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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

대한재국시대의 황족-1

대한제국시대의 황족-1

 

 

초대대한제국황제(初代大韓帝国皇帝) 고종(高宗)의 주요 자녀들

●前妻閔妃의 아들 이척(李坧) 2대황제 순종(
純宗)
貴人張氏의 아들 이강(李堈) 의친왕(義
親王)-> 아들 이건・이우(李鍵・李鍝)
後妻厳妃의 아들 이은(
李垠) 영친왕(英親王)
貴人梁氏의 딸     
덕혜옹주(徳恵翁主)

한일병합에 의해 대한제국의 황실은 일본정부로부터 왕족(王族)과 공족(公族)이 되어 일본의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이우(李鍝)는 공족으로 취급되었다.



◆ 이우(李鍝)
1912-1945  32세몰(歳没)

의친왕의 둘째 아들로 아버지 이강의 외모와 기질(의협심)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강제로 13세에 일본유학길에 올라 18세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마지못해 입학했지만, 학교생활에서도 한국말만 쓸 정도로 주체성이 강했던 탓에 일본인 생도들과 자주 마찰을 일으켰고, 술자리에서도 당시 금지곡이었던 '황성옛터'를 즐겨 부르며 향수를 달래는 등 일본정부 입장에선 결코 고분고분한 인물이 아니었다.

 

또한 일본 정부가 일본 황족과의 결혼을 강요했지만 단호히 거부, 24세가 되던 해에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와 결혼했다.

 

육사 졸업 후 야전 포병학교, 육군포공학교 등을 거쳐, 27세에 야전포병학교 교관이 되었으며 교도연대 중대장을 겸임할 정도로 리더쉽도 갖췄던 멋진 청년이었고, 아버지 이강의 뜻을 받들어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계획하기도 했다.

 

34세에 히로시마 발령을 받았지만 일본에서의 배속을 거부하다 마지못해 근무를 시작하던 첫째 날, 미공군의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 피폭되어 사망했다.


일제의 패망 직후 시신은 1945년 8월에 서울 운동장(동대문 운동장)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의 흥선대원군 묘역인 흥원에 있다. 흥선대원군과 함께 안장된 이유는 운현궁에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 상속자로서 운현궁계 왕족 묘인 흥원에 안장한 것이다. 본시 석상도 있고 신도비도 갖추어진 멀쩡한 무덤이었으나 아드님께서 화장하신 덕분에 원래 매장된 자리에 납골묘로 안장되어 있다

 




■妻 박영효(朴泳孝)손녀 박찬주(朴賛珠)

1914-1995 81歳没
李鍝は妻子を本国に疎開させていたため、妻子は本国で終戦を迎え以降祖国に留まった。

박영효의 손녀로 22세에 이우와 결혼하여 이청과 이종을 낳았다. 남편을 잃은 후 두 아들과 함게 운현궁에 거처했으며 37세에 추계학원 초대 이사장에 취임했다.

 

1992년에 운현궁을 서울시에 매각하고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위치한 추계학원(추계예대,중앙여중고,추계국민학교) 근처의 자택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82세에 사망했다.

 


 


 

 
 




●李淸
●李淙

 

 

 

大韓帝国初代皇帝高宗の主要な子供たち

●前妻閔妃の子 李坧 2代皇帝 純宗
●貴人張氏の子 李堈 義親王→子は李鍵・李鍝
●後妻厳妃の子 李垠 英親王
●貴人梁氏の子 徳恵翁主

日韓併合により韓国皇室は、王族と公族になり日本の皇族に準ずる待遇を受けた。
李鍵は公族として扱われた。




◆이건(
李鍵)
1909-1990  81歳没
李堈の子、李垠の甥にあたる。
幼少期に来日し、学習院を経て陸軍士官学校・陸軍大学校で教育を受けた。
戦後身分喪失、桃山虔一と改名。

의친왕(李堈)의 맏아들로 고종의 장손자이지만 아버지 의친왕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일본식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일본에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제국 육군에 입대했다.

23세에 영친왕비 이방자의 외사촌 마쓰다이라 요시코와 결혼했으며 39세에 모모야마 겐이치(桃山虔一)로 개명하고 몇 년 후 일본일으로 귀화했다. 후에 요시코와 이혼하고 일본에서 살다가 82세에 사망했다.



 


 




■前妻 松平胖の娘 誠子
誠子の母俊子が梨本宮伊都子妃の妹である関係から誠子と李垠王妃方子はイトコになる。

誠子が不倫の上、不倫相手の子を生んだため離婚。
2男3女がある。

松平胖の娘として生まれる→松平誠子
広橋真光伯爵のの養妹となる→広橋誠子
李鍵と結婚する→李誠子
戦後改名する→李佳子
離婚して旧姓に戻す→松平佳子




■後妻 前田美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