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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토박이

민족과 인술 - 동산 김형기

 

 

사색의 창

- 민족과 인술

 

 

 

피고인 1. 동래고보를 거쳐 경성의전 4학년이던 청년은3·1 독립운동의 주동자급으로 분류돼 옥고를 치릅니다. 이후 부산에서 인술을 베풀며 독립운동의 자금 모집에 헌신하기도 했지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던 동산 김형기 선생이었습니다.  다이내믹 부산 제 1530 | 기사 입력 20120620()

 

[관련기사1]

1. 동산 관련 사진 
 

                                                               동산 김형기 선생

 

 

                                      부산 동산의원 시절 환자를 돌보던 모습(출처: 부산시보 캡쳐사진)
  

해방 후 미군정청 수석고문 당시의 선생모습(뒷줄 오른쪽 네번째)(출처: 부산시보 캡쳐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尹相殷재무국장, 徐상환내무국장,해리슨준장(美군정지사)金秉圭도지사,金局泰경찰국장,

뒷줄 오른쪽부터 尹炳昊농림국장,金仁浩道고문, 朴己出보건후생국장, 金炯璣귀환동포후원회회장,禹德俊해리슨준장통역관

 

 

훈장증(1990.8.15/건국훈장애족장)

 

 

 

2. 동산 김형기 선생 약력
1986(태생) : 8월9일 삼락동 유두리에서 김욱권(金昱權)씨의 장남으로 태어남
1911(16세) : 사상의 명문집안 출신 지부염(池富廉)신부와 결혼
    ?           :  사립명진학교졸업및 동래고보 다님
1916(21세) : 경성의학전문학교 입학
1918(23세) : 자택은 양산군 상북면 외석리로 옮겨 감
1919(24세) : 1월부터 2월까지 3.1독립만세 모의에 재경유학생 회장으로 가담,
                   거사준비에 주동적 역활을 담당
                 : 3월1일 탑골공원에서 시위운동 주동급 인사로 참여
                 : 10월에 기소, 11월6일 1년형 언도를 받아 옥고를 치름
1922(27세)  :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1924(29세)  : 울산에서 공의(公醫)로 근무
1925(30세)  : 동래 기장 대변에서 공의(公醫)로 근무
1930(35세)  : 동래 복천동에서 동산병원 개원
1932(37세)  : 부산 영주동에서 동산병원 개원
1942(47세)  : 부산 대청동으로 동산병원 이전
1945(50세)  : 해방 후 미군정청 수석고문,귀환동포 후원 회장 역임
1950(56세)  : 6.25 전쟁직후 정보기관에 연행된 후 행방불명(실종)
1990. 8.15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998. 4.6    : 애국지사 동산김형기선생추모비 건립

 

 

[관련기사3]

애국지사 동산 김형기 선생 추모비 

포악한 왜적이 우리 강토를 강점하여 국토를 유린하며 식민통치를 자행한지 십여년 각계각층의 민족 지도자와 재경 유학생이 주축이 되어 대한 독립의 횃불을 높이 드니 청사에 길이 빛날 3.1 독립운동이다.
 
이 3.1 운동을 주도하신 최고 지도자의 한분인 동산(東山) 김형기(金炯機)선생이시니 이곳 김녕 김씨 (金寧金氏)유두(柳頭) 문중 유헌재(柳軒齋) 앞뜰에 청석을 세워 선생의 위대한 행적의 일단을 새겨두고 우러러 보고자 한다.
 
선생의 본관은 김녕(金寧) 이며 호는 동산(東山) 으로 대보공(大輔公)휘(諱)알지(閼智)를 시조로 하며 고려조(高麗朝)에 금주군(金州君)을 훈봉 받으신 휘(諱)시흥(試興)이신 문열공(文烈公)이 관조(寬祖)이시다. 문열공(文烈公)의 9세손으로 세조 조(世祖 朝)에 단종(端宗) 복위를 주도하고 순절하신 사육신 충의공(忠毅公)휘(諱) 문기(文起) 백촌(白村) 선생의 현손(玄孫)으로 정란(靖亂)의박해를 피하여 부산(釜山)의 유두(柳頭)에 이거(移居)하신 유헌(柳軒) 휘(諱)영필(永弼)공의 13세손이다.
 
선생께서는 서기1896년8월9일 선조의 세거지인 당시 동래군 사상면 유두리 231번지2에서 출생하였으며 충주 지씨 (池氏)부염(富廉)님을 부인으로 맞아 슬하에 장남 재진(在珍)등 2남6녀를 두셨으며 효심이 지극 하셨고 형제간의 우애 또한 각별하신 분이셨다.
 
선생이 경성의전(京城醫專)4학년에 재학중 당시 유일한 학생조직인 재경 유학생회 회장으로 계시면서 1919년 1월 민족대표 33인으 한분이신 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과 함께 협심하여 해외독립운동에 대한 정세와 민족자결주의 사상을 고취 시키면서 만세시위운동에 대한 계획을 재 경성의학 전문학교 대표인 주종선(朱鍾宣)(李公厚)김문벽(金文壁) 등과 같이수립하셨다. 
동월 28일 정동교회에서 강기덕(姜基德)한창식(韓昌植)과 회합하여"  조선 독립선언서"를 지역 대표 및 학교 대표에게 배포함으로써 서울은 물론 전국 방방곡곡에 조선 독립만세 소리가 노도와 같이 번지게 하였으니 실로 독립운동사에길이 빛날 위업을 이루셨다
 
3.1일 탑동 파고다 공원 앞에 모인 수천의 시위군중 앞에서 민족대표를 대신하여 학생 대표로 선생께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셨다고 전하나 확인 할 길이 없어 더 없이 애석한일이다. 이 날의 시위로 주동자인 선생을 비롯하여 학생대표37명이 일경에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을 받고 동년 11월 6일 주동자 중 최고형을 받아 옥고를 치르셨다. 위의 사실을 종합해 보면 3.1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한 핵심 인물 중 한분이 재경 유학생회 회장 동산(東山)김형기(金炯機)선생님을 쉽게 알수있다.
 

 

 

1998년 4월6일 동산의 기념비앞에서 헌화하는 참배인들
 
형기를 마친 선생께서는 1922년 경성의전을 졸업하시고 동래 울산 기장 등지에서 공의로 활약하시면서 이곳 출신의 뜻 있는 분과 교우 관계를 맺으며 독립 운동의 의지를 다졌다. 1932년 경 부산 영주동과 대청동에서 동산의원(東山醫院)을 개원한 후 광복이 되기까지 부산지방 독립지사를 적극 도우며 독지가의 모금과 사재를 보태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니 후일 부산을 중심한 경남 일원독립운동 자금이 영주동의 동산병원으로부터 나왔음이 확인 되었으며 당시의 상황으로는 실로 목숨을 던진 애국 충정이었다 드디어 1945년 8월15일 조국 광복이 찾아오자 선생은 미국 군정청 경상남도 지사의 고문을 역임하면서 해외 귀환동포 환영 위원장을 맡아 사재를 털어 귀환동포를 따뜻이 보살피며 구호에 전념하셨다. 

 


 
오호라  불행하게도 광복후의 어지러운 정국은 사상과 민족의 분열을 가져왔고 치안을 관장한 친일 잔당은 저들의 호신책으로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시며 민족주의자이신 동산(동산)선생을 공산주의자라는 오명으로 희생시키니 실로 하늘을 우러러 통탄할 일이로다. 다행이 선생이 가신지 40 성상이 지난 1990년 천신만고 끝에 당시 재판 기록으로 항일운동의 사실이 입증되어 정부로 부터 건국훈장을 추서 받으시어 지난날의 오욕이 깨끗하게 신원(伸寃)되셨기에 광복회(光復會)와 낙동문화원(落東文化院)이 선창하고 김녕김씨 충의공파 유두문중 (金寧金氏忠毅公派柳頭門中)이 한 뜻이 되어 추모비를 세워 위훈에 보답하고 후세에 귀감으로 삼고자 조그마한 돌에 새기는바이다.  
나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죽는것은 조금도 두렵지않다  평소 동산(東山)선생의 말씀을 함께 새겨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영원히 남게하리라.

                        

                      1998년 4월 6일 대한민국광복회 회장   권쾌복

 

 

[관련기사4] 

1896년 현재의 부산시 사상구 삼락동 인근인 유두리(당시 주소는 양산군 좌이면)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난 동산 김형기선생은 사상역 앞에 있었던 사립명진학교를 졸업한 뒤 동래고보를 거처 경성의전에 입학하게 된다. 그의 독립운동 내력은 1919년 3.1운동때부터 본격화됐다.
경성의학전문학교 4학년으로 재경유학생회 회장을 맡고있던 그는 민족대표 33인과 연결,학생들을 규합하게 됐고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시위대를 이끌다 현장에서 일경에 연행됐다.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1년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다. 풀려난 뒤 학교를 어렵게 졸업 후 울산과 기장을 거처 부산으로 귀향,지금의 중구 영주동에 있던 3층 목조건물을 빌려 동산병원이라는 간판을 내건뒤 그 수입으로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며 부산.경남지역 독립운동가들의 거점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해방 후 대중신문을 약 1년 6개월간 발행하기도 한 그는 애타게 그리던 광복후 이데올로기의 회오리에 휩싸이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친일세력이 해방후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민족주의자들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해 나갔고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 그를 북한의 김두봉과 외사촌간이라는 터무니 없는 이유를 붙여 연행, 그후 생사를 알 수 없었다고 유족들은 전하고 있다. 당시 함께 연행됐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부산지역의 항일 독립운동가인 소정(蘇庭) 최천택(崔天澤)선생이 이후 "빨갱이임을 자백하라고 강요당하던 동산이 잔혹한 고문에 못이겨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다"고 그의 저서전에 기록하여 동산의 마지막을 증언해 주고 있다.

 

이같은 동산의 항일투쟁 사실은 불과 20여년전 우연히 발굴되었다. 지난 89년께 서울에 살고 있는 동산의 손녀(당시 20세)가 독립기념관에서 자신과 같은 본적을 가진 독립투사 이름을 발견하면서 부터 발굴되기 시작했다.  
동산 선생이 3.1운동 주도했다는 이야기는 집안 사람들에게만 전해오던 이야기였다. 해방직후 이데올로기 분쟁의 와중에서 행방불명됐고 독립운동 내력을 입증할 자료가 없어 유족들은 그들의 가슴에만 동산 선생을 담아 놓고 있었다. 오랜 망각의 세월속에 김형기의 손녀가 독립기념관에서 `김형기'란 이름을 발견한 이야기는 종친회에 알려졌고, 이후 종친회는 독립기념관 전시물인 3.1운동 관련자 기소문이란 사실을 알게됐으며, 정부기록보관소에서 동산 김형기 선생이 피고인 1번으로 형을 선고받은 `판결문'까지 찾아냈으며, 동산 김형기 선생은 이 자료 덕택에 지난 1990년 비로소 건국유공자 애족장을 받게 됐다. 동산 김형기 선생의 항일투쟁 자료의 발굴,추적에는 유가족을 비롯하여 현 낙동문화원의 백이성원장(65)과 많은 이들의 노고가 있었다. 이로인해 반세기동안 묻혔던 조국의 독립과 동포들의 위해 일생을 받친 동산 선생의 일대기가 복원될 수 있었던 것이다.

 


 
[관련기사5]

독립운동가 동산 김형기 할아버지 손녀 바이올리니스트 김경민 입니다


안녕하세요 !
이렇게 종친회에 제가 감히 글을 올리게 된것을 진심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하는바입니다.
저는 유두문중 성천파총회(화수회) 김덕규 아저씨께로 부터 간간히 소식을 듣고있었고 김자 형자 기자 할아버지의 자부이신 친정어머니께로 부터도 늘 여러 일들의 염려와 문중의소식을 오래전부터 듣고 관심가지고 있던차에 어머님도 연로하시고 여러정황적 상황으로 봐 이렇게 저라도 문중 종친회에관한  관심을 가지고 앞으로 활동하고저 이렇게 조심스레 문을 두드려 봅니다.  참으로 송구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혹 제가 여자인것이 문제가 된다면 시대적인 가치관으로 너그러운 이해와 넓은 마음으로  선처를 구하는 마음입니다.       
저는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유럽에서 오랜 유학후 귀국하여 여러 활동을 하였고
현재는 숭실대학교 음악원 관현악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앙상블 포럼21이라는 단체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선  인사글 올리오며 그동안 살다보니 소홀했던 뿌리되찾기 , 우리가문의 인물이시며 1990년 8월15일 국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으신 동산 김형기 할아버지의 힘들었던 격동기에 묻혀 인식되지못하였던  위업과 현재까지 잘 알려지지 못한 독립운동가로서의 위상을 되찾고 문중의 명예에도 도움이될수있도록 비록 여자이지만 노력하겠습니다.

동산 김형기 할아버지는
" 3.1만세운동때 경성의학전문학교 재학 재경유학생 회장으로 학생대표가되어 민족대표 33인중 한사람인 박희도로부터 독립운동을 위한 학생들의 역할을 전해듣고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김형기 주종의 윤자영 이공후 등74명은  일본경찰에게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해 11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완법위반으로 징역1년형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르었다.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공의로서 울산에서 의료인으로 첫발을 딛게되고 이어 1926년경 부산의 영주동에서 동산병원을 열어 지역사회의 명의로서 이름을 날리게 되고 해방 3년전인 1942년에 대청동 남일 국민학교 정문 앞으로 의원을 옮겨 이곳에서 해방 이후가지 병원을 운영 하였다. 그러다가 8.15 해방이되자  동산선생은 미군정청 고문단에 수석으로 관여했고  재일 귀환동포 후원위원장을 맡아 배를 타고 물밀듯이 밀려오는 귀환동포의 구호를 위해 재산과 시간을 모두 여기에 바쳤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 이후의 어지러운 정국속에서의 이데올로기분쟁은 동산선생에게도 화를 미치게 했고  6.25동란 직전 환자를 돌보던 새벽 에 정보기관에 연행되어 간후 그길로 소식이 끊겼으며 그냥 구름 처럼 사라져 버린것에 대해 가족과 친지들은 몹시 마음아파하는 것이다 .
정부에서는 동산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하였다."-(자료 제공 부산지방 보훈처)  
이상은 1995년 부산시보에 기재되었던 동산 김형기할아버지에 관한 일부내용을 옮겨보았습니다.
저의부친게서는 그전까지 복권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지만 1991년에 작고 하셨고 그이후  김덕규 아저씨께서 여러가지 백방으로 수고하시고  계신걸로 알고있어 늘 감사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앞으로는 저도 많이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의 아버님과는 시촌간이 되시고 제겐 육촌아저씨가 되십니다.
그동안 직계자손으로 너무나 소홀하였던점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할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고 여러가지 아버지대에서 하지못한 일들을 감히 노력 해보도록 최선을 다하고저 합니다.

가장중요한것은 마음일것이고 직계자손으로서 의무를 느끼고 또한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려 결심 한다면 비록 제가 여자이지만 할아버지께서도 기쁘게 여겨주시리라 생각됩니다.

오랜기간 기다리고만 있다가 더이상은 시간이 없는것 같아 제가 결심을 하고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앞으로 많은 지도와 편달을 바랍니다.  저의 진심과 감사를 함께 보냅니다.

그리고 오랜 생각끝에  나름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되어 알리는것이 좋을것같다는 저의 판단하에 다음의 글을 올립니다..

알릴 말씀은 이번 2012년 7월18일 수요일 8시  예술의 전당 에서 제가 3년째 이끌어오고있는 앙상블 포럼21의 세번째 정기연주회가 열립니다.
이미 음악계에서  음악적 진정성을 인정받고 있는  앙상블 포럼21은  이번연주회 에서 베베른과 리햐르트 슈트라우스의 메타모르포젠(변용) 그리고 브람스의 현악 6중주등을 연주합니다.

좀 급작스럽지만 음악을 애호하시는 종친분들께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게시판에 글 남겨주시면  원하시면 초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종친으로서 할일을 알려주시고 저또한  할아버지의 이름을 알리는데 앞장설것을 다짐하며 이만 글을 마무리하도록 하겟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종친회의 무한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김경민 배상

 

<<주기>>이상의 글은 김녕김씨 유두문중 성천파총회(화수회) 카페에서, 아래 사진은 김경민님 홈피에서 가져 온 것임을 밝힙니다. 1989년 독립기념관에서 김형기 선생의 이름을 발견하고 집안에 알린 김형기 선생의 손녀가 바로 김경민님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창이 닫힙니다

 

 

출처: http://kyoungch.com/phpeuc/board.php?board=board&command=body&no=315

 
바이얼리스트 김경민
연주자로서 교육자로서 이미 확고한 자신만의음악세계를 인정받고있는 바이올리니스트 김경민은 예원학교 (졸업시 연호예술상 수상), 서울예고 수석입학, 서울예고 졸업 후 독일 Ko"ln국립음대 초청으로 도독하여 독일 Hannover 에서 수학 ,졸업 독일 Ko"ln 국립음대 에서 수학,, 졸업 (사사: R.Shevelov교수, I.Ozim교수) Diplom 취득하였다. (학부및 석사과정에 비등함) 이후 스위스 메뉴힌 음악원(I.M.M.A.)서 수학 및 졸업하였고 또한 스위스 베른 국립음악원 에서 장학생(Stucki-Stiftung(슈툭키-재단기금)) 으로 Meister과정 과 Solist과정을 졸업동시에Solist-Diplom(전문연주가자격증)을취득하였다.
또한 N.Milstein,M.Rostal,T.Varga,R.Odnoposoff등의 세계적거장들의 마스터 코스를 수료하였다

제23회 이화경향 콩쿨 종합특상 및중앙콩쿨2회입상 ,한국일보, 동아콩쿨 에 입상하는 등 이미 서울 예고시절 다수의 콩쿨입상으로 그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서울예고악장 ,독일 Lohmar음악학교 출강,Bern 음악원 오케스트라 악장 역임 , Camerata Lysy의 단원및 Solist로도 활동 하였다 . 스위스 Bern Symphony ,KBS교향악단 ,서울시향, 부산시향 ,파리오페라좌실내악단, 프라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서울심포니 등 국내외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였으며 한국 ,독일,스위스, 스페인 등지의 음악페스티발 서 연주하는 등 수차례의 연주회를 통해 현지언론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KBS-FM주최 "한국의 음악가 "기획시리즈 실내악부문 CD출반, Schubert 작품 전곡연주회 ,Beethven,Brahms,Schumann바이올린 소나타 전곡을 완주 하였으며 2000년에는 김경민의 음악스케치라는 타이틀로 1년동안 총12회의 기획연주회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프라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악장(1998년~1999년 ), 서울심포니 오케스트라 악장(2000년 ~2005년)경력 및 2008년까지 한국페스티발 앙상블, 코리아나쳄버 뮤직 소사이어티 멤버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
그녀는 2008년까지 국내 유수대학 강사 로도, 수년간 추계예술대학 겸임교수로도 재직하였고 2010년에서울 종합예술원에서 교명을 바꾸고 압구정캠퍼스에서 새로운 도약을 감행하는 한국콘서바토리 관현악과 교수및 부설음악연구소의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모든분야에서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하는 음악가로 알려진 그녀가 자신의 솔로 활동 못지않게 정열을 쏟고있는 빈트리오 (Piano엄의경,Cello 백희진 )는 2001년 세간의 관심속에 창단 되어 9년째 활동중인데 높은 예술성과 연주력으로 "빈트리오 일본초청연주","베토벤 트리오 전곡 연주", "대관령국제음악제"등에서 연주하였으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후원의 유레카 시리즈 ,다수의 정기연주회 및 매년여름 전석매진을 기록하고있는 "청소년음악회-음악과 함께하는 세계여행"시리즈등을 진행하며 왕성한활동중이다

또한 오랜 준비기간 끝에 2009년10월 김경민이 음악감독으로서 그녀의 제자들과 결성한 앙상블 포럼21은 이미 2회의 자선음악회와 베토벤 프로젝트를 성공시켰으며 특히 3월, 4월 총4회 에 걸친" 베토벤 현악 사중주 프로젝트"는 뛰어난 기획과 구성 ,연주력으로 이미 세간의 인정을 받은바 있다. 앙상블포럼21의 창단 취지와 활동 철학을 통해 그녀의 고집과 음악적 가치관을 엿볼수있으며 이시대의 진정한 음악가상을 지향하는 그녀의 열정적 노력을 느낄수 있을것이다.

현재 김경민은 빈트리오 멤버 ,앙상블 포럼21 음악감독으로 년 10회이상 연주활동 중 이며 , 한국 콘서바토리 관현악과 교수 및 부설 음악연구소소장으로 재직중이다.

 

[역사로 보는 의학] 일제강점기, 한국인 의학생들의 형설지공(螢雪之功)

 

VOM 매거진 / SNUH 이야기

2015.04.15.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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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chsnuh/220331595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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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지도에 이름을 올리다


사진. 경성의학전문학교 1924년 졸업앨범 중 한국 지도​


한국인이라면 볼 때마다 정겹고, 가슴 뭉클해지는 한국 전도(全圖). 그런데 이 지도에는 무언가 색다른 점이 있다. 8도 곳곳마다 누군가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이다. 이 지도의 정체는 무엇일까?


1924년에 경성의학전문학교(이하 경의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를 졸업한 49명의 조선인학생들이 일본인과 별도로 그들만의 졸업앨범을 만들었다. 졸업앨범의 이름은 『형설기념(螢雪記念)』.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주도권을 쥔 관립학교에서 극심한 민족차별을 받으면서도 학업에 힘써 졸업에 성공한 그 감격스러운 느낌을 표현한 것이리라. 또한 이들 중에서 훗날 김동익(金東益), 박병래(朴秉來), 이선근(李先根), 이종륜 (李鍾綸), 최상채(崔相彩) 등 9명의 의학박사가 나왔으니, ‘형설’이라는 어휘는 정말 잘 어울린다.

이 전도는 『형설기념(螢雪記念)』의 표지와 머리말 다음에 실려 있다. 졸업생들은 지도 위에 자신의 고향에 해당하는 곳에 이름을 올렸다. 자신과 고향과 조국에 대한 애정을 당당하게 표현한 것이다. 공부하던 책상머리를비춘 ‘형설’만이 아니라 작지만 민족의 미래를 비출 ‘형설’이 되고자 하는 소망과 의지가 느껴진다.

그들이 4년 동안 다녔던 경의전은 대체 어떤 학교였을까? 191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전문학교관제’와 ‘경성의학전문학교규정’이 반포되어 경의전이 문을 열었다. 기존의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를 인계한 것이다. 입학자격은 조선인은 16세 이상의 고등보통학교 졸업자, 일본인은 17세 이상의 중학교 졸업자였다. 기초 강의는 1~2학년 과목으로, 임상강의는 3~4학년 과목으로 편성되었다. 교사(校舍)는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 네거리에 있었다. 경의전은 부속병원이 없었다. 총독부의원과는 직제상 완전히 별개의 기관이었으나, 이 병원이 부속병원 구실을 해주었다.

사진. 경성의학전문학교 전경(1927년

3.1운동의 선두에 서다


경의전의 조선인 학생들은 학교 당국에 불만이 많았다. 일본인 학생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며 민족차별을 받은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본인 학생은 5년제 중학교를 졸업했다며 조선인의 본과와는 별도로 ‘특별의학과’에 수용되었다. 특별의학과에는 독일어, 해부학, 조직학 등 알짜배기 교과목의 수업 시수가 더 많이 배정되었다. 일본인 졸업생에게는 일본 영토 어디에서나 개업할 수 있는 ‘일본 문부성 지정 의학전문학교’ 졸업자격이 주어졌다. 반면 조선인 졸업생에게는 조선 안에서만 개업할 수 있는 ‘조선총독부 지정 의학교’ 졸업자격만 허용되었다. 게다가 수업은 모두 일본어로 진행되었다. 수신(修身, 지금의 윤리) 시간에는 일본식 가치관과 식민사관이 주입되었다.

나라 전체를 보더라도, 1910년대는 암울한 시기였다. 조선인들은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헌병과 순사들의 횡포에 시달려야 했다. 토지조사사업과 과중한 세금으로 인해 경제적으로도 몰락해갔다. 사회문화 분야에서도 민족차별을 당했고, 조선인들은 열등하다는 궤변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야만 했다.

경의전의 조선인 학생들은 학교 안, 나라 안의 서글픈 현실을 체험하며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3.1운동의 선두에 설 수 있었다. 1919년 2월 김형기(金炯璣)와 한위건(韓偉健)은 경의전 학생대표 자격으로 3.1 운동 준비작업에 참여했다. 3월 1일에는 김형기, 한위건, 김탁원(金鐸遠), 백인제(白麟濟), 길영희(吉瑛羲), 나창헌(羅昌憲), 이의경(李儀景, 작가 이미륵) 등 상당수의 재학생이 3.1운동의 첫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했다.

특히 이익종(李翼鍾)은 지금의 종로 4가에 모인 군중 앞에서 연설을 통해 독립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또한 1918년에 경의전을 졸업한 강기팔(姜基八)은 이듬해 3월 8일 평남 강서군 함종면 일대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고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사진. 3.1운동의 첫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한 김탁원(1920년 대)

총독부 측의 한 문헌에 의하면, 당시 서울에서 3.1운동과 관련해 구금된 학생들을 소속 학교별로 나누었을 때 경의전이 31명으로 가장 많았다. 당시 경의전의 조선인 학생 수를 감안하면, 20%를 넘는 학생이 구금되었다. 1919년에 경의전 학생 79명이 퇴학당한 것도 3.1운동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김형기가 징역 1년, 이익종이 10개월, 김탁원이 7개월, 백인제 등은 6개월을 선고 받았다.

사진. 3.1운동의 첫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한 백인제(1928년) 1947년 1월, 그가 경영하던 병원이 재단법인 백병원으로 등록되었다.  

일본인 교수의 망언에 맞서다

사진. 경성의학전문학교 해부학교실(1924년)​

1921년 5월 말 한 일본인 교수의 ‘망언’으로 경의전은 또다시 들끓게 되었다. 해부학 실습실의 두개골 하나가 없어진 것을 두고 해부학 교수 구보(久保武)가 조선인 학생의 소행이 분명하다면서, 조선인은 원래 해부학적으로 야만인에 가깝다는 폭언을 했다. 이에 평소 민족적 굴욕감을 참고 견뎌왔던 194명의 조선인 학생 전원이 구보 교수의 수업을 거부했다. 이에 학교측은 ‘주동자’ 9명을 퇴학시키고, 나머지 185명을 무기정착 처분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그러자 조선인 학생 전원은 자퇴를 신청하며 응수했다.

이 사건은 언론 보도를 타고 금세 사회문제로 비화되었다. 경의전 졸업생들로 구성된 교우회(校友會)와 학부형들이 중재에 나섰다. 사이토(齋藤實) 총독마저도 3.1운동 때처럼 조선인 전체가 들고 일어날 것을 우려해 원만한 해결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사건 발생 한 달만인 6월 28일, 학교당국이 학생 징계조치를 철회하고 구보 교수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약속함으로써 상황이 수습되었다. 구보는 결국 이듬해에 학교를 떠났고, 일본에서 정신병에 걸려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김상태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한국근현대사를 전공하고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2005년부터 흥미진진하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한국 근대의료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사진과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의료사』, 『제중원 이야기』 등이 있다.

*위 내용은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발간하는 매거진 ‘VOM’ 8호(2014년 12월 발행)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http://blog.naver.com/chsnuh?Redirect=Log&logNo=220331595574

 

근산 김형주 선생

 
■북구를 빛낸 인물
평생 인술(仁術)을 베푼 - 근산(近山) 김형주(金炯珠) 선생

일제시대 구포지역에서 처음으로 현대식 의료기관인 근산병원을 열어 평생 동안 인술(仁術)을 베풀어 왔던 근산(近山)김형주(金炯珠)선생은 1906년 동래군 좌이면(구포면)유두리에서 부친 김욱권(金昱權)과 모친 홍기경(洪寄敬)씨의 3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근산선생은 김면(金寧)김씨의 유두(柳斗)문주의 대지주였던 부친이 개화의 바람을 타고 광산업에 손을 대다가 재산을 다 날리고 몰락하여 어린시절을 어렵게 자랄 수 밖에 없었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머리가 뛰어났던 근산선생은 6세 때 동네의 서당에서 6개월간 한학을 배웠는데 금방《소학》,《대학》까지 공부를 해내어 나이 많은 형들이 공부를 따라 오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집안이 몰락하여 살길을 찾아 양산의 외가쪽으로 이사를 간 뒤 8세 때부터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는 등 고생길에 접어들어 16세까지 소년 시절을 불우하게 보내야만 했다.


근산선생에게는 위로 두 분의 형님이 있었는데 10살이 더 많았던 큰형 동산(東山) 김형기(金炯璣)선생은 경성의전을 다니다가 서울 3·1독립운동의 진원지인 탑골공원에서 재경유학회 회장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1년간 옥살이를 한 후 우여곡절 끝에 졸업, 의사자격을 취득하여 울산을 거쳐 기장에서 병원을 개업했는데 이때부터 근산선생은 형님 밑에서 일을 도우며 의학을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이곳에서 근산선생은 해방이후 부산교육계의 거두였던 김하득(金夏得)선생을 만나게 된다.


그때 김하득 선생은 동래고보를 다녔고 졸업 후에는 수원농전(서울농대전신)에 진학했는데 방학 때마다 내려와 자기가 배운 학과를 근산선생에게 전해 주었다.
근산선생은 머리가 뛰어나서 일본어는 일주일만에 모두 습득하였고 독일어는 한달만에 마스터하여 의학공부를 할 만큼 기초를 닦에 되었다.


18세 때부터 형님 밑에 와서 동산병원이 기장에서 부산 영주동으로 옮겨와 있을 때까지 10년 동안 형님의 진료를 도우면서 독학을 한 끝에 22세 때는 중학과정 졸업검정시험에 합격하고 28세 때 드디어 의사자격시험에 합격하였다. 시험합격 후 경성의전에서 2년 간 수련의 과정을 거쳐 고향인 구포에서 근산의원을 개원하였다.


근산선생은 어렵게 자라났던 어린시절을 생각하면서 왜정 때부터 구포에 있던 애린원(고아원)아이들을 친자식처럼 돌보면서 평생 동안 무료진료를 해주었고 지역주민에게 인술(仁術)을 베풀었다.


근산병원에는 김해·양산 등지에서도 환자가 많이 찾아왔는데 한때 김해에 행림병원을 분원으로 설치 진료를 했다고 한다.


선생은 그 당시 낙동강 하류지역에 유행했던 간디스토마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호스로 약을 투입하는 시술을 개발하였고 환자의 병을 정확히 판정해 내어 부립병원의 일본인 의사도 존경과 감탄을 보낼 만큼 선생의 의술(醫術)은 부산을 비롯한 경남지역에서 명성을 날렸다. 그리고 근산선생은 과학적인 두뇌도 뛰어나 일제시대 제트비행기에 대한 연구도 하여 논문을 썼는데 그 분량이 지게로 한짐이 되었다고 전해 온다.


선생은 해방 이후 장남 인규(寅圭)씨가 의학박사로 성장 할 때까지 병원을 지키다가 1967년 진갑의 연세로 운명하였다.


근산선생이 별세하자 친구인 김하득선생은 통곡을 하면서 근산선생이야말로 천재보다 뛰어난 귀재(鬼才)였고 이 세상에서 근산처럼 어질고 착한 분이 없다고 선생의 특출한 두뇌와 심성을 회고하였다.


근산선생의 장남 인규씨는 부업(父業)을 물려받아 지금도 의사로서 향토를 지키고 있으며 장손 진홍군도 의사의 길을 걷고 있어 근산선생 집안은 3대로 의사를 배출한 가문이 되었다. (조사편집 : 낙동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