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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 이야기

칠(漆)

 

칠(漆) 인체에 무해한 무공해 천연 도료, 옻칠과 황칠

칠(漆)은 옻나무의 수액으로, 천연도료다. 동식물의 기름과 글리세린 등을 섞어 만든 페인트에 밀려 위상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칠은 인체에 무해한 무공해 도료로 오랜 세월 동안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널리 사용되어왔다. 칠과 관련된 우리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자.

옻칠을 사용한 사람들

옻나무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 일본, 베트남, 태국, 인도 등에서 자란다. 따라서 이 지역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옻나무에서 채취한 인체에 무해한 무공해 도료인 옻칠을 이용해왔다. 중국의 경우는 절강성 하모도(河姆渡) 신석기 유적에서 완전한 모습을 갖춘 주칠목기(朱漆木器)가 발견된 바 있다. 전설적인 인물인 순(舜)임금이 칠기를 만들어 사용했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고, 기원전 1세기경에 만들어진 한나라 마왕퇴 무덤에서는 칠기로 관을 만들어 시체를 썩지 않도록 건조시켜 미라처럼 보존시킨 예도 있을 정도로, 중국에서는 칠기가 널리 사용되었다.

중국에서는 조칠(彫漆- 금속이나 나무 그릇의 표면에 옻칠을 한 다음, 그 위에 산수, 인물, 화조 따위를 새기는 기법)기법이 발달하였고, 일본은 마키에(蒔繪- 장식 면에 옻으로 문양을 그리고 그 위에 금, 은, 주석가루나 색 가루를 뿌려 굳히는 방식)라는 칠공예 장식법이 발전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나전칠기(螺鈿漆器), 황칠(黃漆)등이 대표적인데, 이처럼 동아시아의 각 나라마다 특색있는 칠문화가 발전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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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총에서 출토된 칠기찬합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칠기에 그려진 동물 그림

칠의 장점

옻은 옻나무의 진으로 끈적거리는 성질이 있으므로, 칠은 장식 재료를 기물과 접착시켜 다양한 공예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기물에 칠을 하면 부패를 막아주는 방부성, 방수성이 생긴다. 나무로 만든 그릇은 물이 새어나오기 쉬우나, 칠을 하면 물이 스며들지 않으니 썩지 않는다. 팔만대장경 등이 원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나무에 옻칠을 했기 때문이다. 물을 담아 두어도 되니, 국물 등을 담는 그릇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또한 칠은 세균을 막아주는 방충작용을 한다. 따라서 칠기가 식기로 널리 사용될 수 있었다. 칠을 하면 기물에 윤기가 생겨 표면이 매끄러워지고, 광택이 나므로 고급스러움을 줄 수 있다. 흑색, 갈색, 황색, 붉은색 등 여러 색을 낼 수도 있다. 또한 칠은 열(熱)과 산성(酸性)에도 강하며, 전자파를 흡수하는 장점도 갖고 있다. 최근에는 살균력이 좋다고 알려져 옻칠을 한 도마나 국자, 수저 등의 상품도 이용되고 있다.

칠의 단점을 굳이 꼽자면, 낮은 생산량과 높은 가격이다. 옻나무에서 옻을 생산하는 양이 많지 않기 때문에, 궁궐의 나무 기둥에는 옻칠이 아닌 단청을 했던 것이다.

한국 고대의 칠기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칠기(漆器)는 기원전 3세기경 충남 아산 남성리 유적, 2세기경 전남 함평 초포리 유적, 황해도 서흥 천곡리 석관묘 등에서 발견된 칠기 파편 등을 들 수 있다. 보다 완전한 칠기로는 기원전 1세기에 만들어진 창원 다호리, 광주 신창동 유적 등에서 발견된 칠기 그릇과 칼집 등을 들 수 있다. 칠기는 고조선-삼한 시대부터 널리 사용되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의안군(義安郡)에 속한 칠제현(漆隄縣)은 원래 칠토현(漆吐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칠원현(漆園縣)”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곳은 칠기 유물이 출토된 창원시 다호리와 그리 멀지 않은 함안군 칠원면, 칠서면, 칠북면 일대다. 이 지역은 약 2천 년 전부터 옻나무를 재배하고 칠기를 제작하던 곳이라고 할 수가 있다.

옻나무의 산지로 특히 유명했던 곳은 평안북도 태천 지역이다. 때문에 평안도 일대에서는 기원 전후시기 많은 칠기류가 생산된 바 있다. 칠기의 원류라고 할 중국 지역보다 당시 이곳에서 더 발전된 칠기가 생산되기도 했다. 옻나무가 많았던 고구려에서는 장천1호분을 비롯한 여러 무덤에서 옻칠을 한 나무관의 파편이 발견된 바 있다.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해 관에 옻칠을 하여 사용했던 것이다. 무용총, 각저총 벽화에서 보이는 식기류, 소반도 검은색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것 역시 칠기라고 볼 수 있다.

국보 제 165호로 지정된 무령왕 발받침(武寧王 足座). 양 발을 올려놓아 관 속에 시신을 고정시키기 위해 쓰인 것으로, 전면에 검은색 옻칠을 하고 얇은 금판으로 꽃모양을 장식하였다.

백제의 경우에도 523년에 죽은 무령왕의 무덤에서 옻칠을 한 왕과 왕비의 목관과 두침, 발 받침대가 발견된 바 있다. 백제에서는 검은 칠과 붉은 칠을 고루 사용했고, 여러 가지 문양을 그려 넣기도 했다.

신라의 경우에는 천마총, 황남대총,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식리총, 호우총, 은령총, 안압지 등에서 옻칠을 한 잔(盞), 고배(高杯)형 그릇, 합(盒-둥근 그릇), 원반(圓盤), 빗(梳), 함(函) 등 다양한 종류의 칠기가 출토된 바 있다. 특히 신라에서는 ‘칠전(漆典)’이란 관청이 있어, 옻칠의 생산과 관리를 감독했던 것으로 보인다. 칠전은 경덕왕(742〜765)때 식기방(飾器房)으로 고쳤다가 다시 칠전이 되었다. 칠전이 식기방이란 이름을 한때 사용했던 이유는, 궁중에서 칠을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이 식기류였기 때문일 것이다.

834년 신라 흥덕왕은 사치를 금하는 칙령을 내렸는데, 4두품에서 일반 백성까지는 금ㆍ은ㆍ놋쇠로 만든 제품의 사용과 주리평문( 朱裏平文- 문양이 새겨진 붉은 색 칠기 그릇)의 사용을 금지하였다는 내용이 있다.당시에 칠기는일반 백성들이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귀족들의 사용품이었다.

고려의 나전칠기

고려는 상감청자, 청동은입사정병, 나전칠기(螺鈿漆器) 등을 만든 공예 수준이 높은 나라였다. 청자에 쓰인 상감기법, 청동은입사 기법, 그리고 나전칠기 기법은 모두 그릇에 이색 물질을 박아 넣어 문양을 나타내는 장식 기법인 상감(象嵌)이란 공통된 방법을 사용한다. 나전칠기는 기물 위에 굵은 헝겊을 바르고 그 위에 오려낸 자개(螺)를 붙여 꾸민(鈿) 후 옻칠을 덧입히는 방법 등이 사용된다.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람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에는 고려 기병의 안장은 나전으로 만들며, 그릇에 옻칠하는 일은 그리 잘하지 못하지만 나전 일은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만하다고 칭찬한 바 있다.

고려의 나전 기술이 뛰어나자, 원나라의 세조(쿠빌라이, 재위:1260〜1294)의 황후가 대장경을 넣어 둘 함(函)으로 고려의 나전함을 요구했다. 이에 고려는 1272년 전함조성도감(鈿函造成都監)을 설치하고, 나전으로 장식된 경전을 넣는 함(螺鈿經箱)을 만들어 원나라에 보기도 했다.

고려는 중상서(中尙署)와 군기감(軍器監)에 칠기 장인들을 배치하여 나라의 수요를 충당하게 했다. 조선시대에도 경공장(京工匠)과 외공장(外工匠)에 칠기 장인들이 있어, 칠기 공예품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사용해왔다.

금은 그릇 대신 칠기를 사용한 조선

1407년 1월 19일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성석린(成石璘)은 시무(時務) 20조를 태종에게 올렸다. 이 가운데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은 궁궐과 국가 행사에서 쓰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국에 명령을 내려 일체 사용을 금지하고, 나라 안이 모두 사기(沙器)와 칠기를 쓰게 하자.”는 주장이 들어있다. 사치를 방지하자는 것인데, 태종은 이를 받아들여 의정부에서 논하여 시행하라고 지시했다. 조선은 금과 은의 채굴을 극히 억제했던 나라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금, 은 그릇의 사용이 크게 줄고, 대신 사기, 칠기, 그리고 놋그릇이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칠을 하면 기물의 색은 검거나 갈색이 된다. 그런데 붉은 빛과 황금빛을 내는 고급 칠도 있다.

1425년 공조(工曹)에서는 앞으로 각사(各司- 조선시대 서울에 있던 관청을 통틀어 이르던 말)에서 만드는 그릇에 진상하는 붉은 칠기 그릇(朱漆器) 이외는 모두 주홍색을 없애고 검은 옻칠을 사용하라고 지시했었다. 1516년 중종은 팔도 관찰사에 사치를 숭상하는 풍습을 개혁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때 언급된 사치품 가운데는 붉은 칠기 그릇이 들어있을 정도였다. 주칠을 만들 때 들어가는 주석가루는 수입품이기 때문에, 민간인의 사용을 억제했던 것이다. 주칠보다 더 귀한 칠기도 있었다. 그것은 [대명일통지], [청일통지] 등 중국의 여러 서적에 조선의 대표적인 특산품으로 기록된 황칠(黃漆)이다.

중국에서 탐낸 황칠

황칠은 옻칠의 한 종류로 황금빛이 나는 천연도료다. 황칠을 나무와 쇠에 칠하면 좀과 녹이 슬지 않고 열에도 강해 “옻칠 천년, 황칠 만년”이란 말이 있을 정도다. 또한 안식향(安息香)이라는 향기가 있어 사람의 신경을 안정시키는데도 큰 역할을 한다. 황칠은 황칠나무에서 채취한다. 황칠은 말레이반도, 중남미 아메리카에 약 75종, 우리나라에는 1종이 분포하는 한국의 특산 식물이다. 이 나무는 완도, 강진, 해남, 장흥, 해남, 제주도 등 전남 서해안 지역에서 자라며 높이가 15m에 달한다. 6월에 즙을 채취해서 기물에다 칠을 하면, 색이 마치 황금과 같아서 사람들의 눈을 부시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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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지방의 해안가와 섬에서 볼 수 있는 황칠나무. 나무껍질에 상처가 나면 노란색의 액이 나오는데 이것을 도료로 사용하여 황칠을 한다.

황칠은기의 모습. 금속에 황칠을 할 때는 금속을 불에 달구어 칠하며, 목재에 칠하면 무늬가 선명하게 나타난다.

[삼국사기]에는 626년 백제 무왕이 당에 사신을 보내 명광개(明光鎧- 황칠을 한 갑옷)를 주면서, 고구려를 견제해달라고 요구한 기록이 있다. 당나라는 백제가 준 갑옷을 입고 645년 고구려와의 전쟁에 나섰는데, 이때의 기록에는 “백제가 금칠을 한 갑옷인 명광개를 당나라에 주었는데, 갑옷의 광채가 하늘에까지 빛났다”라고 하고 있다.

[구당서] ‘백제’ 조에는 “백제에는 섬이 세 개가 있으니 그곳에서 황칠이 난다. 6월에 칼로 그어 수액을 채취하니, 색깔은 황금색이다.”고 했다. 당나라에서 이렇게 백제의 황칠을 특별히 기록한 것은, 당나라에서는 구할 수 없는 백제의 특산물이었기 때문이다.

2006년 발굴된 경주 계림 북편에 위치한 황남동 123-2 유적에서는 건물지 옆에 의도적으로 파묻은 인화문 토기의 바닥에 남은 유기물질 덩어리에서 황칠의 흔적이 확인된 바 있다. 7세기경 신라시대에 지진구(地鎭具-지진을 제압하려는 의도로 묻은 물건)로 묻어둔 토기에 황칠 덩어리를 담아둔 것은 황칠이 특별한 의미를 가진 물질임을 보여준다. 또한 황칠이 신라에서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고려도경]에는 “황칠은 본래 백제에서 났으나, 지금은 중국의 절강 사람들이 이를 일러 신라칠이라 한다.”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칠은 본래 백제의 특산품이었으나, 나중에 신라가 그 지역의 점령한 후 당나라에 특산물처럼 팔다가, 이 전통이 고려시대까지 이어졌음을 볼 수 있다.

황금색이 ‘황제’, ‘부귀’, ‘중앙’ 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 이를 유난히 좋아했던 중국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탐내는 물건 가운데 하나가 황칠이었다. 따라서 황칠을 조공품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고려는 1276년 중금지유(中禁指諭) 김부윤(金富允)을 원나라에 보내 황칠을 바쳤고, 1282년에도 좌랑(佐郞) 이행검(李行儉)을 원나라에 보내어 황칠을 바쳤다.

황칠의 고갈

원나라에 이어 명나라도 조선에게 지속적으로 황칠을 달라고 요구해왔다. 명나라에 황칠을 조공품으로 보내야 했던 조선은 황칠이 생산되는 전남 해안가 지역민들에게 공납을 요구했다. [조선왕조실록] 1794년 정조 18년 12월 25일의 기록에는 호남위유사(湖南慰諭使) 서영보(徐榮輔)가 황칠과 관련된 글을 임금께 올린 것을 볼 수 있다.

“완도는 황칠이 생산되는 곳이라서, 전라도의 감영, 병영, 수영 및 강진, 해안, 영암 등 3읍에도 모두 연례적으로 바치는데, 왕왕 더 징수하는 폐단이 있다. 근년 이래 나무의 산출은 점점 전보다 못한데 추가로 징수하는 것이 해마다 더 늘어나고, 관에 바칠 즈음에는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고 뇌물을 요구하는 일이 많아져 서로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 되고 있다.”

귀한 특산품인 황칠을 지방 관청에서 서로들 징수하려고 하다 보니 백성들은 공물 수탈을 피하고자 나무를 베어내고 있는 곳도 감추었다. 결국 제주도, 완도, 보길도 등에서 자라던 황칠나무는 계속 줄어만 갔다.

다산 정약용의 시문집 [다산시선]에는 ‘황칠(黃漆)’이란 제목의 시가 실려있다.

“공납으로 지정되어 해마다 실려 가는데, 징수하는 아전들의 농간을 막을 길 없어
지방민들이 이 나무를 악목(惡木)이라 이름하고, 밤마다 도끼 들고 몰래 와서 찍었다네.”

시에서처럼 황칠나무는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는 특산물이자 공납품이 되었기 때문에, 차츰 베어졌다. 고대 동아시아 최고의 도료로 인정받던 황칠은 이로서 조선 후기에 와서 서서히 그 맥이 단절되기 시작했다.

우리 옻칠의 부활을 기대하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풍의 공예품이 대거 들어오면서 우리 전통공예기술은 끊겨버릴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 또 광복 이후에는 캐슈(Cashew)라는 값싼 대용 칠의 도입으로, 우리의 칠기 문화가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 하지만 나전칠기는 지금도 큰 사랑을 받고 있고, 1990년대 초 완도, 보길도, 제주도에서 야생 황칠나무가 자생하는 것이 발견된 이후, 특화 작물로서 황칠나무 양묘단지가 조성되어 다시 번식이 되고 있다. 이에 많은 장점과 쓰임을 가진 천연도료인 옻칠이 보다 널리 활용되었으면 한다.


참고문헌 : 정동찬 외 저, [겨레과학인 우리공예], 민속원, 1999;박영규ㆍ김동우 저, [목칠공예], 솔, 2005;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한국의 고대목기], 2008.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쓴이 김용만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삼국시대 생활사 관련 저술을 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 고대 문명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등의 책을 썼다.
발행2011.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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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네이버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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