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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이야기

동래부지(東萊府誌)

사상지역의 옛기록을 인용할 때 자주 등장하는 '동래부지' 어떠한 책인지를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동래부지(東萊府誌)

 

형태사항 크기 세로 : 37.4   가로 : 26.4
판본 필사본
장정 오침선장(五針線裝)
수량 1책 99장
판식
재질 표지: 능화문황지(菱花紋黃紙), 본문: 저지(楮紙)
표기문자 한자
도설
인장정보 朝鮮總督府圖書之印 서울大學校圖書
서명정보

 

1740년(영조 16) 동래부사 박사창(朴師昌)이 편찬한 동래부의 읍지

 

목차

東萊府誌 : 目錄, 建置沿革, 郡名, 屬縣, 官員, 鄕任, 各面各里·遠近程道, 姓氏, 形勝, 山川, 古蹟, 風俗, 官舍, 樓亭, 廳舍, 倉庫, 官廨, 草梁公廨, 城郭, 關防, 烽燧, 學校, 祠廟, 驛院, 橋梁, 佛宇, 祈雨所, 堤堰, 人物, 孝子·孝女, 烈女, 別典功臣, 科第, 塚墓, 戶, 口, 田結, 土産, 穀物, 各廳武夫, 軍摠, 軍器[ 守城倉, 山城, 僧將軍器 ], 旗幟[ 牙兵, 軍官廳, 守堞廳, 武士廳, 吏奴作隊, 燕享時旗幟 ], [儀仗][ 本府各司儀仗, 草梁各司儀仗 ], 賦案, 大同, 貢物, 雜捧, 烟役, 人吏官屬雜差, 各色匠人, 各司 各處奴婢, 異聞, 官案, 善政碑, 生祠堂, 題詠雜著, 釜山子城碑銘

 

 

내용 및 특징
1740년(영조 16) 동래부사(東萊府使) 박사창(朴師昌)이 편찬한 동래부지(東萊府誌)이다. 서문에서는 박사창은 부사 이서우(李瑞雨)가 찬술(撰述)한 『장산후지(萇山後誌)』『동래승람서후지(東萊勝覽書後誌)』 두 책을 참고하고 읍인(邑人)들을 방문하여 얻은 것을 토대로 본서를 편찬하였다고 한다.


목차는 목록(目錄), 건치연혁(建置沿革)‚ 군명(郡名)‚ 속현(屬縣)‚ 관원(官員)‚ 향임(鄕任)‚ 각면각리(各面各里)․원근정도(遠近程道)‚ 성씨(姓氏)‚ 형승(形勝)‚ 산천(山川)‚ 고적(古蹟)‚ 풍속(風俗)‚ 관사(官舍)‚ 누정(樓亭)‚ 청사(廳舍)‚ 창고(倉庫)‚ 관청(官廨)‚ 초량공해(草梁公廨)‚ 성곽(城郭)‚ 관방(關防)‚ 봉수(烽燧)‚ 학교(學校)‚ 사묘(祠廟)‚ 역원(驛院)‚ 교량(橋梁)‚ 불우(佛宇)‚ 기우소(祈雨所)‚ 제언(堤堰)‚ 인물(人物)‚ 효자(孝子)․효녀(孝女)‚ 열녀(烈女)‚ 별전공신(別典功臣)‚ 과제(科第)‚ 총묘(塚墓)‚ 호(戶), 구(口)‚ 전결(田結)‚ 토산(土産)‚ 곡물(穀物)‚ 각청무부(各廳武夫)‚ 군총(軍摠)‚ 군기(軍器)‚ 기치(旗幟)‚ [의장(儀仗)]‚ 부안(賦案)‚ 대동(大同)‚ 공물(貢物)‚ 잡봉(雜捧)‚ 연역(烟役)‚ 인리관속잡차(人吏官屬雜差)‚ 각색장인(各色匠人)‚ 각사각처노비(各司各處奴婢)‚ 이문(異聞)‚ 관안(官案)‚ 선정비(善政碑)‚ 생사당(生祠堂)‚ 제영잡저(題詠雜著)‚ 부산자성비명(釜山子城碑銘) 순이다.


방리는 면(面) 단위이하에 이(里)와 동(洞)이 상세히 기재되어있는 점이 특색이다.

 

먼저, 읍내면(邑內面)은 동부(東部) 호현리(狐峴里), 충렬사리(忠烈祠里), 안락리(安樂里), 염창동(廉倉洞), 구향교동(舊鄕校洞), 사지동(蛤旨洞), 역동(驛洞), 임산동(林山洞), 당하동(堂下洞), 지동(池洞), 수문동(水門洞), 신향교동(新鄕校洞), 남문동변동(南門東邊洞), 서부(西部) 남문서변리(南門西邊里), 서문로상리(西門路上里), 노하리(路下里), 당동(堂洞), 옥미정동(玉味井洞), 대정동(大井洞), 서문외동(西門外洞), 범어동(凡魚洞), 야정동(野井洞), 객달동(客達洞) 등이다.

 

동면(東面)은 명장리(鳴莊里), 반여리(盤如里), 재송리(栽松里), 해운대리(海雲臺里), 우동리(右洞里), 중동(中洞), 좌동(左洞), 지경리(地境里), 석대리(石臺里), 신천리(新川里), 서동리(西洞里), 오륜대리(五倫臺里) 등이다. 남촌면(南村面)은 숭정리(崇亭里), 동부리(東部里), 서부리(西部里), 북문외리(北門外里), 남문외리(南門外里), 축산리(丑山里), 감포리(甘浦里), 칠포리(漆浦里), 포이포리(包伊浦里), 남천리(南川里), 대연리(大淵里), 석포리(石浦里), 분포리(盆浦里), 용당리(龍堂里), 감만리(戡蠻里), 우암리(牛岩里) 등이다.

 

동평면(東平面)은 고대리(古代里), 부현리(釜峴里), 감물리(甘勿里), 당리(堂里), 미요리(尾要里), 가야리(伽耶里), 부산성내리(釜山城內里), 범천일리(凡川一里), 범천이리(凡川二里), 좌자천일리(佐自川一里), 좌자천이리(佐自川二里), 두모포리(豆毛浦里), 해정리(海汀里) 등이다.

 

사천면(沙川面)은 상단(上端) 주례리(周禮里), 모라리(毛羅里), 괘내리(掛乃里), 덕포리(德浦里), 장문리(場門里), 엄광리(嚴光里), 하단(下端) 신초량리(新草梁里), 구초량리(舊草梁里), 대티리(大峙里), 목장리(牧場里), 감천리(甘川里), 독지리(秃旨里), 장림리(長林里), 서평리(西平里), 다대리(多大里) 등이다.

 

서면(西面)은 산저리(山底里), 여고리(余古里), 석사리(石寺里), 대조리(大鳥里), 거벌리(居伐里), 초읍리(草邑里), 양정리(羊亭里), 연지리(蓮地里), 범전리(凡田里), 전포리(田浦里), 만덕리(萬德里) 등이다.

 

북면(北面)은 부곡리(釜谷里), 선동(仙洞), 두구리(豆口里), 작장리(鵲掌里), 소산리(蘇山里), 남산리(南山里), 구세리(仇世里), 장전리(長箭里), 산성리(山城里) 등이다.


호구는 5,641호이고 인구는 19,099구이며, 남자 9,616구, 여자 11,625구이다. 전결은 전(田) 1,033결 21부 9속, 답(沓) 2,203결 41부 7속이며, 도합 3,236결 63부 6속이고 경자양안 기준이다. 호구와 전결을 감안한 읍세(邑勢)는 소규모 읍에 해당한다.


읍지의 서두에 박사창의 서문(序文)과 목록이 별도로 제시되어있으며, 특히 목록은 이례적으로 항목마다 번호까지 매겨져 있다. 과제(科第), 잡봉(雜捧)‚ 연역(烟役)‚ 부안(賦案) 등 항목명칭이 정조년간 표준화되는 양식과 다소 차이가 있다. 동래부사가 편찬을 주도하였으나 사찬읍지의 성격이 더 큰 것으로 보인다. 건치연혁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되, 후대의 변화상을 추가하였다. 관안(官案)에서는 1503년(연산군 9)~1739년(영조 15)까지 동래의 수령을 다루고 있어서, 중앙에서 파견한 인물들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해볼 수 있다. 특히, 건치연혁과 더불어 살펴보면, 1547년(명종 3) 부사(府使)로 승급되었고, 1592년(선조 25) 현령으로 강등되었으며, 1599년(선조 32) 다시 부사로 승급된 사실이 확인된다. 아울러 실록에서는 18세기부터 관찰사급에 해당하는 내백(萊伯)이라는 새로운 별칭도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들을 비추어볼 때 동래부의 위상변화를 가늠해볼 수 있다.


특히, 초량공해(草梁公廨) 항목에는 왜관(倭館)이 기록되어있다. 왜관은 일본사절과 상인이 조선에서 외교와 무역을 하였던 곳이다. 조선전기에는 제포(현 웅천), 부산포(현 부산), 염포(현 울산) 세 곳에 왜관이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왜관은 폐쇄되었다가 일본의 지속적인 요구로 1607년(선조 40) 두모포왜관이 개관하였다. 그러나 협소하고 선착장 시설이 좋지 않아 1678년(숙종 4) 용두산공원과 복병산 일대 약 10만평 부지에 새롭게 초량왜관을 지어 이전하였다. 이후 동래부는 실질적으로 대일외교 및 무역을 관장하였다.


본 읍지와 영조후반대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와 비교해보면, 1740년(영조 16)1757년(영조 33) 이후의 읍지편찬 항목간 변화양상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각면각리’ 및 ‘호구’는 ‘방리(坊里)’로, ‘원근정도’는 ‘도로(道路)’로, ‘성곽’은 ‘성지(城池)’로, ‘사묘’는 ‘단묘(壇廟)’로, ‘관사․관해․청사․초량공해’ 등은 ‘공해(公廨)’로, ‘토산’은 ‘물산(物産)’으로, ‘관원․속현․향임’ 등은 ‘관직(官職)’으로, ‘관방’은 ‘관애(關隘)’로, ‘불우’는 사찰(寺刹)로, ‘효자․효녀․열녀․별전공신․과제’ 등은 ‘명환(名宦)․인물(人物)’로, ‘전결’은 ‘한전(旱田)․수전(水田)’으로, ‘부안’은 ‘전세(田稅)’로, ‘곡물’은 ‘조적(糶糴)’으로, ‘공물’은 ‘진공(進貢)’으로, ‘제영잡저’는 ‘제영(題詠)’으로, ‘잡봉’은 ‘봉름(俸廩)’으로, ‘군총’은 ‘군병(軍兵)’으로 용어가 바뀌었다. 또한 ‘기우소’, ‘총묘’, ‘곡물’, ‘각청무부’, ‘군기’, ‘기치’, ‘의장’, ‘연역’, ‘인리관속잡차’, ‘각색장인’, ‘각사’, ‘각처노비’, ‘이문’, ‘관안’, ‘선정비’, ‘생사당’, ‘부산자성비’ 등 상세한 지역정보는 사라진 반면에, ‘목장(牧場)’, ‘진보(鎭堡)’, ‘균세(均稅)’ 등 중앙에서 지방통치를 위해 제시한 새로운 표준항목이 추가되었다.

자료적 가치
이 읍지는 18세기 중반 동래부의 상황을 살펴보는데 유용한 자료이다. 관련 자료로는 19세기에 편찬된 2종의 동래부읍지가 추가로 전한다. 대체로 본 읍지가 가장 먼저 편찬되어 후대 읍지의 모본(母本)이 되었고, 1899년 『동래부지(東萊府誌)』〈想白古 915.15-D717〉가 지역전통을 살려서 증보하고, 같은해에 편찬된 『동래부읍지』〈奎 10877〉는 이것을 다시 전국지(全國誌) 차원에서 간략히 재정리한 듯하다. 결국 이 자료는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여지도서』보다 먼저 만들어졌기에, 『여지도서』에서 새롭게 표준화한 편목(編目)을 확인해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19세기에 제작된 이후의 다른 읍지들과도 비교하여 통치정보의 변화양상을 살펴보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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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사항
참고문헌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솔, 1996), 『국역 여지도서』(디자인흐름, 2009), 『조선시대 읍지의 성격과 지리적 인식에 관한 연구』(양보경, 서울대학교 지리학과 박사논문, 1987)
집필자 김백철


출처: 지리지종합정보(서울대학교 한국학연구원)

http://kyujanggak.snu.ac.kr/geo/insp/insp_view.jsp?uci=GK11904_00&c1=01&c2=&c3=&fType=&sType=&s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