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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이야기

부산항 개항후의 상거래 조직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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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부산항의 역사 7 (부산)

부산항의 역사 7

개항기 3

개항후의 상거래 조직단체

객주조합(客主組合)의 형성

객주란 조선조 때 주로 인삼, 약종, 금은, 직물, 피혁, 양사(洋絲), 해산물, 임산물, 곡물 따위 물건을 위탁받아 팔고 사는 것을 거간하거나 그 물주나 상인에게 거처와 숙식을 제공하는 여관집 또는 그 주인을 말했다. 그래서 객주 노릇을 하는 사람을 객주업이라 하였는데 이 객주업을 요즈음 말로 하면 무역업 또는 상품 중개업과 여관업을 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객주업자들은 종래의 전통적인 국내 상품 유통체계를 개편시키면서 개항장이 가진 상품 유통체계를 원활하게 하였다.

1889년의 동래부의 기록에 의하면, 영업세 납부대상이 되고 있는 부산의 객주는 44명이었다. 1년 뒤인 1890년은 부산항을 중심으로 한 해안의 각 포구와 낙동강 수역에 따른 각 포구의 객주수를 모두 합하면 대소 160명 정도였다. 이들 객주는 본래 부산항을 근거지로 삼았던 사람도 있었겠지만 각지에서 거래 물종을 따라 자리를 옮겨온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부산진·초량·서면·영도·부평·하단·엄궁·구포 등 주요 거래지에 분포되어 있었다.

객주업은 왜관이 없어지고 자유무역으로 바뀐 개항 초기에 자유롭게 시작된 도매형식의 상행위였다. 객주는 화물의 흥정을 붙여주고 그 보수로써 팔고 사는 두 편으로부터 수고비조인 구문(口文)을 받았다. 그렇게 영위되던 구문제(口文制)는 부산주재의 일본영사가 조선측의 구문제가 정당한 상거래를 방해한다는 항의를 받고 1889년 구문제는 폐지되고 그해 6월 부산항 객주 44명에 대해 새로운 영업세를 부과하는 제도로 바뀌었다.

이 영업세는 매달 1천량을 받았는데 그 돈은 동래부에 설치한 별포병(別砲兵) 2백명의 삭료(朔料 :이즈음의 월급)에 충당하였다. 이 44명 객주들은 징세 불균등의 페단을 막기 위해 객주끼리 상법회사(商法會社)를 설립했는데 이를 종전에 가졌던 이름 그대로 객주조합이라 하며 거간구전(居間口錢)을 거두었다. 이를 영업세라 했다.

1890년 3월에는 통리아문(統理衙門 :외무에 관한 일체의 일을 맡아보는 조선 왕조말의 관청)에서 인천항의 예를 따라 부산항 객주 25명에 대해 전관지역을 지정한 『부산항 객주영업세 장정(釜山港客主 營業稅章程)』을 제정하여 시행하도록 했다. 이는 특정지역의 물산(物産)에 독점 영업권을 객주에게 부여하는 대신 지정 객주로부터 1인당 60관문(貫文)의 신원보증금과 영업원 수수료를 징수하고 정기적으로 영업세 명목으로 구문 일부를 상납케 했다.

여기서 탈락된 종전의 객주는 지정 객주 25명에게 각각 분속(分屬)되어 구문 일부를 받음으로써 탈락자도 계속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객주들의 전관지역을 지정한 것은 일본상인과 접촉하는 객주를 통괄하고 일본상인에 대항하는 객주들의 경제력을 강화하고 거래체제를 단일화하는 한편 구문징수의 강화로 인한 세액을 높이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를 시행하자니 상거래를 하는 과정에서 구문이나 잡세로 말미암은 객주와 거간 사이 여러가지 문제가 생겼다. 이러한 부조리를 덜기 위해 통리아문(統理衙門)에서는 1890년 5월 『객주거간규칙(客主居間規則)』을 제정 시행케 했다.

이 객주거간규칙은 25객주가 분도 분읍(分道 分邑)하여 각기 몇 읍을 맡되 화물(貨物)을 가진 사람이 오면 시세를 잘 살펴 물자 매매를 권할 뿐 임의로 물화를 처리할 수 없게 규정했다. 또 객주와 거간은 그 소장읍(所掌邑) 상인의 매매에 손해가 없도록 하고 구문(口文)은 구례(舊例)에 따라 하되 함부로 징수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이 객주읍의 시초는 일본 상인과의 경쟁적 위치에 놓인 우리 상인을 보호하고 민족자본을 형성하는데 이바지한 바 컸다. 그러나 상거래의 유통구조를 원활히 한다는 본래의 사명에서 벗어나 영세어민에 자금을 대어주고 어민의 소득을 착취한 바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이 때의 우리나라 상업의 부진 이유의 하나가 도량형(度量衡)의 문란이었다. 그래서 1888년 12월 정부측인 통리아문은 인천에 본사를 두고 부산·원산에 지사를 둔 개항장 3항에 균평사(均平社:均平會社)를 설치했다. 균평사 장정절목(均平社 章程節目)이 뜻하는 바는 두형(斗衡)을 공평하게 하고 화물을 정확하게 검열하고 준칙(準則)에 따른 공평거래를 꾀하는데 있었다. 이 균평회사는 우선은 인천·부산·원산의 개항장에서 운용해 본 뒤 그 성과에 따라 수륙의 각상(各商)에도 적용할 예정이었다.

초량객주조합의 역할과 인근 객주조합

초량은 러·일(露·日)전쟁 전부터 상거래가 활발하여 부산항의 상업 중심지로 등장했다. 부산에 뒤이어 원산·인천이 개항하고는 초량에서 쌓은 상거래의 경험을 토대로 원산·인천으로 객주업이 침투하여 일본상인과 대항하면서 세력을 넓혔다.

1895년 경에는 초량의 객주 정치국(鄭致國)이 인천으로 이주하여 금융업을 시작했다. 이 정치국의 인천 이주로 많은 부산 사람들이 인천 화계동으로 옮겨 갔다. 이러한 일로 말미암아 개항장 상호간의 연계가 이루어졌다.

정치국은 1899년 부산에 선적을 둔 협동기선회사(協同汽船會社)를 부산 유지들과 함께 설립하고 1900년에는 이윤용(李允用)·안영기(安永基) 등 사원 10명과 함께 대한협동우편회사(大韓協同郵便會社)를 설립했다.

정치국은 또 함경도 등지에서 오는 해산물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를 초량에 둘 것을 초량 객주들과 의논하여 설립했다. 창고시설이 갖추어지자 함경도에서 물산(物産)을 가지고 온다 해서 회사 이름을 처음은 북선창고(北鮮倉庫)라고 했다. 이 북선창고가 생기자 원산 등지에 살던 오남근(吳南根)·최장덕(崔長德)·박우점·홍선희 등 객주들이 부산으로 이주해 왔다.

이 객주업자의 거간으로 함경도 강원도 전라도 등지에서 대량의 산물이 부산으로 수송되었다. 그 산물의 주는 함경도의 명태와 건어, 강원도의 목제와 미역, 전라도의 곡물들이었다. 그런 산물을 가져온 물주 또는 상인들은 객주에게 상품판매를 위탁하고 객주의 사랑방에 머물면서 물건이 팔릴 때까지 기다리다가 매매가 형성되면 물주는 객주에게 대금의 5부를 수수료인 구전으로 건네 주었다. 이 객주업의 번창으로 의령의 종이, 개성의 인삼, 중국의 약재들이 다량으로 들어왔다.

1914년 함경도와 서울 사이 경원선(京元線) 철도가 개통되기 전까지의 함경도 지방 물산은 뱃길로 부산으로 와서 경부선으로 서울까지 올라갔다. 그래서 원산 등지의 객주업자들이 부산으로 내려왔다가 경원선이 개통되고 함경도 물산이 철도로 직접 서울 방면으로 수송되자, 일부 업자들은 원산으로 되돌아 갔다. 그렇게 되돌아간 객주들이 창고업을 계속하기 위해 원산에 창고를 세웠는데 그 이름을 북선창고라 했다. 그러자니 북선창고란 이름의 창고가 부산과 원산 두 곳에 있게 되었다. 거래하는데 혼돈을 가져 왔다. 그래서 부산의 북선창고를 남선창고(南鮮倉庫)로 이름을 바꾸었다. 부산의 남선창고는 원산으로 간 사람도 권리를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들의 권리를 이곳 사람이 이양받아 1914년 4월 자본금 10만원(불입 5만원)의 법인등기를 마쳤다. 초대 사장에는 부산출신 오인규(吳仁圭)가 취임했다.

이 남선창고의 주식은 초량객주 조합원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각자가 명태와 해산물 등 위탁물자를 보관시켜 창고를 공동으로 이용하는 한편 금융까지 겸해서 많은 혜택을 입었다. 그 당시의 중심인물은 함경도에서 와서 정착한 오남근(吳南根)을 비롯하여 강원도의 유도현(尹道賢)·방사원(方士圓)·부산 토박이로서 오인규(吳仁圭)·추내유(秋乃有)·김성담(金聖澹)·구덕여(具德汝)·윤대선(尹大善)·권영규(權寧奎)들이었고 이들보다 약간 연대가 떨어진 최성관(崔成寬)·강성문(姜成文)·장경택(張敬宅)·박순백(朴順伯)·김재준(金在俊) 등이 자리를 굳혔다.

이 남선창고는 일제시대에도 종전의 객주들이 실권을 쥐고 있었으나 8·15 광복 5년 전에 개인소유로 경영권이 바뀌었다. 그렇게 개인으로 넘어간 남선창고는 현재 초량 2동 393∼1번지에서 창고업이 그대로 경영되고 있다. 지금은 주로 명태를 보관하는 옛날의 창고가 아니고 가전제품(家電製品) 같은 공산품을 보관하는 창고로 바뀌었다.

개항 이후 초량 중심으로 형성된 객주업자들은 객주업으로 벌어들인 자본으로 장학제도(奬學制度)를 제정하여 1905년 초량에 사립학교를 설립했다. 그 뒤 야간을 주간으로 바꾸어 초량상업학교로 이름도 바꾸었다. 이 초량상업학교는 광복 후 경남공업고등학교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5년 무렵에는 초량동과 영주동에서 객주업을 하는 유지들이 자본을 내어 초량에다 기생조합인 봉래권번(蓬萊券番)을 차렸다가 영주동으로 옮겼다.

부산의 객주업은 초량뿐이 아니었다. 구포와 하단포에도 많은 객주와 상인들이 몰려들어 번창을 이루었다. 하단과 구포는 낙동강의 수운을 이용한 물산의 집산지이자 교류지였다.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기 이전의 물산 운반은 전적으로 낙동강의 수운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경부선 개통 이후에도 낙동강의 수운이 수송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경남북의 농산물과 토산물이 낙동강을 따라 구포와 하단포로 내려오고 구포와 하단포에서는 동·남 해안의 해산물과 부산항에 수입된 외국상품을 낙동강을 따라 경남북지역으로 올려 보냈다. 그러할 때의 산물 취합과 판매는 물주와 상인 그리고 객주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하단포에 객주 조합인 상회사(商會社)가 설치된 것은 1893년의 일이었다. 당시는 과다한 잡세(雜稅)와 부담금을 피하기 위하여 선상(船商)들이 기항(寄港)하는 지역의 객주조합에 소속되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1893년에는 대구·청도·밀양의 3읍 객주가 하단포와 엄궁의 객주조합에 가입하고 같은 해 5월에는 밀양·진주·고성의 3읍 객주가 하단포의 객주조합에 적을 두었다.

구포 또한 왕성한 상거래로 번창했다. 민족 상인들이 자리잡고 상권을 형성해 갔다. 1908년에는 구포를 중심으로 한 상인과 객주와 지주(地主) 70여명이 합자하여 우리나라 지방 금융업의 선구인 구포저축 주식회사(龜浦貯蓄 株式會社)를 설립했다. 그 저축회사는 예금·대부·어음할인 등 근대은행 업무와 같은 역할을 하여 객주업자에게 금융상의 편의를 제공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조직된 부산상법회의소

오늘날의 부산 상공회의소의 효시가 되는 부산객주상법회사(釜山客主商法會社 :일반적으로 객주조합이라 했음)가 설립된 것은 1889년 7월 19일이었다. 이는 일본인 상법회의소에 맞선 민족계열의 관허(官許) 상인단체인 객주조합으로 지역별 상품별의 상거래를 주도(主導)하고 그 상거래 과정에서 일정한 구문(口文)을 객주가 받아 정해진 액수를 정부에 영업세로 납부하는 징세 대행기관이었다.

1895년에는 조선 정부에서 근대적인 상무회의소 규례를 공포하여 개항장 상인의 조직화를 뒤받침했다. 이때의 상무회의소는 반민반관(半民半官)격이어서 정부에서 회의소 운영을 감독하고 회원선거를 감시하고 역원(役員)과 회원의 개선에 관하여는 한편 예산집행까지 감사했다.

정부에서 그렇게 개항장에 관여한 것은 일본과 청국 상인에 대항하는 개항장에서 매매의 질서를 유지하고 민족상인으로서 조직과 체제를 유지하려는 그 목적이 있었다. 부산에서도 인천과 원산 개항장과 마찬가지로 상무소(商務所) 규례를 제정하고 부산항 경무관(警務官) 박기종(朴琪淙)이 중심이 되어 객주와 중개업자와 토착상인으로 상무소를 설치하고 영업세 징수를 하게 했다.

1899년 5월 12일에는 정부가 상무회의소 규례개정(商務會議所 規例改正)을 공포하여 상무회의소를 상무사(商務社)로 이름을 바꾸었다. 따라서 부산도 부산상무회사(釜山商務會社)라 하게 되었다. 이 상무사는 한국인 사업자간의 분쟁뿐 아니라 한·일상인간의 분쟁도 조정하고 거래알선의 업무도 보았다.

이 부산상무회사는 1901년 2월 『부산항 객주회의소』로 다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그것은 부산항 객주회의소 규칙이 통과됨으로서 명칭이 바뀌어졌는데 이는 부산항 총무회의소(釜山港 總務會議所)가 규칙을 입안하여 정부의 인준을 받은 데 있었다. 그 『부산항 객주회의소』규칙에 의하면, 상무회사 때는 지소(支所)를 10곳에 두었는데 객주회의소로 바뀌자 부산·초량·서하(현 서면)·영도·부평·하단·엄궁의 7곳이 되었다. 사업목적을 상업의 발달과 상무의 편의 도모에 두고 부산항 내외 상거래의 폐단과 그에 관련된 사건은 객주의 요청에 따라 합리적으로 해결하도록 했다. 상거래 질서의 문란과 가격조작의 경우에 대비해서 징벌조항도 설정했다.

이러한 과정을 겪은 뒤 1908년 8월 18일에는 동래부윤(東萊府尹)의 허가를 받아 『동래상업회의소』가 발족되었다. 동래상업회의소의 사업목적은 객주업·중매업(仲買業)·재봉업(裁縫業)들을 규합하여 자치체제로 상업을 육성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순수 민간단체로 바뀌었다. 1909년 1월 순종 임금이 대구·마산·부산을 순행했을 때 민족상인을 격력하는 뜻으로 동래상업회의소에 순종임금의 하사금 500원이 내려졌다.

일제강점 이후 1914년에는 조선 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동래상업회의소는 조선인 상업회의소(朝鮮人 商業會議所)로 이름이 바뀌었다. 1915년 7월 15일의 조선총독부 조선상업회의소령이 공포되자 1916년 3월부터 기존의 조선인 상업회의소와 일본인 상업회의소는 해산되고 일정한 자격을 가진 한국인과 일본인 공동의 상업회의소가 새로 발족하게 되었다.

일본인이 조직한 상업회의소

개항을 보자 부산에 머무는 일본인의 수가 많아졌다. 개항 당시 왜관에 머물고 있는 일본인은 82명이었는데 왜관 관리 및 잡직자(雜職者) 1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상인이었다. 그러나 2년 뒤인 1879년에는 8.5배인 7백명으로 불어났고 그 2년 뒤인 1881년에는 2.7배인 1,925명으로 불어났지만 1888년까지는 대체적으로 그 수에 머물었다가 1889년에는 3,033명으로 불어났고 1899년은 6,328명으로, 1909년은 21,697명으로 불어났다.

이렇게 불어나는 일본인들은 그 주가 상인들이었다. 그래서 상인 상호간의 유대와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단체를 조직해 갔다. 일본인들 사이에서 맨 먼저 조직된 것이 『거류지상회의소(居留地商會議所)』가 일본인 전관거류지 안에 설립되었다.

1879년 8월에는 『부산항 일본인 상법회의소』가 역시 일본인 전관거류지 안에 조직되었다. 당시만 해도 일본에서 상법회의소가 조직돼 있었던 곳은 도쿄(東京)와 오사카(大阪) 두 곳 뿐이었다. 일본 전국에서 세 번째인 일본인 상법회의소가 부산항에 조직된 것은 부산항을 거점으로 상권을 일본이 확보하고 일본의 정치 외교를 측면에서 지원하려는데 있었다.

부산항 상법회의소는 부산에 있는 일본인 무역상·은행업·해운업·도매업 등으로 조직되었는데 의원정수는 34명이었고 선출의원과 유지의원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1885년에는 조직을 개편하여 모든 일본인 상인들은 회원으로 가입케 했다. 1890년 6월에는 잡화상까지 회원에 가입토록하여 일본상인 세력을 확대해 갔다.

비록 민간인으로 조직된 일본인 상법회의소라 해도 발언권과 영향력은 컸다. 그 보기를 들면 1898년에 착공하여 1904년에 준공을 본 경부선 철도의 기점은 초량역이었다. 그 때는 영선산(營繕山)이 지금의 영주동에서 바다로 향해 뻗어내려 철도선로를 일본인 전관거류지인 지금의 중앙동까지 연장시킬 수 없었다. 그렇게 철도선이 초량(지금의 정발장군 동상이 선 자리 근방)이 기점이자 종점이 되고 보니 우리나라 사람이 산 초량은 발전적 조건이 좋았으나 일본 사람이 산 지금의 동광동·광복동 중심의 일본인 전관거류지의 발전에 지장이 컸다. 그래서 일본인 상법회의소가 영향력을 작용하여 영선산을 착평(鑿平 :깎아 내려 평평히 함)하고 바다를 메워 평지를 만드는데 역할을 했다.

그렇게 평지를 만든 새마당 자리인 지금의 중앙동에 초량이 기점이자 종점이 되어 있는 부산역을 그 중앙동(부산세관 맞은 편이자 국제부두 서북쪽 자리)자리로 부산역(옛 부산역 :지금의 세관 맞은편 부산역 소화물 취급소 자리)을 옮겨 일본인 전관거류지의 발전을 꾀했다. 그러니 일본인 상법회의소는 돈 한푼 들이지 않는 가운데 일본거류민을 부추겨 전관거류지의 번영과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것은 또 일본이 대륙침략을 꾀할 기틀을 마련하는 일이기도 했다.

1881년 11월부터는 상법회의소 정기간행물인 「朝鮮新報」를 발간하여 회원들과 일본에 있는 일본 상법회의소 간의 정보교환을 꾀했다.

일본인 상법회의소는 회원의 복지와 이익추구만이 아니었다. 일본의 정치 외교를 측면에서 지원하면서 일본인에 불리한 상거래에 대해서는 일본정부의 지원으로 무력시위까지 감행할 정도였다. 말하자면 식민지 구축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개항후의 무역

개항초기의 대외 수출입

개항 후의 20년 동안인 1896년 이전까지의 3개 개항지 수출입액은 부산이 50% 내외, 인천이 40% 내외, 원산이 10% 정도였다. 그 뒤 목포·진남포·군산·마산·성진이 개항되는 1897년 이후는 부산이 전체수출입의 30% 내외로 줄어들고 별다른 감소없이 30∼40%를 계속 유지한 인천에게 1902년에서 1905년까지는 수출입 수위 자리를 인천에 넘겨주었다. 그러다가 경부선 철도가 부설된 1906년 이후에는 다시 인천을 넘어선 수위 자리를 부산이 지키게 되었다.

《부산시사 제1권(1989)》에 의하면, 개항 다음 해인 1877년 수출액은 12만4천11원인데 수입액은 31만4천8백24원으로 19만원의 수입초과를 보였다. 그때의 수출 1위는 우피(牛皮)로 전체 수출의 44%, 2위가 해삼으로 12.3%, 3위가 해조(海藻)로 5.1%로 값싼 생산품인데 비해 수입은 1위가 생금건(生金巾)으로 전체수입의 13.4%, 2위가 구리(銅)로 4.3%, 3위가 천축포(天竺布)로 3.9%로 값비싼 공산품들이었다.

2년 뒤인 1879년 수출액은 61만2천1백74원으로 2년 전보다 5배 가까이 불었는데 수입액은 56만6천9백55원으로 수입액이 수출액보다 낮아졌다. 수출품 1위는 쌀(米)로 전체의 57.4%, 2위가 콩(大豆)으로 16.1%, 3위가 우피(牛皮)로 9.7%로 역시 1차 생산품으로 되어 있다. 수입품은 1위가 생금건으로 62.4%나 되고, 2위는 한랭사(寒冷紗)로 12.8%, 3위는 천축포로 5.0%로 되어 역시 값비싼 공산품으로 되어 있다.

그 3년 후인 1882년의 수출액은 1백15만1천3백10원인데 수입액은 78만4천1백89원으로 수출액이 월등으로 많았다. 그 가운데 수출은 값싼 생산품인 콩이 전체 수출액의 25.1%, 우피가 16.4%, 면포(綿布)가 9.0%이다. 그 대신 수입품은 값비싼 제조품인 금건(金巾)으로 65.6%, 한랭사 16.8%, 염료(染料) 5.7%이다.

그 10년 뒤인 1892년의 수출액은 1백28만1천9백83원인데 수입액은 1백1만9천2백90원으로 되어 있다. 수출 1위는 쌀로서 41.2%, 2위가 콩으로 32.9%, 3위가 우피로 9.4%인데 수입 1위는 금건(金巾)으로 25.0%, 2위가 한랭사와 면려(綿?)로 9.3%, 3위가 석유로 5.5%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일본이 우리나라에 수출한 제품중에는 일본제품보다 외국제품이 80%나 차지하고 있다. 이는 이본이 중계무역으로 그 이득을 얻고 있는 것이다. 외국제품은 거의 모두가 조악한 제품으로 일본상인이 나가사끼(長崎) 또는 고오베(神戶)의 영국 상사(商社)에서 구입하거나 상해(上海)에서 직접 구입하여 우리 나라에 재수출한 것이었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수출한 품목은 쌀·피혁(皮革)·두류(豆類)·지금(地金)·곤포(昆布)·생사(生絲)·김 등이었다. 그러니 일본은 조선에서 다량의 원료인 농산물·광산물·해산물을 헐하게 사들이여 산업개발과 함께 값비싼 제조품을 만들어 부가가치를 높이었다.

수입의 탈을 쓴 일본의 사금은(砂金銀) 수탈

《부산부사원고(釜山府史原稿), 1937》를 접한 필자는 개항기의 무역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적지 않다. 그것은 우리쪽 기록으로서는 지금(地金) 수출에 관한 기록은 간혹 볼 수 있어도 사금(砂金)수출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는 반면 일본쪽 또는 일본 거류민단 기록은 그 사금이 다량으로 일본 오사카(大阪)의 조폐국(造幣局)으로 유입된 사실이다.

그 기록으로 1879년 11월 4일이라면 개항에서 3년쯤이 지난 때다.

그때 일본인 거류지의 일본인 관리관 前田獻吉은 保長頭取(일본거류민의 지구대표)들에 다음과 같이 통첩하고 있다.

“당국(일본국) 무역품은 그 과반(過半)을 사금은(砂金銀)으로 하고 있다. 이 사금의 취급을 보건데 거류지 가호(家戶)마다 값을 달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 값이 점점 올라 뜻밖의 이(利)를 그들(조선인)에게 주는 것은 한탄스러운 일이다. 사금은이 우리나라(일본)로 수출되어 때때로 이외의 실패를 보는 일이 있다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의 손실임을 알아야 한다. 그 원인은 사금은의 감정법을 몰라 그 진위(眞僞)를 판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실패를 저지르지 않으려면 기계(器械)와 약품 등을 구비해야 할 것이다. 그 감정법을 당청(當廳 :거류민 관리청)에서 오후 3시에서 4시까지 전시(傳示)할 것이다. 이번에 원산항(元山港)이 개항되면 그곳의 무역품으로는 사금은(砂金銀)이 많을 것이다. 그곳으로 최초에 출장가는 사람은 그곳 사금은의 감정법을 배워 실패하는 일이 없도록 함은 물론 매호구(每戶區)의 가격을 높이는 폐단이 일어나지 않게 서로 주의해야 한다. 이 뜻을 거류민 일동에게 통달해 주기 바란다”고 했다.

이로써 볼 때 일본무역 수출품은 부산의 개항 직후부터 그 과반(過半)이 사금은(砂金銀)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반이라면 아주 많은 액수가 될 것이다. 그리고 각자(일본인을 말함)가 경쟁이 되어 값을 올리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감정법을 관리청에서 전수(傳授)하고 있다. 원산항의 개항(1880)에 앞서 미리 정보를 얻을 것까지 당부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일본인과 우리나라 사람 사이 은밀한 가운데 사금의 매매가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본정부의 대장성(大藏省)이 일본의 조선주재 총영사(종전의 관리관) 前田獻吉에게 보낸 공문을 보면 조선의 사금은은 일본정부가 조선정부와는 관계없이 사들인 것임을 알 수 있다. 1882년 8월 24일의 조선주재 일본총영사 前田獻吉이 일본 대장성의 사금매상수속(砂金買上手續)을 포달(布達)한 내용을 보면,

‘부산·원산 양항(兩港)에서 무역되고 있는 조선산의 사금에 대해 사금매매수속을 다음과 같이 포달(布達)한다'하고는

1. 조선국 산출 사금은 조폐국(造幣局) 정제분석(精製分析)에서 용해(溶解)할 것이나 조폐국에서 시험하기 이전 오사카(大阪) 출납국(出納局) 출장소에서 가도금(假渡金)을 8분(分)정도 지불할 것이다.

2. 조폐국의 시험결과 보고를 받으면 즉일 또는 그 다음날에 대금을 청산 할 것이다.

3. 결산할 때 가도금이 부족하면 잔금을 지급하고, 과도(過渡)인 경우는 곧 반제(返濟)해야 한다.

등 일본 민간인이 우리나라 사람에게서 매입하고 조폐국에 매도하기 유리하게 한 9개 조항을 내세워 사금수집을 부추겼다.

그때 일본 大阪의 조폐국 출납국 출장소가 부산의 공식기구에는 보이지 않으나 실제는 부산의 일본인 전관거류지에 와서 업무를 본 것 같다. 이로써 일본 상인이 우리나라 사람을 부추겨 사금을 채취케 하고 그것을 사들여 일본 조폐국에 넘긴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부산과 원산의 개항장에서 사금의 밀무역이 이루어진 것 같은데 1882년과 83년 무렵에는 부산과 원산에서 행해진 사금수출의 1년 총액이 약 50만원이나 되었다. 그 가격은 1?? 1원(圓) 80전(錢)에서 2원80전으로 되어 있다.

1885년 부산의 수출은 《부산시사(釜山市史)》 제1권에서는 18만4천4백74원이다. 1위가 우피(牛皮)로 전체수출의 54%, 2위가 콩으로 12.4%, 3위가 해조(海藻)로 8.5%로 되어 있다. 그런데 《부산부사원고(釜山府史原稿)》는 1885년의 일본측이 조사한 부산의 사금수출고를 밝히면서 수출총액이 48만5천43원(圓)으로 1위가 사금(砂金)인데 14만3천8백70원, 2위가 우피(牛皮)로 13만4백67원, 3위가 콩으로 3만8천3백94원이다.

이렇게 1989년 부산시가 펴낸 《부산시사》 1권이 밝힌 통계에는 사금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 일본인이 조사해서 1937년 펴낸 《부산부사원고》는 사금이 수출 1위가 되어 있다. 이로 보아서는 우리나라 사람을 통해 일본 상인이 사금을 거두어 일본 大阪 造幣局으로 팔아넘긴 것을 알 수 있다.

역시 같은 1885년의 원산의 수출액은 《부산부사원고》에 따르면, 52만4천7백80원인데 사금이 1위로 전체수출의 74%를 차지하고 2위가 우피(牛皮), 3위가 명태로 되어 있다.

원산항에서 나오는 사금 출산지는 영흥(永興) 중심으로 10수 개소가 있었는데 수출의 매선편(每船便)마다 20∼30관(貫)의 사금이 실려 나갔다. 일본인의 기행문 가운데 조선사람은 모래를 파서 금을 인다(일러서 가려낸다)고 했으며, 듣는 바에는 갱부(坑夫:원산지방에서 사금을 채취하는 인부를 말했음)가 4만명이나 된다고 했지만 그 숫자는 과장된 말이 아닌가 하고 있다.

이 기록의 《부산부사원고》는 일제시대 일본인인 都甲玄鄕이 그들의 자료를 검토해서 일본말로 된 원고이므로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본다. 이 때의 사금채취는 사금이 함유된 계곡이나 내(川)의 토사(土砂)를 쟁반같은 것에 담아서 물속에서 흔들어 토사를 흘러보내 채취하기도 하고, 사금이 함유된 토사를 경사진 빨래판이나 가마니 위로 흘러 보내 그 흠이나 올 사이에 멈추게 해서 채취하기도 했다.

이때 우리 나라는 금본위 화폐제도가 아니지만 일본은 금본위 화폐제도로 국제교역을 크게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나지 않는 금을 조선에서, 비록 사금이라도 모조리 긁어내려는 계략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 개항에서 일제강점까지의 30여년 사이 우리나라의 사금이란 사금은 그들의 손으로 온통 넘어갔다. 만일 정부에서 그 일에 관여했다면 비록 우리의 소중한 것이 딴 나라로 넘겨진다 해도 국가적 이익과 함께 사금 채취인들의 이권도 보호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버려진 모래속의 것으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고 또 정치력이 미치지 못했던 일이고 보니 몽땅 빼앗기면서도 우리 기록에는 그 사실마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일제강점이 되자 구한국 화폐는 일본의 화폐로 대체시켜 화폐가 통일되었다. 그에 따라 한국의 화폐, 그 중에서도 금화와 은화는 회수되어 일본의 大阪 造幣局에서 일본화폐로 개주(改鑄)되어 다시 수입하는 형태가 되었다.

1918년 12월에는 조선광업령(朝鮮鑛業令)을 개정하여 금·은·연(鉛)·철·사금(砂金)·사광(砂鑛) 등의 광업세가 면제되어 광산물 수탈은 보다 적극화되어 갔다.

그런데 밀수출 형태였을 사금수출이 개항 이후 실제적인 수출 1위에 속했음에도 그에 관한 우리의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사금 밀수출을 단속한 흔적도 걸려든 범법자도 없다. 그만큼 우리의 그날은 위정자도 백성도 몽매했을까? 이해하기 어려운 바 적지 않다. 보다 깊은 고구(考究)가 필요하다.

개항후기의 대외 수출입

조선의 동학혁명 진압문제로 일어난 1894년의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두자 일본은 조선에 보다 더한 개방을 요구해 왔다. 그 요구로 1897년에서 1899년 사이 일본인 거류지를 부산·원산·인천의 종전의 개항장 이외에 진남포·목포·평양·군산·마산·성진으로 확대해 갔다.

그 개항장의 확대로 조·일무역도 확대되어 조선이 일본 산업자본의 수출시장이 되어갔다. 조선에 수출하는 일본의 비중은 1893년 50.2%, 1897년 63.9%, 1910년 61.6%로 증가했다. 이때는 일본제 면제품(綿製品)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 대신 조선이 일본에 수출하는 수출품은 쌀과 콩과 우피(牛皮)가 보다 더 많아져 갔다.

1904년 2월부터 1905년 10월까지의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일어난 러·일전쟁 이후에는 거류지에서 행해지던 무역체제가 무너지고 쌀과 무명을 교환한다는 「미면교환체제(米綿交換體制)」가 더욱 확대되어 개항장 이외에서도 교환이 이루어졌다.

여기서 부산항의 지역별 대외무역을 보면, 개항에서 10년 뒤의 1885년까지는 수출이건 수입이건 일본 일변도였던 것이 1886년에 들어 수출은 일본에 98.8%, 중국에 1.2%가 되고, 수입은 일본 96%에 중국이 3.9%가 되었다. 1891년 들어서는 수출이 일본 98.2%, 중국 1.6%, 러시아 0.2%가 되고 수입이 일본 97%, 중국 2.9%, 러시아 0.1%가 되었다. 10년 뒤인 1901년 수출총액 3백10만5천9백63원에 일본 96.6%, 중국 1.2%, 러시아 2.3%가 되고, 수입은 2백73만1천9백23원에 일본 79.1%, 중국 20.6%, 러시아 0.2%가 되었다.

1910년에 가서는 수출총액 6백4만9천8백34원에 일본 89.3%, 중국 1.4%, 러시아 9.3%인데 대해 수입총액은 9백83만6천1백78원으로 일본 74.6%, 중국 3.7%, 러시아 0%가 되는 대신 그 이외의 나라에서의 것이 21.7%가 되었다.

이로 보아서도 수출이건 수입이건 일본 편중이 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계속)

출전 : 부산라이프 부산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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