러의 비밀은 그의 학자적 깊이에서 오는 걸까, 아니면 그의 ‘딴따라(tantara: 트럼펫 소리란 뜻으로 연예인을 얕잡아 부르는 말)’적 재주에서 오는 걸까.

6월7일 서울 명지대 연구실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민예품과 고가의 미술서적들, 서류 등 연구 흔적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칸막이 한쪽에 걸린 신학철의 그림 ‘지게’의 인상이 강렬하다. 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농군의 지겟단 위에 진달래와 나비가 따라붙었다. 유 교수는 ‘슬림형’ 담배를 끝도 없이 피웠다. 글을 쓰거나 진지한 대화를 할 때는 긴장해야 하기 때문에 담배를 피우게 된다고 했다. 자신이 포착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전할 때는 담배를 낀 그의 손가락이 제법 흔들렸다.

유홍준 교수는 답사기 6권에 경복궁 근정전 앞마당에 깔린 박석의 가치를 재조명했다.

죽은 문화재에 생명력 부여

유 교수는 죽어 있는 문화재를 끄집어내 생명력을 부여하는 힘을 가졌다. 게다가 사람들이 눈길 두지 않던 문화재급 꽃이나 나무, 동물들을 등장시켜 깊은 인상을 안겨주기도 한다. 합천 가회면 오도리의 시도기념물 이팝나무, 대조사 꽃사슴 해탈이와 진돗개 복실이, 부여 농군의 지게….

“문화유산을 하나의 물질로만 보게 되면 굉장히 생경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것과 같이 어우러졌던 인간이나 에피소드는 유물과 유적을 더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오 헨리의 소설 ‘마지막 잎새’는 그리니치빌리지에 살고 있는 가난한 화가의 따뜻한 인간애를 그리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분위기는 다 잊어버리고 한 늙은 화가가 담장에 마지막 잎을 그려 넣는 에피소드만 기억하게 돼요. 답사기에서도 소설과 영화처럼 에피소드 처리를 잘해야 하거든요.”

철저한 계산의 산물

▼ 그것을 의도한다는 건가요?

“일종의 작가적 구성이 필요한 거지요. 유능한 작가와 감독은 에피소드 처리에 대단히 능숙한 사람들입니다. 글을 쓸 때도 좋은 에피소드가 있으면 글 쓰는 맛이 납니다. 그런 게 없을 때는 글이 굉장히 빡빡해집니다. 특히 문화재의 아름다움을 얘기할 때는 기존에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이미지에 겹쳐지게 비유하면 제법 설득력이 생겨요.”

그가 답사기 1권에서 고선사탑과 석가탑을 비교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그는 장중한 고선사탑은 글래머 스타 같아서 배우 소피아 로렌 같은 느낌을 주고, 우아하고 귀족적 느낌의 석가탑은 그레이스 켈리나 잉그리드 버그만 같다고 썼다.

“문제는 제가 비유하는 것들이 다 옛날 스타, 옛날 정서를 작동시키는 것들이어서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정보를 담지 못한다는 겁니다, 허허. 제 책의 독자 가운데 중년 이후가 많은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인터뷰 도중 마침 이날 오후 유 교수가 미술사학과 4학년 ‘문화유산 교육론’ 수업에서 자신의 글쓰기 지론을 밝힌다는 얘기를 듣고 그의 수업을 청강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이라는 건축물을 어떻게 축조했는지 그 개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책은 철저한 계산의 산물이었다. 먼저 그는 이 책이 전국을 대상으로 한 답사기라는 점에서 내용 구성상 지역적 안배를 염두에 뒀다. 서울 경기도에서 경복궁, 충청도 부여, 전라도 선암사, 경상도 거창·합천, 경북 도동서원, 강원도의 낙산사를 새로 썼는데, 이것은 이번에 낸 1~5권 개정판에 넣었다. 구체 소재는 궁궐, 서원, 양반집, 사찰, 관아. 한 개의 장(章)은 대략 200자 원고지 100장 안쪽이다. 단편소설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각 장이 단편과 분량도 비슷하지만 세밀한 플롯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플롯에 들이는 공은 아주 특별하다. 이는 한때 그가 문학청년이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미술평론가인 그는 글쓰기는 잘 짜인 구성에서 나와야 감동과 재미가 극대화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답사기 6권에서 도동서원을 소개하는 글을 보자. 우선 그는 어떤 형식으로 써도 들어가야 하는 부분, 즉 서원의 건축적 특징과 그 주인 한훤당 김굉필에 대한 이야기를 마련해뒀다. 그 다음 주인공과 관련된 일, 곧 도동서원에서 일어났던 특별한 사건이나 사상적 의미를 조명하려 했다.

“그런데 특별한 게 눈에 띄지 않았어요. 결국 한훤당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중심으로 서술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동서원의 임자인 그가 어떻게 문묘배향의 첫 인물이 되고, 스승이었던 점필재 김종직과 헤어지는 과정 등이 흥미로운 요소이지요. 스승과 제자의 헤어짐은 사실 지금 생각해도 울림이 있는 이야기로 이 시대와 겹쳐집니다. 당대에 중요한 위치에 있던 지식인 점필재가 변절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개인의 안일을 위한 게 아니라 사회적 선을 실천할 수 있는 한 방편으로 생각을 조금 바꿨을 뿐이었지요. 이를 판단하는 것은 사실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사건에 대한 해석을 직접 하지 않고 은근히 내세우면서 퇴계 이황과 한문학자인 송재소 성균관대 명예교수님이 언급한 부분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렇게 인문학적 내용이 갖춰진 겁니다. 만약 이 부분이 빠졌다면 그저 서원의 건물 이야기에 그쳤을 수도 있지요.”

남이 발견하지 못한 진주

스승과 제자의 결별 사건의 대강은 이렇다. 점필재가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조정에 건의하는 일이 없자 김굉필이 이를 비난하는 시를 지어 올렸다. 그러자 점필재가 ‘권세에 구구하게 편승하고 싶지 않다’는 시로 화답했고, 그 뒤 두 사람이 갈라섰다는 기록이 남효온의 ‘사우명행록’에 나와 있다.

“점필재를 옹호하고 싶다는 말을 쓰고 싶었지만 끝내 쓰지 못했어요. 제가 그런 말을 썼다면 또 후대는 저를 비난하지 않을까요? 후대 사람들은 꼿꼿하고 군소리 없고 딱 부러지는 것을 원하거든요. 그래도 현명한 독자는 이 글을 천천히 읽을 적에 이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되새김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글의 주요 소재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 뒤 그는 글의 시작(프롤로그)과 끝(에필로그)에 사용할 에피소드에 대해 고민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식사할 때 입맛을 돋우는 전채요리 같은 것이다. 이것이 감칠맛 나면 글을 끝까지 읽게 된다.

“학생들을 데리고 갔을 때 있었던 일화를 쓸까, 아니면 답사회원들과의 일화를 쓸까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대구시각장애인협회 회원들에게 답사 안내를 해주겠노라고 약속하고 그것을 지키지 못한 일화가 생각났어요. 그래서 그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문화유산 답사를 하게 한다는 것이 어불성설 같지만 촉각과 청각을 위주로 한 답사도 특별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기승전결 가운데 시각장애인 이야기를 기와 결로 장치해두고, 서원에 대한 설명과 가는 길의 풍광, 서원의 역사, 주인에 대한 역사적 평가 같은 글의 뼈대가 될 부분들을 선정했습니다. 그 다음 살을 붙이는 작업이 에피소드 처리였습니다. 이것도 남이 미처 포착하지 못한 이야기들이어야 좋습니다. 마침 도동서원은 돌조각들이 무척 아름다워 그것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나갔지요.”

유 교수는 남이 지나친 부분에서 색다른 것을 끄집어내야 좋은 글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특히 지식욕을 자극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면 독자들이 필자의 안목에 신뢰를 갖게 된다고 한다.

“저는 건축으로 치면 설계도를 아주 많이 고쳐서 시공하는 방식의 글쓰기를 합니다. 이번 답사기도 잡지에 연재하던 글을 묶은 것이지만 한 편의 글을 두 편으로 쪼개는 등 완전히 수리하듯 썼어요. 마지막 교정 때는 100여 장의 글을 한 호흡에 다 읽어보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소파에 앉아서 전화도 받지 않고 한번에 끝까지 읽어봐야 해요. 아무튼 핵심은 미리 조사를 다 한 뒤에 기승전결로 글을 재배치하는 것입니다. 특히 저는 에필로그에 대한 아이디어가 구체적으로 만들어지면 글을 아주 기분 좋게 끝낼 수 있습니다. 신문글은 첫 문장이 중요하고요.”

자신이 마무리한 뒤에도 자문이 필요한 부분이 있을 경우 유 교수는 전문가에게 의뢰해서 오류를 바로잡기도 한다. 이번 답사기 ‘순천 선암사’ 편에서는 꽃과 나무를 많이 언급하고 있다. 그는 ‘궁궐의 우리 나무’를 펴낸 박상진 교수에게 비판적 열독을 의뢰했고,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았다고 한다. 또 선사시대부터 발해시대까지 다룬 ‘한국미술사강의1’을 출간하기 전 그는 시대별로 후배 전공자들에게 비판적 열독을 의뢰해 상당한 분량을 수정할 수 있었다.

“아놀드 하우저가 ‘문학과 예술의 사회학’ 원고를 완성한 뒤 하퍼스 출판사에 보냈을 때 이 출판사는 그 원고를 보수적 미술평론가 허버트 리드 경에게 보냈답니다. 반대 논리를 가진 사람에게 의견을 구한 것이지요. 그런데 리드 경이 이 원고를 읽고는 ‘이 사람의 입장은 나와 정반대이지만 원고 자체는 훌륭하다’는 평을 했답니다. 비판적 열독은 글을 개선하는 데 주효합니다.”

은근한 MB 비판

이번 답사기의 첫 장 ‘경복궁’편을 보는 즐거움도 적지 않다. 경복궁에 대한 여러 가지 잘못된 고정관념들이 삽시간에 무너진다.

“정말 쓰기 힘든 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얘기입니다. 경복궁에 관한 책이 얼마나 많아요. 정색하고 이것을 쓰자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랍니다. 그래서 평소 제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던 내용들을 앞부분에서 다뤘습니다. 일반적으로 경복궁이 자금성보다 먼저 건축됐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몰라요. 자금성을 벤치마킹해서 경복궁을 지은 것으로 알고, 그 가치를 폄하해온 게 사실이에요. 또 박석의 가치도 무시됐었지요. 서울은 정도전이 설계하고 박자청이라는 분이 시공했는데, 건축가 박자청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조선 초 성균관 문묘, 경복궁 경회루, 창덕궁 금천교, 청계천 살꼬지다리 등을 시공했던 사람인데요. 경회루는 설계에서 시공까지 8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답니다. 경회루는 지금 아무리 좋은 장비를 동원해도 8개월 만에 완공하기 힘들어요. 그런데 박자청은 당대에는 노비 출신이라고 괄시를 받았습니다. 그런 분을 복권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6월7일 유홍준교수가 명지대 미술사학과 문화유산교육론 수업시간에 자신의 글쓰기 방법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경복궁의 심장인 근정전의 의미를 캐는 장면에선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은근한 비판이 날카롭다. 근정전은 말 그대로 ‘부지런하게 정사를 펴는 집무실(勤政殿)’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건물을 근정전이라고 지은 정도전의 말을 인용한다.

‘아침엔 정무를 보고, 낮에는 사람을 만나고, 저녁에는 지시할 사항을 다듬고, 밤에는 몸을 편안히 하여야 하나니 이것이 임금의 부지런함입니다.’

쉴 때는 편히 쉬는 것이 부지런함이라는 역설이 ‘부지런한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비판으로 읽히는 것은 지나친 해석일까. 또 ‘부디 어진 이를 찾는 데 부지런하시고, 어진 이를 쓰는 것은 빨리 하십시오’라는 정도전의 말을 인용하는 대목에선 인사에 실패해온 이명박 정부의 실정(失政)을 꼬집는 것 같기도 하다.

이처럼 그의 비판은 은근하다. 그의 책 제목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인데도 ‘나’가 빠져 있다는 느낌이 든다. 문화유산을 해석할 때, 혹은 자신의 주관적인 견해를 표현할 만한 자리에도 어김없이 다른 사람을 배치해놓는다. 미술사가 고유섭과 최순우, 혹은 서산마애불 지킴이 아저씨, 답사에 동반했던 학생과 친구가 의견을 내놓는다. 이에 한 평론가는 “화자인 ‘나’가 자신의 미학을 직접 전하는 방식이었다면 단명했을 텐데 자신은 빠지고 남을 통해 유물이 부각되는 방식의 글쓰기였기 때문에 이 책이 장수하고 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문화적 주주국가 자부심 가져야

예외적으로 그가 목소리를 높이는 부분이 있다. 한국인의 문화의식에 이중적인 면이 있다고 질타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그는 어떤 근거로 문화적 이중성을 나무라는 것일까.

▼ 이중성에 대한 설문조사나 객관적 증거가 있는지요? 아니면 몇몇 사례를 일반화한 것 아닌가요?

“드러내지 않고 있을 뿐 누구나 아는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안에 민족적 자부심과 문화적 열등의식이 뒤섞여 있어요. 심각합니다. 자부심도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한 자부심인지 모르고 갖고 있는 경우도 많고요. 오래된 피해의식에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열등의식이 더 심해졌어요. 해외로 반출된 문화재는 다 돌려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해외여행 중에 대영박물관의 한국관에 가면 초라하다고 투덜댑니다. 물론 외규장각 도서처럼 약탈당한 문화재는 돌려받아야겠지만 어떻게 몇 만점의 유물을 다 환수해올 수 있겠어요? 대영박물관의 유물을 다 돌려받으면 그것을 어떻게 하겠다는 거죠? 어느 독자는 우리 안에 있는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해 좀더 깊이 있는 얘기를 해줄 수 없느냐고 묻더군요.”

▼ 그럼 어떻게 그것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하나의 예가 있습니다. 2007년 강릉단오제가 유네스코(UNESCO) 무형문화재로 등재됐는데요. 당시 중국이 심하게 반대했어요. 단오는 원래 중국에서 유래한 것인데, 강릉단오제가 유네스코 무형문화재가 되면 중국이 원천국의 지위를 뺏기게 되니까요. 유네스코 연구소에서 ‘맞짱’ 토론을 했는데 그때 우리 측이 내세운 논리가 바로 이것이었어요. ‘단오가 중국에서 먼저 시작한 것은 맞다. 그러나 단오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뒤 대관령 산신제와 함께 1100년 동안 맥을 이어왔다. 만약 원천지를 따져서 이것의 의미가 부정된다면 유럽의 기독교 관련 무형유산도 유네스코에 등재하면 안 된다. 이스라엘 것만 등재해야 한다.’ 결국 우리의 논리가 먹혀서 유네스코 등재가 이뤄졌지요. 문화에 대한 민족적 자부심은 세계 최고, 최대의 의미보다 우리 나름의 독자성에서 나옵니다. 세계문화사를 보면 하나의 문화권은 중심부와 주변부 문화로 구성됩니다. 19세기 이전 동아시아 문화의 중심부는 중국이었고, 한국, 일본, 베트남 등은 당당한 지분을 가진 문화적 주주국가입니다. 이런 의식의 전환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유홍준의 한국미술사강의 1’ 서문에 보면 ‘한 나라의 문화적 정체성은 그 원천이 어디에 있는가로 가름되지 않는다. 유럽 중세의 기독교 문화를 아무도 유대문화의 아류라고 말하지 않는다. 중국의 불교미술이 인도에서 왔다고 낮게 평하는 일이 없다. 한국의 불교미술은 한국의 문화인 것이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 이중적 문화의식의 폐단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요.

“균형된 감각을 갖고 국제적 관계 속에서 문화유산을 볼 필요가 있어요. 그러지 않으면 자폐증이 되고, 결국 우리가 손해를 봐요.”

유 교수는 얘기하다 말고 한반도가 나오는 옛날 세계지도를 가져왔다. 17세기 지도에는 한반도가 마치 고구마처럼 생겼다. 동해를 ‘일본해(Sea of Japan)’로 표기한 지도도 있다.

“외교부와 국토해양부, 지리학회에서 동해의 영문표기를 ‘East Sea’로 정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세계지도에서 방위 개념의 ‘East Sea’가 받아들여질 수 있겠어요? 북해를 ‘North Sea’라고 표기하는 게 용인되는 것은 유럽의 북해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봐요. 동지나해의 영문표기는 ‘East China Sea’입니다. 우리도 ‘Eastern Sea of Korea’나 ‘Sea of Korea’로 하는 게 더 설득력 있다고 봅니다.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도 열린 자세로 전향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어요.”

‘문화재청 복원기구 필요’

답사기의 북한편도 펴낸 터라 그쪽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예상외로 그쪽의 인식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중국의 청동기는 BC 2000년경부터 시작됐어요. 그런데 지금 북한에선 BC 5000년에 북한에서 청동기가 시작됐다고 합니다. 그러면 북한의 청동기 문화가 왜 중국으로 퍼지지 않고 3000년 동안 막혀 있었어요?”

이번 책에는 문화재청장 시절에 겪은 이야기들도 조금 나온다. 문화재청장 시절 그는 경복궁 경회루를 일반인에 개방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낡은 광화문 현판을 떼자고 했고, 광화문광장 만들기를 추진했다. 2008년 2월 숭례문이 화재로 소실되면서 4년간의 공직 생활을 접었다.

▼ 문화재 관리자로서 아쉬웠던 부분은 어떤 것들인가요?

“행정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법령을 근거로 한 조치이고, 다른 하나는 예산 집행입니다. 법적 근거가 있으니 공권력이 생기고, 예산이 있으니 집행력이 생기는 건데요. 문화재보호법은 1963년에 만들어져 지금까지 수차 개정해오면서 누더기법이 됐어요. 그런데 문제는 국민소득 500달러도 되지 않을 때 만들어진 법이다 보니 2만달러 시대에는 맞지 않는 게 많아요.”

▼ 예를 들면요?

“사적으로 지정된 땅 등에 대해선 개인이 재산권 행사를 못해요. 옛날엔 개인이 억울해도 참았지만, 지금은 적당한 보상을 해주고 문화재로 지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보상금액이 많지 않아 집행하는 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래서 등록문화재라는 개념이 등장했어요. 예컨대 돌담길의 경우 돌담만 등록하고 그 주변은 장독대를 두든 뭘 하든 개인이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게 한 겁니다.”

▼ 제도적 허점이 많이 있군요.

“사실 청장으로 있으면서 가장 아쉽게 느낀 점은 문화재청이 문화재 복원기구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어요.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때 국가가 직접 운영하던 것들의 상당수를 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아웃소싱했는데요. 그러다 보니 복원 기술이 축적되지 않고 있어요. 문화재는 결국 품질의 문제인데, 여기에 경제논리를 갖다 대니 기술이 쌓이는 게 없습니다. 대부분의 문화재 보수업자들이 영세하다 보니 대규모 공사를 하는 데도 한계가 있어요. 공사금액이 1억원 넘어가면 조달청에서 발주하는데, 그곳에선 돈의 논리와 서류만으로 판단합니다. 돈이 들어도 품질을 높여야 한다는 게 요즘 민심인데, 결국 제도가 국민의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갈라진 광화문 현판, 문제는 시스템

▼ 문화재청장 시절 수의계약을 남발한다는 지적을 받았었는데요.

“공무원들은 절대 수의계약을 하려고 하지 않아요. 수의계약이 알려지면 바로 감사가 들어오거든요. 그런데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선 수의계약 방법이 좋을 때가 많아요. 그래서 저는 감사받는 것을 무릅쓰고 여러 차례 수의계약을 했습니다. 국회에서도 제가 그랬어요. 수의계약은 돈 먹지 않았다는 자신감이 있으니까 하는 거라고요. 뭔가 부정을 저질렀다면 오히려 감사 대상이 되지 않도록 교묘한 방법으로 입찰을 유도하지 않았을까요?”

▼ 지난해 광화문이 중건된 뒤 몇 개월 뒤 현판이 갈라져 물의를 빚었는데요. 왜 그런 나무를 사용했을까요?

“현판에 사용할 나무를 미리 준비했어야 해요. 옛날에는 아우라지강 뱃사공이 나무를 뗏목에 싣고 서울로 와요. 그동안 물을 잔뜩 먹은 나무를 그늘에서 3년간 말렸어요. 그것을 다듬어 사용했기 때문에 오래갔지요. 그런데 생목이나 다름없는 나무를 사용하다 보니 뒤틀리고 터질 수밖에요. 사실 문제는 안목보다 돈이에요. 또 시스템이고. 문화재를 복원할 때 나무뿐 아니라 기와, 단청 등 재료 문제가 아주 심각해요. 광화문과 숭례문에 전통적으로 사용해오던 춘양목을 썼지만 대들보는 캐나다에서 사온 다글라스 수종이 쓰였어요.”

유 교수는 청장 시절이던 2005년 전통건축 복원에 울진 소광리 금강송을 사용하기 위해 산림청이 관리하는 소나무밭 150만평을 문화재청으로 150년 뒤 이관한다는 업무협약을 이뤄냈다.

“경복궁 건청궁을 복원할 때는 문화재청이 직접 사업을 시행해 최고의 자재, 최고의 인력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문화재 복원은 질과 영속성을 따져야 합니다. 예산집행에서도 신뢰와 특수성을 인정해줘야 그것이 가능해요. 그런데 이것을 감안하지 않고 일반 시스템과 같이 하려니 어려운 겁니다. 이제 문화재 행정은 미적분으로, 지혜롭게 풀어야 합니다. 주먹구구식으로, 1차방정식으로 풀던 시기는 지났습니다.”

유홍준 교수가 답사객에게 부여 무량사의 주련을 해석해주고 있다. 주련에는 ‘크게 취해 거연히 춤을 추고, 싶어지는데/ 장삼자락이 히말라야에 걸릴까 걱정이 되네’ 라는 진묵대사의 시가 적혀 있다.

▼ 광화문 중건 공사 때 공사장 가림막으로 화가의 설치작품을 활용하는 아이디어는 어떻게 냈는지요?

“설치미술은 미술을 답답한 갤러리에 가두지 않고 일상의 공간에서 대중과 만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대중성을 갖고 있습니다. 광화문 철거와 중건 때 저는 그 공간이 볼썽사나운 곳이 돼선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전(前) 미술평론가’로서 설치미술을 가림막에 쓰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철거 2년간은 양주혜의 ‘바코드’가, 중건 3년간은 강익중의 작품이 쓰였지요. 강익중씨 작품은 가로 50m, 세로 25m의 초대형으로, 가격을 계산해보니 30억원이나 나왔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걱정했는데 강씨가 작품 대여형식으로 설치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의해와 그 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잘못 생각하면 설치했다가 버리는 가림막에 돈을 투자할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광화문이 중건되는 과정에도 그곳을 지나다니는 우리가 행복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강씨는 가림막에 썼던 작품을 가져다 일본 징용 조선인촌 우토르 마을에 설치한다고 했어요. 정말 인생도처유상수 아닙니까.”

문화재보호법에선 문화재를 ‘인위적이거나 자연적으로 형성된 국가적·민족적 또는 세계적 유산으로서 역사적·예술적·학술적 또는 경관적 가치가 큰 유·무형 문화적 소산 및 기념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문화재에 대한 그의 인식이 궁금했다.

‘야, 미치게 아름답네’

“100년 이상 된 유물 중에서 미술사적 역사적 가치를 가진 것을 일반적으로 문화재라고 합니다. 특히 건축 회화 조각 공예 부문이 대부분이죠. 50년 이상 100년 이하는 근대문화재라고 하고요. 100년 전의 회화나 조각, 공예는 남아 있는 게 많지 않아요. 그 시대의 장인적 노력이 들어가서 그 나름의 아름다움을 가진 것이 미술품으로 인정받고, 일상에서 사용됐던 것은 민예품입니다. 민예품 중에도 멋진 것이 많아요.”

▼ 역사적, 미술사적 가치는 누가 매기는 것인가요?

“미술사적 보편 가치라는 게 있어요. 몽고와 티베트의 색깔이 다르듯이. 고려불화의 가치도 그런 겁니다. 14세기에 제작된 150점의 고려불화는 세계에서 자랑할 만해요. 그러니 세계적 박물관들이 한 점씩만 갖고 있어도 명예롭게 여깁니다.”

▼ 그런 문화재를 보면 가슴이 뜁니까.

“뛰죠. 처음 봤을 때 놀라는 것도 있어요. 그 장인적 기교나 아름다움….”

그는 정말 심장이 빨리 뛰는 것처럼 말이 빨라지며 조교에게 ‘고려 국보전’ 책을 갖고 오라고 했다. 조교가 가져온 책의 책장을 넘기는 그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 그가 가리키는 사진은 화려한 문양의 금제 장신구다. 그가 책장을 넘기며 “야, 미치게 아름답지… 정말로” 찬탄한다.

“고려시대 때 의상 속에 들어 있던 장신구예요. 그런데 미술사에 제대로 언급이 되지 않고 있어요. 이게 4㎝밖에 안 돼요. 그런데 사실 어디에 썼는지 아직도 밝혀진 게 없어요. 처음 봤을 때 정말 놀랐어요. 이 비슷한 게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파리 기메박물관에도 있어요. 한국 미술사의 사각지대입니다. 지금 사용해도 정말 멋있지 않아요? 마치 에르메스 보석제품 같아요.”

▼ 무엇이 그리 미치게 하나요?

“아름다움이죠. 박물관이 이런 것들 많이 사서 일반인이 많이 보게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제가 갖고 싶은 것은… 저런 거지.”

그가 가리킨 것은 황새 모양을 한 기다란 촛대였다. 금속으로 만든 민예품이다. 기자의 눈에는 별반 매력이 없다.

“좋은 것을 갖고 싶은 것은 인간의 기본적 욕망입니다. 능력이 있으면 나도 하나 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정상이죠. 안목과 재력을 갖고 모은 유명한 컬렉션으로 이름이 남기도 해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을 지낸 브란디지는 샌프란시스코 동양미술관을 건립해서 그곳에 브란디지 컬렉션을 기증했어요. 간송 전형필은 10만석 재산을 문화재 수집에 썼고, 지금 우리가 간송미술관을 만날 수 있게 했어요.

요즘 장인정신이 없어져가고 있어요. 제 결론은 이래요. 문화는 소비자가 만드는 것이지 공급자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좋은 제품을 만들 때 그걸 사주는 소비문화가 있어야 좋은 작품이 계속 나오고, 장인정신이 살아납니다. 음악회에 관객이 많아야 좋은 연주자가 늘어납니다. 전시회가 북적거려야 미술문화도 일어나는 것처럼요.”

나무에 빠진 남자

조교가 ‘고려 국보전’ 책을 가져온 곳은 유 교수의 서재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서재는 대한민국 교수의 학교 서재 가운데 가장 구경할 만한 곳 같다. 값비싼 미술관련 서적이 2만여 권 정리돼 있다. ‘TV쇼 진품명품’의 감정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영복씨가 그의 서재에 대해 “돈으로 계산하기 불가능하다”고 감정했다고 한다.

“저에게 책은 세 부류로 나뉩니다. 직업으로서 읽어야 하는 책, 저술가로서 읽어야 하는 책, 그리고 일반 독자로서 갖고 싶은 책이 그것입니다. 정년퇴임하고 나면 일반 독자로서의 책꽂이를 갖고 싶어요.”

2년 반 뒤면 그도 정년을 맞는다. 요즘 그의 화두는 ‘유홍준의 한국미술사강의’ 집필이다. 1권(선사, 삼국, 발해 편)은 지난해 9월에 출간돼 호평을 받았다. 이 시리즈에 대한 그의 의욕은 답사기의 그것을 넘는다.

“대학원 미술사 세미나 시간에 한 학생이 ‘선생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같은 책은 나중에 쓰시고 나의 한국미술사강의를 쓰시면 안 됩니까?’라고 해서 충격을 받았어요. 아직 우리나라엔 미술사의 진정한 통사가 없어 학생들이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세계미술사 시리즈인 ‘펠리컨 미술사’(56권, 예일대 출판부)나 테임스 앤 허드슨 출판사의 ‘세계의 미술’(약 200권) 시리즈에도 아직 영어로 된 한국미술사라는 책이 나오지 않고 있어요. 기가 막힌 얘기지요. 지명도가 생기면 책임도 생기는 건데, 저의 사회적 책임은 바로 ‘한국미술사강의’ 집필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년 전에 현대편까지 완성할 계획이고요. 그 다음 한 권으로 된 입문서를 다시 쓸 생각입니다.”

퇴임 후 그는 농사짓고 나무 기르는 데 남은 생을 바칠 계획이다. 이미 부여에 ‘휴휴당(休休堂·쉬고 쉬는 집)’을 짓고 ‘5도2촌(1주일 중 5일은 도시에, 2일은 시골에서 지낸다는 말)’ 생활을 하고 있다.

“나무하고 살면 사람이 선량해진대요. 강아지는 시비를 붙어도 나무는 시비를 붙지 않으니까. 우리나라 정원에 알맞은 나무들을 보급하는 일을 하고 싶고, 나무처럼 살고 싶어요. 나이 들어서도 품위 있는 건 나무밖에 없잖아요.”



정현상 기자│doppel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