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 김형기 할아버지의 묘소를 다녀오다.지난주 부산으로 모친과 함께 가다.
모르게든 알게든 세상의 비밀은 존재한다..존재못한다?
동산 김형기 할아버지 3.1운동 때 학생대표로 만세를 주도하여 부르다..
"그날 시위행진에서주동자급에 속하는 134명중 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 재경유학생회 회장의 자격으로 학생대표가 되어 3.1만세 운동에 참여한 동산 김형기 선생과 주종의,이공후,윤자영,김대우등 74명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는데 그해11월6일 경성지방법원의 재판결과 이른바 보안위반의 죄명으로 징역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루었다.
1년의 형기를 마친 동산 선생은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공의(公醫)로서 울산에서 의료인의 첫발을 딛게되고 동래의 기장으로 와서 근무를 하게 되었고 이때 동산 선생은 이곳 출신의 김학수 곽상훈씨와 교우관계를 맺으면서 독립운동의 뜨거운 의지를 다시한번 굳게 다지게 된다.
그리고 30대인 1926년 경에 부산 영주동에서 동산의원을 열어 지역사회의 명의로서 이름을 날리게 되고 해방 3년전인 1942년에 대청동 남일국민학교 정문앞으로 의원을 옮겨 이곳에서 해방이후 까지 병원을 운영하였다.
그러다가 8.15해방이 되자 동산선생은 미군 전청 고문단의 수석으로 관여했고 재일 귀환동포 후원위원장을 맡아 배를 타고 물밀듯이 밀려오는 귀환 동포의 구호를 위해 재산과 시간을 모두 여기다 바쳤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이후 어지러운 정국속에 서의 이데올로기 분쟁은 결국 동산선생에게도 화를 미치게 했고 6.25동란 직전 환자를 돌보던 새벽에 정보기관에 연행되어 간후 그길로 소식이 끊겼으며,그냥 구름처럼 사라져버렸다는 것에 대해 가족과 친지들은 몹시 마음 아파 하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동산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하였다.....중략
....모든 유족들은 동산선생의 공적이 하루빨리 재정립 조명될수있기를 소망하고 있다" (1995년 6월 9일 자 부산 시보에 연재된 "부산의 독립운동가" 기사에서 발췌함)
파란만장하고 격앙되고 드라마틱하며 복잡한 집안사는 할아버지의 행적이나 가치를 현재에 와서 인정받기위한 작업을 아무리 한다해도 나의 아버지 세대와 맛물려 위로 받을 수 없을 만큼 괴로움과 고난의 역사인 것 같다.
물론 이미 몇몇 문중의 사람들이 할아버지의 행적을 계속하여 추적,추모하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할아버지의 진정성은 사실인 것이 분명하므로 이것은 불변의 진정성일 것이다.
직계 가족의 고난의 시간 역사는 되돌릴 수도, 보상받을 수도, 그렇다고 어딘가에 원망할 수도 없다는 것이 비극이다.
만일 내가 남자였거나 출가를 하지않았거나 훌륭한 남자로서 걸출한 학자가 되었거나 큰 재산가가 되었거나 했다면 많은 일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
훌륭하신 업적을 남기셨어도 사상범으로 몰려 억울하게 돌아가신 할아버지 덕분에 나의 아버지는 평생 쉽지 않은 삶을 사실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억울하고 억울하셔서 우리 아버지는 늘 우울하셨다. 멸문지가의 표본이 된 우리집?
씁쓸하다..검은 담즙이 뿜어져 나오는 원인 모를 나의 우울증은 여기서 유래된듯 하다 .
그러나 삶은 계속되고 있기를 원했다.
우리 아버지의 한 ,내 동생의 한 ,나의 한, 그 집 며느리로서 살아온 나의 어머니의 한.. 그 모든 것들과 함께 인생은 누구의 것이나 표류되고 헤매이며 흘러간다.
이많은 집안사의 비밀과 고통과 현재의 고난과 어머니대에서 매듭지어야 할 이 많은 마무리 작업은 누가 다 할수있는 걸까?
할아버지 할머니묘소, 우리집안 선산 앞으로 좁은 길이나고 마을이 산소 바로 앞까지 들어와 산란해 질 때 까지 우리 어머니는 무기력했고 직계자손들은 넋놓고 있었다는 것이 마냥 송구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아버지의 묘소도 힘들게 찾게 되는 힘없는 내자신에게 나의 가족사는 너무 많은 짐을 나에게 지우는 것도 같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를 악물고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집안의 역사가 아닐까 하는 갈등를 계속하고 있다.
나의 아버지는 허무하게 찬땅속에 누우신채 누군가가 당신을 대신하여 모든것을 잘 일으켜 세워줄 시간을 오래전부터 오기를 기다리시고 계시는지도 모른다.
아버지! 나를 궁휼이 여겨 주세요!!!
나에겐 많은 트라우마와 걸림돌과 그것보다 많고 많은 비밀이 존재한다.
[출처] 아 !김형기 할아버님! 나는 동산 김형기할아버지의 직계손녀!|작성자 김경민
** 추서 : 바이얼리니스트 김경민님의 사진은 본인이 직접 올린 것이 아니며 제가 글을 옮기면서 추가한 것임을 밝힙니다. 독립운동가의 집안이 그렇듯 어려움속에서도 바이얼리니스토로 당당히 자리매김한 김경민님이 자랑스럽고 한편으로 격려하기 위해 그의 연주회 포스트를 올리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기사를 담아갈 때 사진의 사용은 김경민님의 프라이버시에 침해가 되지않도록 유의 하시기 바랍니다.(옮긴 이 : 푸른파도)
** 최근 김경민님과의 연락 사항
동산김형기선생에 관해 자료를 보완코자 손녀 김경민님의 blog에 들어가 동산선생의 사진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연락을 받았다.
김경민입니다. 김형기 할아버지 손녀입니다.
받은날짜 :14-06-11 (수) 00:44
- 보낸사람 : 김경민<kmkeem7@naver.com>
- 받는사람 : <koskes@naver.com>
안녕하세요 강은수 선생님
이제서야 연락을 드리옴을 용서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블로그 덧글을 잘 안보거나 그런 것에 익숙치는 않은 편이라 늦게 덧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죄송하구요..
한 두장의 할아버지 사진은 가지고 있구요 친정에 다시 가서 한번 더 찾아 보고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할아버지에 관한 좋은글 제가 제블로그에 올리게 된 것도 영광입니다.
그럼 다시 꼭 연락 드리기로 하지요.
김경민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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