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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이야기

‘부산 바로 알기’ 열정 · 발품 60년

 

‘부산 바로 알기’ 열정 · 발품 60년

부산 바로 관찰 · 이해 · 기록했다

 

향토사 연구가 주영택에게 부산 지방사의 길을 묻다

 

사진·문진우

 

부산 해운대에서 나고 자라 역사학을 전공했다. 교직에서 40년 동안 청소년 역사교육에 헌신했다. ‘부산 바로 알기’에의 뜨거운 열정과 끊임없는 발품으로, 지난 60년 부산 전역을 보고, 이해하고, 해석했다. 오직 확실한 사료(史料)를 바탕으로, ‘우리 고장 역사의 발자취’ ‘해운대 역사와 문화를 만나다’ ‘부산의 속살 명소를 탐하다’ ‘발로 찾은 부산의 전설 보따리’ 같은, 온 세대가 함께 할 역작들을 저술했다.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 주영택(朱永澤 · 76) 원장의 평생 스토리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그 준엄한 경고에도 역사 인식은 크게 부족한 시대. 척박한 연구 환경 속에서 평생을 향토사 연구에 매달려 온 그 저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전체 역사의 맥락 속에서 부산향토사가 갖는 위상과 의미는 어떠한가? 도시화의 열풍 속에서, 부산사람들이 알아야 할 역사는 무엇인가? 향토사 연구가의 특출한 삶 속에서 그 답을 찾는다.

 

주 영 택

 

1938년 부산 해운대 출생. 부산대 사학과, 경성대 교육대학원 역사교육 전공. 2000년 동백중학교 교장 퇴임. 부산시사 편찬위원, 부산시 지명위원, 부산100경 자문위원, 부산시 동상 · 기념비 및 조형물 건립 심의위원 역임. 현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장, 국사편찬위원회 부산사료조사위원, 부산교통공사 도시철도역명 심의위원, 녹조근정훈장(2000), 해운대구민 애향대상(2004). 저서 ‘우리 고장 역사의 발자취’(1998) ‘가마골 역사 이야기’(2000) ‘해운대 역사와 문화를 만나다’(2010) ‘주영택이 발로 찾은 부산의 전설 보따리’(2013) 등.

 

부산 향토사 대가의 ‘부산 뿌리찾기’에 바친 한 평생

‘철길 따라 해운대 80년 역사 속으로 들어가다’-동해남부선 스토리텔링 걷기. 부산 한 유력 신문의 최근 ‘주말&엔’ 섹션 특집 제목이다. 동해남부선 폐선부지 활용방안을 둘러싼 논란이 뜨거울 즈음, 이 신문은 그 폐선부지의 속 깊은 역사에 주목한 것이다. 지역언론이 과거의 ‘역사’에 마음먹고 주목했다? 정말 반갑지 않은가?

 

이 특집 현장에서, 향토사학자 주영택 원장이 해설을 맡았다. 담당기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선생을 모셨냐고. 해운대구청에 ‘해설을 할 만한 분’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향토사를 잘 알고 계신 분’ ‘해운대에서 자라 해운대 역사책까지 내신 분’으로 추천하더라. 해당 구청이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향토사학자가 있다, 또한 자랑스럽지 아니한가?

 

Q.‘철길 따라 해운대 80년 역사 속으로 들어가다’, 그 특집,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기사였다. 동해남부선 우동-송정 구간, 이 철길의 역사적 가치부터 말해 달라.

 

“동해남부선, 부산과 경북 포항까지 147.8㎞ 길이의 철도 노선이다. 이 철로의 부산?해운대 구간은 1934년 일제 강점기 때 뚫렸고, 부산 도심에서 동해안 일대를 연결하던 이 철로의 일부, 곧 해운대 노선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거다. 이 구간, 해운대의 온전한 역사의 현장이다. 3만년 전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산 유적이 있는 곳, 부산의 ‘뿌리’라고나 할까.”

 

 

① 최근 한 신문의 ‘철길 따라 해운대 80년 역사 속으로 들어가다’ 특집에서 현장 설명을 하고 있는 주영택 원장. 그는 지금 기차가 다니지 않는 우동-송정 구간 역시, 일제 자원수탈기 속의 역경 속을 산 선조의 역사가 오롯이 남아있다고 강조한다.

② 2003년 금정구청 관광안내 도우미 연수교육에서 강의하는 주영택 원장.

1997년 한창 답사에 바쁠 때 금정산 답사 중.

 

동해남부선 철길, 역경 속 산 선조 역사 오롯이

Q. 해운대에서 나고 살았으니, 해운대 철길에 대한 생생한 기억도 많겠다. 향토사의 맥락에서 그 기억들을 풀어 보면-.

 

“동해남부선은 당시 부산 도심과 해운대를 철도로 연결하려 건설한 것이다. 표면적 이유, 1930년대 해운대 지역이 온천, 골프장 같은 관광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해운대로 유람 오는 일본인을 수송할 교통수단이 필요해서였다. 국내 철도의 탄생이 그러하듯, 동해남부선 역시 일제의 자원수탈을 위한 거다. 그런 역경 속을 산 선조의 역사, 오롯이 남아있다. 학생에게는 통학열차로, 보따리 상인에게는 상품을 내다 파는 이동수단으로, 출근하는 직장인에게는 통근열차로, 관광객에게는 해운대 해안선과 해, 달을 보기 위한 관광열차로 …. 우린 이 80년의 역사를 기억하고 되새겨야 한다.”

 

왜, 지금, 향토사학자를 만나는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단재 신채호 선생의 깨우침이다.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다. 특히 동북아 정세는 지금 격변을 거듭하고 있다. 일본은 하루가 멀다 하고 역사왜곡을 거듭하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 역시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청소년의 역사인식? 무지의 걱정을 넘어 심각한 수준이다.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고 대응해야 한다. 우리의 역사와 영토는 우리 스스로 지켜가야 한다.

 

 

향토사 이론-현장 겸비한 재야(在野)대가

Q.‘그 추억을 품은 금정이야기’ 4권 전집을 10년 만에 마무리했다.

“사진집 ‘그 추억을 품은 금정이야기’를 냄으로써 2005년 ‘전설-그 사연이 숨 쉬는 금정 이야기’, 2006년 ‘지명-그 터에 얽힌 금정 이야기’, 2009년 ‘역사-그 역사가 묻힌 금정 이야기’에 이어 전집 4권을 마무리했다. 4권 분량만 해도 1천 쪽이 훌쩍 넘는다. 향토사나 지역사는 교과서에도 잘 나오지 않는다. 직접 발품을 팔아 현장의 흔적을 담아냈다. 이번 4권에는 금정산, 금정산성, 전통사찰, 자연 · 역사 · 고분 · 문화유산, 금석문, 자연마을에 관한 사진을 싣고 있다. 지난 1957년부터 55년간 금정 지역에 묻혀 있거나 잘못 이해해 온 역사 문화를 바로잡고 재조명하기 위해 하염없이 셔터를 누른 사진 5천여 장을 추리고 또 추린 것이다.”

 

Q. 부산 토박이라도 부산 향토사에 관심을 가지기란 쉽지 않다. 전공 · 직업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 ·

“부산대 사학과를 나와 1965년부터 부산 경남지역 교육계에서 국사를 가르쳤다. 그것만으로 끝났으면 ‘향토사’라는 장르와는 담을 쌓고 살았을지도 모르지.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며 자연스레 의문이 들더라. 우리 고장의 역사는 어떤가? 아는 게 별로 없더라. 그러니 가르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고 …, 하는 수 없이 주말이면 아내와 도시락 싸들고 언양 양산 울산의 산들과 유적지들 탐사를 시작했다.”

 

Q. 직접 발로 뛰며 향토사를 연구하는 일, 만만치 않았을 터이다. 대체 부산의 향토사에 어떤 매력이 있기에 평생을 바쳐 연구 하는가?

“향토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고장의 내력과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이 숨어있는 보물단지다. 하지만 막상 파들어 가면 남아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 어쩔 수 있나. 발로 뛰어 그 흔적들을 찾아내고 어르신들 얘기를 채록하며 얻은 조각그림들을 하나하나 짜맞춰가는, 무슨 퍼즐게임 같은 거다. 아무리 힘들고, 또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부산의 역사를 찾아내고 또 바로 세운다는 일념 하나로 버텨왔다.”

 

Q. 부산의 역사가 다른 지역과 비교해 특별한 점이 있나?

“특별하다. 부산은 우선 ‘사포지향(四包之鄕)’ 아닌가. 명산 명강 명해의 삼포(三包)에, 온천까지 가진 고장이다. 한 마디로 ‘사람 살기 좋은 곳’의 전형이다. 부산사람이 처음 자리 잡은 곳, 곧 금정산과 해운대 장산 기슭에 구석기시대부터 선조가 살았다는 것은 그만큼 먹을 것, 머물 곳, 움직일 교통수단이 많았다는 얘기다. 부산의 해양문화 역시 그런 바탕 위에 자리 잡아 온 거다. 지금 부산사람의 특질이라 할 끈질긴 생명력과 저항성 같은 것은 다른 지역에선 참 찾기 어렵다. 국가 · 민족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초개처럼 바치는 그 애국애족 정신 역시 ‘동래 혼(魂)이라 할 만하다. 우리, 이런 역사를 바로 알고, 긍정적 기질을 키워가야 한다.”

 

학교현장, ‘국사’ 경시에 역사 스토리 나눌 기회 전무

Q. 최근 학생들의 역사의식에 많은 문제가 있다. 3 · 1절과 6 · 25전쟁을 잘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거나 …, 이렇듯 역사에 무심한 현상, 어떻게 생각하나?

 

“교육제도의 결함 탓이다. 내 교사 시절 학교마다, 추우나 더우나 주례(週例)조례를 했다. 조례, 교장의 훈화를 듣고, 전교생의 질서교육을 가다듬으며, 고학년-저학년이 만나는 소중한 기회다. 교장이 훈화를 하며, 때에 맞는 역사 스토리도 많이 전파했다. 지금, 월례조례도 갖지 않는 학교가 많다. 국사도 사회과의 한 부분으로 편성하고 있고, 학생들이 국경일이든, 지역역사든 무슨 역사를 알 수 있겠나?”

 

Q. 부산사람이라면 꼭 알아둬야 할 역사가 있나?

“당연하다, 임진왜란의 역사부터 똑바로 알아야 한다. 임진왜란 전 기간 동안 줄기차게, 끈기 있게, 민 · 관 · 군이 함께 저항한 곳은 부산뿐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자금을 가장 많이 낸 곳도 범어사다. 6 · 25전쟁 때 외지 사람을 한껏 포용한 곳, 부산이다. 그런 부산의 끈기와 강단, 배려와 포용의 정신을 ‘부산정신’으로 알고, 오늘을 살며 내일에 대비해야 한다.”

 

왼쪽 사진은 2010년 용두산공원에서 찾아낸 부산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부적비인 충신비. 오른쪽 사진은 젊었을 적 역사 유적지 현장답사 중 한 때.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고장의 내력과 조상들의 숨결이 살아있는 그 향토사 연구, 아무리 힘들고, 또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부산의 역사를 찾아내고 또 바로 세운다는 일념 하나로 버텨왔다고 자부한다.

 

“향토사 연구, 밥 되지 않더라도 건강 닿는 한 계속할 것”

부산 향토사가 주영택, 그는 이제 나이가 들어 직접 발로 뛰며 자료를 찾고 해석하고 정리하는 작업도 쉽지 않을 터, 언제까지 부산의 역사를 찾는 일을 계속할 계획일까? 그는 단문으로 대답한다, “건강이 닿는 한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Q. 앞으로 할 일은?

“많다. 시간이 모자란다. 우선 ‘발로 찾은 전설 보따리’ 2권을 더 내야지. 그리고 꼭 내가 해야 할 일도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 민족의 많은 부동산이 조선총독부로 넘어간 역사를 정리해야 한다. 일제는 1910년부터 9년 동안 우리 반도에 대한 토지조사사업을, 1918년부터 11년 동안 임야조사를 했다. 그 결과 공부기록이 명확하지 않는 토지며 산(山) 모두 총독부로 넘어갔다. 해운대 장산, 와우산, 금정산에서 ‘이산(李山)’ 표석, 금정산에서 ‘산(山)’ 표석들도 두루 발굴했다. 그런 역사를 정리해야 한다.”

 

그는 후세의 향토사 연구를 위한, 후대의 역사인식을 깨우치기 위한 책무를 다할 결심이다. 그는 표현한다, “60대에 시속 60㎞로, 70대에 시속 70㎞로 달렸으니 80대엔 시속 80㎞로 달려야 하리라”고. 그는 덧붙였다.

 

“‘차용범이 만난 부산사람’이 나를 만나고 기록한다는 얘길 듣고 가슴이 벅차더라”고. “그 인터뷰 준비를 하느라 우왕좌왕했더니 허리 통증이 오더라”고, “근데 정말 오늘 인터뷰를 진행하니 그 허리통증도 싹 나은 것 같다”고-.

 

짐작컨대, 그는 세칭 역사학계의 (제도)밖에서 향토사학자로 활동하며 부산 향토사에 평생을 걸고도, 그 제도권과 주변의 야박한 인식에 서운함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부산 역사학계에서 ‘재야’의 영역이 넓고 깊은 것은 부인하지 못할 터, 그래서, 그는 향토사의 이론과 현장을 잘 융합시켜 온 ‘부산 향토사 연구의 주춧돌을 놓은 이’로 후세에 길이 남으리. 그가 다짐해 온 그 ‘버킷 리스트’ 역시, 그의 평생 열정과 자취를 새삼 확인시켜 주며, 부산사람으로 하여금 부산의 기억들을 나눌 수 있도록 감동을 주는 든든한 바탕일 터이니-.

 

차용범 편집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