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산공원 비석에 '화재 막아달라'부적이…
2010-06-02 [11:00:00] | 수정시간: 2010-06-02 [14:36:56] | 1면
▲ 용두산공원에서 발견된 용두산신위비 뒷면. 화(火)자를 수(水)자가 에워싸고 있는 부적이다(점선 안). 김경현 기자
주영택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 원장은 부산 중구 용두산공원 부산타워 기념품관(팔각정) 뒤편 담장 밑 숲 속에서 비석 3기를 발견했다. 그 중 특이한 것은 부적이 새겨진 '용두산신위(龍頭山神位)' 비. 높이 136㎝ 너비 49㎝ 두께 9.5㎝의 비석 앞면에 세로로 '용두산신위'가 새겨져 있고, '관청에서 허가했다'는 뜻의 '관허(官許)'도 음각돼 있다.
향토사학자 주영택 원장
1955년 세운 비석 3기 발견
水火豫防 음각 신령께 기원
재미있는 건 비석의 뒷면. '부산수화예방(釜山水火豫防)'이란 글 아래에 부적이 음각돼 있는 것. 사각 테두리 안에 화(火)자를 가운데 써놓고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돌아가며 수(水)자가 불을 에워싸고 있는 형상이다. '불의 성'을 둘러싼 해자처럼 보인다. 화재예방 부적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황하수급 사해용왕(黃河水及 四海龍王)'이란 글도 보이는데 황하의 물과 사해의 용왕을 동원해서라도 불을 막겠다는 기원의 주문이다. 비가 세워진 날은 '단기 4288년 정월 15일', 1955년 정월 보름날이다. 비를 세운 이는 문기홍. 경남 도지사 이상룡, 경찰국장 최치환, 부산시장 최병규의 이름도 적혀 있다. 민관합동으로 비석에 부적을 새겨 용두산 산신령께 무탈을 빌고 기원한 특이한 비석이다.
2기의 비석은 5m 간격으로 좌우에 서 있다. 그 중 하나에는 55년 4월에 세운 것으로 용두산 산신령에게 불이 나지 않도록 기원하는 제사와 기도대회를 열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또 다른 비석은 문기홍의 송덕비.
50년대 초반 부산에선 큰불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53년 1월 국제시장 대화재, 53년 11월 부산역전 대화재에 이어 54년 용두산 피란민 판자촌에서 일어난 불로 용두산은 풀 한 포기조차 볼 수 없는 민둥산이 됐다. 비석을 세운 건 바로 이 용두산 대화재 이후. 주 원장은 "용두산에 두모포진지 비석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공원을 샅샅이 뒤지다가 접근이 쉽지 않은 이곳에서 이 비석을 찾았다"고 했다.
이상헌 기자 ttong@
- 또다른 비석 세운 이유는?
- 2010-06-24 [09:49:00] | 최종수정: 2010-06-24 [15:05:48]
용두산공원 화재예방부적이 새겨진 비석(본보 6월 2일자 1면 보도) 바로 옆에서 비석이 추가로 발견됐다. 이전에 발견된 3기를 포함해 1955년에 세운 비석이 4기로 늘어났다. 새로 확인된 비석은 숲속 옹벽에 바짝 붙어 있고, 대부분이 땅 속에 묻혀 있어 그동안 발견되지 않았다.
새로 발견된 비석은 '국조단군'이란 글과 함께 안중근, 민영환, 이준 열사의 이름이 새겨진 '보국충신비'. 55년 4월 10일에 세운 비석이다. 화재예방부적이 새겨진 용두산신위비는 그해 정월에 세워졌고, 몇 달 만에 또 다른 비석을 세운 것이다.
용두산공원서 비석 추가 발견
열사 이름 새겨진 보국충신비
호국정신으로 화마 극복 추정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50년대 초반 부산은 화마로 몸살을 앓았다. 53년 1월 30일 4천260채의 가게가 잿더미가 됐던 국제시장 대화재, 53년 11월 27일 영주동 피난민 판자촌에서 시작된 부산역전 대화재에 이어 54년 12월 10일 용두산피난민 판자촌에서 난 불로 용두산은 나무 한 그루 찾아볼 수 없는 민둥산이 돼 버렸다.
'용두산신위비'가 세워진 건 용두산 대화재 직후. 당시 부산일보 기사에 따르면 '화마는 물론 수난(水難)까지 예방하여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신념으로 수화예방기도회라는 단체가 탄생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수화예방기도회는 문기홍이란 이가 회장으로 있던 단체다.
하지만 비석을 세우고 난 뒤에도 화마는 기승을 부렸다. 55년 3월 2일 부산역 구내에 정거 중이던 객차 내에서 대참사가 발생했다. 승객이 가져온 인화물질이 폭발해 순식간에 객차가 불바다로 변했고, 42명의 애꿎은 목숨이 숨졌다.
이에 따라 3월 9일과 한식인 4월 6일에 기도제를 지내고 4월 10일 '보국충신비'를 세웠던 것.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건 일제에 저항한 순국열사들의 이름을 새긴 점이다.
지역 사정에 밝은 이영근 씨와 함께 이 비석을 발견한 주영택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 원장은 "구국충신들의 호국정신을 담아 부산을 화마로부터 구해내고자 했던 것"이라고 추정했다. 주 원장은 비석 건립과 기도대회를 주도한 문기홍이 '단군시보사' 사장의 직함으로 발행한 '국조단군지'를 경성대 정경주 교수로부터 입수했다. 국조단군지는 유림과 단군의 이름으로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논지를 담고 있다.
부적비석으로 막지 못했던 화마를 선조의 힘을 빌려 막으려 한 노력은 성공했을까.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
<관련글>
광화문 해태(해치)상
광화문 문 앞의 해태상 |
광화문 앞에 수문장처럼 우두커니 앉아있는 돌짐승 한 마리.
수많은 사람들이 이 앞을 지나가지만 대부분이 무심코 스치고 만다.
하지만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보라. 이 돌짐승도 우리에겐 보통이
상의 의미를 지니고 다가온다.
이 짐승의 이름은 해태. 불을 먹어치운다는 전설상의 짐승이다.
때문에 수차례에 걸쳐 화재를 당한 경복궁을 화마로부터 보호하기 위
해 이 자리에 놓여졌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내용인즉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등 조선의 모든 궁궐들이 하나같이 잦
은 화재로 큰 손실을 입었던 바, 이는 관악산이 서울의 조산으로 화산
(火山)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관악산 상봉에 우물을 파고
그안에 구리로 만든 용을 넣고, 광화문 앞 좌우에는 해태상을 앉혀 관
악산쪽 화기를 제압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해태상을 궁궐앞에 세운 것은 현재의 왕이 성군임을 칭
송하는 의미와 함께 신하들이 궁궐을 출입할 때 마음을 가다듬고 공손
한 자세를 갖게 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신하들은 해태상을 경계로 안쪽에선 말이나 탈것에서 내려야 했던 것
이다.
해태의 원래 이름은 '해치'라고 한다. 중국 요임금시대에 세상에 태어
났으며 한 개의 뿔만 가진 짐승으로서 양의 모습을 닮았다.
대단히 영물스러워 사람의 시시비비를 가려내는 재주가 있는데, 나쁜
사람을 보면 그 뿔로 받아넘기는 정의감이 있다고 한다.
때문에 옛날 성군을 도와 좋은 일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광화문앞의
해태상은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석공 이세욱(李世旭)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일제가 경복궁을 뜯고 조선총독부를 세우는 와중에 여
기저기 방치되기도 했다.
1923년 10월경에 일본인들이 총독부 건물을 짖느라 부산을 떠는 와중
에 해태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는데, 당시 이를 지켜본 한 신문기자
는 이런 글을 남겼다.
"근년에 와서 넘어가는 저녁 햇볕이 눈물 젖은 옛 대궐에 비치고 북악
의 쓸쓸한 바람이 너의 낯을 스쳐갈 때 말없이 우두커니 서있는 네 모
양은 참으로 쓸쓸하구나 ...
(중략)
긴 세월 동안 유순하면서도 위엄 있게 경복궁을 지키고 섰던 네가 무
슨 죄가 있어 이리 저리 밧줄에 묶여 끌려 왔느냐. 말 못하는 너는 시
키는 대로 끌려 왔을 뿐이겠지" (동아일보. 1923. 10. 23일자)
민족의 수난과 함께 한 해태상이며 오늘날도 민족의 역사를 응시하듯
부리부리한 눈과 굳게 다문 입으로 세종로 1번지를 지키고 있는 해태
상인 것이다.
해태의 원래 자리는 광화문 바로 앞이 아니라 문에서 4,50미터쯤 떨어진 사헌부 앞이었다. 사진은 원래 자리에 서 있는 해태를 잘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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