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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토박이

사상의 재실

 

함안조씨재실 (沙川齎)

 

함안 조씨 가승(家乘)에 의하면 조선조 단묘(端廟) 때 생육신의 한분이던 어계 조여 선생의 현손인조 근(趙 瑾)이 밀양 으로 왔다가 임진왜란 전 양주고을 사천 땅에 이거하여 큰 아들은 괘내리에(甘洞) 둘째 아들은 주례리에 각 각 터전을 마련하고 정착하였다


 이 집안에서는 사상 향안에 85명 이 수록되어 있고 두명의 선무원종 공신과 무과급제 1명과 무과초시 입격자 두 사람을 내고 두 명의 풍헌과 면장 1명을 내고 동래향청의 무임(武任)으로 천총(千摠) 1명과 파총(把摠)1명을 맡았고 동래성 축성(동래성 축성) 때 세 명의 감(監)을 담당하였된집안으로 15대를 이어오고 있다. 현재 후손들은 김해 기장 양산 밀양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천총(千摠) ; 조선 시대에, 각 군영에 속한 정삼품 무관 벼슬
파총(把摠) ; 조선 선조 27년(1594)에 각 군영에 둔 종사품 무관 벼슬.

최근에 와서 사상지역의 도시 개발로 인해 조상의 분묘가 훼손되어 주례동에 있던 재실을 감전동 253ㅡ1번지에 옮겨 사천재를 건립하였다. 이곳 재실에는 입향조 이하 여러 조상을 한 곳에 모시고 매년 음력 10월에 합사로 향제를 지내고있다 

 

함안 조씨문중 입향조 조 근의 큰아들 국도(國道)ㅡ손자 ( 英信. 英連. 英千)
                                      둘째아들 진도(璡道)

5인은 임진왜란에 참전하였으며 이중 두 분만 살아 돌아오시고 세분은 전사하였다. 그중 영련(英連)은 목없는 시신으로 돌아 온 상태로 묘를 고석등에 모셨다고 한다

 

입향조 조 근의 아들인 국도 할아버지는 당시 42세로 나이에도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일가족 5명과 함께전란에 참전 하였다는것이 높은 벼슬을 한 조상을 둔 것보다 훨씬 자랑스럽다고 종손인 조현일씨는할아버지의 애국심을 높이 평가 한다고 말하였다

 

여산송씨

 

여산송씨주례문중재실[礪山宋氏周禮門中齋室] 

여산송씨의 시조는 고려 肅宗年間(숙종년간1096~1105)때 進士(진사)를 지내시고 나라에 공을 세워 銀靑光祿大夫 (은청광록대부)로서   樞密院府使(추밀원부사)에 봉작 되였으며, 시조공의 묘소는 전라도(전라도)  여산부(여산부)의 동쪽 10리 쯤에 있는 天壺山(천호산) 자락 아래 문수동의 서북쪽 중봉에 위치해있으며 현재의 전라북도 익산시에 소재하고 있다(조선시대 역대 왕비 가운데 조선초 端宗(단종)의 妃(비)가 바로 定順王后(정순왕후) 가 송씨였는데 당시 礪浪府院君(여랑부원군) 宋玹壽(송현수)의 딸이였고 어머니는 여흥 閔(민)씨였다.)

동래입향조인 송극명(宋克明)공은 조선조 단종비  정순왕후의 숙부로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여 관직을 버리고 단양을 거쳐 동래에 낙향 정착한 집안이다. 동래에서 유일한 생원(生員) 한 분을 배출하고 또한 동래 원향(原鄕)의 5향집 가운데 한 집으로 6충신을 충렬사에 배향한 집안이다. 조선 후기에 향반사회에서 위세가 당당 하였는데 그의 후손인 처사 송계방(宋啓邦) 공이 임진왜란 이후 이고쇼 주례동에 이거 정착하여 사상 향안(鄕案)에 16명이 기록되어잇는 집안이다. 후
손들은 1980년 주례동 산 103번지에 주례사(周禮詞)를 건립하여 입향조이하 여러 조상의 향제를 매년 10월(음력) 둘째 일요일에 지내고 있으며 자손들은 대대로 주례동을 중심으로 살고있다.

 

주례사 건물을 지은 주인공은 김창희 대목장(도편수)은 한옥전문가로 창덕궁 복원의 도편수(집을 지을 때 책임을 지고 일을 지휘하는 우두머리 목수)로 참여했으며, 부석사, 무량수전, 해인사 대웅전 등 수많은 문화재 증축 및 보수에 참여한 우리나라 한옥 건축의 거장이다. 생전에 청도 한옥학교에서 젊은이들을 지도하였다.그래서 가끔 학생들을 데리고 와 설명을 해주고 한다고 재실의 회장님이 설명해 준다. 못을 사용하지 않고 끼워맞춤방식을 채용한 우리의 전통한옥미를 한껏 살려 놓은데다 재실의 기능인 조상숭배하는 공간을 효과적으로 구성해 놓았다.

 

내부는 전부 목재로 되어있으므로 4년에 한번씩 독일산 특수도료를 칠한다고 한다. 니스로 칠할 경우 도막이 일어나 나무를 상하게 하므로 비싸 관리비가 들지만 재실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 감수한다고 한다.

 

동래 회동동에 있는 종중재실에는 여산송씨 출신으로 임란공신 6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어 제에 사용할 음식은 문중에서 제공하지만 제사는 부산지역 향교에서 사람들이 나와 지내준다니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회장님께서는 전통 한옥으로 잘 지어놓은 재실의 활용에 대하여 관내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예절과 충효사상등을 교육하는 공간으로 제공하겠다고 얼마전 시사를 앞두고 사상구 송숙희 구청장에게 건의하였다는 말에 참 좋은 생각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요즘같이 인성교육을 필요로 하는 때에 지리산등 멀리가지 않고 가까운 곳에서 방학이라던가 주말을 이용하여 재실을 교육의 공간으로 활용한다면 시간과 경비를 절약하며 실속있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여산송씨 주례문중을 이뤄 온 입향조를 비롯 여러 조상들이 얼마나 기뻐 할 일이랴!


여산송씨 주례문중의 전통한옥 재실을 교육의 장으로 이용하는 계획이 하루속히 구체화되어 실현되기를 기원한다.

 

 

분성배씨

 

1560년경 분성배씨 참판공파 입향조가 주례지역에 터를잡은 뒤 후손들이 주례를 중심으로 살아오면서 20년 전까지는 입향조 무덤에서 시사를 지냈으나 아파트단지 개발로 현 위치에 재실을 지어 16분 어르신의 위퍠를 모시고 있다. 또한 후손들이 사상의 경우 주례동에 살고있는 사람은 주례문중에서, 괘법동에 살고있는 사람들은 괘법문중에서 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시사는 매년 11월 둘째 휴일날로 하며 11시경에 시제를 지낸다고 하는데, 방문한 날에는 주례문중 배대신 총무외 젊은이가 거미줄을 제거하고 경내를 청소하고 있었는데 바로 다음 주 일요일이 시제일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평소 문중제실은 문이 잠겨있는데 마침 찾아간 날이시제를 준비하는 관계로 재실내 사람이 있어서 취재를 할 수 있어 여간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사무실내부에는 분성배씨 가계도와 참판 칙령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있는 분성배씨의 선조들의 사진이 걸려져 있어 가계의 뿌리가 튼튼함을 나태주고 있었다.

사상초등학교 27회 졸업생인 배대신 총무님께서는 주례와 개금이 접하는 위치에 초등학교 다닐때까지 뒷부분이 약간 망가진 장승백이가 서 있었다고 증언과 지금의 부산은행 자리가 예전에 배가 닿은 포구라고 일러 주었다. 그 당시 초등학교 다닐 때 소풍은 낙동강제방, 운수사등지를 갔으며 멀리는 구포 왜성까지 걸어서 간 일이있다고 하였다

 

김녕김씨


김녕김씨 유두문중 재실

삼락동에는 옛날 삼각주의 유두(柳頭)시절 조선중엽 김녕김씨(金寧金氏)들이 이 섬을 개간하여 터전을 마련하고 살았다. 이어서 의춘방씨(宜春房氏), 안동권씨(安東權氏), 밀양박씨(密陽朴氏), 김해김씨(金海金氏) 등이 살았다. 조선시대 유두지역을 대표했던 김녕김씨에 대해서 살펴보면 옛 낙동강 하구유역의 유도(柳島) 유두리(柳頭里, 오늘날 삼락동)에 김녕김씨 집안이 집성촌을 일찍부터 이루고 살았다.

옛 양산군지(梁山郡誌)와 모라동 뒷산 기슭에 있는 김준옥(金俊玉) 공(公)의 묘비명에 의하면 조선조 중엽 김녕김씨 김영필(金永弼) 공(公)이 충청도 영동에서 낙동강 하구 유역의 유도로 옮겨와 정착하여 삼대를 내려오면서 이 섬을 개간하고 둑을 쌓고 나무를 심어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며 살 수 있도록 이 섬을 개척한 집안이다. 파조(派祖)이신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 선생이 단종 병자년에 사육신(死六臣)으로 화(禍)를 당하고 영조 신해년에 복관(復官)되고 정조 무술년에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받았을 때에도 후손들은 이곳을 떠나지 않고 대대로 농사를 짓고 살았다.

 

김녕김씨 유두(柳頭)문중의 입향조(入鄕祖)인 김영필 공은 어떤 인물일까? 유학자이고, 명종17년(1562년) 태생이며, 유도(삼락동) 출신이다. 자(字)는 운재(運載), 호(號)는 유헌(柳軒)이며 김녕김씨로 사육신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후손으로 고손(高孫)관계이다. 타고난 성품이 현명하고 문장과 학문이 뛰어나며 박학수행(博學修行)하여 경서(經書)와 역서(歷史)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단종의 복위가 실패하면서 백촌 김문기 부자(父子)가 참형을 당하자 일족들은 합천쪽으로 피신
하였고 이 와중에 김영필은 낙동강 하류로 갈대가 우거진 유두리 강변에 정착하엿던 것이다.

 

1914년 이 섬이 양산군 좌이면(左耳面)에서 동래군 사상면 삼락리가 되고 뒤이어 낙동강 제방이 축조되어 섬이 육지가 되고 일부가 수몰되어 후손들은 양산, 구포, 모라,삼락, 괘법동 등지에 흩어지게 되고 후손들은 15대를 이어 오면서 20년전에 모라동 뒷산(사상구 모라3동 산 115)에 입향조 호(號)를 따라 유헌재(柳軒齋)를 건립하여 입향조 이하 조상의 향제를 거행하고 있다.

 

재실에서 동쪽으로 약 200미터 떨어진 곳에 통정대부김준옥묘비가 있다. 양산군수유인목(柳寅睦) 공(公)이 찬문한 김준옥(金峻玉) 공의 묘비명에 보면 유도(柳島)는 낙동강 하구강 가운데 있으면서 섬사람들은 해마다 홍수의 피해가 많아서 큰 걱정으로 여겼다. 공(公)은 섬 주위에 둑을 쌓고 나무를 심어 이 정자나무 덕택으로 사람들이 이 나무를 활인정(活人亭), 활인수(活人樹)라 했다고 양산읍지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또한 김석량(金碩浪) 공이 무과에 급제하여 숙종조에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을 하였으며 또한 두 분의 효자(孝子)가 나와 김영우(金英禹) 공과 손자 김응권(金應權) 공이다.세인들이 이르기를 효자 밑에 효손이 있도다 하
여 사림(士林)이 이를 밝히고 책을 만들고 이어 비각(碑閣)을 세워서 길이 전하였다. 이 가문에서 조선조 후기에 많은 선비를 배출하였고 근세에 독립유공자인 동산(東山) 김형기(金泂璣) 선생이 이 집안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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